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 언제부턴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야마하 피아노, 내가 그토록 갖고 싶던(되찾고 싶었던 이 맞는 말 같다. 우리 집은 예전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갖고 있다가 디지털로 바꿨으니까) 업라이트 피아노를 지난 11월 우리 집에 들여놓았다.

  미묘하고 부드러운 터치감, 남자로서는 약한 손가락 힘을 가진 나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피아노가 나의 약한 손가락을 관용적인 자세로 웃으면서 반기는 듯 하다. 오전에 집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 피아노를 자주 친다. 쇼팽이나 슈베르트 같은 옛날 작곡가들의 곡집은 너무 고리타분해서 싫고, 산뜻한 뉴에이지나 한국의 발라드곡 정도에 국한해서 곡을 선정하여 연주한다. 한 예로 나는 김동률의 '이제서야' 가 얼마나 복잡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가지고 있는지 피아노를 통해 체감했다.

  평생 쓸 수 있는 악기가 피아노인 만큼 소중히 다루고 언제나 내 곁에 있는 피아노였으면 좋겠다.

2006.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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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면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같은 전형적인 A형 남자, 게다가 소심하기로 유명한 황소자리까지 겹친 사람이라면 더욱 금언으로 여겨야 할 구절이다. 나는 미신은 안 믿지만 이런 혈액형과 별자리 따위가 인간의 성격을 규정짓는다고 어느 정도 믿는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혈액형과 별자리에 따라 정해진 성격을 갖고 이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내 마음 속에 그녀라는 존재는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을 어렴풋이 장식해 주고 떠나버렸다. 6월부터인가, 서늘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날씨가 온 하늘과 땅을 뒤덮는 그 때 그녀의 존재가 점점 눈에 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끝이 약간 안으로 말리는, 내가 좋아하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에 나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말과 행동, 이 모두가 계속적으로 나의 가슴 속에 주입되면서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점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누나, 오빠 등과 비슷한 모습의 사람에게 호감을 갖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도 끌리는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매우 소심한, 그러나 속으로는 거창한 상상에 취해 빠져 다니는 17세 소년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나를 즐겁게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상상이 그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까. 경외심..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차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본 이후로..이상하다. 그녀와 그녀 옆의 친구들과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점점 물리적 거리는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내가 얼마나 그녀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메신저라고 하는 놈이 자꾸 나를 유혹했다. 그러나 나는 MSN에 접속하고 그녀를 발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말을 했으나, 사람이 만나지 못하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을까. MSN에서 만난다고 마음이 가까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상 공간이라서 그런가보다.

