기획노트는 나의 장기적인 진로인 소셜네트워킹서비스 기획자와 전자정부 연구 및 조정 위원을 준비하기 위해 혼자서 부족한 지식을 허겁지겁 먹어가며 부랴부랴 쓰는 아이디어 노트다. 대학생밖에 안 된 내가 온라인에 쓰는 글이니 전문성과 완성도는 떨어지겠지만 내가 배운 것들을 진정 내것으로 만들고 점점 글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 훈련을 하기 위해 기획노트 쓰기는 필수불가결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기획노트는 무슨 기획노트야 청소나 열심히 해'[각주:1] 의 상황에 놓여있는 나로서는 정신이 분산된 채 하루하루를 보내기 십상이어서 수시로 꺼내 읽어보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스스로에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평소 생각해 온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하고자 할 때 하얀 스크린 앞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좌절하려는 순간 꺼내 읽어보아 글빨을 위한 줄기를 뽑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템플릿이 필요했다. 이점을 착안하시오, 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몇 문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한 시간동안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특정 웹사이트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글의 경우 이렇게 글을 써라.
  어떤 웹사이트가 있는데(스샷첨부) 이것은 어떤 기능을 제공하고 어떤 레이아웃을 취해서 이러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이것과 비슷한 다른 사이트 2-3개는 이런 기능/레이아웃/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에 비해 이 사이트는 이런 점이 좋고 이런 점이 나쁘다. 다만 이 사이트에는 이런 기능과 설계가 아예 없어서 내가 만약 이 사이트를 개조한다면 이렇게 하면 좋겠다.
 

실현가능성보다는 최대한 창의성에 치중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글은 이렇게 써라.
  내가 세상을 봤을 때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거나 부족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디자인과 코딩의 웹사이트/위젯/모듈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이렇게 생겼다.(그림, 코드 일부) 이것의 실현가능성은 이러한 사이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모바일 기기/TV/내비게이션/전화 등의 정보통신장비에서는 이러한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을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하면 참 좋겠다. 왜 좋은가?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가적 기능이나 디자인 혹은 연동될 다른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기획노트'에 쓸 글은 크게 이렇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뉠 것이어서 각각의 글에 대한 템플릿을 만들어 보았다. '이러한, 이렇게'에 실제 생각을 집어넣고, 위의 문장 하나는 실제 포스트의 문단 하나가 되게끔 하고, 허전한 곳을 그림이나 동영상으로 채워넣고 귀찮으면 단어에 링크를 걸어놓으면 금세 포스트 하나가 완성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몇 가지 스스로 지킬 기준을 만들어 놓았다.

  •  이미 한국에 널리 알려진 웹사이트의 소개를 재탕하지 말 것 (한국 외의 다른 곳에는 널리 알려졌지만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를 경우에는 적극 소개할 것)
  • 깊은 분석이 들어간 근거/방안/예시 등은 1개 이상만 되면 충분하다. '또한, ...' 식으로 2개 이상의 근거/방안/예시를 대려고 하면 한 포스트를 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한 포스트를 쓰는 시간은 1시간 이하가 되게 한다. (그림 편집 시간과 html 수정 시간을 제외한 순수한 개요 구상과 글쓰기의 시간)
  • 깊은 분석이 없이 단순히 1~2문장으로 소개만 하면 되는 근거/방안/예시는 5-6개가 적당하다.
  • 바로 실용/수익/출품으로 이어지는 결과물(.css, .html, .psd, .jsp, .cpp, .hwp, .ppt 등)은 나의 이익을 위하여 올리지 않는다. (이것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기획노트에 CCL을 붙일 수 있다)
  • IT geek의 시각이 아닌 언론학과 정치학의 시각으로 글을 써서 다른 포스트와의 차별화에 만전을 기하라.



    이 정도만 지키면서 글을 쓰면 자동차를 타고 이미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언제나 경험을 노하우로 승화시켜 스스로가 읽어볼 수 있는 가이드라인으로 액화시켜 놓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자기계발의 촉매는 없다고 생각한다.



