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 겨울, 나는 아버지 친구의 소개를 받고 뉴질랜드로 2달간 혼자 단기 어학연수를 갔다왔다. 워낙 어렸고 정규 학교교육을 받기에는 기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나는 Shore English라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일주일에 5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이 있었고 영어뿐만 아니라 곁가지로 수학(고등학교 1학년 10-가 할때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도 하고 뉴질랜드 선생님과 Auckland Takapuna 주변 견학과 현장학습도 했다. Auckland 도심까지 학원 아저씨와 차를 타고 가서 볼링을 같이 치고 영화를 봤던 기억도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집은 아버지 친구네 집에서 홈스테이 식으로 했다. 아버지 친구분은 나만 있는 2층의 작은 방을 마련해주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Holden 회사 차 말고 작은 일본 차로(Honda였던 것 같다) 매일 나를 학원까지 데려다주셨다. 언덕 위의 주거단지 마을에 있는 5층짜리 별장처럼 생긴 하얀 집의 2층이었는데 그곳에서 학원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아버지 친구 아들은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고 Westlake Boys High School에 다니고 있었다. (옆에는 Westlake Girls High School이 있었는데, 이곳에 다니는 일본계 혼혈 애들이 진짜로 이뻤다!!) 뉴질랜드는 교육과정이 한국보다 전체적으로 1년씩 빨라서 high school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빠른 89였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성진이였고 성진이와 나는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온 다음에는 어머님의 저녁 준비를 도와드리고 저녁을 먹은 다음 같이 쇼핑몰로 놀러가거나 옆의 늪지대 있는 정돈되지 않은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거나 집앞 시멘트 바닥에서 Frisbee를 던지면서 놀곤 했다. 맞다, 글을 쓰면서 방금 또 생각난 건데 성진이 집에서 언덕 아래쪽에 있는 하얀 담을 넘어가면 잔디밭이 있는 영국계 내외분이 계신 집이 나왔다. 이 집은 크기는 작지만 마당이 넓어서 그 집 아들(8살 정도)과 같이 야구나 럭비를 하기도 했었다.

 사실 뉴질랜드에 갔다온 후 영어학원의 성적표와 팜플렛, Rotorua와 Taupo 관광지에서 성진이네 가족과 찍은 사진 몇 장만으로 두 달간의 기억을 갈무리한 나로서는 그 이후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다시 서울 학생의 생활에 젖어들어갔고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부담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은 그때는 별거 아닌 걸로 여겨졌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들은 음악이 지금 내가 듣는 Pop 음악의 근간을 만들었고, 그때 했던 운동 종목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 종목이 되었으며, 그때 영어로 입을 풀어놓은 게 나의 고등학교 1학년을 잘 넘기게 해준 든든한 지원이 되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나는 22살, 7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작년 겨울쯤에 갑자기 생각이 든 건 두 가지였다. 2003년 1월과 2월의 뉴질랜드 음악 차트를 보면 그때 내가 TV와 라디오와 거리에서 그렇게 많이도 들었던 좋아하는 Pop 음악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학원이 있던 Anzac Street를 이용해서 내가 두달 간 몸담았던 곳의 스트리트뷰를 볼 수 있겠다. 잠깐 번뜩하고 생각난 추억여행의 아이디어를 나는 다이어리에 적어놓았다. 그렇게 해놓고 언젠가는 추억을 다시 들추어 잊혀진 기억에 불을 지피자 생각했는데 그동안 또 나 자신을 여러 가지 일로 채찍질하고 쳇바퀴 굴리다보니 실천은 계속 뒤로 미루어졌다. 그런데 오늘, 하늘은 맑고 날씨는 덥고 나는 기분 좋게 혼자 아침을 보내며 느긋하게 쉬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딱 7년 전의 그 느낌이 개기일식을 하듯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구글을 띄우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new zealand 2003 january music chart"

제일 위에 바로 결과가 나왔다. .nz인 걸 보니 뉴질랜드 사이트다. 100%다. 이곳에 내가 듣던 음악이 모두 다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사실 몇달 전에 멜론 플레이어에 '2003 January Auckland'라는 마이앨범을 만들고 이 안에 내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중학생 때 들었던 음악을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 되살려서 집어넣어 놓았다. 7곡밖에 안 되었었다. 그런데 차트를 발견하고 2003년 1월과 2월의 주간 Top 50 Singles Chart를 하나씩 열어서 안에 있는 곡 제목을 하나씩 읽어보니 정말 놀랍게도 내가 7년동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Pop 음악의 선율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뉴질랜드 음악 차트 사이트 http://www.rianz.org.nz/rianz/chart.asp

 여기 있는 곡은 바로 Melon Player 안의 마이앨범에 등록을 해서 재생시켰다. 잊혀졌던 음악이 추억이 되어 돌아왔다. 내 품에 다시 돌아온 음악들은 나에게 최고의 편안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마치 7년동안 잊고 있었던 곡들을 다시 듣는 건 7년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똑같았다.

 그렇게 30여 곡을 모아서 마이앨범을 완성시켜 통째로 재생시켜 놓고 나는 구글 지도로 갔다.

"takapuna auckland"

지명을 쳤기 때문에 검색 결과 맨 위에는 지도가 나오게 된다. Takapuna 지역의 축소 지도가 나왔고 조금만 확대하니까 Anzac Street가 나왔다. (나는 그 많은 길들 중에 이 길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여행을 할 때에는 전체의 단 한 부분만 알면 나머지는 저절로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스트리트뷰로 Anzac Street를 쭉쭉 달렸다. 처음에는 roundabout(빙글빙글 도는 교차로. 영국령 국가의 한적한 지역에서 교차로 대신 있는 도로) 과 주변의 정리되지 않은 수풀만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거리 저 멀리 보이는 7층짜리 흰색 건물이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영어학원 간판을 찾아냈으며 학원 근처의 아담한 쇼핑몰 Westfield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던 해변의 버거킹과 fish & chips 가게, 버스를 타던 정류장도 보였다.


