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는 날에는 내가 이 도시를 마스터했으니 두려울 게 없다는 느낌이 참 좋다. 더 관광을 하지 않아도 이 느낌이 남아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게다가 흐리고 춥던 키타큐슈 공항의 날씨는 내가 떠난다니까 맑아졌다.


흐리고 비오는 일본 도시 풍경에 프랑스 음악은 매우 잘 어울린다.


현지에 가서 더 좋은 옵션을 취함으로써 계획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13명-5명-2명-혼자. 혼자 있어도 우울해지지 않고 기분좋은 법을 배운다.


멜론을 틀면 카메라를 못쓴다. 따라서 카메라를 쓸 일이 없을 때 멜론을 듣는다.


우의는 절대로 우산을 대체할 수 없다.


여행중 음악 듣기는 시골 버스를 타면서 쓸쓸한 기분이 들때 그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혹은 이전의 행복한 기억을 회상하기 위해 필요하다. 도시에서는 퍼퓸, 시골에서는 99년의 음악이 역시 잘 어울렸다.


한 곳에 이틀을 초과하여 머무르면 권태기가 찾아온다. 그전에 박수칠 때 떠나라.


허브에서 지방도시로 가는건 인터넷으로 계획이 가능하나 지방도시에서 다른 지방도시로 가는건 현지 사정을 봐가며 그때 계획해야 한다.


잘때는 날이 풀린 날이어도 일단 겨울이면 다 춥다. 난방을 하거나 깔깔이를 입어야 한다.


겨울에는 점퍼 주머니가 있지만 여름에는 크로스백이 필요하다.


여행의 철학. 관객이 아닌 스탭처럼 즐긴다.


자투리시간에 구글 번역 켜고 가까운 미래에 할 말을 즐겨찾기로 미리 저장하고 학습한다. 여행 오기 전에 리스트를 만드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이렇게 그때그때 하기도 한다.


밥을 혼자 먹으면서 좋은 점은 이렇게 느낀 점을 글로 써서 정리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전대에 10000엔 넣은걸 모르고 돈 세보니 10000엔 부족해서 잠시 패닉. 안하던 짓 하지 말자. 준비할 때 미리 전대를 차보던가.


체인점 사이제리아는 충전을 안해줬다. 구내식당 느낌의 라멘집과 쇼후엔은 해줬다. 안에 손님이 적은 작은 규모의 장소에 가야 충전을 해준다. 아마도 직원의 책임성 때문인듯. 규모가 크면 도난의 확률도 높으니까. 

내가 밥먹고 충전하듯 나의 기계도 같이 충전한다.


일정이 탄탄한 것과 서두르는 것은 전혀 다르다. 탄탄한 일정이면서도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도시가 작아서 헤매도 안전. 하카타 텐진이라는 거대 허브가 있어 안전.


노자 사상. 관광지같지 않은 곳을 관광한다. 프리패스는 길을 헤매도 안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여행 초보의 안전한 보루.


길을 잘못 들었거나 헤매더라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면 모두 여행지. 처음이면서 이쁘면 무조건 촬영. 헤맨 곳이라도 처음이면서 이쁘면 무조건 여행 성공


카오산의 추운 아침은 공포감을 주지만 곧 용기를 내고 밖으로 나와 햇살과 공원을 찾아가는 순간 최고의 안도감이 찾아온다. 일본은 가장 먼 느낌과 가장 가까운 느낌을 양 극단으로 준다.


백열등이 땅에 있는 원룸 골목. 가로등이 아님으로써 분위기는 확 좋아진다. 한국의 자취방 하숙집이 배워야 함. 특히 벽에 장착한 백열등. 현관의 완전한 네모각짐도.


내게 여행은 공부. 포켓몬스터 같은 RPG게임.


니시테츠 버스에 대해 너무 모른 상태에서 온게 이번 여행의 실수.


버스 기다릴때 에버노트 쓰기


1시간에 한번씩 버스가 오는게 지방도시에서는 기본이므로 그러한 상황을 배경지식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카드결제는 엔을 달러로 결제하는 거라서 수수료가 붙어도 이익일 수 있다.


자동차 표지판에 .도 있다.


다음에는 기타를 연습해서 나카스 근처에 와서 공연하고 교류해야겠다. 그리고 여자친구와 수상버스.


버스 윗면에 버스번호


오클랜드의 그 나무냄새 풀냄새


버스에 회송이 있다


좌측우측통행 개념이 별로 없다


횡단보도가 끝나는 곳에는 경사진 홈이 있어서 빨리 달리면 덜컹한다


미투데이 갤러리 에는 자료가 계속 축적된다. 분류는 여행이 끝나고 나서.


여행 끝나고 앓아누워도 되니까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한국에서 사온 에너지드링크를 계속 마신다.


일단 공항 안에 들어오면 무지 덥다. 20도 이상이다. 그래서 바깥에서 입던 점퍼를 그대로 입고 있으면 무지 덥다. 공항패션이 5월 말 패션인 건 그 때문이다. 출발 층에서 탑승권을 발급받을 때 점퍼를 미리 벗어서 캐리어가방에 넣고 수하물로 부치자. 그 다음부터는 점퍼 없이 다닌다. 도착하는 공항이 아무리 추운 지역이다 하여도 모든 공항의 온도는 20도 이상이다. 그리고 수하물을 찾아간 뒤에 공항 밖을 나간다. 따라서 점퍼는 수하물을 찾아간 뒤 꺼내 입으면 된다.


대형 명찰을 메고 온 건 참 현명한 선택이다. 작은 크로스백을 안 가지고 오기로 마음먹은 내게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안에는 수하물 표(위탁수하물 찾을 때 필요한), 귀국 탑승권 발급을 위한 e-티켓 인쇄물(제주항공 직원이 대신 인쇄해줌), 여권, 출국 탑승권 4가지를 넣을 수 있었다.