 7월 말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미친 짓이 시작되었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안 왔다. 또 보냈다. 그래도 안 왔다. 내가 자꾸 헛스윙 하는 것 같아 약간 불만 섞인 문자를 보냈다. 실수였다. 일단 그녀는 나의 제안이 많이 부담스러웠나보다. 어떻게 본다면, 아니 당연히 데이트 신청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많이 후회한다. 그녀에게 미안하고,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일방적인 설득은 설득당하는 쪽을 매우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한다는 진리를 왜 못 깨닫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마침내 알았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소심한 행동이 오히려 그녀에게 부담을 준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내가 애같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게 사실이라 같은 나이의 이성보다는 누나들에게 더 편할 때가 많다. 사실 나에게는 친누나가 있기 때문에 누나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사실이다. 나는 동갑의 이성 친구들이 누나같이 느껴지지 않으면 되레 접근을 꺼려하는 무의식적 본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본능을 인정해야 나의 이상한 행동이 합리화되니까. 하지만 이 본능은 고쳐야 되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고쳐지지 않으니까 소심하다는 말을 듣는다. 동갑내기들한테만.. 아무튼 공부와 사색을 하며 여름방학을 그럭저럭 잘 보냈다. 씁쓸한 마음은 속에 담아두면서 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나 또한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두 명 다 부담스럽게 했다. 내가 주범이고 내가 잘못했다. 소심하기 때문에 모든 걸 망쳐놓았다. 직접 대면하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사실 부끄러울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는 MSN에 주로 나의 생각을 치중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용기를 내서 말은 못하고 그저 MSN에 로그인 표시 띄워놓고 마냥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을 밥먹듯 한 것이다. 그녀 대신 나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가끔씩, 그 대신 많이 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민을 털어놓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친구들이 더 편하게 느껴지더라. 그녀를 제외한 모든 그녀의 친구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중요한 그녀는 내가 좋아한 사람이었지만 다가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언젠가 나는 그녀의 친구의 주선으로 그녀와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다. 너무 어색했다. 만나는 기회가 없으니까 어색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게다가 소심하기도 하고, 그녀가 어울리는 친구들의 모임과는 관계가 적은 사람이니까 어색할 수밖에. 그녀와의 관계성을 늘리기 위해 어떻게 해보려고 했으나 나의 현실적 문제도 고려하면서 생각해 보니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녀와 대화를 했다. 미안해, 그때 일은 잊어주길 바래.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는 걸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정도의 대화를 했다. 그녀의 대답은 조심스러웠지만 날카로웠다. 내가 부담스럽다는 말이 날카로움의 첫번째 원인이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다. 8월의 문자만은 잊어줘. 아무튼 그녀는 나를 다시는 만나기 싫다는 조심스러운 말을 꺼냈고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뒤섞인 감정 속에서 그래, 그렇게 하자는 답을 하며 대화를 마쳤다.

   그 날 이후로 많은 날이 지나고 6월만 해도 평범했던 둘의 관계가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날 피했고, 나도 그녀를 피했다. 원래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오히려 서로 피하는 일이 쉬웠다. 나는 우리가 원래 만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 평범한 대화라도 자주 했으면 좋겠어. 부담가질 일 전혀 없이 말야. 뭐 그럭저럭 10월이 가고 그녀의 생일이 점점 다가왔다. 선물은 10월 말에 샀다. 꼭 내가 직접 선물을 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1월이 다가오자 그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다시 한번 생각나는 말인데, 이 학교의 환경 자체가 나에게 주위 사람 의식을 많이 하게 하나 보다. 주위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예의주시하는 생활에 익숙한 나는 이제야 그 고통을 알겠다. 내가 소심한 이유는 그런 환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생일날 나는 선물을 건네주지 못하고 서랍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선물은 결국 12월에 줄 수 있었다. 원래의 아름다운 포장이 아닌 나의 투박한 포장으로..

뭐 그렇다. 이제는 점점 잊혀져가는 작년의 기억들이 정말로 잊혀져간다. 그녀를 영원히 잊는 것이 나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은 잊을 수 있어도 그녀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나와의 거리가 아득히 먼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6.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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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이 지금도 잘 지내니?
잘 지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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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각 1월 19일 1시 39분.

갑자기 말도 안 될 정도로 대폭 증가한 투데이 숫자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왜 이렇게 많이 늘었을까.

내 포스트에 대한 덧글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도 광고성 덧글이다.

원래 투데이가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거나, 아주 흥미로운 포스트를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네이버에서 검색을 통해 들어올 경로를 가진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을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사람인데, 나는 그 셋 중 아무것도 아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투데이 1957, 그리고 아무 변화 없는 나의 블로그.

