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24시간 중에 버려지는 시간들은 구석구석 숨어 있다. 단지 우리가 그 시간들의 이름을 지어주지 못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의 하루에서 비생산적으로 지나가 버리고 마는 시간들이 눈에 보인다. 이러한 시간들은 우리가 일, 약속 등으로 이름 붙이는 일정 시간 동안의 활동 사이에 끼어 있어서 웬만해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냥 묵인하거나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미리 그러한 시간들이 어떤 상황에 생기는지를 알고 있으면 마음 속은 이미 그 시간을 쓰지 말자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버려지는 시간들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된다. 즉 버려지는 시간들이 발생하는 상황을 피해가거나, 버려지는 시간 중에 다른 의미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휴가를 나오기 전에 이 목록을 만들어보았다. 내가 평소의 삶에서 어떤 경우에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냈는가를 오직 기억의 반추에 의지하여 글로 적었다. 이건 내 생활 반경에 한정되어 나온 목록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버려지는 시간들은 물론 나와 다를 수 있다.

- 컴퓨터의 부팅시간
- CPU의 처리시간
- 다음 지하철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
-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는 시간(가끔씩)
- 정리 안 된 아수라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시간
- 목적의식 없이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네이버 안의 링크로 들어가서 멍하니 보고 있는 시간
- 파일 다운로드가 끝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시간
-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을 마냥 기다리는 시간
- 번화가에서 목적지를 못 찾고 헤매는 시간
- 비효율적인 늦잠을 자는 시간
- 계획에 차질이 생겨 이 순간에 이 물건이 필요한데 이 물건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붕 뜨는 시간
- 모임에서 대화 주제가 고갈되어 말없이 서로 먹기만 하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관심없던 TV의 뮤직비디오나 남들의 행동에 관심이 가는 시간
- DVD를 보려 하는데 케이블 연결이 잘못되어 그걸 고치는 시간
- 은행창구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시간
- 물건 사는 곳에서 판매자와 대화하는 시간
- 삐끼한테 잡히는 시간
- 막다른 길을 만나 되돌아가는 시간
- 한꺼번에 하면 될 일을 하나씩 하는 시간
- 아예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
- 계획을 다시 한번 다른 종이에 옮겨적는 시간
- 뜻밖의 전화를 받고 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자료를 찾아내는 시간
- 로그아웃했다가 다시 로그인하는 시간
- 보일러가 온수를 틀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시간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버려지는 시간이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보고 그 시간에 대한 묘사를 해주면 그 시간을 의미있는 시간으로 바꾸기 위한 해결책을 그 묘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해결책의 발견은 누구나 다 할 줄 아는 일이지만 사람들이 별로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건 목록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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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물건을 함부로 집 안에 들여놓지 않는다. 그들은 구입을 할 때나 주변 사람에게 선물을 받을 때에도 집 안에 물건이 들어갈 때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1.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물건의 출구가 확보되어 있는가?
  2. 저장되는 공간과 사용되는 공간을 모두 가지고 있는가?
  3. 물건의 사용과 이동을 위한 도구를 이미 가지고 있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애초부터 물건을 함부로 반입하지 않는다. 부피가 큰 물건의 설치의 경우 더욱 그러하고, 인테리어 공사나 배선 등의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세 가지중 무시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한 후 신중히 결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절차에 따라 생각한 후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물건을 가져올 줄만 알지 버리는 방법을 확보해놓지 못해 집 안을 어지럽게 채워넣거나 설치해 놓은 물건을 긴 시간 동안 애물단지로 만들어놓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내가 동네 뒷산(수락산)을 올라갔는데 해발 300m 정도 되는 곳에있는 절 옆 콘크리트 건물 안에 커다란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나는 어떻게 이 무겁고 큰 물건을 이 곳에 가지고 왔을까 생각해보게 되었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소방방재용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피아노를 들어서 상공에서 운반하는 모습이었다. 분명 피아노를 가져다 놓기 위해서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피아노가 만약에 고장나거나 혹은 아예 못 쓰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버릴 것인가? 버릴 방법이 없다면 그 물건은 버릴 수 있는 쓰레기보다 열등한 무가치 재화에 불과하게 된다.