  1. 일병 2호봉입니다.푸훗~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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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나는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전자정부 사이트에 설문조사에 관한 페이지나 위젯, 모바일 기기나 IPTV 그리고 개인적인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에 연동되는 모듈을 집어넣자고 생각했다. 권위 있는 정부 기관의 편협하지 않은 설문조사 기획자가 충분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질 높은 응답을 끌어오기 위하여 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인터넷을 이용한 설문조사이다. 현재의 기술 수준과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를 고려해보면 그러하다.

  그래서 Google 검색창에 web survey라고 키워드를 입력한 뒤 검색결과를 확인하니 가장 위에 있는 사이트가 바로 이 classapps라는 사이트였다. 알고 보니 이 사이트는 Fortune 선정 100대 기업 중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영미권 대기업들이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할 때 사용되고 있었다. (메인 페이지의 Enterprise Clients를 확인할 것) 도대체 어떤 좋은 기능이 있길래 이리 널리 사용되고 있을까?

  classapps는 .NET Framework를 사용한 설문조사 사이트와 ASP 방식의 설문조사 사이트 두 곳에서 똑같은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설문조사자의 정보 수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이메일 송수신을 한꺼번에 해주는 Add-on(ResponseLogic), 응답자의 응답이 단답형이나 사지선다형이 아닌 주관식일 경우 그것을 일정한 사용자 설정 레이아웃에 따라 분류하고 그림과 도안으로 정리해주는 Add-on(ActiveLogic) 등을 추가로 제공해주고 있다.

  아마 사내 인트라넷 등에서 각 부서별 설문조사 담당자들이 20~30개 정도의 질문을 한 페이지에 만들고 요 classapps에 올려서 사원들이 페이지에 접속하여 차근차근 시험 문제를 풀듯이 답변을 하고, 그 답변이 모여서 설문조사 담당자(admin)에게 전달되고 분석 가능한 표로 정리되는 것 같다. classapps에서 프로그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페이지인 TakeTour를 보면 금방 어떤 기능을 담고 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classapps의 설문조사 프로그램이 어떤 기능을 제공하는지 여기서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링크로 가보자)

  다만 이 classapps는 위젯 기능을 제공하지 못했다. asp 페이지 내에서만 동작하는 덩치 큰 사이트로, 이런 형식의 사이트는 우리 공군 인트라넷에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위젯을 제공하는 사이트로는 Facebook의 추가 기능으로 쓸 수 있는 Zoomerang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추후 포스팅 예정)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설문조사가 올라왔을 때 '설문조사가 떴으니 확인하고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이메일을 리스트에 있는 사원들에게 보내는 방식의 정적인 참여 유도가 구식으로 느껴졌다. 회사 등의 특정 단체 범위를 넘어선 집단 내 사람들의 충분한 참여를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업데이트를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팸메일과 대형 전광판 광고, TV의 공익광고와 신문 전면광고 등의 것들이며 지금은 핸드폰/스마트폰이라는 기기를 이용한 새로운 방안이 연구 중이다. 만약 전자정부 서비스에 설문조사가 들어간다면 설문조사를 통한 데이터 입력은 인터넷으로 하더라도 설문조사 소식을 처음 듣는 일과 결과를 요약하여 확인하는 일은 모바일에 넘겨주어야 하겠다.

  21개 형식으로 올릴 수 있는 각각의 질문 또한 기능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설문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다 많이 생각하고 답변을 할 수 있도록 링크나 이미지나 동영상을 추가하면 분명 더 좋을 것이다. 위지아처럼 차트를 생성할 때 여러 미디어를 붙여넣을 수 있다면 설문조사를 위한 배경 자료가 풍부해진다.

  설문조사 사이트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에 권위를 가져야 하고, 이는 오프라인 설문조사 기관이 경쟁구도를 띠지 않고 독과점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한국에서도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만한 설문조사를 할 수 있는 조직은 Gallop이라는 사기업과 몇몇 중소기업, 국가기관 그리고 언론사가 전부다. 온라인에서도 독과점 체제는 그대로 적용된다. 구글의 검색결과 중 web survey라는 키워드에 적합한 결과는 두 페이지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기능을 갖는 사이트가 Fortune지 선정 100대 기업들이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정도라면 한국의 뛰어난 개발자들이 최신 웹프로그래밍과 디자인으로 무장해 사이트를 만들어 도전장을 내미는 것도 그리 큰 무리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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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물건을 살 때 갖는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루에 내가 얼마나 그 물건을 활용하는가, 그 물건이 쓸모를 갖는 시간이 하루 중 몇%인가,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 물건을 쓰게 되는가이다