▲ Shore English를 구글 스트리트뷰로 찾아내었다

 분명 이 사진은 2010년에 찍은 거일텐데, Takapuna의 거리는 7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안 변해도 너무 안 변했다. 오히려 그러한 '정체된 도시'는 나의 추억여행의 방해요소를 전혀 남겨주지 않아 나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 지역은 내가 생각해도 발전이 필요 없다. 느린 삶의 템포를 가지고 바다와 함께하는 활동적인 삶. 서울에서 빡빡한 학생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 정도의 도시는 휴양지로서의 천국이지 절대 도시처럼 보이지 않는다. 방학때마다 가서 살다 오면 딱 좋은 그런 동네다. 그리고 마침 내가 이 곳에서 딱 두 달만 있다 왔다는 게 나는 정말로 감사하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공간을 초월한 접근성은 초고속으로, 그리고 매우 쉬운 방법으로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그리고 추억을 되살리는 여행에서 나는 모든 과정에 대해 온전한 통제를 할 수 있었고, 옛날의 기억과 다시 마주치는 일을 운명이나 우연에 맡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검색과 UI 상호작용이라는 아주 주체적인 과정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계속 바빠서 미루어 오곤 하고 할 기회가 생기면 까먹곤 했던 일을 해냈다. 뿌듯한 기분이 밀려온다.

ps 혹시 성진이가 이 글을 보면 이곳에 댓글이라도 달아줬으면 좋겠다. 그땐 너무 어려서 서로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집전화번호도 수첩에 적어오지 못했는데, 디카로 사진도 한 장 못 남겼는데 그게 너무나도 아쉽고 후회된다. 성진이는 뉴질랜드에 정착해서 살고 있을까? 아마 Auckland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facebook에서 나도 Westlake Boys High School로 검색해볼게. 혹시라도 한국에 왔으면 꼭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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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11.

 요즘 나는 휴가를 나올 때마다 항상 하루는 숭례문 옆에 있는 프랑스문화원에 간다. 그곳의 미디어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군대 안에서 읽은 후 다음 휴가 나올 때 반납하는 식의 독서를 한 지도 이제 2권째다. 사실 모르는 단어를 만나면 일일이 사전을 찾아보고 또 반복해서 외워야 하기 때문에 바쁜 군생활(요즘 국군장병들은 절대로 그냥 팅가팅가 놀지 않는다) 중에 프랑스어 책을 읽으려면 많아야 1권밖에 안 된다. 그러다가 저번 휴가때 미디어도서관 안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대학생 정도 되는 여자분이 다소곳이 한적한 도서관을 지키고 계신 것을 보았다. 아르바이트생 같았다.

 그때 시각은 16시 40분. 도서관을 주로 찾는 불문학과 대학원생들과 멋진 정장을 빼입은 종로 스타일 할아버지들 그리고 한국에 사는 극소수의 프랑스 현지 사람들도 슬슬 저녁 먹으러 나간 시각에 나는 대학교 동아리에서의 모임이 오늘이 아닌 내일임을 알고 시간이 붕 떠서 도서관에서 계속 박혀 있기로 했다. 나는 DVD를 하나 꺼낸 다음 여자분께 TV 리모컨과 헤드폰을 빌려서 DVD 플레이어가 있는 곳으로 갔다. 1시간 40분 정도 되는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때운 다음 저녁에 다른 친구를 만날 계획이었다.

 내가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시간 동안 정말로 프랑스문화원 미디어도서관 안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와 그 대학생 정도 되는 여자분 빼고는 정적만이 흘렀다. 솔직히 난 머쓱한 기분이 들었고 만약 내가 솔로였으면 이 상황은 완전히 저 여자분께 작업을 걸기 위해 내가 괜히 DVD를 본다는 핑계로 들어왔다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냥 멍하니 영화만 보고 있기는 마음이 동하지 않아 여자분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보았다. 역시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이나 대학원 초년생이 확실하다.

 그 분은 어떻게 이곳에서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고 계실까? 인터넷의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내서 면접을 보고 오게 되었을까? 이러한 방법이 가장 정상적이지만 내 경험상 이렇게 작지만 권위 내지는 진입 장벽을 가진 곳의 아르바이트는 공개채용보다 인맥에 의한 추천 혹은 스카우트가 우선한다. 가장 높은 확률은 대학교 선배(이자 친한 언니이기도 한)가 자기가 원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가 교환학생이나 취업 등의 다른 일이 생겨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무실 직원 분에게 후배가 참 괜찮다고 소개하며 칭찬을 해주고 떠난 경우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나름의 객관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도서관 알바 자리와는 그리 개연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아는 사람, 혹은 두세 다리 건너 알게 된 사람과의 관계와 대화를 통한 신뢰를 바탕으로 일자리를 주선하는 게 도서관 알바와 더 어울린다.

 나는 아직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전역을 하게 되면 프랑스문화원도 더 자주 올 것이고 (물론 휴가때마다 꼭 하루 이상씩 발도장은 계속 찍고 간다) 아르바이트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 내년 5월에는 내가 본 여자분에서 다른 분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원래 프랑스문화원 직원인 슬림 피트의 하얀 얼굴에 단정한 커트 머리를 지닌 똑똑해보이는 남자분은 그대로 계시겠지만 말이다. 이제부터 나는 도서관에 가서 직원과 알바생의 눈길을 피해 구석에 들어가서 책 찾아보고 대출 처리 한 다음 휙 도망갈 게 아니라 대화를 시도해 보아야겠다. 안면을 아는 단계를 지난 후 교환학생 상담을 옆의 CampusFrance 사무실에서 받아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단계까지 가면 그때 슬그머니 알바 얘기를 하면 되겠다. 인간성이라는 묘약은 꽤 많은 경우에서 온라인의 차가운 이력서 시장을 생략하게 해준다. 돈과 지위를 얻는 방법에 보다 유연하고 쉬운 길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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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몇일이다, 몇년이다 라는 개념은 시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오늘이 무슨 달이고 무슨 요일인지는 그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달과 요일은 정서를 품은 음악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지요. 세계화로 연결된 우리와 친숙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비슷한 패턴의 도시 생활을 하고 있어서 가지는 감정도 서로 비슷해져서 어떻게 보면 적어도 요일이라는 기준만으로 감정의 변화를 지켜보면 모든 사람들의 감정에서 평준화된 추세가 발견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추세를 부드럽게 타기 위해서 우리는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하는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요일에 어울리게 맞추기 위해 음악을 듣곤 하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요에 맞추어 요일을 주제로 한 곡들도 가끔씩 생겨나고 있구요. 여기서는 요일이 곡 제목에 들어가거나 가사 속에 들어가는 곡들을 찾아 소개해 드릴까 해요.