 언제나 이 세 가지 조건을 확보하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물건의 소비는 점점 사치가 된다. 물건의 가격이 높아도 점점 사치재가 되지만 이러한 비가격 기준을 통해서도 사치의 여부를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건은 집안이나 사무실 안을 거치면서 일종의 여행을 한다. 들어오는 곳이 있으면 나가는 곳도 있어야 여행을 끝낼 수가 있다. 영구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버리게 되어 있다. 산업공학에서 말하는 source node와 sink node는 사소한 집안의 물건 배치와 인테리어에도 분명 적용된다. 배수구, 접지선, 쓰레기봉투와 수거차량, 자연부패 등 무엇이든지 소멸되는 구멍을 필요로 한다. 만약 다용도실이나 화장실에 배수구가 없다면, 집안에 쓰레기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분리수거다. 조금만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 분리수거는 엄청나게 복잡한 작업이 될 수 있다. 재질에 따른 분리를 해야 한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의 재질 종류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PP, PET, LDPE, PS..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면 땡인 사람들이라면 이런 것에 아무 관심이 없겠지만 실제로 물건을 밖으로 버리는 입장에 있다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참고로 대학생 시절 편한 생활만을 영위했던 나도 군대에 와서 버리는 방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길거나 큰 물건을 비치하려면 문이나 창문이 충분히 넓어야 한다. 부피가 큰 물건이나 여러 재질이 결합한 제조품일 경우에는 다른 물건보다 더욱 더 나중에 어떻게 버릴지를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무로 된 가구(대표적으로 소파)를 가져왔으면 나중에 버릴 때 통째로 버릴 수 있는지를 먼저 고려하고, 분해하고 버려야 한다면 못을 뽑을 장도리와 칼을 준비해야 한다. 무거운 고철을 버리기 위해서는 트럭의 도움이 필요하다. 작은 물건을 버리기 위해서는 쓰레기봉투만 집안에 비치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쓰레기봉투를 준비했다면 쓰레기를 버리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봉투를 묶을 투명테이프와 전화번호를 쓸 유성매직이 옆에 있어야 한다.

  정기간행물, 정기적으로 받는 사은품을 비치해 둘 것이라면 최근 몇 주 혹은 몇 달 이내의 것들만 비치한다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저장되는 공간에 계속해서 여유분을 남겨놓으려면 정기적으로 계속해서 들어오는 물건들에 대해 일정 기한을 정하고 물건의 부피 한도를 정한 뒤 새것이 들어오면 헌것을 버려야 한다. 옛것을 계속 축적했을 때 가치를 갖는 재화는 생각보다 매우 적다. 대표적인 것이 문헌자료, 신문, 그리고 골동품 정도다. 그 외의 것은 굳이 축적하여 공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물건은 또한 물건 그 자체로 사용가치를 갖지만 저장과 보관을 위하여 보조적인 도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모든 물건은 저장되는 공간과 사용되는 공간의 두 가지 공간을 파생시키고, 사용되는 공간만 있으면 당연히 집안이 어지러워진다. 집안을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 공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용되는 공간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하다. 책이나 잡지나 신문을 가져왔으면 그것들을 꽂아놓을 수 있는(저장) 책장이나 잡지 스탠드나 커피테이블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버리기 위해 쓰는 노끈이 필요하다. 책장이 있다면 Bookend가 필요하다. A4 문서를 인쇄했다면 클리어파일, 낱장파일 등의 서류가 필요하다. 문구류를 가져오면 연필꽂이가 있어야 한다. 음식이 들어온다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음식을 추가로 조리해야 한다면 주방에 충분한 수의 도구가 있어야 하고, 배달음식이나 가공식품의 경우에도 커피믹스를 만들기 위한 커피포트와 물통, 일회용 용기를 데우기 위한 전자레인지, 세척을 위한 세제와 수세미와 싱크대가 필요하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봉투나 쓰레기통이 옆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보조적인 도구가 없다면 물건을 함부로 가져오면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아무 생각 없이 소비를 하다 보면, 혹은 자신의 돈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소비는 공간적으로 어떤 식의 소비를 하든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 시대의 비자본적, 비가격적 측면을 간과하는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된다. 계획적으로 소비하고 효용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물건을 운용하느냐 (어떻게 돈을 쓰느냐는 당연히 중요하니까)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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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노트는 나의 장기적인 진로인 소셜네트워킹서비스 기획자와 전자정부 연구 및 조정 위원을 준비하기 위해 혼자서 부족한 지식을 허겁지겁 먹어가며 부랴부랴 쓰는 아이디어 노트다. 대학생밖에 안 된 내가 온라인에 쓰는 글이니 전문성과 완성도는 떨어지겠지만 내가 배운 것들을 진정 내것으로 만들고 점점 글의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 훈련을 하기 위해 기획노트 쓰기는 필수불가결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기획노트는 무슨 기획노트야 청소나 열심히 해'[각주:1] 의 상황에 놓여있는 나로서는 정신이 분산된 채 하루하루를 보내기 십상이어서 수시로 꺼내 읽어보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스스로에게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평소 생각해 온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하고자 할 때 하얀 스크린 앞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좌절하려는 순간 꺼내 읽어보아 글빨을 위한 줄기를 뽑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템플릿이 필요했다. 이점을 착안하시오, 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몇 문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한 시간동안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특정 웹사이트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글의 경우 이렇게 글을 써라.
  어떤 웹사이트가 있는데(스샷첨부) 이것은 어떤 기능을 제공하고 어떤 레이아웃을 취해서 이러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이것과 비슷한 다른 사이트 2-3개는 이런 기능/레이아웃/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에 비해 이 사이트는 이런 점이 좋고 이런 점이 나쁘다. 다만 이 사이트에는 이런 기능과 설계가 아예 없어서 내가 만약 이 사이트를 개조한다면 이렇게 하면 좋겠다.
 