  관심분야를 좁게 가진 사람은 구입한 물건을 대체로 자주 사용한다. 컴퓨터 매니아가 미니PC와 주변기기를 사고,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새 이펙터를 사고, 주로 하는 운동이 등산밖에 없는 사람이 캠핑 기구를 살 때 그들은 구입한 물건의 활용률을 매우 높게 유지한다. 가격이 만원이든 10만원이든 최고의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나 또한 평소 하는 일과 여가의 범위가 좁고 깊어서 사는 물건들의 종류가 절대 다양하지 않다. 내가 얼마를 벌어서 얼마를 쓸 수 있느냐에 따라 라이프스타일의 다양성이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는데, 확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나의 관심사도 주로 고정되어 있다. 나는 보다 저렴한 물건을 사서 몇천원을 아끼느니 보다 자주 쓸 물건을 선택해 구입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자주 안 쓸 물건은 아예 안 사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구입하지 않을 물건들을 정해 나가면서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오히려 더 좁고 깊게 조형하고 압박해 나간다. 그렇게 하면 내 집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내 전문적인 영역에 관련된 물건이 되며 나의 비전문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스파를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호화로운 몇백만원짜리 스파 욕조를 집에 갖다놓는 것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매니아가 아닌 이상 스파는 이미 설치되어 있는 영업점을 찾아가 하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홈시어터, 스키용품,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가끔 이용할 바에야 다른 곳의 물건을 돈 주고 잠깐 빌려 쓰거나 대체재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나는 활용률이 얼마 이하면 구매를 금지하도록 속으로 절제를 위한 규칙을 세워 놓는다.

  앞서 말한 논지를 이어나가면 자신이 관심 갖는 모든 일과 여가에 관련된 물건을 집에 갖다놓아 집 안에 불필요하게 전문적인 물건을 들여놓는 사람이나 취미가 다양하다고 그 취미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사유화하려는 사람은 집안에 물건을 썩혀두는 사치스러운 사람이다. 특히 장식 목적으로 책을 사놓는 사람이 나는 제일 혐오스럽다. 빌려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재화가 책이 아닌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한 단초가 바로 지나친 구매로 인한 필요 이상의 사유화와 그에 따른 수준 이하의 활용률, 사후 관리의 소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추가적 비용과 비용에 따른 국가적 GDP의 손실이다. 물건의 수명을 닳게 하는 정도가 미미한 이상 그 물건의 활용률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만족감, 즉 총 효용을 최대화하기 위한 사전 단계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렌탈 업자와 공공시설, 벼룩시장, 그리고 카풀과 같은 사회적 약속은 물건의 활용률을 높여주어 낭비를 막는 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 또한 내 물건이 아닌 물건들을 삶 속에서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로 내 물건일 필요가 있는 물건에는 돈을 아낌없이 지불한다. 주위에서 비싸다고 핀잔 주는 물건들이 몇 개 있어도 나의 월 지출은 주위 사람들과 비슷하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소득이 늘고 여가 시간이 늘어도 이러한 소비패턴을 나는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이다. 결국 작은 집, 작은 차, 적지만 값비싼 물건들이 들어가 있고 내가 소유한 물건들을 종류별로 모았을 때 묶음의 수가 서너 개를 넘지 않는 모습이 내가 꾸는 미래의 소비생활의 모습이다. 상당히 개인주의적이지만 공적 영역을 넓게 활용하기 때문에 중도 좌파 성향에 가깝다. (렌탈업자가 국유화된다면 완벽히 똑같다) 북유럽의 소비패턴을 따라가려 하는 것 같다. 남에게 미안한 마음 갖지 않으면서 비싸게 놀고 싶은 마음은 앞으로도 쭉 버릴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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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와 책이 지식을 기록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였던 시절,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높다 하는 사람들의 연구 대상과 지식의 범위는 그들이 사는 지역과 국가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한정되었다. 건축, 법률, 경전, 의술, 문학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능통해 문과와 이과의 구분 없이 통합적 지식경영으로 큰 업적을 쌓았던 다산 정약용 선생마저도 일본에서 대충 본 것으로 '땡'이었던 서양식 기어 메커니즘과 건축 장비에 대해서는 함부로 코멘트를 남기지 못하고 결국 한국산 기중기를 새로 만드는 우회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글만 가지고 지식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고, 언제나 그림과 소리와 영상은 저장된 매체가 아닌 현실 속의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와닿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역과 국가 범위에서만 멀티미디어와 텍스트를 조합한 학문 연구와 예술 활동이 이루어졌다. 외국으로 나갔다 온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의 범위가 지역과 국가에 한정되었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모든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 시대는 사진과 영상을 지역과 국가 간에 인쇄하고 전송하고 배포하기 시작한 시대부터다.
 