200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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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 1957의 비밀은 지금도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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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사관고등학교는 1996년 설립 이래로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고 있다. 나는 10기이다. 1,2,3,4,5,6기 선배들이란... 아득히 멀기만 하다. 그들은 이제 어른이다. 6기가 나보다 4살 많으니까 21살, 이제 사회에 입성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학교의 초기 단계 (내가 정의하는 민사고 역사의 1장) 에는 최명재 설립자님 (우리 10기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께서 손수 학교의 동태를 파악하셨다. 학생들은 설립자님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인간적이지 못한 학교 시스템 속에서, 그 추운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의 겨울 속에서, 공부하다 졸면 설립자님께 끌려가 학교 분수대 물에 빠지면서 그렇게 자랐다. 그런 비인간적인 학교의 교육 방식이 놀라운 대학 진학이라는 결실을 맺어줬는지도 모른다. 6기,7기... 이제 8기 선배님들의 대학 진학 결과가 나오는 때이다. 이번 8기 국제계열은 행복하다. 많은 선배님들이 원하는 대학에 모두 붙으셨다. 이런 결과의 원동력이 무엇일까. 나는 8기 선배님까지 학교의 군대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악을 쓰고 공부한 것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9기 신입생들이 150명씩이나 들어오면서 학교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설립자님이 안 계심으로 인하여 학교의 경직성이 많이 풀어졌으니까.

나와 내 친구 준이(둘다 10기 인문반)는 이번 토론 캠프를 하면서 많은 선배님들과 마주쳤다. 5기부터 9기까지. 그 중 5,6,7,8기 선배님들은 9기,10기와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여러 가지를 분석하고 생각해본 결과 나와 준이는 우리 학교의 역사를 1장과 2장으로 구분했다.

우리 학교는 시간적으로는 9기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역사, 다른 말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근거 1 : 인원이 갑자기 늘었다.

  원래 엄격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 워낙 적고, 설립자님 혼자서 엄청난 공을 들여 세우신 학교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설립자님은 모두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설립자님은 불운의 사고를 당해 학교에 계시지 못하게 되었고, 재정의 압박으로 인해 9기부터는 정원을 150명으로 확 늘렸다. 설립자님이라는 집안의 가장 같은 존재가 없어지니까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여타 학교와 비슷한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교장 이돈희 선생님은 설립자님과는 스타일이 정반대이신 분이라 학생들을 비인간적으로, 비이성적으로 몰아세우시지는 않으시다. 부드럽게 대해주신다. 교장선생님은 설립자님과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우리 학교는 교장선생님을 선두로 하여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정류장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과 선생님과의 유대감이 부족해지고, 학생들끼리의 유대감도 약화되었다. 동고동락하며 우정을 깊게 쌓았던 8기까지의 선배님들과는 달리 9기와 10기 학생들은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맥을 유지하되 깊은 우정까지는 고려해 보지 않는 것 같다. 나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인원이 많으면서 우리 학교의 가족적인 분위기는 없어지고, 학생들이 모인 집단의 분위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 학교 역사책의 페이지는 2장으로 넘겨진다.


근거 2 : 학생들이 엄격한 규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근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제일 많다.

  정말 8기 선배님들이 들어오고 1학년 생활을 할때까지는 규칙이 매우 엄격했다. 정말 사소한 행동에도 규칙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고, 별 볼일 없는 행동과 사물들에 온갖 규칙을 적용함에 따라 학생들의 행동 각각이 모두 뭔가 조직화되어 있고 경직되어 보였다. 가장 쉬운 예는 바로 학생법정. 체육 선생님 혹은 생활지도 선생님이 손수 학생법을 어긴 학생에게 회초리의 형벌을 가하는 풍경은 8기때까지만 있었고, 9기가 들어오면서 없어졌다. 교장선생님은 그런 회초리 같은 것을 꽤 싫어하시는 것 같다. 뭐.. 나도 싫어한다. 또, 9기부터는 학생들이 교모를 안 쓰고 선생님들이 사모를 안 쓴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란다.(사실 좀 비효율적이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8기까지는 후배가 선배한테 잘못 보일 경우 가차없이 선배들의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혼정실(지하 1층) 은 무시무시한 형벌의 장소가 되고, 선배들 중 힘깨나 쓰는 분들이 후배들을 팼다고 한다. 그러한 전통은 민사고 설립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전통 때문에 8기까지의 선배님들은 엄격한 선후배 관계의 유지와 규칙의 준수 이 두 가지를 숙지하고 있다. 토론 캠프 중에 9기와 10기가 조금 캠프생들에게 부드럽게 대해서 한 5기 선배님에게 엄한 훈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9기와 10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 학교가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지금 9기와 10기가 학교에 있고 올해에 11기가 들어오는 이 시점에서 그렇게 예전의 낡고 엄격한 규칙을 그대로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9기가 들어오면서 설립자님의 부재, 회초리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엄격한 규칙이 없어지니 9기와 10기는 대체로 풀어질 수밖에 없고, 선생님들도 우리들과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허물이 없어지는 것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표출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여러 가지 변화로 인하여 규칙이 부드러워지고, 선후배 관계가 부드러워졌다. 1장에서 2장으로 전환했다.