실현가능성보다는 최대한 창의성에 치중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글은 이렇게 써라.
  내가 세상을 봤을 때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거나 부족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디자인과 코딩의 웹사이트/위젯/모듈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이렇게 생겼다.(그림, 코드 일부) 이것의 실현가능성은 이러한 사이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모바일 기기/TV/내비게이션/전화 등의 정보통신장비에서는 이러한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을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하면 참 좋겠다. 왜 좋은가?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가적 기능이나 디자인 혹은 연동될 다른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기획노트'에 쓸 글은 크게 이렇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뉠 것이어서 각각의 글에 대한 템플릿을 만들어 보았다. '이러한, 이렇게'에 실제 생각을 집어넣고, 위의 문장 하나는 실제 포스트의 문단 하나가 되게끔 하고, 허전한 곳을 그림이나 동영상으로 채워넣고 귀찮으면 단어에 링크를 걸어놓으면 금세 포스트 하나가 완성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몇 가지 스스로 지킬 기준을 만들어 놓았다.

  •  이미 한국에 널리 알려진 웹사이트의 소개를 재탕하지 말 것 (한국 외의 다른 곳에는 널리 알려졌지만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를 경우에는 적극 소개할 것)
  • 깊은 분석이 들어간 근거/방안/예시 등은 1개 이상만 되면 충분하다. '또한, ...' 식으로 2개 이상의 근거/방안/예시를 대려고 하면 한 포스트를 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한 포스트를 쓰는 시간은 1시간 이하가 되게 한다. (그림 편집 시간과 html 수정 시간을 제외한 순수한 개요 구상과 글쓰기의 시간)
  • 깊은 분석이 없이 단순히 1~2문장으로 소개만 하면 되는 근거/방안/예시는 5-6개가 적당하다.
  • 바로 실용/수익/출품으로 이어지는 결과물(.css, .html, .psd, .jsp, .cpp, .hwp, .ppt 등)은 나의 이익을 위하여 올리지 않는다. (이것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기획노트에 CCL을 붙일 수 있다)
  • IT geek의 시각이 아닌 언론학과 정치학의 시각으로 글을 써서 다른 포스트와의 차별화에 만전을 기하라.



    이 정도만 지키면서 글을 쓰면 자동차를 타고 이미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언제나 경험을 노하우로 승화시켜 스스로가 읽어볼 수 있는 가이드라인으로 액화시켜 놓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자기계발의 촉매는 없다고 생각한다.