  나는 언제나 영상이 부족해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빈 속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허접'하다고 생각해왔다. 어떻게 보면 자원과 기술이 부족하여 그렇게 허접해진 경우가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만, 지금의 시대에 살면서 다른 나라의 생생한 영상이 밥 먹듯이 당연한 나로서는 불과 20년 전까지의 몇몇 풍경들이 우스울 뿐이다.
 
  옛날 조선 시대의 현학적인 시인들이 묘사하고 화가를 시켜 그린 시와 그림들은 그 안에 소개한 동식물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먼 나라에 아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시인들이 인터넷으로 중국 현지촬영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묘사도 같이 아우를 수 있을 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상상만 할 줄 아는 것은 발전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분명 잘못되었다.

  20년 전 나의 삼촌, 이모뻘 되는 사람들이 읽었던 아동용 그림책, 무명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의 삽화가 그려진 그 번역서에 수록된 그림들을 보면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흔히 아이들이 읽는 소설은 (아직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에서 창작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20년 전 한국의 삽화가들은 이 나라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해 지금처럼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생생하게 학습하지는 못했다. 요즘 사람들은 고해상도의 사진 자료가 섞인 외국의 복제, 민속문화, 건축, 도시환경, 자연환경에 대한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어서 지금 나오는 아동용 그림책의 삽화에는 영국이면 영국, 프랑스면 프랑스의 지역 모습과 풍토가 생생하게 그려져 나온다. 그러나 사진과 영상 매체를 못 보았던 가난했던 시절의 책에는 디테일을 제거한 티셔츠 수준의 옷과 빵, 스프, 고기, 과일과 우유 등으로 정형화된 식사 장면,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했던 삼각형 지붕의 단순한 콘크리트 집 따위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한국산인지 영국산인지 그 국적이 명확하지 않은 그림으로 책을 채워넣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60년대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영문학 연극 동아리와 로큰롤 밴드의 완성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 모임의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들은 다음 저 먼 나라의 문화를 모방할 수 있었을까? 연극 동아리에 소속한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원문을 어느 정도로 깊게 이해했으며 무대의 의상과 조경을 얼마나 현지에 맞게 제작했을까? 그리고 로큰롤 밴드의 사람들은 카피곡을 연주할 때 얼마나 대상과 똑같게 기타 주법을 구사하고 무대매너를 따라했을까? 제대로 된 정교한 모방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된다. 모방을 통한 창조는 분명 좋은 것이지만 모방, 즉 학습과 견문이 정교하지 못하면 창조는 주체성이 없는 이상 모두 다 허접해진다.