  학교는 이제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고 있다. 9기 150명, 10기 150명, 11기 150명 .. 인원을 보아도 그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눈으로 알 수 있다. 우리 학교는 변화를 거듭하며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대선배님들 중 일부는 지금의 우리 학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기도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학교의 풍경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학교 풍경이 정말 궁금하다.

  우리 학교는 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강원도 산골의 자립형 사립고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 역사의 1장은 8기에서 끝나게 되었다. 9기부터 우리 학교 역사의 2장이 시작된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우리 학교가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하리라 나는 믿는다.


200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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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패닉의 '달팽이' 가 방송에 나왔는데, 그 때의 감동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빠 대학교에 패닉이 특별출연해서 공연을 했을 때 앞에서 내가 얼마나 숨죽이고 그들을 쳐다보았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약간 비가 오려고 하는 우중충한 날씨와 그에 어울리게 노래를 해준 이적과 김진표.. 모두 내가 7살때, 즉 1995년~1996년 쯤에 있었던 일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을 잊게 되고, 나는 평범한 중학생으로 성장했고,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음반을 막 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어떤 가수에 그토록 열광하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7년만에 돌아온 패닉의 새 앨범을 사는 것이었다. 잘 생각해 보니 내 친구들도 그들의 기억 저편에 어렴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패닉' 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싶다.

이번 패닉 4집에는 풍부한 사운드와 스타일 있는 곡들의 조합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패닉의 문학적인 가사, 한국 문학의 한 갈래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한 개인의 자아를 구석구석 생생히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그 가사는 나의 가슴 속까지 음악을 전해주는 데 한몫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종이나비'. 블로그 배경음악으로 구입했을 정도다. 환상적인 분위기, 부드러운 반주곡과 보컬, 꿈을 꾸다 깨어나는 곡 속의 주인공, 모두 나에게 호감을 주었다. 특히 김진표의 속삭이는 목소리와 그 속의 가사의 호소력은 정말 나를 다른 평화로운 곳으로 데려다 주는 것 같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흰색 방 창가에서 이 음악을 들으면 정말로 나비 한 마리가 창가를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사랑을 주제로 한 7번 트랙 '종이나비', 정말 추천한다.


뉴스 1

'로시난테'를 타고 돌아온 음악계의 돈키호테 '패닉'이 공연업계의 쏟아지는 러브 콜을 받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패닉이 다음달 말쯤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도시 투어 공연에 나설 것으로 알려지자 국내 유수의 공연기획사들이 패닉에게 러브콜을 보내며 물밑 접촉을 벌이고 있는 것.

패닉 투어 공연이 공연기획사들에게 흥행보증수표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있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12월 8일, 4집 음반을 발표하고 각종 음반 판매 차트에서 1위권을 유지해오며 큰 주목을 받았던 패닉이 타이틀곡 '로시난테'에 이어 후속곡으로 내정된 '정류장'까지 히트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패닉의 멤버인 이적과 김진표의 부동의 열성 팬들이 10만명에 이른다는 점과, 좋은 음악 공연을 찾는데 주저하지 않는 20,30대 팬층의 존재 등이 공연계가 패닉에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 중 하나이다.