  1. 일병 2호봉입니다.푸훗~ [본문으로]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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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물건을 살 때 갖는 규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루에 내가 얼마나 그 물건을 활용하는가, 그 물건이 쓸모를 갖는 시간이 하루 중 몇%인가,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 물건을 쓰게 되는가이다

  관심분야를 좁게 가진 사람은 구입한 물건을 대체로 자주 사용한다. 컴퓨터 매니아가 미니PC와 주변기기를 사고,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새 이펙터를 사고, 주로 하는 운동이 등산밖에 없는 사람이 캠핑 기구를 살 때 그들은 구입한 물건의 활용률을 매우 높게 유지한다. 가격이 만원이든 10만원이든 최고의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나 또한 평소 하는 일과 여가의 범위가 좁고 깊어서 사는 물건들의 종류가 절대 다양하지 않다. 내가 얼마를 벌어서 얼마를 쓸 수 있느냐에 따라 라이프스타일의 다양성이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는데, 확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나의 관심사도 주로 고정되어 있다. 나는 보다 저렴한 물건을 사서 몇천원을 아끼느니 보다 자주 쓸 물건을 선택해 구입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자주 안 쓸 물건은 아예 안 사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구입하지 않을 물건들을 정해 나가면서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오히려 더 좁고 깊게 조형하고 압박해 나간다. 그렇게 하면 내 집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내 전문적인 영역에 관련된 물건이 되며 나의 비전문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스파를 무진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호화로운 몇백만원짜리 스파 욕조를 집에 갖다놓는 것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매니아가 아닌 이상 스파는 이미 설치되어 있는 영업점을 찾아가 하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홈시어터, 스키용품,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가끔 이용할 바에야 다른 곳의 물건을 돈 주고 잠깐 빌려 쓰거나 대체재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나는 활용률이 얼마 이하면 구매를 금지하도록 속으로 절제를 위한 규칙을 세워 놓는다.

  앞서 말한 논지를 이어나가면 자신이 관심 갖는 모든 일과 여가에 관련된 물건을 집에 갖다놓아 집 안에 불필요하게 전문적인 물건을 들여놓는 사람이나 취미가 다양하다고 그 취미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사유화하려는 사람은 집안에 물건을 썩혀두는 사치스러운 사람이다. 특히 장식 목적으로 책을 사놓는 사람이 나는 제일 혐오스럽다. 빌려 쓸 수 있는 가장 쉬운 재화가 책이 아닌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한 단초가 바로 지나친 구매로 인한 필요 이상의 사유화와 그에 따른 수준 이하의 활용률, 사후 관리의 소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추가적 비용과 비용에 따른 국가적 GDP의 손실이다. 물건의 수명을 닳게 하는 정도가 미미한 이상 그 물건의 활용률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만족감, 즉 총 효용을 최대화하기 위한 사전 단계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렌탈 업자와 공공시설, 벼룩시장, 그리고 카풀과 같은 사회적 약속은 물건의 활용률을 높여주어 낭비를 막는 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 또한 내 물건이 아닌 물건들을 삶 속에서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로 내 물건일 필요가 있는 물건에는 돈을 아낌없이 지불한다. 주위에서 비싸다고 핀잔 주는 물건들이 몇 개 있어도 나의 월 지출은 주위 사람들과 비슷하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소득이 늘고 여가 시간이 늘어도 이러한 소비패턴을 나는 계속 유지해 나갈 것이다. 결국 작은 집, 작은 차, 적지만 값비싼 물건들이 들어가 있고 내가 소유한 물건들을 종류별로 모았을 때 묶음의 수가 서너 개를 넘지 않는 모습이 내가 꾸는 미래의 소비생활의 모습이다. 상당히 개인주의적이지만 공적 영역을 넓게 활용하기 때문에 중도 좌파 성향에 가깝다. (렌탈업자가 국유화된다면 완벽히 똑같다) 북유럽의 소비패턴을 따라가려 하는 것 같다. 남에게 미안한 마음 갖지 않으면서 비싸게 놀고 싶은 마음은 앞으로도 쭉 버릴 수 없을 것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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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와 책이 지식을 기록하는 가장 훌륭한 도구였던 시절,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높다 하는 사람들의 연구 대상과 지식의 범위는 그들이 사는 지역과 국가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에 한정되었다. 건축, 법률, 경전, 의술, 문학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능통해 문과와 이과의 구분 없이 통합적 지식경영으로 큰 업적을 쌓았던 다산 정약용 선생마저도 일본에서 대충 본 것으로 '땡'이었던 서양식 기어 메커니즘과 건축 장비에 대해서는 함부로 코멘트를 남기지 못하고 결국 한국산 기중기를 새로 만드는 우회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글만 가지고 지식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고, 언제나 그림과 소리와 영상은 저장된 매체가 아닌 현실 속의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와닿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역과 국가 범위에서만 멀티미디어와 텍스트를 조합한 학문 연구와 예술 활동이 이루어졌다. 외국으로 나갔다 온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의 범위가 지역과 국가에 한정되었다.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모든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 시대는 사진과 영상을 지역과 국가 간에 인쇄하고 전송하고 배포하기 시작한 시대부터다.
 