샴푸를 빼먹었다. 굉장한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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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 겨울, 나는 아버지 친구의 소개를 받고 뉴질랜드로 2달간 혼자 단기 어학연수를 갔다왔다. 워낙 어렸고 정규 학교교육을 받기에는 기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나는 Shore English라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일주일에 5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이 있었고 영어뿐만 아니라 곁가지로 수학(고등학교 1학년 10-가 할때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도 하고 뉴질랜드 선생님과 Auckland Takapuna 주변 견학과 현장학습도 했다. Auckland 도심까지 학원 아저씨와 차를 타고 가서 볼링을 같이 치고 영화를 봤던 기억도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집은 아버지 친구네 집에서 홈스테이 식으로 했다. 아버지 친구분은 나만 있는 2층의 작은 방을 마련해주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Holden 회사 차 말고 작은 일본 차로(Honda였던 것 같다) 매일 나를 학원까지 데려다주셨다. 언덕 위의 주거단지 마을에 있는 5층짜리 별장처럼 생긴 하얀 집의 2층이었는데 그곳에서 학원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아버지 친구 아들은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고 Westlake Boys High School에 다니고 있었다. (옆에는 Westlake Girls High School이 있었는데, 이곳에 다니는 일본계 혼혈 애들이 진짜로 이뻤다!!) 뉴질랜드는 교육과정이 한국보다 전체적으로 1년씩 빨라서 high school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빠른 89였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성진이였고 성진이와 나는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온 다음에는 어머님의 저녁 준비를 도와드리고 저녁을 먹은 다음 같이 쇼핑몰로 놀러가거나 옆의 늪지대 있는 정돈되지 않은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거나 집앞 시멘트 바닥에서 Frisbee를 던지면서 놀곤 했다. 맞다, 글을 쓰면서 방금 또 생각난 건데 성진이 집에서 언덕 아래쪽에 있는 하얀 담을 넘어가면 잔디밭이 있는 영국계 내외분이 계신 집이 나왔다. 이 집은 크기는 작지만 마당이 넓어서 그 집 아들(8살 정도)과 같이 야구나 럭비를 하기도 했었다.

 사실 뉴질랜드에 갔다온 후 영어학원의 성적표와 팜플렛, Rotorua와 Taupo 관광지에서 성진이네 가족과 찍은 사진 몇 장만으로 두 달간의 기억을 갈무리한 나로서는 그 이후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다시 서울 학생의 생활에 젖어들어갔고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부담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은 그때는 별거 아닌 걸로 여겨졌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들은 음악이 지금 내가 듣는 Pop 음악의 근간을 만들었고, 그때 했던 운동 종목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 종목이 되었으며, 그때 영어로 입을 풀어놓은 게 나의 고등학교 1학년을 잘 넘기게 해준 든든한 지원이 되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나는 22살, 7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작년 겨울쯤에 갑자기 생각이 든 건 두 가지였다. 2003년 1월과 2월의 뉴질랜드 음악 차트를 보면 그때 내가 TV와 라디오와 거리에서 그렇게 많이도 들었던 좋아하는 Pop 음악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학원이 있던 Anzac Street를 이용해서 내가 두달 간 몸담았던 곳의 스트리트뷰를 볼 수 있겠다. 잠깐 번뜩하고 생각난 추억여행의 아이디어를 나는 다이어리에 적어놓았다. 그렇게 해놓고 언젠가는 추억을 다시 들추어 잊혀진 기억에 불을 지피자 생각했는데 그동안 또 나 자신을 여러 가지 일로 채찍질하고 쳇바퀴 굴리다보니 실천은 계속 뒤로 미루어졌다. 그런데 오늘, 하늘은 맑고 날씨는 덥고 나는 기분 좋게 혼자 아침을 보내며 느긋하게 쉬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딱 7년 전의 그 느낌이 개기일식을 하듯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구글을 띄우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new zealand 2003 january music chart"

제일 위에 바로 결과가 나왔다. .nz인 걸 보니 뉴질랜드 사이트다. 100%다. 이곳에 내가 듣던 음악이 모두 다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사실 몇달 전에 멜론 플레이어에 '2003 January Auckland'라는 마이앨범을 만들고 이 안에 내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중학생 때 들었던 음악을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 되살려서 집어넣어 놓았다. 7곡밖에 안 되었었다. 그런데 차트를 발견하고 2003년 1월과 2월의 주간 Top 50 Singles Chart를 하나씩 열어서 안에 있는 곡 제목을 하나씩 읽어보니 정말 놀랍게도 내가 7년동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Pop 음악의 선율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뉴질랜드 음악 차트 사이트 http://www.rianz.org.nz/rianz/chart.asp

 여기 있는 곡은 바로 Melon Player 안의 마이앨범에 등록을 해서 재생시켰다. 잊혀졌던 음악이 추억이 되어 돌아왔다. 내 품에 다시 돌아온 음악들은 나에게 최고의 편안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마치 7년동안 잊고 있었던 곡들을 다시 듣는 건 7년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똑같았다.

 그렇게 30여 곡을 모아서 마이앨범을 완성시켜 통째로 재생시켜 놓고 나는 구글 지도로 갔다.

"takapuna auckland"

지명을 쳤기 때문에 검색 결과 맨 위에는 지도가 나오게 된다. Takapuna 지역의 축소 지도가 나왔고 조금만 확대하니까 Anzac Street가 나왔다. (나는 그 많은 길들 중에 이 길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여행을 할 때에는 전체의 단 한 부분만 알면 나머지는 저절로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스트리트뷰로 Anzac Street를 쭉쭉 달렸다. 처음에는 roundabout(빙글빙글 도는 교차로. 영국령 국가의 한적한 지역에서 교차로 대신 있는 도로) 과 주변의 정리되지 않은 수풀만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거리 저 멀리 보이는 7층짜리 흰색 건물이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영어학원 간판을 찾아냈으며 학원 근처의 아담한 쇼핑몰 Westfield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던 해변의 버거킹과 fish & chips 가게, 버스를 타던 정류장도 보였다.