패닉 공연 유치에 나선 한 공연기획사는 "올 상반기 공연중 패닉은 작품성과 흥행성까지 모두 성공적인 공연이 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면서 "국내 최고 개런티라 할 수 있는 회당 개런티 5천만원을 제시했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패닉의 소속사 뮤직팜의 강태규 이사는 "회당 최고 개런티 제의를 받았지만 패닉에게는 오히려 8년만의 공연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기획과 공연내용이 더 중요하다"며 "패닉의 팬들에게 공연 그 자체로 과거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이 과제인 만큼 현재 패닉 멤버들과 최고의 공연 아이템을 구상중이다"고 말했다.

패닉의 멤버 이적과 김진표 역시 "뮤지션은 당연히 공연장에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법이다"며 "이번 전국 공연 역시 오래동안 기다려온 팬들을 위해 진한 추억의 사진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전했다.

뉴스 2

정갈해진 음악으로 7년만에 컴백

“뭉클합니다. 고마움… 반가움… 송구함…. 여러 감회가 들었어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패닉을 사랑해준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발매 일주일 만에 음반판매량 4만장. 7년 만에 컴백한 패닉에게 쏟아진 대중의 뜨거운 관심에 이적이 밝힌 소감이다. 패닉의 음반발매 소식에 음악 팬들은 기대감에 들떴고 지난 8일 음반이 발매되자 순식간에 초도주문량이 소진됐다. 인터넷에는 ‘진정한 음악이 왔다’ ‘오랜만에 사고 싶은 음반이 나왔다’며 찬사를 보냈다.

김진표는 “녹음할 땐 신났지만 막상 앨범 작업을 끝내고나니 걱정되더라.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반응이 좋아서 너무 기쁘다”며 미소를 보였다.

1995년 데뷔한 패닉은 신선한 가사와 많은 장르를 아우르는 음악, 독특한 음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지난 7년간 각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패닉의 관계는 꾸준히 이어왔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감회는 어땠을까.

이적은 “(김)진표를 처음 만났을 때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사람이 상당히 좋아졌다. 차분해지고.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진표에게 놀라고 있다”고 영원한 파트너를 칭찬했다.

작사 작곡은 이적이 도맡아 했지만 앨범에 수록될 곡 선정은 김진표의 몫이었다. 가사도 이적이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의견을 교환해가며 완성해갔다. 패닉은 지난해 가을부터 작업을 시작해 올 여름 본격적인 녹음작업에 임했다. 이적의 곡에 ‘천재 뮤지션’ 정재일이 지휘자로 나서 편곡을 도맡았다.

7년간 각자의 길에서 충분히 개성을 만끽한 후의 패닉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당시에도 참신했지만 이번에는 정갈함이 돋보인다.

이적은 “사운드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공백 이전의 패닉이 울퉁불퉁한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좀 정교해졌고 정돈된 듯한 느낌”이라고 자평했다.


이적과 김진표의 노래와 랩도 더욱 조화를 이룬다. 이적은 “예전에는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표현을 할 줄 몰랐는데 이번에는 표현하는 능력이 많이 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진표의 랩은 다소곳해졌다. 가끔 ‘종이나비’나 ‘나선계단’에선 노래를 주도하기도 하지만 ‘태풍’ ‘로시난테’ 등에서는 차분히 읊조리며 노래에 랩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했다. 노래가 거치면 거칠게, 따뜻하고 부드러우면 랩도 분위기를 탔다. 김진표는 “곡이 먼저지 랩이 먼저가 아니다”면서 “여러 목소리를 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가사마다 패닉 특유의 세상에 대한 냉소가 있지만 너무 자극적이지 않다. 힘든 일상에 대한 여러 절망들을 표현해 약간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나 ‘눈녹듯’에서는 사랑에 대한 감상도 표현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패닉에게 ‘한번 패닉은 영원한 패닉이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나. 다음 앨범은 언제 나오느냐’ 물었다. 이적은 갑자기 진지해지며 “이제 또다시 각자 솔로 활동한다고 하면 팬들이 화낼 것 같다”며 “이번 앨범 활동 막바지에 심도 있게 고민해봐야겠다”고 말했다.