  나는 언제나 영상이 부족해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빈 속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허접'하다고 생각해왔다. 어떻게 보면 자원과 기술이 부족하여 그렇게 허접해진 경우가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만, 지금의 시대에 살면서 다른 나라의 생생한 영상이 밥 먹듯이 당연한 나로서는 불과 20년 전까지의 몇몇 풍경들이 우스울 뿐이다.
 
  옛날 조선 시대의 현학적인 시인들이 묘사하고 화가를 시켜 그린 시와 그림들은 그 안에 소개한 동식물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먼 나라에 아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시인들이 인터넷으로 중국 현지촬영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보다 현실적인 묘사도 같이 아우를 수 있을 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상상만 할 줄 아는 것은 발전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분명 잘못되었다.

  20년 전 나의 삼촌, 이모뻘 되는 사람들이 읽었던 아동용 그림책, 무명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의 삽화가 그려진 그 번역서에 수록된 그림들을 보면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흔히 아이들이 읽는 소설은 (아직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에서 창작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20년 전 한국의 삽화가들은 이 나라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해 지금처럼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생생하게 학습하지는 못했다. 요즘 사람들은 고해상도의 사진 자료가 섞인 외국의 복제, 민속문화, 건축, 도시환경, 자연환경에 대한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어서 지금 나오는 아동용 그림책의 삽화에는 영국이면 영국, 프랑스면 프랑스의 지역 모습과 풍토가 생생하게 그려져 나온다. 그러나 사진과 영상 매체를 못 보았던 가난했던 시절의 책에는 디테일을 제거한 티셔츠 수준의 옷과 빵, 스프, 고기, 과일과 우유 등으로 정형화된 식사 장면,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했던 삼각형 지붕의 단순한 콘크리트 집 따위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한국산인지 영국산인지 그 국적이 명확하지 않은 그림으로 책을 채워넣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60년대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영문학 연극 동아리와 로큰롤 밴드의 완성도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 모임의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들은 다음 저 먼 나라의 문화를 모방할 수 있었을까? 연극 동아리에 소속한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원문을 어느 정도로 깊게 이해했으며 무대의 의상과 조경을 얼마나 현지에 맞게 제작했을까? 그리고 로큰롤 밴드의 사람들은 카피곡을 연주할 때 얼마나 대상과 똑같게 기타 주법을 구사하고 무대매너를 따라했을까? 제대로 된 정교한 모방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된다. 모방을 통한 창조는 분명 좋은 것이지만 모방, 즉 학습과 견문이 정교하지 못하면 창조는 주체성이 없는 이상 모두 다 허접해진다.

  그래서 카메라와 캠코더 그리고 컬러인쇄 기술은 학습과 견문을 정교하게 만들어주면서 지역과 국가 간 이질감을 극복하였고, 그래서 대단한 발명품이다. 나는 도서관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책과 인터넷을 통해 웬만한 전 세계의 지식을 모두 다 열람할 수 있다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매우 감사하고 기쁘다. 그래서 그 생각으로 더 열심히 새로운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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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나는 책이 가지고 있는 글자라는 한계 때문에 불안을 느껴 왔다. 글을 읽고 작가가 의도한 영상을 완벽히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핵심 인물들과 그들이 지금 처한 상황, 사건의 전개 양상을 살점이 부실한 생선 요리처럼, 다운로드를 받다 말아 깨져서 나오는 불법 영화 파일처럼 그렇게 불안전하게 되살릴 뿐이다. 물론 이러한 한계가 문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독서를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해 볼 때, 한계를 최대한 이겨내고자 하는 독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최고의 독서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환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강변에 있거나 호수를 끼고 산을 등진 곳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노벨상을 탈 만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시인들이 안개낀 곳의 정자 위에서 혹은 배를 타면서 숲과 꽃나무 사이로 시구를 지어 보냈던 것과 같이 정신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의도하고자 한 생산물에 어울리는 환경이 감싸주고 받쳐주어야 한다.