월요일
 월요일은 차분하게 시작하면서 한주의 시작이라는 스트레스에 신경쓰지 않고 초연해지는 건 어떨까요? 제가 소개하는 두 곡은 빵빵한 로고송으로 시작하는 아침뉴스나, 호들갑을 떨며 힘차게 새날을 열어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오늘아침'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는 '월요일은 힘차게!' 라는 고정관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곡들이에요. 저는 성격이 밝은 성격은 아니고, 물론 밝을 필요가 있을 때에는 한없이 밝아지지만 억지로 밝아지기는 싫어서 차분한 시작으로 미소만 지을 수 있을 정도면 딱 좋더라구요.

1. The Carpenters - Rainy Days and Mondays

2. The Bangles - Manic Monday
 

화요일
 월요일, 고달픈 새 한주의 시작을 겪어낸 당신. 주말 동안 정신을 가볍게 하고 어제는 일이나 공부의 양이 많아 감정에 집중할 수 없었으니 화요일부터는 잠시 쉬었다 가는 기분으로 혼자만의 산책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날씨가 흐리든 맑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죠.

1. 미스티 블루 - 화요일의 실루엣

2. Swan Dive - Groovy Tuesday


수요일
 
수요일은 한 주의 중간이라 시간이 정말 안 가는 기분이 들어요. 무언가 정체되어 있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부단히 친구들을 만나거나 평소에 미루어두었던 일을 파고들던지 해서 느리게 가는 시간을 빨리 가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 한 주도 꺾였으니 놀아야 하는데 주말이 오기까지는 3일이나 남았을 때, 그 애절함과 기다림에 어울리는 곡들이 몇 개 있어서 소개해 드려요.

1. 루싸이트토끼 - 수요일
 
'수요일'은 어디를 찾아봐도 없어서 '꿈에선 놀아줘'로 대신 올렸어요

2. Lisa Loeb - Waiting for Wednesday


목요일
 제가 좋아하는 앨범 중에 John Mayer의 'Any Given Thursday'라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을 목요일에 학교 수업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올 때나 중간에 한강변을 거칠 때 들으면 한 주의 힘든 일은 다 지나가고 이제 힘차게 놀 준비를 해야겠다는 해방감을 맛볼 수가 있어요. 목요일은 확실히 억눌려있고 정적이고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수요일보다는 밝고 명랑하죠. 누군가는 그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나 과제를 떠안게 되어 직장이나 학교에서 막판 스퍼트를 내는 식으로 갑자기 일과가 벅차게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1. The Moonshiners - 목요일의 연인


금요일
 드디어 일과가 끝난 금요일 밤. 금요일 밤에 혼자 집에 있으면 그것보다 바보같은 일은 없을 거에요. 아무런 부담이 없는 최고로 한가하고 가벼운 토요일 아침을 보장받으며 밤새도록 놀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밤새도록 놀기 위해 사람들은 평소에 즐겨 찾는 가까운 번화가나 익숙한 과방/동아리방 등의 공간보다는 서울의 바깥으로 짧은 여행을 가거나 평소에 인터넷으로 찾아본 유명한 장소를 찾아가거나 조금은 비싸더라도 환상적인 인테리어와 맛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으로 많이 가는 것 같아요. 그것도 연인의 손을 잡고 둘만이서 가거나 가장 친한 몇 명의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그 어느 날보다 화려하고 풍성한 밤을 보내는 것처럼 보여요. 클럽처럼 시끄러울 수도 있고 찻집처럼 조용할 수도 있지만 금요일의 휴식만한 게 없죠.

1. Clazziquai - 금요일의 Blues
 

2. The Cure - Friday I'm in Love


토요일
 금요일에 가장 신나고 화끈하게 논 다음 찾아오는 토요일 아침, 토요일은 생각보다는 조용하고 때로는 혼자 보내는 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날씨가 좋으면 친구들과 번화가를 산책하고 쇼핑을 한다거나 각종 군것질을 하고,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정도로, 토요일 밤도 금요일 밤 못지않게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만 어제 잘 놀았던 사람들은 후회가 없어서 토요일에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을 때도 있어요.

1. Paris Match - Saturday


일요일
 그리고 일요일. 저는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일요일은 노는 주말이 아니라 안식일, 휴일과 같이 가족들과 편안하게 지내는 날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요. 일요일에는 우리나라나 일본을 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낮에는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평소에 관심과 애정을 쏟지 못했던 가족들을 위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라고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나 일본도 이제는 일요일에는 거의 일을 안 하죠. 친구나 애인과는 만나기보다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집에 편안하게 앉아 대화를 하는 게 더 일요일에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진짜 친한 동성 친구와의 끈끈한 우정을 갖고 있다면 다음날이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허물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주위에 많아요. 전 그게 부럽더라구요.

1. 재주소년 - Sunday
2. Loveholic - 일요일 맑음
3. Maroon 5 - Sunday Morning
4. Acid House Kings - Sunday Morning
5. Earth, Wind & Fire - Sunday Morning
6. Fourplay - Sunday Morning
7. The Indigo - Sunday Morning
8. Oasis - Sunday Morning Call
9. Aquibird - Sunday Morning Driver

위의 곡들은 각자 찾아 들어보시길~~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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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병 특기학교중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그곳 정보통신학교!! 
2009년 5월 15일부터 6월 16일까지 난 그곳에서 살았다.