패닉은 지난 7년간 자신들에게 ‘지조’를 지켜온 팬들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갈 예정이며, 내년 2월 대규모 콘서트를 갖는다.

2006. 1. 10.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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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학교에 있다.

1월 2일부터 7일까지 우리 학교에 와서 토론과 논술의 대략적인 교육을 받고 돌아갈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다.

물론 급여를 노린 점도 없지는 않지만 ㅎㅎ

20분 후면 기숙사 방을 나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한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를 9시 반부터 지금까지 방에서 하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만큼 아이들에게 많이 가르치고 아이들도 나를 잘 따르고 많이 배워갔으면 한다.

여기서 나 또한 애들 가르치면서 토론과 논술에 대해 많이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 수업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은, 나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첫째이고,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이번 토론 캠프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발산된다는 것이 둘째이다. 정말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 벌써 11시가 가까워오네. 이제 나가봐야겠다.


200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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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집에 왔다.

406호에서 205호로 옮기는 큰 이사를 한 뒤

28일 2시 반에 학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일단 내가 가장 기대하고 기대하던 YAMAHA 피아노가 내 방에서

늠름한 자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언제부턴가 고장나 있는 컴퓨터가..ㅠ

마루에는 피아노 사고 공짜로 준 야마하 DVD플레이어가 있었다.

이거는 원래 있던 야마하 DVD플레이어와 달리 DivX를 지원해서 avi파일 들어있는 CD를 다 돌릴 수 있다. 너무 좋다. 역시 집이 제일 좋다.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코엑스몰에 가서 잠깐 놀다가 인터콘티넨탈 호텔 안에 부페(백조부페였는데 이름이 Grand Kitchen으로 바뀌었다)에서 점심을 매우 잘 먹었다. 우와.. 역시 호텔은 다르다.

다시 지하통로로 이웃한 코엑스몰로 가서 내가 수학여행때 멋지게 쓰고 다닐 Colorful한 우산을 Ann's Garden(이쁜거 많더라)에서 사고 내 쭉티도 There's 라는 데서 샀다. 반디앤루니스 가서 수학여행을 위한 프랑스어 회화책도 샀다 ^^v 그리고 코엑스몰을 나와 창덕궁 비원 옆에 있는 미용실에서 웨이브펌도 하고 마지막으로 대학로에 가서 2006년도 프랭클린 플래너를 샀다. 오늘은 정말 재미있는 날이었다.


2005.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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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전 11시 21분.

어제 친구들과 한참 떠들다 4시에 자서 11시에 일어났다.

완전히 시차적응을 하는 기분이다. 방 안에서는 12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11시였기 때문이다.

어제 우리 학교에도 사랑의 물결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끝이 가까워오자 새로운 커플들이 몇몇 탄생했고(축하한다 짜식), 원래 있던 한 쌍들은 더 그들의 사랑을 결속시킨 듯 하였다. 나는 그냥 혼자 있다가 밤에 친구들과 모여서 명목상 솔로들의 파티라고 모임의 이름을 지어놓고 카드게임(6Take.. 정말 재밌다) 을 하면서 놀았다. 진 사람이 진실을 털어놓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잘하다가 한 5판쯤 되면서 완전 고꾸라졌다. 한번 크게 진 적이 있어서 내가 진실을 말하게 되었다. 이건 상식이지만, 친구들이 원하는 그런 얘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말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 결국 나는 힘들게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잠깐, "얘들아, 이거 얘기하면 분위기 따운될지도 몰라. 너무 센티하거든."