▲ Shore English를 구글 스트리트뷰로 찾아내었다

 분명 이 사진은 2010년에 찍은 거일텐데, Takapuna의 거리는 7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안 변해도 너무 안 변했다. 오히려 그러한 '정체된 도시'는 나의 추억여행의 방해요소를 전혀 남겨주지 않아 나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 지역은 내가 생각해도 발전이 필요 없다. 느린 삶의 템포를 가지고 바다와 함께하는 활동적인 삶. 서울에서 빡빡한 학생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 정도의 도시는 휴양지로서의 천국이지 절대 도시처럼 보이지 않는다. 방학때마다 가서 살다 오면 딱 좋은 그런 동네다. 그리고 마침 내가 이 곳에서 딱 두 달만 있다 왔다는 게 나는 정말로 감사하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공간을 초월한 접근성은 초고속으로, 그리고 매우 쉬운 방법으로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그리고 추억을 되살리는 여행에서 나는 모든 과정에 대해 온전한 통제를 할 수 있었고, 옛날의 기억과 다시 마주치는 일을 운명이나 우연에 맡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검색과 UI 상호작용이라는 아주 주체적인 과정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계속 바빠서 미루어 오곤 하고 할 기회가 생기면 까먹곤 했던 일을 해냈다. 뿌듯한 기분이 밀려온다.

ps 혹시 성진이가 이 글을 보면 이곳에 댓글이라도 달아줬으면 좋겠다. 그땐 너무 어려서 서로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집전화번호도 수첩에 적어오지 못했는데, 디카로 사진도 한 장 못 남겼는데 그게 너무나도 아쉽고 후회된다. 성진이는 뉴질랜드에 정착해서 살고 있을까? 아마 Auckland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facebook에서 나도 Westlake Boys High School로 검색해볼게. 혹시라도 한국에 왔으면 꼭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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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병 특기학교중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그곳 정보통신학교!! 
2009년 5월 15일부터 6월 16일까지 난 그곳에서 살았다.


 영국의 조용한 교외를 연상하게 하는 진주의 흐리고 쌀쌀한 기후와,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평지, 그리고 진록색의 곧게 뻗은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의 각진 행렬, 군부대가 갖는 음침하고도 장엄한 풍경의 분위기.

 그 고요한 땅 한 구석에 사립 기숙사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과 걸어서 5분 거리의 아담한 4층짜리 교육장 두세 동 그리고 언덕을 올라가야만 보이는 단층의 조촐한 식당.

 ㅁ(미음)자로 마치 정원과도 같은 평온한 잔디밭을 에워싸고 있는 건물 그리고 친근하며 소박한 느낌을 선사해주는 하얀 색의 울타리, 정원 가운데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그림같은 벤치, 자갈밭과 천막이 쳐진 구석의 흡연장과 생활관 옆의 잡동사니 기구들을 보관해놓은 창고. 생활관을 삼면에서 안아주고 있는 산과 숲의 울창함 그리고 그 사이로 청아하게 들려오는 도심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낯선 새소리, 그리고 정문에서 길고 곧게 뻗은 이차선 도로.

 생활관 안의 200명의 젊은 청년들과 그 비슷한 또래의 4명의 훈육조교 그리고 사감선생님같은 간부들과 편한 옷차림 속에 계급과 권위를 숨긴 대대장. 100명의 선임과 100명의 후임이 서로의 삶을 간섭하지 않으며 질서 있게 조직을 갖추어 살아가는 모습.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내무실과 낮은 천장, 아침의 안개와 찬 공기를 생생히 들이마실 수 있는 낮고 큰 창문, 실내에 갇혀있는 느낌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안락함을 만끽하게 해주는 실외 계단, 유일하게 바깥 세상과 통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더욱 소중했던 8대의 하얀색 공중전화기와 학생들의 젊은 감성에 맞추어주는 아량의 상징과도 같았던 '사랑의 감동폰'(문자메시지)서비스. 80바이트를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공책 찢은 종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세심한 글귀를 못생긴 손글씨로 적어나갔더랬다.

 동기들을 위해주는 착한 마음으로 자진해서 일하는 근무자들, 우리가 '대대'라고 불렀던 3명의 친구들은 정말 다른 97명의 사람들과 사회에 있을 때의 가면과 명찰을 다 떼어버리고 동기로서, 똑같은 순수한 사람으로서 친하게 지냈다.

 선임 기수는 후임 기수 앞에서 모범을 보이자 다짐하고, 후임 기수는 선임 기수 앞에서 부끄럽지 않자는 결의를 하루에 세 번씩은 꼭 했더랬다.

 아침에 안개를 마시며 혹은 햇살을 쬐며 기상할 때 이곳 정보통신학교는 절대 사람들에게 불쾌한 긴장감이나 강요를 유발하지 않았다. 갓 훈련단을 마친 우리의 먹을거리라고는 훈련단 때 먹고 남은 레모나, 레모비타, 생강차가 전부였지. 심지어 단 한번 뿐인 공동구매 때도 구입이 가능한 건 이것들 뿐이었으니까. 과자는 종봉(종교봉사) 가서 배터지게 열심히 먹었던 오예스<초코파이<가나파이<몽쉘, 써니텐, 짱구 정도가 전부. BX는 꿈도 못 꾸었지. 수료차 때 각 과정별 대표자 1명이 가서 더플백에 과자를 넣어온 게 전부여서 아쉬웠어. 간혹 내 친구들 중에는 종교타운에 가서 과자를 전투복 안에 갑옷처럼 두르고 온 친구들도 있었어. 그들은 친구들을 먹여살리는 영웅이었고 따라서 존경의 대상이었지.

 난 프로젝트팀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지만 안 시켜주더군. 학과 빼먹고 가점 받고 중위, 대위 분들과 같이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개발하고 디자인하는 게 너무나도 하고 싶었는데 결국 못해서 난 대신 정보통신학교 홍보동영상을 UCC로 만들게 되었지. 훈육중대장님께서 우리 UCC팀에게 과자를 꽤나 많이 주셨는데, 수료차 때 먹기로 약속한 족발은 결국 허사였어. 그대신 진주에서 파는 동네피자 한판은 먹어봤지. 특기학교 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맛있는 치킨집과 피자집의 스티커가 내무실 안에 잘 찾아보면 붙어 있었어. 하루 있는 병사의 날 때는 위닝 대회, 족구, 농구, 축구, 계주, 영화, 그리고 저녁에 자습용 책상을 가운데에 모으고 먹었던 치킨과 피자가 기억나.

 공대같은 분위기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는 친근하고 희극적인 공간. 이곳의 그런 분위기를 강화시켜주었던 건 바로 TS(Tape Show)라는 저녁음악방송 DJ 프로그램이었어. 난 이게 너무 좋았는데...


  이제 우리 부대 안에서도 어느 정도 짬이 차고 조금은 편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이곳이 눈치를 보며 난관을 하나씩 헤쳐나가야 하는 준(準)사회임은 분명해. 그때마다 나는 가난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시절의 유토피아였던 그곳을 떠올리곤 하지. 한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때처럼 고요함 속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마치 수도원처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기회는 더이상 내게는 오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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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동아리 공연 합니다아~~

서울 사시는 분들 많이많이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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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So What 게시판에 올린 후기.


