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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면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같은 전형적인 A형 남자, 게다가 소심하기로 유명한 황소자리까지 겹친 사람이라면 더욱 금언으로 여겨야 할 구절이다. 나는 미신은 안 믿지만 이런 혈액형과 별자리 따위가 인간의 성격을 규정짓는다고 어느 정도 믿는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혈액형과 별자리에 따라 정해진 성격을 갖고 이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내 마음 속에 그녀라는 존재는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을 어렴풋이 장식해 주고 떠나버렸다. 6월부터인가, 서늘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날씨가 온 하늘과 땅을 뒤덮는 그 때 그녀의 존재가 점점 눈에 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끝이 약간 안으로 말리는, 내가 좋아하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에 나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말과 행동, 이 모두가 계속적으로 나의 가슴 속에 주입되면서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점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누나, 오빠 등과 비슷한 모습의 사람에게 호감을 갖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도 끌리는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매우 소심한, 그러나 속으로는 거창한 상상에 취해 빠져 다니는 17세 소년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나를 즐겁게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상상이 그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까. 경외심..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차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본 이후로..이상하다. 그녀와 그녀 옆의 친구들과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점점 물리적 거리는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내가 얼마나 그녀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메신저라고 하는 놈이 자꾸 나를 유혹했다. 그러나 나는 MSN에 접속하고 그녀를 발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말을 했으나, 사람이 만나지 못하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을까. MSN에서 만난다고 마음이 가까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상 공간이라서 그런가보다.

 7월 말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미친 짓이 시작되었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안 왔다. 또 보냈다. 그래도 안 왔다. 내가 자꾸 헛스윙 하는 것 같아 약간 불만 섞인 문자를 보냈다. 실수였다. 일단 그녀는 나의 제안이 많이 부담스러웠나보다. 어떻게 본다면, 아니 당연히 데이트 신청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많이 후회한다. 그녀에게 미안하고,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일방적인 설득은 설득당하는 쪽을 매우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한다는 진리를 왜 못 깨닫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마침내 알았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소심한 행동이 오히려 그녀에게 부담을 준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내가 애같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게 사실이라 같은 나이의 이성보다는 누나들에게 더 편할 때가 많다. 사실 나에게는 친누나가 있기 때문에 누나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사실이다. 나는 동갑의 이성 친구들이 누나같이 느껴지지 않으면 되레 접근을 꺼려하는 무의식적 본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본능을 인정해야 나의 이상한 행동이 합리화되니까. 하지만 이 본능은 고쳐야 되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고쳐지지 않으니까 소심하다는 말을 듣는다. 동갑내기들한테만.. 아무튼 공부와 사색을 하며 여름방학을 그럭저럭 잘 보냈다. 씁쓸한 마음은 속에 담아두면서 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나 또한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두 명 다 부담스럽게 했다. 내가 주범이고 내가 잘못했다. 소심하기 때문에 모든 걸 망쳐놓았다. 직접 대면하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사실 부끄러울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는 MSN에 주로 나의 생각을 치중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용기를 내서 말은 못하고 그저 MSN에 로그인 표시 띄워놓고 마냥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을 밥먹듯 한 것이다. 그녀 대신 나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가끔씩, 그 대신 많이 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민을 털어놓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친구들이 더 편하게 느껴지더라. 그녀를 제외한 모든 그녀의 친구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중요한 그녀는 내가 좋아한 사람이었지만 다가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언젠가 나는 그녀의 친구의 주선으로 그녀와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다. 너무 어색했다. 만나는 기회가 없으니까 어색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게다가 소심하기도 하고, 그녀가 어울리는 친구들의 모임과는 관계가 적은 사람이니까 어색할 수밖에. 그녀와의 관계성을 늘리기 위해 어떻게 해보려고 했으나 나의 현실적 문제도 고려하면서 생각해 보니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녀와 대화를 했다. 미안해, 그때 일은 잊어주길 바래.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는 걸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정도의 대화를 했다. 그녀의 대답은 조심스러웠지만 날카로웠다. 내가 부담스럽다는 말이 날카로움의 첫번째 원인이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다. 8월의 문자만은 잊어줘. 아무튼 그녀는 나를 다시는 만나기 싫다는 조심스러운 말을 꺼냈고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뒤섞인 감정 속에서 그래, 그렇게 하자는 답을 하며 대화를 마쳤다.

   그 날 이후로 많은 날이 지나고 6월만 해도 평범했던 둘의 관계가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날 피했고, 나도 그녀를 피했다. 원래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오히려 서로 피하는 일이 쉬웠다. 나는 우리가 원래 만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 평범한 대화라도 자주 했으면 좋겠어. 부담가질 일 전혀 없이 말야. 뭐 그럭저럭 10월이 가고 그녀의 생일이 점점 다가왔다. 선물은 10월 말에 샀다. 꼭 내가 직접 선물을 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1월이 다가오자 그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다시 한번 생각나는 말인데, 이 학교의 환경 자체가 나에게 주위 사람 의식을 많이 하게 하나 보다. 주위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예의주시하는 생활에 익숙한 나는 이제야 그 고통을 알겠다. 내가 소심한 이유는 그런 환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생일날 나는 선물을 건네주지 못하고 서랍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선물은 결국 12월에 줄 수 있었다. 원래의 아름다운 포장이 아닌 나의 투박한 포장으로..

뭐 그렇다. 이제는 점점 잊혀져가는 작년의 기억들이 정말로 잊혀져간다. 그녀를 영원히 잊는 것이 나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은 잊을 수 있어도 그녀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나와의 거리가 아득히 먼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6.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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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이 지금도 잘 지내니?
잘 지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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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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