  그래서 카메라와 캠코더 그리고 컬러인쇄 기술은 학습과 견문을 정교하게 만들어주면서 지역과 국가 간 이질감을 극복하였고, 그래서 대단한 발명품이다. 나는 도서관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책과 인터넷을 통해 웬만한 전 세계의 지식을 모두 다 열람할 수 있다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매우 감사하고 기쁘다. 그래서 그 생각으로 더 열심히 새로운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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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가치체계는 우유와 치즈와 초콜릿, 그리고 양파와 고추와 씨즈닝을 명확히 구분하는 이분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 맛과 짠 맛의 구분일 수도 있고 색깔에 따른 구분일 수도 있으며 어울리는 음료 종류에 따른 구분일 수도 있다. 분명 그 둘은 겨울과 여름, 클래식과 펑크락, 설탕과 소금처럼 명확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분명 조용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응접실에서 쿠키 종류와 우유, 쥬스, 차, 커피 등을 교회 집사님들과 같이 먹고 마셨던 수많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그 때마다 봉지과자는 테이블 위에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변에서 돗자리르 펴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실 때에는 언제나 봉지 과자에 양념가루가 있는 것들만을 고집했다. 맥주가 지배하고 있을 때 감히 쿠크다스나 버터와플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임의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에서 갑자기 사먹는 과자는 테이블 위에 항상 뒤죽박죽 펼쳐져 있다. 단지 먹고 이야기하는 것에만 가치를 둔 모임에서 과자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매번 꼭 어느 한 명이 나서서 초코송이, 씨리얼, 다이제 같은 과자를 틀에서 꺼낸 다음 뜯어놓은 썬칩이나 새우깡 봉지에 던져 넣었다. 심지어는 한 손을 가져와 초콜릿과 씨즈닝이 고루 섞이도록 버무리는 만행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한 결과의 모습은 마치 케이크와 삼겹살을 한입에 같이 먹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뒤섞인 상황을 자아낸 사람이 바쁘게 흘러가야만 하는 모임 속에서 익명성을 띤다는 것이다. 아무도 과자의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뒤죽박죽 한 자리에 섞인 과자는 모두의 기호를 고루 반영하겠다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인가? 내 눈에는 구분이 없이 섞여 있는 결과물은 생산성 없는 정당 간의 타협안, 노사 간의 절충안과도 같아 보일 뿐이다.

  솔직히 이 사소한 문제에 더 화를 내어 보고자 한다면 배고팠던 우리나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먹는 게 중요했지 얼마나 운치 있게 먹느냐, 어떤 음악이나 인테리어나 조경 안에 둘러싸여 먹느냐 등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된 것 같다. 초가집과 산 능선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마을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무작정 포크레인 부대를 때려넣고 흙을 무참히 퍼간 도시개발의 사례는 대한민국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고 이는 지금의 매력없는 도시 경관이 증명한다. 음식을 사먹는 작은 일에서부터 도시를 건설하는 큰 일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하나의 목적에만 집중한 나머지 결과물의 아름다움과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뒤죽박죽 형상을 만들어놓는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 행태는 다른 분야의 사소하거나 중대한 일에도 전염되었다.

  하지만 뒤죽박죽인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다. 비빔밥에는 밥과 고기와 야채가 뒤섞여 있지만 그 뒤섞임 덕분에 세계인이 칭찬하는 맛을 만들어낸다. 탈춤은 연극을 하는 사람과 연극을 보는 사람이 모두 대사를 내뱉고 주고받으면서 흘러가 매 공연마다 다른 예술을 펼쳐나가게 되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아름다운 극 장르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탈지유와 코코아파우더 그리고 팜유와 씨즈닝을 뒤섞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 두 종류를 섞었을 때 독특하고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다.

  결론은 구분의 판정승이다. 이제 우리도 스타일에 따른 구분짓기와 종류별로 묶고 꾸미기에 신경 쓸 여유가 충분히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견문이 넓어졌다. 그러한 발전을 실생활에 펼쳐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중 하나가 먹는 모임을 단순히 먹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특정한 분류를 기반으로 하여 음식들의 스타일을 살려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개인적 기호를 보다 존중해주는 모임으로 바꾸는 일이다. 내게 "애가 쪼잔하게 뭐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니" 혹은 "남자가 왜 그리.."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설득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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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나는 책이 가지고 있는 글자라는 한계 때문에 불안을 느껴 왔다. 글을 읽고 작가가 의도한 영상을 완벽히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핵심 인물들과 그들이 지금 처한 상황, 사건의 전개 양상을 살점이 부실한 생선 요리처럼, 다운로드를 받다 말아 깨져서 나오는 불법 영화 파일처럼 그렇게 불안전하게 되살릴 뿐이다. 물론 이러한 한계가 문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독서를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해 볼 때, 한계를 최대한 이겨내고자 하는 독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최고의 독서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환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강변에 있거나 호수를 끼고 산을 등진 곳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노벨상을 탈 만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시인들이 안개낀 곳의 정자 위에서 혹은 배를 타면서 숲과 꽃나무 사이로 시구를 지어 보냈던 것과 같이 정신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의도하고자 한 생산물에 어울리는 환경이 감싸주고 받쳐주어야 한다.