 안녕하세요 욱입니다. 이번 뮤캠 아주 성공적으로 잘 끝났습니다. 별 탈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역시 우리 동아리는 한다 하면 하는 동아리인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 뮤캠때 고등학교에서 하는 알바 때문에 쇼케이스 바로 직전에 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땐 정말로 아쉬웠어요. 멋진 영화를 처음부터 보지 않고 절정부터 보아서 그 감동이 덜해진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전일 참가 고고씽 했지요. 크크



 우선 서울에서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무지~하게 먼 이곳 '누나 펜션'으로 모든 쏘왓 멤버들을 데리고 온 광표와 두혁이한테 크나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사전답사도 갔다오고, 지식iN에서 낚시성 글로 한방 맞은 후 현장 표지판에서 직접 시간표를 적어오기까지 하는 노력을 보여준 두 친구, 너네가 진짜 멋있는 놈들이야.


  아무튼 화창하고 따뜻한 아침 동방에서 몇 안되는 사람들이었지만 모여서 짐은 용달차에 부치고 가벼운 몸으로 전철과 버스를 무지하게 갈아탔습니다. 덕소의 문호리에 온 다음부터는 버스 간격이 40분, 50분 막 이래서 과연 잘 갈 수 있을까 내심 걱정도 많이 했는데, 나름 재빠른 울 광표 군의 활약으로 13명은 무사히 누나 펜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첫날 아쉬웠던 점이 한가지 있다면 사람이 너무 적어서 첫날부터 하기로 계획했던 프로그램을 모두 금요일로 미루고 목요일과 금요일의 일부 프로그램은 아예 무산시켜버린 점. 이번 뮤캠을 통해 전일 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겠더라구요. 뮤캠의 시작과 끝부분에 우뚝 서서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차려놓은 밥상에서 먹고 즐기기는 쉽지만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은 힘든 것처럼, 뮤캠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가까이 와닿았습니다. 다 올수는 없어도 첫날에 사람들이 많이 오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뮤캠의 일정과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고, 결국 모두가 더 즐거운 뮤캠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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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첫날 밤에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얘기하고 노는 재미로 지냈습니다. 한철이형을 중심으로 한 토크쇼 굳이에요 굳~~ 널럴한 시간표를 쓱싹쓱싹 그려서 붙여놓은 다음 느긋한 마음을 가지며 꼭 재즈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참 즐거웠습니다. MT처럼 게임이나 술 마셔라 위주가 아닌, 마치 친척 식구들 모두 모인 자리처럼 편안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둘째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프로그램. 전 감모 시간이 개인적으로 재미있었어요. 소설 쓰는 산체스형과 함께 저는 광고 콘티를 썼습니다. 하나의 음악에 대한 감상과 표현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비슷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고, 그 부분에 집중하며 모든 세션이 음악을 연주하면 곡의 분명한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곰형의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식도 맛없는 건 하나도 없고 어찌 그리 다들 잘 만드시는지.. (떡만두국은 단연 돋보였지요) 일하는 팀 정해놓고 역할 분배가 제대로 되어서 모두들 참 기분 좋게 놀고 먹고 할 수 있었지요. 역시 최고의 행사는 최고의 기획으로부터 나온다는.. 그래서 기획회의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봤습니다.


근데 솔직히 요리 하는건 좋은데 밥을 다 만들고 나면 싱크대가 완전 전쟁터더라. ㅎㅎㅎ 우리 모두! 배고파서 열정적으로 요리하는 건 좋지만 흥분하지는 말아요. 허허 (부족한 요리 실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둘째날 밤부터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고 그때부터 뮤캠 분위기가 제대로 났지요. 준형이형 주위에 쪼르르 앉은 통기타 노래방 손님들도 첫날보다 배로 늘어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ㅎㅎ (준형이형 왼손가락 안 아프세요?) 역시 이런 자리에 노래는 빠질 수 없는거고 재즈동아리라고 재즈만 할 (스튜디오에서 잼) 필요도 없는거 같아요. 그리고 시카가 말했던 것처럼 간지 솔로 인터플레이 이런거 필요 없고 기타 반주에 가요 잘 부르면 그걸로 굳 이라는 생각도 문득 드는군요.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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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에는 가장 인상깊었던 울 민혁 형님의 'Adorno의 Jazz 비판에 대한 고찰' 캬~ 이거 정말 학문적인 토론이었어요. 역시 형이에요. 하지만 그때 제가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사람들 표정이 다들 졸려하는 표정이더라구요. ㅎㅎㅎ 곧 올리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형이 주신 연정 슬리퍼 잃어버렸는데 면목없습니다. ㅠㅠ


  그리고 재즈사와 화성학. 아 정말 최고의 강의였습니다. 두혁이 정말 미래가 밝다. 재즈사 할 때 조교밴드 만들어서 강의와 함께 음악을 병행해서 라이브로 들려주는 방법은 참 흥미롭고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주하형의 화성학. 이걸로 체계적인 이론보다는 직관을 중심으로 화성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이해 안되는 부분도 형이 기타 한번 쫙 들려주신 다음에는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하고 이해가 되고.. 아무튼 흥미로운 명강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뮤직캠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감모, 화성학, 재즈사 같은 프로그램의 기획력인 것 같아요. 전반적인 생활에 관한 기획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전자가 얼마나 치밀한가에 따라 사람들이 이 뮤캠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지가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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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케이스도 간지 좔좔~ 이었습니다. 성은이 베이스 킹왕짱 잘하더구나. 융형은 나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지. 크크크 그 외에도 멋진 7.5기 분들의 활약 덕에 셋째날 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정작 저는 쇼케이스때 이렇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했나 하는 뒤늦은 후회 혹은 의구심이 들기도 하구요.

 그리고 댄스타임. 완전 방음 시설 구조의 스튜디오에 40명이 들어차서 날뛰니 덥기도 더웠지만 그만큼 열정적이었습니다. 이번엔 불을 누가 껐나?

 댄스타임 때 기억나는 사람은 요시형, 주영누나, 송희, 주영이, 그리고 재경이형. 크크크크크 댄스 끝나고 저는 재경이형 올빽 머리를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성은, 민지, 민경, 민정 이쪽 라인도 귀엽게 모여서 춤추는 모습 보고 기뻤어요. 이런 순간이 자주 오는 게 아니죠. 홍대에 M2 가도 못 느끼는 무언가 가족적이면서 끈끈하고, 그리고 멋을 내기보다는 즐기는데 충실한 모습..