 영국의 조용한 교외를 연상하게 하는 진주의 흐리고 쌀쌀한 기후와, 드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평지, 그리고 진록색의 곧게 뻗은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의 각진 행렬, 군부대가 갖는 음침하고도 장엄한 풍경의 분위기.

 그 고요한 땅 한 구석에 사립 기숙사학교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과 걸어서 5분 거리의 아담한 4층짜리 교육장 두세 동 그리고 언덕을 올라가야만 보이는 단층의 조촐한 식당.

 ㅁ(미음)자로 마치 정원과도 같은 평온한 잔디밭을 에워싸고 있는 건물 그리고 친근하며 소박한 느낌을 선사해주는 하얀 색의 울타리, 정원 가운데 있는 나무 한 그루와 그림같은 벤치, 자갈밭과 천막이 쳐진 구석의 흡연장과 생활관 옆의 잡동사니 기구들을 보관해놓은 창고. 생활관을 삼면에서 안아주고 있는 산과 숲의 울창함 그리고 그 사이로 청아하게 들려오는 도심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낯선 새소리, 그리고 정문에서 길고 곧게 뻗은 이차선 도로.

 생활관 안의 200명의 젊은 청년들과 그 비슷한 또래의 4명의 훈육조교 그리고 사감선생님같은 간부들과 편한 옷차림 속에 계급과 권위를 숨긴 대대장. 100명의 선임과 100명의 후임이 서로의 삶을 간섭하지 않으며 질서 있게 조직을 갖추어 살아가는 모습.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내무실과 낮은 천장, 아침의 안개와 찬 공기를 생생히 들이마실 수 있는 낮고 큰 창문, 실내에 갇혀있는 느낌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안락함을 만끽하게 해주는 실외 계단, 유일하게 바깥 세상과 통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더욱 소중했던 8대의 하얀색 공중전화기와 학생들의 젊은 감성에 맞추어주는 아량의 상징과도 같았던 '사랑의 감동폰'(문자메시지)서비스. 80바이트를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공책 찢은 종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세심한 글귀를 못생긴 손글씨로 적어나갔더랬다.

 동기들을 위해주는 착한 마음으로 자진해서 일하는 근무자들, 우리가 '대대'라고 불렀던 3명의 친구들은 정말 다른 97명의 사람들과 사회에 있을 때의 가면과 명찰을 다 떼어버리고 동기로서, 똑같은 순수한 사람으로서 친하게 지냈다.

 선임 기수는 후임 기수 앞에서 모범을 보이자 다짐하고, 후임 기수는 선임 기수 앞에서 부끄럽지 않자는 결의를 하루에 세 번씩은 꼭 했더랬다.

 아침에 안개를 마시며 혹은 햇살을 쬐며 기상할 때 이곳 정보통신학교는 절대 사람들에게 불쾌한 긴장감이나 강요를 유발하지 않았다. 갓 훈련단을 마친 우리의 먹을거리라고는 훈련단 때 먹고 남은 레모나, 레모비타, 생강차가 전부였지. 심지어 단 한번 뿐인 공동구매 때도 구입이 가능한 건 이것들 뿐이었으니까. 과자는 종봉(종교봉사) 가서 배터지게 열심히 먹었던 오예스<초코파이<가나파이<몽쉘, 써니텐, 짱구 정도가 전부. BX는 꿈도 못 꾸었지. 수료차 때 각 과정별 대표자 1명이 가서 더플백에 과자를 넣어온 게 전부여서 아쉬웠어. 간혹 내 친구들 중에는 종교타운에 가서 과자를 전투복 안에 갑옷처럼 두르고 온 친구들도 있었어. 그들은 친구들을 먹여살리는 영웅이었고 따라서 존경의 대상이었지.

 난 프로젝트팀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지만 안 시켜주더군. 학과 빼먹고 가점 받고 중위, 대위 분들과 같이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개발하고 디자인하는 게 너무나도 하고 싶었는데 결국 못해서 난 대신 정보통신학교 홍보동영상을 UCC로 만들게 되었지. 훈육중대장님께서 우리 UCC팀에게 과자를 꽤나 많이 주셨는데, 수료차 때 먹기로 약속한 족발은 결국 허사였어. 그대신 진주에서 파는 동네피자 한판은 먹어봤지. 특기학교 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맛있는 치킨집과 피자집의 스티커가 내무실 안에 잘 찾아보면 붙어 있었어. 하루 있는 병사의 날 때는 위닝 대회, 족구, 농구, 축구, 계주, 영화, 그리고 저녁에 자습용 책상을 가운데에 모으고 먹었던 치킨과 피자가 기억나.

 공대같은 분위기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는 친근하고 희극적인 공간. 이곳의 그런 분위기를 강화시켜주었던 건 바로 TS(Tape Show)라는 저녁음악방송 DJ 프로그램이었어. 난 이게 너무 좋았는데...


  이제 우리 부대 안에서도 어느 정도 짬이 차고 조금은 편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이곳이 눈치를 보며 난관을 하나씩 헤쳐나가야 하는 준(準)사회임은 분명해. 그때마다 나는 가난하지만 모두가 평등한 시절의 유토피아였던 그곳을 떠올리곤 하지. 한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때처럼 고요함 속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마치 수도원처럼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기회는 더이상 내게는 오지 않을테니까.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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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추웠던 12월 5일, 우리 동네 치킨집에서 나와 엄마와 이모 그리고 이모부가 만나서 오랜만에 대화를 했다. 엄마와 이모는 사는 얘기를 하고 나와 이모부는 또 다른 얘기를 했다. 대학교수이신 이모부에게 진로에 대한 상담을 받았다. 2시간 동안 이렇게 몰입되어서 상담하고 토론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이모부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경험과 '진짜 사회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내게 하나하나 짜릿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대화에서 오고 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메모해 놓고 계속 들춰볼 감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한가롭게 메모하면서 들을 여지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음날 교회에 가러 지하철 7호선을 타는 그 30분 동안 어제 이모부와 내가 나눈 말들을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흐지부지하게 잊어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마들역에서부터 청담역까지 열차가 달리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쉼없이 날림 글씨로 수첩을 채워 나갔다. 이모부와의 대화는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사회 인식과 허무맹랑한 꿈을 마치 헐렁해진 너트를 스패너로 꽉 조이는 것처럼 정확한 위치로 고정시켜 주었다. 