  환경은 나에게 특정한 분위기와 감정을 부여한다. 환경이 나에게 준 것들을 가슴에 품고 그것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책을 읽어보면 책의 글이 마땅히 되살려야 할 풍경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의 환경의 도움을 받아 펼쳐내고 그려낼 수 있다. 무거운 분위기의 책들 -정치사의 폭풍 속에서 힘들게 이고 저곳 떠도는 망명자의 이야기, 감금과 독재 속에서 저항하는 남자의 이야기, 쓰라린 과거의 가족사를 덮기 위해 살인자로 변해 도시를 누비는 운명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 등- 을 한여름 시끌벅적한 야외수영장 비치 의자에서 햇살을 받으며 몰입하여 읽을 수 있을까? 혹은 '냉정과 열정사이' 나 '도쿄 타워'같은 도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적적한 컴퓨터실 안에 앉아 급하게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을까? 읽는 건 가능하겠지만 상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불균형감을 조장하고 정작 글이 그려내는 장면은 생생하고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 내가 책을 읽는 장소가 아늑한 집 거실인가, 사람 북적이는 지하철인가, 우중충한 카페인가, 단출하고 냉랭한 독서실인가, 따뜻한 조명과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만남의 장소인가에 따라 내가 손에 집어야 하는 책은 달라져야 한다. 책을 집은 손 말고 다른 손이 심심치 않게 건드리는 과자나 음료도 책의 분위기를 눈 앞에 잘 녹여내기 위해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낮과 밤, 더움과 추움, 햇빛과 구름 등의 주변 날씨를 보고 나서 그에 어울리는 책을 집어 읽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 나는 밀란 쿤데라의 '향수'가 가진 음침하고 짙은 그리움의 정서와 조국과 타지 사이의 방황이 가져오는 권태, 주변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외로움,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집합을 잘 녹여낼 파리와 프라하라는 두 도시의 이미지 (반드시 대조를 통해서만 명확해진다. 대조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는 서방 도시의 이미지를 멋모르고 드높이고 아끼는 하찮은 사대주의 무리의 일부가 될 것 같아서 말한다) 를 농도 있게 읽어내기 위해 꼭 밤에만 커튼을 친 독서실에서 읽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인디 그룹 '페퍼톤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집을 작업하면서 항상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화창한 날에만 작업실에 햇빛을 들여와 합주와 믹싱을 하고 FX를 넣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또다른 소설 작가도 서울에 사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쓰기 위해 명동의 연인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특히나 북적일 때만을 골라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카페의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음악을 만들거나 글을 쓸 때에도 환경은 몰입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원리가 비발디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영감'이다. 수많은 전례들이 이를 증명한다.

  농도 있게 몰입한 결과로 나온 창작물은 분명 조금 더 창의적이고 비범하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스 와인이나 로제 와인, 코나 커피 등과 같은 독특한 음료들은 모두 제작하는 시기가 수시가 아니라 특정한 기간이며 공정 또한 독특하다. 흔해빠진 환경에서는 가치 높은 산출이 나오지 않는다. 만원짜리 공장제 와인이나 도처에 있는 자판기 커피 등은 그 만드는 방법도 흔하고 그 음료를 받아줄 분위기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에서 마실 수 도 있고 퇴근 후에 마실 수도 있다. 굳이 장식이나 음악 등을 이용하여 레스토랑이나 카페처럼 시상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 음료 중에서는 이렇게 환경과 별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겠지만, 시상과 분위기를 가득 품고 있는 책은 언제나 각각의 책 한 권이 하나 혹은 한 묶음의 환경과 연결관계를 맺고 있다. 누군가 써 놓은 한 편의 글도 각각 어떤 환경과 일대일 대응을 한다. 음료보다 책과 글을 드높이는, 물질보다 정신을 드높이는 사고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책과 글은 그만큼 완벽히 맛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음료를 맛볼 줄 아는 사람들보다 현저히 적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 어떤 책인가에 따라 환경을 바꾸고, 혹은 지금의 환경에 따라 읽을 책을 바꾸는 유연한 습관은 어떤 책을 읽던지 그 책의 몰입도를 높이고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게끔 해준다. 마치 한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와 뚝배기를 쓰고 양식을 먹을 때에는 코스를 나누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처럼 책이라는 마음의 양식도 잘 먹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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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항상 일을 잘하고 있을 때 더 잘해야 한다, 혹은 지금은 잘하지만 언제 실수를 낼지 모른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싫어했다. 일을 어느 정도까지 하면 잘 하는 것인가라는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이 불분명한 기대치 혹은 미래에 대한 주의깊지 못한 추측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므로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척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 여러명의 종합적인 의견을 수렴했을 때 그 결과물은 각각의 상대적 평가 중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군에서는 그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군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미터기가 아니고 '궤도'다. 궤도 위에 올려놓여 있기만 한다면 정상으로 판단되고, 그보다 더 좋아도 상관없지만 절대로 그보다 나빠서는 안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더 잘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여유있게 지내도 되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적인 최소 기준선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절대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조직의 모습이다. 과정이 아닌 결과를 통해 판단하되 결과 이후의 모든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궤도를 벗어난 이들에게는 호된 질책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직 구성원들을 판단하게 되면 심리적 요소에 의해 집단의 분위기를 요동치게 하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이고 평온한가 아니면 이상하고 불안한가, 이 두 가지로 명확한 이분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집단의 분위기라는 것을 경기 호황이나 침체의 곡선처럼 생각하느냐 정상과 이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추측이 사라진다는 점은 이분법의 크나큰 장점이다.

