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는 책이 가지고 있는 글자라는 한계 때문에 불안을 느껴 왔다. 글을 읽고 작가가 의도한 영상을 완벽히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핵심 인물들과 그들이 지금 처한 상황, 사건의 전개 양상을 살점이 부실한 생선 요리처럼, 다운로드를 받다 말아 깨져서 나오는 불법 영화 파일처럼 그렇게 불안전하게 되살릴 뿐이다. 물론 이러한 한계가 문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독서를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해 볼 때, 한계를 최대한 이겨내고자 하는 독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최고의 독서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환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강변에 있거나 호수를 끼고 산을 등진 곳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노벨상을 탈 만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시인들이 안개낀 곳의 정자 위에서 혹은 배를 타면서 숲과 꽃나무 사이로 시구를 지어 보냈던 것과 같이 정신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의도하고자 한 생산물에 어울리는 환경이 감싸주고 받쳐주어야 한다.
환경은 나에게 특정한 분위기와 감정을 부여한다. 환경이 나에게 준 것들을 가슴에 품고 그것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책을 읽어보면 책의 글이 마땅히 되살려야 할 풍경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의 환경의 도움을 받아 펼쳐내고 그려낼 수 있다. 무거운 분위기의 책들 -정치사의 폭풍 속에서 힘들게 이고 저곳 떠도는 망명자의 이야기, 감금과 독재 속에서 저항하는 남자의 이야기, 쓰라린 과거의 가족사를 덮기 위해 살인자로 변해 도시를 누비는 운명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 등- 을 한여름 시끌벅적한 야외수영장 비치 의자에서 햇살을 받으며 몰입하여 읽을 수 있을까? 혹은 '냉정과 열정사이' 나 '도쿄 타워'같은 도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적적한 컴퓨터실 안에 앉아 급하게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을까? 읽는 건 가능하겠지만 상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불균형감을 조장하고 정작 글이 그려내는 장면은 생생하고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 내가 책을 읽는 장소가 아늑한 집 거실인가, 사람 북적이는 지하철인가, 우중충한 카페인가, 단출하고 냉랭한 독서실인가, 따뜻한 조명과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만남의 장소인가에 따라 내가 손에 집어야 하는 책은 달라져야 한다. 책을 집은 손 말고 다른 손이 심심치 않게 건드리는 과자나 음료도 책의 분위기를 눈 앞에 잘 녹여내기 위해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낮과 밤, 더움과 추움, 햇빛과 구름 등의 주변 날씨를 보고 나서 그에 어울리는 책을 집어 읽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 나는 밀란 쿤데라의 '향수'가 가진 음침하고 짙은 그리움의 정서와 조국과 타지 사이의 방황이 가져오는 권태, 주변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외로움,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집합을 잘 녹여낼 파리와 프라하라는 두 도시의 이미지 (반드시 대조를 통해서만 명확해진다. 대조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는 서방 도시의 이미지를 멋모르고 드높이고 아끼는 하찮은 사대주의 무리의 일부가 될 것 같아서 말한다) 를 농도 있게 읽어내기 위해 꼭 밤에만 커튼을 친 독서실에서 읽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인디 그룹 '페퍼톤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집을 작업하면서 항상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화창한 날에만 작업실에 햇빛을 들여와 합주와 믹싱을 하고 FX를 넣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또다른 소설 작가도 서울에 사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쓰기 위해 명동의 연인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특히나 북적일 때만을 골라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카페의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음악을 만들거나 글을 쓸 때에도 환경은 몰입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원리가 비발디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영감'이다. 수많은 전례들이 이를 증명한다.