 아래 내용은 기존의 나의 의견 혹은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과 그에 대한 이모부의 대답이다. ★는 대답을 듣고 나서 바로 찌릿 하고 떠오른 내 생각이다. 


Q.
인터넷을 이용한 소셜네트워킹 서비스를 먼저 시작하고 그 다음에 전자정부와 정보통신 관련 법제 연구를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제겐 네이버가 딱인데요?

A. 네이버라는 회사와 네이버의 사업 영역 그리고 서비스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내가 네이버의 직원으로서 소속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Q. 사실 전 네이버에 들어가서 기존의 네이버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업 분야를 새로 제시하고 그를 위해 기업 외의 기관과의 협력과 조정 업무를 하고 싶었어요. 정보산업공학과는 제2전공에 불과하니까요. 제1전공을 살리면서 제가 좋아하는 컴퓨터를 만지려면 네이버가 딱인데..

A.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다음 5년 정도가 되면 내 창의적인 생각으로 신규 사업분야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과 권위를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현실을 하나도 모르는 유치하고 naive한 공상이다.

대학생 또래 친구들끼리 모여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나는 이러이렇게 해서 언제 뭐가 되면 그때 뭐를 할 거야'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고 나서는 그것의 실현가능성은 무시된 채 자신도 모르게 그 말대로 계획하게 된다. 사실 그 계획은 소설에 불과한데 말이다. 미래에 대한 정보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므로 진로에 대해서만큼은 나의 능력을 믿기보다 반드시 지금 이 사회를 잘 아는 어른들과 같이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검토를 받아야 하겠다. 


Q. 교수가 되면 대학교 안에 갇혀있게 되지 않을까요? 창의성과 재미가 없는 직업 같아요.


A. 교수가 되면 네이버는 물론이고 수많은 IT벤처기업과 정부기관을 클라이언트로 받아 프로젝트 수주 비용으로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엄청난 경쟁이 따르겠지만 회사에서의 경쟁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덜할 것이다. 교수의 위치에 서면 조교들이 데이터 수집을 비롯한 반복적인 업무를 하고 내가 그 집단의 리더로서 집단의 아이디어를 만들고 평소 꿈꾸어 온 산업계의 큰 변화와 혁신을 이루어내는 주동자가 된다. 


Q.
전 돈을 빨리 벌고 싶은데 네이버 같은 대기업이면 월급이 제가 만족할 정도로 충분할 거에요.


A.  꼭 대기업에 가야만 많은 돈을 받는 것이 아니다. 돈을 많이 받는 전문직종에는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연구원, 정치인 그리고 교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방식은 기업 조직의 월급과 보너스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Q.
근데 교수가 되려면 석사, 박사를 한국이나 외국에서 아무튼 무조건 밟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돈이 계속 나가잖아요?


빨리 대졸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고 싶은 건 바로 그 우려 때문이에요.


A.석사과정부터는 학부와 전혀 다른 학문 활동을 하게 된다. 학부 때는 나의 output이 없거나 있더라도 습작(習作) 혹은 학점을 따기 위한 과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신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없고 대신 내가 수업을 듣고 등록금을 지불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input이 output을 월등히 앞지르는 시기이다. 하지만 석사 때부터는 앞서간 교수의 도움과 그와의 조력자 관계를 통해 실제로 학계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일에 참여하기 시작함으로써 output에 대한 대가를 받기 시작한다. 대가는 단순한 돈뿐만 아니라 유학이나 포럼 등을 위한 지원금, 장학금 등의 특정 명목의 돈일 수도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와 의논하며 연구할 기회와 인맥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한 푼도 내 돈을 받지 않고 석사·박사 과정을 마칠 수가 있는 것이니, 석사·박사 때 돈을 어떻게 낼까 막연히 고민하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인 대졸신입사원을 선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보너스로 중간 중간 이모부께서 해 주신 말들 


 대기업 사원의 경쟁은 파이 나누어먹기이지 모두를 이롭게 하는 창조가 아니다. 파이 나누어먹기는 지적 능력보다는 전술과 타이밍, 편가르기와 권모술수에 능해야 잘 할 수 있다. 나같이 남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린 사람에게는 파이 나누어먹기가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착하게 성공하는 법, 남을 짓밟지 않고도 부와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노선을 따라야 한다. 그러한 비경쟁적인 정신노동을 통해 직업활동을 하는 직종 중 가장 좋은 것이 교수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창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의 경쟁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내가 세운 목표와 나 사이의 경쟁'이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따는 등의 '실행'을 하기에 앞서 내가 이렇게 진로를 정하면 마음 편히 한 단계씩 차근차근 해 나가도 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명확히 해야 한다.


★ 큰 그림은 이 세상의 실제 모습에서 알 수 있는 요구사항, 실현 가능한 일들의 목록 그리고 어떤 경로로 가면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는 발전 단계 구성도(테크트리)를 담고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오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와 연구에 100% 힘을 쏟을 수가 없다. 큰 그림이 명확해야 내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잠재력이 생긴다. (이모부는 대학교에 들어온 다음 사법고시/교수 두 가지의 10년치 진로를 미리 정해놓고 공부를 시작하여 사법고시에 떨어진 후 바로 교수의 길로 가셨다. 이미 닦아놓은 길을 가기 때문에 그냥 매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조교수가 되고 정교수가 되었다.) 