  환경은 나에게 특정한 분위기와 감정을 부여한다. 환경이 나에게 준 것들을 가슴에 품고 그것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책을 읽어보면 책의 글이 마땅히 되살려야 할 풍경을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의 환경의 도움을 받아 펼쳐내고 그려낼 수 있다. 무거운 분위기의 책들 -정치사의 폭풍 속에서 힘들게 이고 저곳 떠도는 망명자의 이야기, 감금과 독재 속에서 저항하는 남자의 이야기, 쓰라린 과거의 가족사를 덮기 위해 살인자로 변해 도시를 누비는 운명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 등- 을 한여름 시끌벅적한 야외수영장 비치 의자에서 햇살을 받으며 몰입하여 읽을 수 있을까? 혹은 '냉정과 열정사이' 나 '도쿄 타워'같은 도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적적한 컴퓨터실 안에 앉아 급하게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을까? 읽는 건 가능하겠지만 상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불균형감을 조장하고 정작 글이 그려내는 장면은 생생하고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 내가 책을 읽는 장소가 아늑한 집 거실인가, 사람 북적이는 지하철인가, 우중충한 카페인가, 단출하고 냉랭한 독서실인가, 따뜻한 조명과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있는 만남의 장소인가에 따라 내가 손에 집어야 하는 책은 달라져야 한다. 책을 집은 손 말고 다른 손이 심심치 않게 건드리는 과자나 음료도 책의 분위기를 눈 앞에 잘 녹여내기 위해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낮과 밤, 더움과 추움, 햇빛과 구름 등의 주변 날씨를 보고 나서 그에 어울리는 책을 집어 읽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 나는 밀란 쿤데라의 '향수'가 가진 음침하고 짙은 그리움의 정서와 조국과 타지 사이의 방황이 가져오는 권태, 주변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외로움,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집합을 잘 녹여낼 파리와 프라하라는 두 도시의 이미지 (반드시 대조를 통해서만 명확해진다. 대조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는 서방 도시의 이미지를 멋모르고 드높이고 아끼는 하찮은 사대주의 무리의 일부가 될 것 같아서 말한다) 를 농도 있게 읽어내기 위해 꼭 밤에만 커튼을 친 독서실에서 읽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인디 그룹 '페퍼톤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집을 작업하면서 항상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화창한 날에만 작업실에 햇빛을 들여와 합주와 믹싱을 하고 FX를 넣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또다른 소설 작가도 서울에 사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쓰기 위해 명동의 연인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특히나 북적일 때만을 골라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카페의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음악을 만들거나 글을 쓸 때에도 환경은 몰입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원리가 비발디와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영감'이다. 수많은 전례들이 이를 증명한다.

  농도 있게 몰입한 결과로 나온 창작물은 분명 조금 더 창의적이고 비범하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스 와인이나 로제 와인, 코나 커피 등과 같은 독특한 음료들은 모두 제작하는 시기가 수시가 아니라 특정한 기간이며 공정 또한 독특하다. 흔해빠진 환경에서는 가치 높은 산출이 나오지 않는다. 만원짜리 공장제 와인이나 도처에 있는 자판기 커피 등은 그 만드는 방법도 흔하고 그 음료를 받아줄 분위기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에서 마실 수 도 있고 퇴근 후에 마실 수도 있다. 굳이 장식이나 음악 등을 이용하여 레스토랑이나 카페처럼 시상을 주입할 필요가 없다. 음료 중에서는 이렇게 환경과 별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겠지만, 시상과 분위기를 가득 품고 있는 책은 언제나 각각의 책 한 권이 하나 혹은 한 묶음의 환경과 연결관계를 맺고 있다. 누군가 써 놓은 한 편의 글도 각각 어떤 환경과 일대일 대응을 한다. 음료보다 책과 글을 드높이는, 물질보다 정신을 드높이는 사고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책과 글은 그만큼 완벽히 맛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음료를 맛볼 줄 아는 사람들보다 현저히 적다.