  이분법은 공산주의에 어울리는 평가 척도이다. 아무리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더라도 받는 월급과 식량은 평등하다. 남들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기준에 미달한 것이므로 회의를 통해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는다. 그런데 군은 공산주의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이 같고 같은 종류의 물품을 사용하며 집단으로 일한다. 청소는 모두가 깨끗이 해야 하고 경례와 같은 기본적인 예절도 모두에게 요구된다. 물자가 남으면 좋은 것이고 부족하면 큰일난다. 일을 다 끝낸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며 그냥 '정상'일 뿐이다. 비교의 심리가 크나큰 죄악으로 느껴지는 체제 속에서 군은 존재한다.

  한편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시장은 그와 다르다. 호황과 침체는 개인들의 상황이 모두 다르고, 개인들이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여 우열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것을 찾고 나쁜 것을 쫓아내려 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기대하게 되거나 혹은 더 나빠질 것을 우려하게 된다. 개인을 보살펴줄 조직의 규칙이나 제도가 군만큼 온몸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과연 군 안에서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지를 감히 규정할 수 있을까? 한편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이 아닌지는 얼마나 쉽게 정의할 수 있는가. 궤도를 벗어난 롤러코스터는 조치 후 다시 궤도에 올려놓으면 되고, 이미 궤도를 돌고 있는 것들은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상관없이 궤도 위에 있다는 것만을 유지하면 되게끔 현상 유지를 추구하면 된다.

  나아가 정상과 이상의 이분법을 통해 조직 구성원들을 바라보며 그에 따라 정상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조치하는 부지런함은 구성원들의 평가자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지속적인 확인과 조치로 현 상황을 항상 기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조금만 실수가 생기기 시작해도 곧 큰 문제의 상황, 즉 정상이 아닌 이상에 직면하게 된다. 상황이 점차 나빠진다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나빠지든 많이 나빠지든 두 경우 다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 틀이 평가자들에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동안 가만히 있었으니 이제 애들을 잡아보자'와 같은 험악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가자들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기대와 추측을 금하고, 조직 구성원 각각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무 중 정상 궤도를 벗어난 것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여 불안감을 없애야 전체적인 조직이 순탄하게 움직일 수가 있다. 위의 사항을 따르지 못하면 그 때부터 조직 안의 절대적 기준은 희미해지고 조직은 너무 풀어지거나 너무 험악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모두가 다 같이 잘 하자는 이상을 좇아야 한다.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기준 이상을 달성해서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성취의 연속이 바로 군 생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정상과 이상의 이분법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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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무리 그날 좋은 일이 있어도, 대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어도,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해도 경례를 받아주는 선임들의 60%는 무표정이거나 우울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얼굴로 경례를 받아주게 된다. 경례가 너무나도 기본적인 습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 보통의 의례가 경례자와 수례자 두 사람의 기분과 태도 그리고 속마음에까지 영향을 주기는 힘들다. 선임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거나 둘 사이에 사고가 터져서 사이가 멀어졌다면 경례가 아닌 비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그리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수례자의 표정이 언짢아보이면 당장은 그 상황을 개선할 어떤 방법도 없음을 알고 일단 경례를 마무리하여 원래의 마음과 행동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불필요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평소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후임들에게 오해를 사는 선임들도 꽤나 있다. 그들은 나에 의해 직접적인 악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후임의 입장에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표정이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습관조차 지켜주지 않는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선임의 평소 어두운 표정은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신 또는 후임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고칠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경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감이다. 불필요하게 주눅들지 않고 내가 먼저 목소리를 크게 하고 눈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의 태도에서 상대방의 태도와 표정은 중요하지 않으며, 경례 중에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이다. 자신감 있게 경례하는 후임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렇다고 경례 하나로 평소의 잘못이 용서된다거나 평가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례는 기본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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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주기만 한 사람, 헌신적으로 계속해서 매달린 사람, 그에게 곧 들이닥칠 무서운 기분은 자존심의 상처와 무기력한 자아의 체험이다. 하지만 그 기분이 피부에 와닿도록 하는 원인에는 자신에 기인한 것보다 주위 사람들 또는 환경이 주는 외부 시선의 요인이 더 크다. 남의 눈치를 보는 순간 그래도 이만큼 주었으니 이제는 받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보상심리가 싹트고 그에 따라 왜 나에게 문자나 편지가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남의 눈치에 신경쓰지 않으면 보상심리 또한 작동하지 않는다. 눈치를 보지 않게 만듦으로써 자존심의 상처는 상당량 줄일 수 있고 그에 따라 나의 일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