 2시간 동안의 쉼없는 대화 동안 난 이모부의 중학교 때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진로와 직업에 대한 인생길을 모조리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이모부가 몇살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와 나의 생각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이날의 대화를 통해 배운 건 내게 운명처럼 정해진 진로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맞는 진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정할 수 있느냐였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요소였다.  


 대학가 술집이나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못 나왔던 얘기를 동네 치킨집에서 했다. 얘기가 끝나고 이모부 아들(나의 8촌이다) 장난감 글록 소총을 고쳐준 뒤 엄마와 나는 나중에 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5분 거리의 단지 중앙도로는 엄청나게 추웠지만 마음은 극적인 흥분으로 뜨거웠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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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작곡가 버트 바카락의 또 하나의 명곡을 발견했습니다. Barry Manilow의 곡들을 떠올리게 하는 웅장하면서 따뜻한 브라스밴드와 스트링이 어우러진 'This Guy's in Love with You'.

 이 곡을 부른 사람은 70년대의 Herb Alpert라는 가수입니다. 이 분의 유명한 곡이 이 곡밖에 없다는 게 더욱 더 이 곡을 돋보이게 만드네요. 원래 한 곡을 제대로 유명하게 만든 다음 홀연히 사라진 가수들은 시간이 지나도 특정한 사람들이 매니아적으로 영원한 관심과 사랑을 가져다주잖아요. 노래방에서 친구들끼리 부르는 것들 중에 '발걸음', '사랑의 바보', 'Just Once'같은 곡들처럼 그 가수 하면 그 곡밖에 떠오르지 않는 경우, 그러나 매우 선명하게 기억남는 곡들.

첫번째 동영상
작곡가 Burt Bacharach 옹의 맛보기 연주-일본의 EBS 교양음악 프로그램 같은 거네요. 리포터가 아주 좋아하고 있어요.

 
두번째 동영상
이 곡을 실제로 불러 방송에 출연하고 LP앨범을 출시한 Herb Alpert의 곡(이건 가요무대??)


세번째 동영상
영국의 유명한 락밴드 오아시스의 메인보컬님이 공연 중 잠깐 불러주신 커버곡


네번째 동영상
캐나다에 있는 한 무명 가수가 멀리 인도네시아로 날아간 연인을 위해 만든 UCC라고 하네요. 훈훈하다~!



이 곡의 가사와 코드는 다음과 같아요. (출처: Bacharach Online)
우리 모두 7코드의 마술사 바카락 옹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시다.

Eb             Abmaj7
 You see this guy

                            Dbmaj7
 this guy's in love with you

Eb             Amaj7
 Yes, I'm in love

    C7sus     G9  G7  Cm7     
who looks at you the way I do

Bbm7           Eb9sus Eb7
when you smile I can  tell

   Abmaj7           Abm6           
we know each other very well

   Gm7    Cm7           Fm9
how can I show you I'm glad

  Bb9sus
I got to know you, 'cause:

{*} Eb                   Abmaj7
      I've heard some talk

                            Dbmaj7
 they say you think I'm fine

Eb               Abmaj7
  Yes, I'm in love

    G7sus    G9  G7  Cm7
and what I'd do  to make you mine,

Bbm7         Eb9sus  Eb7          
tell me now, is  it  so?

      Abmaj7        Abm6
Don't let me be the last to know.

    Gm7       Cm7
My hands are shaking

      Fm9     Bb9sus           
don't let my heart  keep breaking, 'cause

Eb           Abmaj7
 I need your love

Eb           Amaj7
 I want your love

Eb          Dm7 Cm7
 say you're in  love

Cm6 Cm7    F7       Bb   Bbmaj7  Bb7    
in  love with this guy,

  
if not I'll just die. {rpt * to fade}


피아노 악보는 제가 오늘 첫번째 동영상을 보고 땄습니다. 시간 나면 스캔을 하든 피날레로 다시 찍든 해서 올려드리지요. 내일은 나도 쳐봐야지..후후훗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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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21년 삶 동안 가장 나를 제약했던 한 가지 성격은 자신을 하나의 스탕리로 고정시켜 다른 사람들에 대해 한 가지 입장으로 다가갔다는 점이다. 옷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난 깔끔한 세미정장과 니트가 좋아서 계속해서 그 코디를 유지해 왔다. 첫인상이 좋거나 평소에는 그랬다가 갑자기 좋아진 사람에게는 마냥 친절하고 착하고 분위기 있게만 다가갔으며 화를 내거나 질투하거나 조절할 수 없이 마음대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

  물론 진로와 자기계발을 위해 자신의 관심사나 주력과목을 한 부류로 집중시키는 것은 20대 초반 정도 나이의 사람으로서는 바람직하다. 지금 내가 정치외교학과 정보공학, 산업공학을 벗어난 다른 과목도 함께 배우고자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학문 분야나 직업 분야에는 전문성이라는 가치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지만, 옷차림이나 대화법, 매너나 취미 삼아 하는 요리, 음악, 운동 그리고 쇼핑하는 물건의 스타일은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다. 전문성이 아닌 다양성이 필요한 것이다.

  변화를 기반으로 한 다양성으로 자신의 가장 좋아하거나 잘 하거나 혹은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스타일과 입장을 고른 다음 타인이 예측할 수 없는 간격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면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최종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호감을 남기게 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위대함이 태어난다, 놀라움이 태어난다' 라는 이동통신사의 광고문구는 다양성을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희미한 실마리를 안겨준다. 아무런 줏대 없이 이것저것 해보는 것이 다양성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 나를 나답게 해주는 하나의 모습에서 다양한 이탈을 반드시 시도해 보는 것이 다양성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혹은 분명하게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의 가장 중요한 일과 역할인 공부와 계획 그리고 각종 글쓰기와 기획으로부터 이것들 이외의 모든 삶 속의 일과 역할을 분리해내어 생각해야겠다. 공부와 계획에는 다양성이 있어서는 안 되고 선택과 집중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신념이 워낙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용기 있고 자유롭게 다양하게 내 모습을 바꾸어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 사고가 반드시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 주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준비하고 배우고 익혀나갈 것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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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박4일의 휴가를 받고(연가라고 아시나요) 10월 6일부터 9일까지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군부대라는 공간적 한계 때문에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요, 상점들이 영업을 시작하는 9시가 되기 전에는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각종 결제를 하고 그 다음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에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계획을 짜 보았어요. 남들이 일하지 않는 아침에 인터넷은 일하고 있다는 게 저한테는 참 고마워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 결제를 위해서는 수첩과 체크카드와 보안카드와 USB를 이렇게 펼쳐놓고 결제할 것들을 체크해 가면서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요. 돈 내기도 꽤나 복잡한 일인 것 같아요. 이번에는 공인인증서 재발급까지 해야 돼서 더욱 더 복잡하네요.
 