  그러니 책을 읽을 때 어떤 책인가에 따라 환경을 바꾸고, 혹은 지금의 환경에 따라 읽을 책을 바꾸는 유연한 습관은 어떤 책을 읽던지 그 책의 몰입도를 높이고 생생한 기억으로 간직하게끔 해준다. 마치 한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와 뚝배기를 쓰고 양식을 먹을 때에는 코스를 나누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처럼 책이라는 마음의 양식도 잘 먹는 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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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항상 일을 잘하고 있을 때 더 잘해야 한다, 혹은 지금은 잘하지만 언제 실수를 낼지 모른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싫어했다. 일을 어느 정도까지 하면 잘 하는 것인가라는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이 불분명한 기대치 혹은 미래에 대한 주의깊지 못한 추측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므로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척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 여러명의 종합적인 의견을 수렴했을 때 그 결과물은 각각의 상대적 평가 중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군에서는 그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군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미터기가 아니고 '궤도'다. 궤도 위에 올려놓여 있기만 한다면 정상으로 판단되고, 그보다 더 좋아도 상관없지만 절대로 그보다 나빠서는 안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더 잘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여유있게 지내도 되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적인 최소 기준선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절대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조직의 모습이다. 과정이 아닌 결과를 통해 판단하되 결과 이후의 모든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궤도를 벗어난 이들에게는 호된 질책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직 구성원들을 판단하게 되면 심리적 요소에 의해 집단의 분위기를 요동치게 하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이고 평온한가 아니면 이상하고 불안한가, 이 두 가지로 명확한 이분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집단의 분위기라는 것을 경기 호황이나 침체의 곡선처럼 생각하느냐 정상과 이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추측이 사라진다는 점은 이분법의 크나큰 장점이다.

  이분법은 공산주의에 어울리는 평가 척도이다. 아무리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더라도 받는 월급과 식량은 평등하다. 남들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기준에 미달한 것이므로 회의를 통해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는다. 그런데 군은 공산주의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이 같고 같은 종류의 물품을 사용하며 집단으로 일한다. 청소는 모두가 깨끗이 해야 하고 경례와 같은 기본적인 예절도 모두에게 요구된다. 물자가 남으면 좋은 것이고 부족하면 큰일난다. 일을 다 끝낸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며 그냥 '정상'일 뿐이다. 비교의 심리가 크나큰 죄악으로 느껴지는 체제 속에서 군은 존재한다.

  한편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시장은 그와 다르다. 호황과 침체는 개인들의 상황이 모두 다르고, 개인들이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여 우열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것을 찾고 나쁜 것을 쫓아내려 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기대하게 되거나 혹은 더 나빠질 것을 우려하게 된다. 개인을 보살펴줄 조직의 규칙이나 제도가 군만큼 온몸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과연 군 안에서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지를 감히 규정할 수 있을까? 한편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이 아닌지는 얼마나 쉽게 정의할 수 있는가. 궤도를 벗어난 롤러코스터는 조치 후 다시 궤도에 올려놓으면 되고, 이미 궤도를 돌고 있는 것들은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상관없이 궤도 위에 있다는 것만을 유지하면 되게끔 현상 유지를 추구하면 된다.

  나아가 정상과 이상의 이분법을 통해 조직 구성원들을 바라보며 그에 따라 정상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조치하는 부지런함은 구성원들의 평가자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지속적인 확인과 조치로 현 상황을 항상 기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조금만 실수가 생기기 시작해도 곧 큰 문제의 상황, 즉 정상이 아닌 이상에 직면하게 된다. 상황이 점차 나빠진다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나빠지든 많이 나빠지든 두 경우 다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 틀이 평가자들에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동안 가만히 있었으니 이제 애들을 잡아보자'와 같은 험악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가자들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기대와 추측을 금하고, 조직 구성원 각각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무 중 정상 궤도를 벗어난 것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여 불안감을 없애야 전체적인 조직이 순탄하게 움직일 수가 있다. 위의 사항을 따르지 못하면 그 때부터 조직 안의 절대적 기준은 희미해지고 조직은 너무 풀어지거나 너무 험악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모두가 다 같이 잘 하자는 이상을 좇아야 한다.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기준 이상을 달성해서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성취의 연속이 바로 군 생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정상과 이상의 이분법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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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무리 그날 좋은 일이 있어도, 대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어도,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해도 경례를 받아주는 선임들의 60%는 무표정이거나 우울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얼굴로 경례를 받아주게 된다. 경례가 너무나도 기본적인 습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 보통의 의례가 경례자와 수례자 두 사람의 기분과 태도 그리고 속마음에까지 영향을 주기는 힘들다. 선임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거나 둘 사이에 사고가 터져서 사이가 멀어졌다면 경례가 아닌 비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그리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수례자의 표정이 언짢아보이면 당장은 그 상황을 개선할 어떤 방법도 없음을 알고 일단 경례를 마무리하여 원래의 마음과 행동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불필요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평소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후임들에게 오해를 사는 선임들도 꽤나 있다. 그들은 나에 의해 직접적인 악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후임의 입장에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표정이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습관조차 지켜주지 않는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선임의 평소 어두운 표정은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신 또는 후임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고칠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경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감이다. 불필요하게 주눅들지 않고 내가 먼저 목소리를 크게 하고 눈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의 태도에서 상대방의 태도와 표정은 중요하지 않으며, 경례 중에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이다. 자신감 있게 경례하는 후임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렇다고 경례 하나로 평소의 잘못이 용서된다거나 평가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례는 기본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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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주기만 한 사람, 헌신적으로 계속해서 매달린 사람, 그에게 곧 들이닥칠 무서운 기분은 자존심의 상처와 무기력한 자아의 체험이다. 하지만 그 기분이 피부에 와닿도록 하는 원인에는 자신에 기인한 것보다 주위 사람들 또는 환경이 주는 외부 시선의 요인이 더 크다. 남의 눈치를 보는 순간 그래도 이만큼 주었으니 이제는 받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보상심리가 싹트고 그에 따라 왜 나에게 문자나 편지가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남의 눈치에 신경쓰지 않으면 보상심리 또한 작동하지 않는다. 눈치를 보지 않게 만듦으로써 자존심의 상처는 상당량 줄일 수 있고 그에 따라 나의 일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