농도 있게 몰입한 결과로 나온 창작물은 분명 조금 더 창의적이고 비범하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스 와인이나 로제 와인, 코나 커피 등과 같은 독특한 음료들은 모두 제작하는 시기가 수시가 아니라 특정한 기간이며 공정 또한 독특하다. 흔해빠진 환경에서는 가치 높은 산출이 나오지 않는다. 만원짜리 공장제 와인이나 도처에 있는 자판기 커피 등은 그 만드는 방법도 흔하고 그 음료를 받아줄 분위기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에서 마실 수 도 있고 퇴근 후에 마실 수도 있다. 굳이 장식이나 음악 등을 이용하여 레스토랑이나 카페처럼 시상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 음료 중에서는 이렇게 환경과 별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겠지만, 시상과 분위기를 가득 품고 있는 책은 언제나 각각의 책 한 권이 하나 혹은 한 묶음의 환경과 연결관계를 맺고 있다. 누군가 써 놓은 한 편의 글도 각각 어떤 환경과 일대일 대응을 한다. 음료보다 책과 글을 드높이는, 물질보다 정신을 드높이는 사고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책과 글은 그만큼 완벽히 맛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음료를 맛볼 줄 아는 사람들보다 현저히 적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 어떤 책인가에 따라 환경을 바꾸고, 혹은 지금의 환경에 따라 읽을 책을 바꾸는 유연한 습관은 어떤 책을 읽던지 그 책의 몰입도를 높이고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게끔 해준다. 마치 한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와 뚝배기를 쓰고 양식을 먹을 때에는 코스를 나누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처럼 책이라는 마음의 양식도 잘 먹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환경은 나에게 특정한 분위기와 감정을 부여한다. 환경이 나에게 준 것들을 가슴에 품고 그것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책을 읽어보면 책의 글이 마땅히 되살려야 할 풍경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의 환경의 도움을 받아 펼쳐내고 그려낼 수 있다. 무거운 분위기의 책들 -정치사의 폭풍 속에서 힘들게 이고 저곳 떠도는 망명자의 이야기, 감금과 독재 속에서 저항하는 남자의 이야기, 쓰라린 과거의 가족사를 덮기 위해 살인자로 변해 도시를 누비는 운명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 등- 을 한여름 시끌벅적한 야외수영장 비치 의자에서 햇살을 받으며 몰입하여 읽을 수 있을까? 혹은 '냉정과 열정사이' 나 '도쿄 타워'같은 도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적적한 컴퓨터실 안에 앉아 급하게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을까? 읽는 건 가능하겠지만 상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불균형감을 조장하고 정작 글이 그려내는 장면은 생생하고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 내가 책을 읽는 장소가 아늑한 집 거실인가, 사람 북적이는 지하철인가, 우중충한 카페인가, 단출하고 냉랭한 독서실인가, 따뜻한 조명과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만남의 장소인가에 따라 내가 손에 집어야 하는 책은 달라져야 한다. 책을 집은 손 말고 다른 손이 심심치 않게 건드리는 과자나 음료도 책의 분위기를 눈 앞에 잘 녹여내기 위해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낮과 밤, 더움과 추움, 햇빛과 구름 등의 주변 날씨를 보고 나서 그에 어울리는 책을 집어 읽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 나는 밀란 쿤데라의 '향수'가 가진 음침하고 짙은 그리움의 정서와 조국과 타지 사이의 방황이 가져오는 권태, 주변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외로움,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집합을 잘 녹여낼 파리와 프라하라는 두 도시의 이미지 (반드시 대조를 통해서만 명확해진다. 대조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는 서방 도시의 이미지를 멋모르고 드높이고 아끼는 하찮은 사대주의 무리의 일부가 될 것 같아서 말한다) 를 농도 있게 읽어내기 위해 꼭 밤에만 커튼을 친 독서실에서 읽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인디 그룹 '페퍼톤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집을 작업하면서 항상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화창한 날에만 작업실에 햇빛을 들여와 합주와 믹싱을 하고 FX를 넣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또다른 소설 작가도 서울에 사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쓰기 위해 명동의 연인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특히나 북적일 때만을 골라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카페의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음악을 만들거나 글을 쓸 때에도 환경은 몰입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원리가 비발디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영감'이다. 수많은 전례들이 이를 증명한다.
농도 있게 몰입한 결과로 나온 창작물은 분명 조금 더 창의적이고 비범하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스 와인이나 로제 와인, 코나 커피 등과 같은 독특한 음료들은 모두 제작하는 시기가 수시가 아니라 특정한 기간이며 공정 또한 독특하다. 흔해빠진 환경에서는 가치 높은 산출이 나오지 않는다. 만원짜리 공장제 와인이나 도처에 있는 자판기 커피 등은 그 만드는 방법도 흔하고 그 음료를 받아줄 분위기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에서 마실 수 도 있고 퇴근 후에 마실 수도 있다. 굳이 장식이나 음악 등을 이용하여 레스토랑이나 카페처럼 시상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 음료 중에서는 이렇게 환경과 별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겠지만, 시상과 분위기를 가득 품고 있는 책은 언제나 각각의 책 한 권이 하나 혹은 한 묶음의 환경과 연결관계를 맺고 있다. 누군가 써 놓은 한 편의 글도 각각 어떤 환경과 일대일 대응을 한다. 음료보다 책과 글을 드높이는, 물질보다 정신을 드높이는 사고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책과 글은 그만큼 완벽히 맛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음료를 맛볼 줄 아는 사람들보다 현저히 적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 어떤 책인가에 따라 환경을 바꾸고, 혹은 지금의 환경에 따라 읽을 책을 바꾸는 유연한 습관은 어떤 책을 읽던지 그 책의 몰입도를 높이고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게끔 해준다. 마치 한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와 뚝배기를 쓰고 양식을 먹을 때에는 코스를 나누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처럼 책이라는 마음의 양식도 잘 먹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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