 위에 제가 쓰는 수첩 3개가 보이네요. 제일 작은 건 군부대에서 제가 건빵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면서 선임들이나 영외자들의 말을 받아적거나 그날 할 일을 프랭클린 플래너 형식으로 정리해놓는 New PD 수첩이구요, 왼쪽 위에 있는 색깔 종이의 6공 다이어리는 일주일 단위로 1주부터 96주까지 한 장(두 페이지)씩 마련해 놓은 공군 생활 중의 장기계획 수첩이에요.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프랭클린 플래너는 입대 전 사회에 있을 때까지 한창 썼던 놈이구요. 이 세 가지 수첩을 번갈아 보면서 다음 휴가가 올 때까지의 한두 달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게 휴가 중에 제가 치르는 중대한 의식이에요. 

  그리고 네이버 N드라이브에 제 증명사진을 올려놓았어요. 사지방(군 PC방)에서 시험을 접수할 일이 생기더라구요, 그 때 사진이 필요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생각난게 네이버 N드라이브였어요. 아울러 집에서 쓰던 유틸리티 몇개도 슬쩍..

  시계와 외장하드가 고장이 나서 한 9시 정도가 되면 전화해 보고 오늘 고칠 수 있는지 알아볼 거에요. 그리고 1달 동안 잠자던 제 검은색 핸드폰을 114에 전화를 걸어 상담원에게 깨워달라고 해야 돼요. 9시쯤 되면 출발해서 제가 들러야 하기로 예정된 곳을 하나하나 최소 동선으로 찍어가면서 구입을 하고 상담을 하고 그런 일들을 할 거에요. 

  마지막으로 외출을 위해서 군에서 쓰던 지갑을 사회에서 쓰던 지갑으로 바꾸고, MP3와 각종 멤버십카드/할인카드를 꺼내고 자주 가는 장소나 자주 보는 사람들을 따로 적어놓은 수첩을 꺼내고 집에 놓아둔 좋은 화장품을 쓸 거에요.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다 보면 휴가가 참 길다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군바리 기질을 잠시 전환해 놓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저 자신이 그동안의 세월에 따라 얼마나 다른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져 있었는지를 느끼곤 해요.

  지금 저에게는 군 생활이 일상이고 휴가가 비일상이에요. 일상에서 비일상, 비일상에서 일상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신중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복잡하지만 언제나 저는 이 사실로 위안을 삼곤 하지요. 제게는 이곳 서울에서의 제가 현실의 자아이고, 저곳의 삶은 꿈결 속에 빠르게 흘러갈 뿐. 마치 4일 동안 깨어 있다 다시 한두 달의 긴 수면에 빠지는 겨울잠 동물처럼 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정말 시간은 금방 갑니다. 진짜 훅~ 갑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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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가가 살고 있지 않는 지역, 작가가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타지에 대한 동경과 선망의 감정은 으레 나타나는 화풍이요 악풍 중 하나다. 그러한 동경과 선망은 수 세기에 걸쳐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전세계 인간의 보편적 감성이기 때문에 21세기의 예술매체인 레코드에도 그 정서는 어김없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 동경(憧憬)의 정서를 깊이 머금은 4편의 앨범을 소개해 볼까 한다.
       

1. MOCCA - FRIENDS (인도네시아 → 네덜란드)



  꼭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모카(MOCCA)의 보컬 아리나(Arina)는 실제로 자카르타의 이름난 부자집 딸로 알려져 있고, 다른 밴드 멤버들도 인도네시아에서는 꽤 넉넉한 부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일제시대의 돈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풍을 좇았던 것처럼 여유로운 MOCCA는 유럽풍을 따라가게 되었다. 통기타지만 The Cardigans의 기타팝에 가까운 사운드를 뒤에서 받쳐주며 영어로 된 가사를 나긋나긋하게 부르는 MOCCA, 그 가사 속에는 부유하고 안락한 집에 사는 소녀의 이미지가 녹아들어가 있다. 한없이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Happy!) 집 안의 개와 운동을 하거나(Buddy Zeus) 동네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My Only One).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이고 안락한 가사는 네덜란드와 스웨덴 쪽의 소규모 팝/락 밴드에서 많이 들어볼 수 있다. 스웨덴의 Acid House Kings가 대표적이다.
 
  익숙한 유럽풍은 한국에서도 먹혔고 그에 따라 MOCCA는 GMF에 나오게 되었으며 페퍼톤스와 함께 내한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분명 한국의 20대 여성층에게 제대로 먹히는 음악이다.


2. The Trendy Eastern TOKYO (미국 → 일본)




  미국의 High Note Records라는 유명한 재즈 레이블이 라운지 음악도 같이 내면서 유명한 세계도시의 느낌을 담아낸 앨범이 The Trendy Eastern이다. 도쿄 말고도 홍콩을 주제로 한 앨범도 있다. 역시 서양인, 특히 미국인은 동양 하면 제일 먼저 일본을 떠올리는 것 같다. 일본 하면 당연히 등장하는 코토와 샤미센(게이샤의 추억 같은 영화를 보면 항상 stereotype처럼 나온다)은 여기서도 빠른 비트와 어우러져 세련됨을 자랑한다. 비록 내가 이 앨범을 직접 다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한 곡은 들어봤는데 역시나 예상과 같았다.