  스튜디오와 집을 왔다갔다할 때 추운 거는 뭐 문제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슬리퍼가 있으면 참 유용했지요. 나중에는 겨울 뮤캠 때마다 모두들 따뜻한 슬리퍼를 챙겨오시면 좋을듯. 수면양말을 신고 다니는 방법도 있겠지요.


  셋째날 밤도 그렇게 지나가고, 쏘왓에서 잘 안 한다는 게임도 즐겁게 하고, (게임 2시간 한 다음 주하형이 계단 손잡이 타고 뛰어넘어가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야마카시' 같았어요.) 무언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느낌이 드는 새터와는 달리 편안했어요. 전체적으로 저는 정말로 하루에 5시간밖에 안 잤는데도 몸이 쌩쌩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해요. 재밌는 거 없을까 하는 들뜬 마음으로 잼 하러 갔다가 밥 먹으러 갔다가... 힘든 건 전혀 없고 재미만 가득했습니다. 셋째날 밤에는 한번도 안 자고 밤을 샌 다음 다음날 7시까지 버텼는데, 그렇게 오래 버틴 건 이번이 첫번째 경험이에요. 집에 갈 때에도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뮤캠에는 정말이지 '님 좀 짱인듯'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치밀한 기획, 편안한 분위기, 재즈와 대화 이 둘에 깊게 빠져드는 사람들... 무리하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았던 이번 뮤직 캠프는 저에게 있어 최고의 기억이 될 것 같아요. So What 화이팅이구요 사랑합니다. 동아리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 사진 올려놓고 보니 지상이형 종엽이형 요시형은 두번 나왔네 ㅋㅋ 지상형 군대 잘갔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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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동아리 So What에 들어오고 드럼을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드럼을 어떻게 잘 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어보았고, 드럼을 같이 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 사귀었다. 우리 드럼라인의 맏형인 종엽이형, 설계를 비롯하여 전공수업이 힘든데도 누구보다 열심히 드럼을 연습하여 '칼박'의 제왕이 된 재경이형, 같은 89라서 마음이 잘 맞는 광표..

  드럼이 두드리기만 하는 단순한 악기여서일까, 드럼을 치는 나로서는 이 단순하게 보이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각종 생각에 사로잡힌다.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 특히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 등지에 있는 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단순한 일의 반복을 일상 속에 깊이 자리잡는 경우가 많은데, 나의 경우도 단순한 드럼 두드리기가 일상의 큰 부분으로 자리잡아서 잡념이 사라지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금방 알아챈다. 그리고 내가 이 드럼이라는 악기를 자신감 있게 치고 있는지는 나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가는 나 또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무기력한 채 드럼을 치다가 내 안의 부족한 자신감을 다시 채우려고 하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드럼이든 공부든 사회생활이든 모두 일을 처음 시작할 때에 자신감을 갖지 않으면 중도에 자신감을 회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이탈리아의 아마추어 호르니스트 Giovanni Hoffer라는 분의 '7:30 PM' 을 연주했다. YouTube에 올라온 동영상에 첫눈에 반하여 이 곡을 연주하겠다고 대뜸 지원했다. 하지만 매우 복잡하고 생소한 라틴 리듬이 참 어려웠고, 나는 그동안 연주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라틴 리듬을 기피해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연주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과 고민을 많이 했다. 나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아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무너진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이 곡의 드럼 패턴을 모두 채보한 뒤 거의 원곡을 카피하는 식으로 연습을 했다. 두혁이와 헌광이 그리고 준렬이형과 같이 맞추면서 합주를 할 때에도 처음에 자신감이 없던 나는 악보를 베이스드럼 위에 올려놓고 악보를 보면서 드럼을 쳤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로 눈앞에 악보가 있으니 악보가 득이 되면 되었지 절대로 해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드럼을 치는 나에게는 이 악보는 커다란 해가 되었다.


  악보에 매달려 나의 느긋한 자세와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마음가짐이 퇴색되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음악의 흐름에 맞게 내 마음이 자연스레 가는 대로, 내가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노트들을 찍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그린 악보가 나에게 명령을 하면 나는 그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내가 풀어놓은 밧줄에 내가 묶인 것이다.


  드럼을 칠 때의 마음가짐은 나의 성향과 본능을 존중하고 내 안의 흐름을 살려 나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자신감이다. 얼마 전에 우리 동아리의 큰형인 종범이형(01학번)이 나의 드럼 치는 모습을 보고 '동욱아, 조금 더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이 드럼을 지배한다, 라는 거만한 생각을 가져봐. 그리고 몸에 힘 빼고' 라는 조언을 해주신 적이 있다. 그 조언을 들은 뒤 잠깐 동안 내 연주가 멋지게 고조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나는 악보를 만들고 그 패턴을 학습함으로써 조금 더 다양한 연주를 표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다른 연주자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키웠고, 결국 점점 나의 연주는 자신감을 잃게 되고 스트로크에는 힘이 빠졌으며 그에 따라 박자도 흔들렸다. 차라리 패턴은 다양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트로크도 깔끔하게 하고 박자도 맞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공연이 끝나고 신촌으로 향하는 171번 버스를 타면서 나의 모습을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느낀 점은 내가 신나면 신날수록 연주의 질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자신감이 가지면 신날 수밖에 없다. 아무한테도 간섭받지 않고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내 스타일대로 악기를 만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항상 이 점을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연주를 계속해야겠다고 나는 마음 속 깊이 다짐을 각인시켰다.


* 구성을 정하고 서로 약속을 하고 믿음을 바탕으로 연주하여 음악 중간에 같이 시작하고 같이 끝내는 것은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멤버들이 더욱 친해지게 한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돋보였던 곡인 Autumn Leaves가 바로 그런 곡이었다. 7:30 PM도 모든 세션들이 동시에 음악을 끊음으로써 임팩트를 선사했다. 내년 재즈바 때에도 임팩트 있는 곡들을 많이 연주하면서 우리들과 관객들 모두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


2007.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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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진로간담회는 나에게 많은 자신감과 안도감을 심어주었다. 외무고시라는 아직은 막연한 시험, 그리고 외무고시 합격한 외교통상부 직원이라는 만나보지 못한 낯선 사람을 오늘 직접 대면하였기 때문이다. 94학번인 김동준 사무관은 우리 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여 4년간 공부한 뒤 외무고시에 합격하였다. 간략한 자기 소개와 함께 이어진 두서 없는 간담회는 준비성의 부족으로 학생들의 반감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과 선배 아저씨의 딱딱하지 않은 간담회의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진로간담회는 대학생들에게 정보와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는 참 좋은 학부대학 주최의 행사이다.