아이들은 센티해도 상관없단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힘들게 얘기했다. 친구들이 예상대로 우울해졌다. 나도 내 이야기를 하면서 왜 이렇게 속으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다 내가 용기 없는 고등학생이어서 생긴 일이라고 나는 속으로 되뇌였다. 나는 솔직히 고등학교 시절에 꼭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겠다는 굳은 다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이런 얘기를 꺼내고 다른 친구들이 어땠냐는 둥 그런 레파토리로 계속 모임의 흐름을 이끌어가니 내가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본 다음 결론을 내렸다. 여자에게 환상을 심어줄 수 있는 남자는 같은 남자가 보잘것없다고 평가해도 여자 관계와는 상관없다는 것, 솔직하고 순수하면 매력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뭐 이런 것들이 우리 학교 친구들의 전반적인 얘기를 들어본 다음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내가 어리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순수하고 솔직하고 진지한 게 좋은데, 여자들은 그걸 혐오하는 듯 하다. 꼭 나쁜 남자 짓을 해야 여자를 만들 수 있는 걸까?


  주일은 주님과 함께 보내자는 심정으로 우울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지금 외로움을 타는데, 이 기분도 꽤 괜찮다. 쉬는 마음으로 책 좀 보고 경건하게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면 나에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이다. 


200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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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그땐 참 쓸쓸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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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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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함부로 올릴 수 없는 과거사진이네..ㅎㅎㅎ
모두들 많이 이뻐지고 많이 성숙해졌다. 지금을 돌아보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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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먹어도 체내의 세로토닌 분비를 도와 잠을 오게 하지만, 나는 특이하게도 면학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잠이 오는 이상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1시간 정도는 괜찮다. 그 다음부터는 정말 졸음이 밀려온다. 귀가 꽉 막힌 듯한 느낌과 함께 말이다.

나만 그런건가 아니면 모두 다 그런 건가?

요즘 내가 왜 이렇게 이어폰 때문에 졸게 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내가 드럼 있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드럼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이 음악에 집중하게 된다. 뇌가 청각에 관한 일을 주로 하려고 한다. 공부하고 있는데도.

그래서 청각에 너무 신경쓰다 보니 졸음이 오는 것 같다. 또 내가 드럼 비트를 허공에 대고 치는 ;; 습관..이라고 해야 될까. 아무튼 그런 습관이 있는데 그것도 나를 졸게 하는 원인인 것 같다. 공부할 때는 정말 공부만 해야 한다. 뇌가 학습만 하는데 쓰여야 한다. 이와 더불어 또 발견한 사실은 내가 iPod을 조작함으로써 Track Skip 버튼을 막 눌러서 내가 원하는 곡을 틀으면 그 곡이 머리속에 쏙 들어오게 되어서 또 음악에 집중하게 되고 결국 졸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Shuffle 모드로 듣되 Track Skip 버튼은 절대 누르지 않고, 나오는 음악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iPod에 진짜 언제 들어도 듣고 싶은 음악만 담아야 한다 이 말이다.

전에 내가 쓴 글 중에 이런 게 있다. MP3의 음악이 내가 듣고 싶은 음악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그 음악은 나의 '첫번째 뇌 부분'을 자극하고, 그 음악에 집중하는 나는 졸게 된다. 하지만 나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음악이 들려오면 그 음악은 나의 '두번째 뇌 부분'을 자극하고, 그 음악은 배경음악 그 자체로 취급되어 나는 졸리지 않는다. .. 뭐 이렇게 말이다. 나는 이 글이 정말 과학적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내가 경험한 대로 쓴 글이라고만 안다.


음악을 마음 내키는 대로 골라 듣는 안 좋은 습관을 버리고 어떤 음악이든 가리지 않고 잘 듣는 태도를 가져야겠다. 그러면 MP3 플레이어를 들어도 잠이 안 올 것이다.

2005.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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