3. Serengeti - Afro Afro (한국 → 탄자니아)




  한국의 인디에 머물러 있던 세렝게티는 이 앨범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방송에도 출연하고 굵직한 음악 축제에도 나오기 시작하여 이제는 꽤나 알려진 실력파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윈디시티가 레게를 추종할 때 세렝게티는 Funk를 기반으로 한 자신들만의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윈디시티와 세렝게티의 음악 성향은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그 사운드는 언제나 아프리카의 느낌을 살리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하였다. 동물이 실사로 큼직큼직하게 그려져 있는 앨범재킷도 그렇고, 팀명도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이 아니던가.


4. Paris Match - Quattro (일본 → 이탈리아)




  애시드 재즈 그룹 파리스 매치의 4집 "Quattro"는 다른 앨범에 비해 일본 도시의 느낌이 덜하다. 꼭 앨범 표지가 이탈리아의 지중해변을 그리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4집은 다른 앨범에 비해 빅밴드의 비중이 매우 큰 앨범이다. (Summer Breeze의 네덜란드 현지촬영 빅밴드 버전을 YouTube에서 검색해 보길 바란다) 트럼펫과 색소폰은 유럽의 정서를 앞에 내세우고, 다른 파리스 매치의 곡들이 보여주는 하몬드 오르간이나 기타 오르간 계열 신디사이저는 쏙 숨어들었다. (이 오르간 소리가 일본 도시의 느낌을 살려준다고 생각한다. 6집 After Six를 들어보라)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나는 늦은 여름 밤 지중해변을 홀로 산책하며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동경이 반드시 모방을 낳지는 않는다. 문화적 주체성이 없다고 비판받을 것도 아니다. 동경은 낯선 대상에 다가가고자 하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이며, 그것이 음악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잠시 틀에 박힌 현실을 벗어나게 해주는 환상의 묘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왜 전세계의 수많은 음악과 아티스트와 앨범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한국을 동경하는 앨범을 집어낼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일까?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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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가치체계는 우유와 치즈와 초콜릿, 그리고 양파와 고추와 씨즈닝을 명확히 구분하는 이분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 맛과 짠 맛의 구분일 수도 있고 색깔에 따른 구분일 수도 있으며 어울리는 음료 종류에 따른 구분일 수도 있다. 분명 그 둘은 겨울과 여름, 클래식과 펑크락, 설탕과 소금처럼 명확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분명 조용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응접실에서 쿠키 종류와 우유, 쥬스, 차, 커피 등을 교회 집사님들과 같이 먹고 마셨던 수많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그 때마다 봉지과자는 테이블 위에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변에서 돗자리르 펴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실 때에는 언제나 봉지 과자에 양념가루가 있는 것들만을 고집했다. 맥주가 지배하고 있을 때 감히 쿠크다스나 버터와플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임의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에서 갑자기 사먹는 과자는 테이블 위에 항상 뒤죽박죽 펼쳐져 있다. 단지 먹고 이야기하는 것에만 가치를 둔 모임에서 과자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매번 꼭 어느 한 명이 나서서 초코송이, 씨리얼, 다이제 같은 과자를 틀에서 꺼낸 다음 뜯어놓은 썬칩이나 새우깡 봉지에 던져 넣었다. 심지어는 한 손을 가져와 초콜릿과 씨즈닝이 고루 섞이도록 버무리는 만행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한 결과의 모습은 마치 케이크와 삼겹살을 한입에 같이 먹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뒤섞인 상황을 자아낸 사람이 바쁘게 흘러가야만 하는 모임 속에서 익명성을 띤다는 것이다. 아무도 과자의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뒤죽박죽 한 자리에 섞인 과자는 모두의 기호를 고루 반영하겠다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인가? 내 눈에는 구분이 없이 섞여 있는 결과물은 생산성 없는 정당 간의 타협안, 노사 간의 절충안과도 같아 보일 뿐이다.

  솔직히 이 사소한 문제에 더 화를 내어 보고자 한다면 배고팠던 우리나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먹는 게 중요했지 얼마나 운치 있게 먹느냐, 어떤 음악이나 인테리어나 조경 안에 둘러싸여 먹느냐 등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된 것 같다. 초가집과 산 능선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마을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무작정 포크레인 부대를 때려넣고 흙을 무참히 퍼간 도시개발의 사례는 대한민국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고 이는 지금의 매력없는 도시 경관이 증명한다. 음식을 사먹는 작은 일에서부터 도시를 건설하는 큰 일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하나의 목적에만 집중한 나머지 결과물의 아름다움과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뒤죽박죽 형상을 만들어놓는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 행태는 다른 분야의 사소하거나 중대한 일에도 전염되었다.

  하지만 뒤죽박죽인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다. 비빔밥에는 밥과 고기와 야채가 뒤섞여 있지만 그 뒤섞임 덕분에 세계인이 칭찬하는 맛을 만들어낸다. 탈춤은 연극을 하는 사람과 연극을 보는 사람이 모두 대사를 내뱉고 주고받으면서 흘러가 매 공연마다 다른 예술을 펼쳐나가게 되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아름다운 극 장르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탈지유와 코코아파우더 그리고 팜유와 씨즈닝을 뒤섞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 두 종류를 섞었을 때 독특하고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다.

  결론은 구분의 판정승이다. 이제 우리도 스타일에 따른 구분짓기와 종류별로 묶고 꾸미기에 신경 쓸 여유가 충분히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견문이 넓어졌다. 그러한 발전을 실생활에 펼쳐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중 하나가 먹는 모임을 단순히 먹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특정한 분류를 기반으로 하여 음식들의 스타일을 살려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개인적 기호를 보다 존중해주는 모임으로 바꾸는 일이다. 내게 "애가 쪼잔하게 뭐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니" 혹은 "남자가 왜 그리.."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설득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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