  사무관 아저씨의 약 40분에 걸친 경험담과 조언이 끝나고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이렇게 가장 먼저 질문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나는 평소에 이 점이 가장 궁금했다. '외무고시 외에도 외교통상부 특별전형이 있는데, 이 특별전형으로 합격한 사람은 외무고시 합격자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직급 상승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오늘 내가 이 점에 대해 질문한 결과 선배님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아직은 고시가 외교부에 들어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외교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는 앞으로 공무원 채용 방법을 더욱 다양화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특별전형도 참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채용을 위해 특정 분야나 지역에 대해 공부를 하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도 했는데, 외무고시 말고 외교통상부 특별전형의 경우 전형이 매우 다양해서 자기에게 맞는 전형을 찾아 오면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믿을 수 있는 수준에서 말한 그 신중한 답변은 프랑스어를 계속 하면서 앞으로 네덜란드어와 체코어로 멋지게 단장하고픈 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설레게 했다.


 사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고시원으로 들어가 수능과도 같은 그런 공부를 반복하면서 고시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다. 공무원 채용 시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완벽한 객관성을 추구하다 보니 그러한 문제내기식 스타일을 고집할 수밖에 없지만, 난 정말이지 그러한 문제 유형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수능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다시 떠올린다면 외무고시는 아직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나의 막연한 거부감은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외무고시도 참 할 만한 시험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선배님의 조언 중 기억나는 것은 신문 기사를 읽는 방법에 관한 한마디였다. 면접 질문에 답하기 위한 생각에 관련하여 신문 기사를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질문을 품고 글을 읽으면, 신문을 통해 사실을 습득하자마자 나는 사실의 조각들을 뒤섞어 의견을 만들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읽어보자' 라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글을 읽으면 말 그대로 오늘 신문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만 기계적으로 외우고 만다. 평소에 내가 신문 기사를 읽는 방법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외교관, 아직 그 꿈은 버릴 수 없다. 오늘 간담회를 하신 선배님 또한 어렸을 적에 외교관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초등학교 발표 시간에 손을 들며 큰 소리로 외치셨다던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렸을 적의 내가 생각났다. 7살 때 아빠가 항상 '넌 외교관 타입이다' 라고 다독여주시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어본다.


2007.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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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콜곡 I Feel Good (James Brown)


연세춘추 2007년 11월 12일 - 양아름 기자


학내공연동행기- 'So What', 재즈로 호흡하다

  지난 9일 백주년 기념관 콘서트홀에서 열린 '쏘왓'의 정기공연. 재즈하면 무엇이 생각나느냐는 사회자의 물음에 "쏘~왓"이라는 관중의 익살스런 대답이 이어졌다. 이렇듯 공연은 관중과 공연가 간의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런 모습을 보며 성균관대학교 재즈동아리 '그루브'의 부회장 이혜선씨는 "왜 저렇게 잘하냐"며 애교 섞인 시샘을 표했다. 관중들의 박수는 음악에 따라 강약과 빠르기를 달리했고 적절한 순간에 환호성이 터졌다. 박수소리만 녹음해도 음악이 완성될 정도로 관객들도 공연가들과 함께 재즈를 연주했다.

  재즈라면 완벽해 보이는 이들도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았다. 쏘왓의 무대는 빡빡하고 고된 연습을 통해 완성된다. 쏘왓의 동아리방 이웃사촌인 무선통신 동아리 '야라'의 최훈(화공,06)씨는 "밤낮 가리지 않고 연습하는 것 같다"며 혀를 내두른다. 이번 공연을 위해서는 매주 두 번 저녁에 모여 많은 악기들로 구성된 팀인 빅밴드 공연을 연습했다. 3~8명의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캄보팀들은 개인적으로 시간을 맞춰 홍익대 앞 연습실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김현수(전기전자,06)씨는 "12시에 모여서 새벽까지 연습하고 귀가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같은 곡이라도 공연가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 재즈의 매력이다. 그래서 쏘왓 동아리원들은 본격적인 연습에 앞서 곡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의논한다. 이렇게 전체적인 방향을 잡고 나서는 악기는 악기대로, 보컬은 보컬대로 자유롭게 자신의 느낌을 가미한다. 이때 어떤 사람들과, 어떤 공간에서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음악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들도 고려한다.

  자유로운 음악표현과는 달리 연습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재즈는 다른 음악과 달리 악기들이 서로 다투지 않으며 개성을 드러낸다. 색소폰이 독주를 하다가도 더블 베이스가 솔로로 나서고 이어 전체 악기가 화음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항상 자신만이 두드러질 수 없는 인생처럼, 솔로 연주와 합주가 번갈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악기의 연습이 끝나길 기다려 연습할 때가 많다. 가끔은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쏘왓 동아리원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나이나 학번에 따라 격식을 따지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기다려준다.

  쏘왓의 연습은 학기 중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방학 때는 동아리원이 모두 '뮤직캠프'를 다녀온다. "연주만 하러 온 사람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반긴다"는 김현수씨의 말처럼 뮤직캠프는 동아리원의 친목도모를 위한 성격이 강하다. 이번 해에는 경기도 용평에서 3박 4일 합숙을 했다. 뮤직캠프에서는 재즈의 역사나 재즈 이론에 관해 배우고 마지막 날에는 직접 재즈 연주를 한다. 이때가 신입생에게는 처음 공연할 수 있는 기회다. 뮤직캠프에 참가했던 신예리(사회과학계열,07)씨는 "뮤직캠프 동안 속세를 떠난 기분이었다"며 그 시간이 천국같았다고 말한다. 공부나 일상 속 고민을 떠나 재즈만 생각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렇듯 열심히 연습하는 쏘왓 동아리원들이지만 이들은 매주 한 번 재즈를 감상하는 모임도 가진다. 쏘왓은 재즈 연주를 잘하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또 정기공연을 다채롭게 꾸미기 위해서 퍼포먼스도 준비한다. 정기공연에서는 『물랑루즈』의 영화음악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s」에 퍼포먼스를 곁들였다. 남자가 여자에게 꽃과 편지를 전해주지만 여자는 요염하게 거절한다. 그러다가 결국 남자가 선물하는 반지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퍼포먼스를 보고 관객들의 환호성은 절정에 달했다.