  남의 눈치에 신경쓰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랑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숨겨야 하고 되도록 화제로 꺼내서는 안 된다. 현재 내가 좋아하거나 작업 중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내가 쌓고 있는 공적의 세부적인내용을 설명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불필요한 말이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보답해주고 열정적으로 응답하여 그 사람이 남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고 내 자부심도 높여주기 전까지는 금물이다. 나의 사랑 가꾸기와 헌신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람이 나의 헌신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듣고만 있는 경우에도 그러한 경청은 나를 방해한다. 나 자신이 타인의 경청을 인지한 다음 스스로에게 헌신을 주저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공든 탑은 혼자 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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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에 사람의 심리는 예외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익숙한 동네 앞 술집에서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 나의 마음과 듣도보도 못한 도시의 한 구석에서 누군가의 부름에 달려나갔을 때 내 마음이 편한 정도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 마음이 편한 정도는 사람이 다양한 화제를 꺼내고 풍부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데이트를 할 때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때나 직장 상사들과 회식을 할 때나 어느 종류의 만남이든 만남의 성격은 사람 개인이 환경의 영향을 받은 심리와 그에 따른 대화의 폭에 따라 결정된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만나는가, 즉 시간의 요소는 만남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대화를 하는 사람이 만남에 참여할 시간이 넉넉한가 촉박한가, 압축적인가 지루한가, 낮인가 밤인가 등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 서로가 나누는 이야기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남녀가 데이트를 주제로 만났는데 둘 다 1시간 뒤에 각각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예정해 놓았다면 둘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정보교환 정도에 그칠 것이다. 여유로움을 잃어서 가장 달성하기 쉽고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정보교환이라는 목적에만 치중하도록 두 사람의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의지만으로는 그 마음을 쉽게 되돌릴 수 없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만나기로 예정해 놓았다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해져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카페나 레스토랑이나 술집에서 만나는가, 관광지나 공원이나 강변에서 같이 있는가 등의 장소의 요소는 시간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 만남의 목적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고, 그만큼 장소를 제안한 사람이 적절한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책임도 높아진다. 시간은 만남 외의 개인들의 일정에 제약을 받지만 장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같이 모여서 어떤 특정한 활동을 하는지를 장소가 결정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도 장소에 큰 영향을 받는다. 놀이공원에 가면 서로가 즐겁게 놀면서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 목적이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고백장소로 가면 고백이 목적이 된다. 언제나 만남을 제안한 사람이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할지를 먼저 생각해 본 다음 그 이야기를 늘어놓을 심리적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장소를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전혀 종속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감정을 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접대문화, 다도, 모임공간과 같은 인공물이 등장하여 환경을 제어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아온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의 요소를 만남의 목적과 사람들이 할 이야기와 행동을 예견하여 설정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인간관계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실패했을 경우 관계의 증진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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