  남의 눈치에 신경쓰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랑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숨겨야 하고 되도록 화제로 꺼내서는 안 된다. 현재 내가 좋아하거나 작업 중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내가 쌓고 있는 공적의 세부적인내용을 설명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불필요한 말이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보답해주고 열정적으로 응답하여 그 사람이 남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고 내 자부심도 높여주기 전까지는 금물이다. 나의 사랑 가꾸기와 헌신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람이 나의 헌신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듣고만 있는 경우에도 그러한 경청은 나를 방해한다. 나 자신이 타인의 경청을 인지한 다음 스스로에게 헌신을 주저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공든 탑은 혼자 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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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에 사람의 심리는 예외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익숙한 동네 앞 술집에서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 나의 마음과 듣도보도 못한 도시의 한 구석에서 누군가의 부름에 달려나갔을 때 내 마음이 편한 정도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 마음이 편한 정도는 사람이 다양한 화제를 꺼내고 풍부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데이트를 할 때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때나 직장 상사들과 회식을 할 때나 어느 종류의 만남이든 만남의 성격은 사람 개인이 환경의 영향을 받은 심리와 그에 따른 대화의 폭에 따라 결정된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만나는가, 즉 시간의 요소는 만남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대화를 하는 사람이 만남에 참여할 시간이 넉넉한가 촉박한가, 압축적인가 지루한가, 낮인가 밤인가 등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 서로가 나누는 이야기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남녀가 데이트를 주제로 만났는데 둘 다 1시간 뒤에 각각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예정해 놓았다면 둘이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정보교환 정도에 그칠 것이다. 여유로움을 잃어서 가장 달성하기 쉽고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정보교환이라는 목적에만 치중하도록 두 사람의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의지만으로는 그 마음을 쉽게 되돌릴 수 없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만나기로 예정해 놓았다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해져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카페나 레스토랑이나 술집에서 만나는가, 관광지나 공원이나 강변에서 같이 있는가 등의 장소의 요소는 시간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 만남의 목적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고, 그만큼 장소를 제안한 사람이 적절한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책임도 높아진다. 시간은 만남 외의 개인들의 일정에 제약을 받지만 장소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같이 모여서 어떤 특정한 활동을 하는지를 장소가 결정하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도 장소에 큰 영향을 받는다. 놀이공원에 가면 서로가 즐겁게 놀면서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 목적이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고백장소로 가면 고백이 목적이 된다. 언제나 만남을 제안한 사람이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할지를 먼저 생각해 본 다음 그 이야기를 늘어놓을 심리적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장소를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전혀 종속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감정을 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접대문화, 다도, 모임공간과 같은 인공물이 등장하여 환경을 제어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아온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의 요소를 만남의 목적과 사람들이 할 이야기와 행동을 예견하여 설정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한 인간관계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실패했을 경우 관계의 증진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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