  쏘왓의 1년 중 가장 큰 공연인 콘서트가 끝났다. 신들린 피아노 연주라는 찬사를 받았던 고두혁(전기전자,07)씨는 "연습이 끝나서 후련하다"면서 "다른 동아리원들이 연주하는 곡을 듣는 것도 재밌었다"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공연이 무르익을수록 자리가 더 채워져가는 콘서트홀을 보며 재즈로 진정 호흡하고 있는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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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연고전(고연전)이 어제 첫 경기를 시작했다. 잠실을 가득 메운 푸른 물결과 붉은 물결, 이 두 물결은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장관을 보여주었다. 예전에 신문이나 연세대학교 잡지 등에서 보아왔던 연고전의 풍경들이 바로 내 눈앞에 벌어지는 것을 보고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귀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응원가, 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고함치는 대규모의 학생 관중들, 경기의 긴박감에 온 정신을 집중한 표정, 주위의 친구들과 함께 맞추어 흔드는 손과 어깨와 몸, 모두가 귀로 눈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1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잠실야구장이 있다. 오늘 나는 그곳에서 동아리 사람들을 기다렸다. 주위에는 연대 사람들보다 고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다니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더욱 신선했고, 그 때문인지 고대 여자 아이들이 연대 친구들보다 더 이뻐 보이기도 했다. 내가 고대 학생들의 모습에서 참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너무 집단주의적이지 않은 기분좋은 단합이다. 파란색만을 유일한 공통 코드로 삼고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여 다양한 스타일을 걸치고 등장하는 연대 학생들과는 달리, 고대 학생들은 모두가 똑같은 크림슨 레드의 반팔 티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연대의 옷 색깔은 크게 3가지로 나뉘었다. 하늘색, 파란색, 남색, 이렇게 3가지로 나뉘었지만 고대의 경우 거의 모두가 크림슨 레드였고 극소수만 새빨간 티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반이나 과별로 디자인한 티셔츠의 경우라도 색깔과 도안이 차분하게 통일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연세대도 반이나 과 티 디자인을 할 때 '크림슨 레드'처럼 조금 더 구체적인 색깔을 정하여 통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 선교사가 세운 학교와 대한민국 민족 지도자가 세운 학교, 따라서 개인주의가 강한 학교와 집단주의가 강한 학교 사이의 차이는 아직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다.

 

2

오늘 경기는 3개, 야구와 농구와 아이스하키였다. 잠실에서 했던 종목은 이중 야구와 농구였고, 아이스하키는 목동에서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쉽지만 연대가 야구와 농구에서 모두 졌다. 나는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농구 경기만 보았는데, 농구 경기는 고대의 센터와 외곽 슈터의 맹활약으로 고대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 팀은 초반에 너무 방심해서 고대와 14점 차이를 만들었다. 그 차이는 3쿼터 중반에 7점 차이까지 좁혀졌으나 결국 4쿼터에는 15점 차이로 다시 벌어졌다. 초반에 방심을 한 팀이 거의 지게 된다.

고대의 경우 크게 두 가지 전술을 4쿼터 내내 일관성 있게 유지했다. 공격을 할 때에는 선수 3명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서 그 3명끼리 빠른 패스를 했다. 패스를 받은 사람은 안정된 자세로 3점 슛을 했고 따라서 정확도가 높은 슛은 득점으로 이어졌다. 반면 우리 연대 선수들은 3점 슛을 하기 전에 자세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정확성이 조금 더 좋았다면 우리 연대도 충분히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농구 3쿼터 중반에서 점수차가 7점 차이까지 좁혀졌을 때 연대는 정말 열심히 '해야'와 '아리요'를 외쳤다. 그 전까지는 잇따른 선수들의 슛 실수로 관중들도 지치고 앞의 응원단도 지쳐 있었지만, 점수차가 점점 좁아지고 빠른 팀워크에 의한 멋진 슛이 잇따라 연대에서 터지면서 관중들은 다시 우르르 일어섰다. 연대 응원가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서운 맛이 없다고 흔히들 연대생들이 불만을 표시하는데, 나는 이번에 연대 응원가가 가진 독특한 카리스마가 무엇인지 느꼈다. 고대는 동작이 단순하고 소리 지르는 부분이 많아서 상대편을 압도하기가 참 편하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면 상대편이 그 응원에 익숙해진다. 우리 연대의 응원 동작은 매우 복잡하다. 정말 별의별 동작을 다 만들고 '응아일체'의 경우 관중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돌림노래 형식을 취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동작들은 복잡하면 할수록 하나같이 더욱 더 귀여워진다. 개인적으로 상대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즐거운 귀여운 동작보다는 조금은 단순하더라도 힘찬 동작이 더 좋은 듯하다. '해야'와 '아리요'는 바로 그 동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 농구 이후로 그 두 곡이 무지무지 좋아졌다.

 

4

오늘은 연고전 둘째 날이다. 2승하자.


2007.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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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나와 효섭이형과 창우형은 신촌의 고기집에서 푸짐하게 한 사람 당 5900원으로 마음껏 배를 채웠다. 1학기가 끝나고 이제 일상의 굴레에서 잠시 삐져나와도 주위에서 뭐라 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대가 왔다. 곧 장마가 시작됨을 하늘도 알려주려는지 오후 6시부터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비, 의자에 마주하고 앉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걸어가면서 팔짱을 끼는 연인들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땅에 살포시 내려앉는 그 비는 저쪽 거리에서 조용히 우리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사실 나는 지난 1학기 동안 형들 혹은 친구들과 서너명이 함께 고기집에서 저녁과 술 한잔을 함께 했던 경험이 없었다. 초밥 가게와 서양식 레스토랑 같은 정돈된 곳에서만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을 뿐이었다. 깔끔함을 좋아하는 나의 위상을 떨쳐버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지난 한 학기동안에는 꼭 그런 깨끗한 곳만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제 밤 나에게 '비오는 날의 고기집'은 새로운 분위기를 선사해주었다. 나를 쉽게 놓아주고 내 자신이 쉽게 풀어질 수 있는 분위기, 남자들만의 솔직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수 있는 분위기 말이다. 같은 신촌이라는 공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 기분이 들어 속으로 기분이 참 좋았다.


  고기집을 나와서 우리 셋과 지난 어울림 회장이었던 오혁이형 이렇게 넷은 먹자골목의 끝, 약간은 어둡고 쓸쓸한 그곳으로 걸어갔다. 나트륨등 아래의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활기찬 공간에서 빠져나와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떠드는 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우리 넷은 자동차가 비를 뚫고 분주히 움직이는 굴다리 밑을 지났다.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들도 이렇게 도시에서 조금은 구석진 곳을 걸어다니며 속으로 깊은 생각을 하며 거리의 아름다움에 취했을 것이다. 긴 통로를 빠져나와 우리는 이번 9월 일일호프를 열 장소인 NOVA라는 주점에 들어갔다. 파리의 작은 호텔에 나만의 작은 짐을 풀어놓고 늦은 밤 혼자서 커피를 마시러 골목길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도 서울과 파리는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저 멀리 흰색 간판이 보이는 그 순간 신촌 구석진 곳의 한 컷짜리 풍경은 지난 파리 여행에서 담아온 풍경에 겹쳐져 더욱 나를 아련하게 했다.


  NOVA는 매우 은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위치도 별의별 사람들 가리지 않고 환영의 메시지를 던지는 요란한 신촌 한복판이 아니라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 지역이었다. 아는 사람들만 끼리끼리 찾아와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기쁜 일과 푸하하 웃을 일과 힘든 일을 적당히 섞어 이야기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지금 말하기 정말 이상하지만, 처음에는 'NOVA'라는 가게 이름에 초신성 폭발(supernova)을 생각했다. 자미로콰이의 음악이 갖는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지는 투명한 플라스틱 벽과 요란한 네온싸인, 그러면서도 그리 요란하지는 않은 음악이 이곳 NOVA에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긴 파리에도 이런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곳 NOVA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추측은 완전히 뒤집혔다. 네온과 아르곤이 들어간 형광등이 줄지어 늘어설 줄 알았던 천장과 벽에는 은은한 노란 색 백열등이 가리워져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바닥과 벽과 천장은 나무로 되어 있어서 삶의 슬픔이 담긴 음악도 부드럽게 공간에 채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점의 크기는 학생회관의 푸른샘보다 약간 작아서, 보통 우리들이 스타벅스나 할리스 커피같은 곳에 갔을 때 느끼는 크기와 비슷했다. 나는 내부를 들여다보며 이정도 크기면 조금 더 이상적으로 아담하고 조금 더 인간적이고 조금 더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에 안았다.


  우리들은 깔루아 밀크와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 칵테일 종류가 다양하고 남자들을 위한 양주도 있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이 왔을 때 성숙하게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일 것 같다. 확실히 MT와 새터같은 행사에 사람들과 처음으로 안면을 트기 위해 마시는 맥주와 소주와는 다른 술이 그에 걸맞게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주점 누나는 주로 한국 노래 중에 통기타가 들어간 곡을 틀었는데, 70년대의 남자 둘이서 느끼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아닌 조금 더 비트가 살아있는 곡을 틀었다. 그중 '살다보면'이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 넷은 '아, 이 노래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하고 느꼈다. 하지만 꼭 한국 노래가 아니어도 외국 노래 중에서도 사람의 슬픔과 그리움과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우는 마음' 등을 표현하는 노래가 있다면 그것도 잘 어울릴 듯싶다.


  주점의 가운데에는 네모난 바와 의자가, 바 안에는 커즈와일 PC88 스테이지 피아노와 통기타가 놓여있었다. 보컬과 키보드가 이곳 안으로 들어가 앉아 음악을 만들며 바에 앉은 사람과 눈으로 말로 소통할 것이다. 저편에는 전자드럼이 있었다. 나는 주점 누나에게 가서 드럼을 잠깐 쳐보겠다고 한 뒤 전자드럼의 성격을 알아보았다. 라이드 벨이 안 된다는 점만 빼고는 모든 것이 어쿠스틱 드럼과 똑같았다. 크래시는 하나였고 스네어는 그리 크지 않아서 림샷을 할 때에 조금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스네어 테두리를 때리면 림샷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내가 어울림 22기 기장을 맡았으므로 세세한 면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칵테일을 홀짝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형이랑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다시 칵테일을 마시고 이쪽 저쪽을 살펴보았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자 효섭이형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 일일호프는 확실히 대동제의 공연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약 4시간 동안 충분히 우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팀 구성원들 간의 우정을 확인하자는 제안이었다. 즉 음악을 남들을 위해 들려주는 것을 뛰어넘어 곡 사이사이에 멤버들이 마이크를 잡고 길게 말도 하고, 우리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유머와 이벤트도 선사해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가만히 생각을 해본 결과 곡과 곡 사이에 3분 정도 어울림 멤버 중 한 사람이 말을 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다음 들려줄 곡에 대한 소개, 그 곡을 선정한 이유, 곡을 연습하면서 멤버들과 있었던 에피소드와 같은 말로 사람들의 눈과 멤버들의 눈이 서로 오가고 마주치고, 같이 웃고 기뻐하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곧 나른함에 잠겼다. 정말 편했다. 교수님이나 사과대 선배들 앞에서 내가 가졌던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단지 내 마음은 밖에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 함께 촉촉히 젖을 뿐이었다. 셋이 이야기를 한참 나누면서 우리들의 목소리는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끔 대화가 끊겨 침묵을 했지만 그 침묵 마저 달콤했다. 이곳에 와서 어울림의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조용하고 진솔한 대화의 그 활기와 침묵하여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는 달콤함을 함께 즐기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특히 연인들끼리, 정말 친한 친구들끼리 와서 테이블 하나씩 맡고 칵테일 한 잔씩 마신다면 그들을 위한 이벤트도 다양하고 풍성할 것이다.


  오혁이형이 먼저 가시고 10분 뒤 우리들도 주점에서 나왔다. 거리에는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걷지 않았다. 차도에서 발광어류들이 군집이동을 할 뿐이었다. 밤 10시 쯤이었는데, 나에게는 그 순간이 늦은 밤 12시처럼 아늑했다. 정말이지 이번 일일호프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조용하고 진솔해볼 기회를 찾아다녔던 사람에게 고마운 오아시스가 될 것만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연습인가,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효섭이형과 창우형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왔다. 272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차창에는 빗방울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대학로를 지나갈 때에는 창 밖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을 들으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속으로 많이 생각하고, 많이 흐뭇해하고, 많이 즐거워한 하루였다.


2007.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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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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