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하게 되는 일, 발생 빈도가 높은 일은 쉽게 접근해서 처리하게끔 조치를 취한다. 자주 전화를 걸기 때문에 앉은 자리에 바로 전화기가 있고, 자주 쓰지 않는 핫라인 전화는 먼 곳에 비치해 두었다. 바탕 화면의 바로 가기나 빠른 실행은 자주 가는 사이트나 실행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구성할 수 있다. 웹사이트에서 댓글은 글 아래 바로 위치해 있어서 댓글을 달고 싶을 때 바로 달 수 있다. 이처럼 일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만들어 놓으면 소요시간이 줄어든다.
하지만 소요시간이 짧기 때문에 일의 접근성을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이 쓰는 수첩은 짧은 시간 동안의 단발성 일 처리를 목적으로 하므로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다. 전화를 받고 바로 메모를 할 때, 내일의 20분 동안의 일정이 갑자기 잡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전화번호를 알려줄 때, 검색창에 입력해보아야겠다는 키워드가 떠올랐을 때 잠깐 수첩을 펴고 적고 덮는 것과 같이 수첩은 소설책처럼 긴 시간 동안 연이어서 들여다보는 물건이 아니다. 이와 같이 이 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일의 접근성이 좋아서 소요시간이 짧다는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소요시간이 짧기 때문에 일의 접근성을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주 하지는 않지만 소요시간이 짧은 일 또한 접근이 용이하도록 해야 함은 그 일을 함으로써 생산하는 양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잠깐이면 될 일을 수많은 준비 절차와 시간을 거쳐야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본론보다 서두가 더 길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에 따라 오는 좌절감은 상당하다. 시간을 꽤나 많이 낭비했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더불어 나는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이라는 죄책감도 느낄 수 있다. 알맹이보다 껍질에 쏟는 시간이 더 많으면서 그래도 껍질은 까고 있으니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혹은 이 일이 충분히 보람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타성에 젖어 발전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싶다.
또한 자주 하지 않는 일이라도 접근성을 좋게 만들어놓는 사전 환경 수립은 불필요한 공간이나 에너지를 잡아먹도록 하지 않는다. 사전 환경 수립이란 게 별 거 아니다. 수첩을 항상 들고 다니기, 빠른 실행에 넣어둘 파일을 잠깐 열어볼 파일로만 추려서 등록하기, 여럿이 쓰는 컴퓨터에는 서로 약속한 대로 폴더와 파일 조직을 만들기 등 공간이나 에너지의 추가적인 소비는 없다. 서로가 같은 문서를 여러 컴퓨터 안에 저장해 두어서 불필요하게 하드디스크 공간을 쓴다던가(데이터베이스 안의 데이터 중복과 같은 문제) 어느 파일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파일 검색을 돌려야 하는 등의 시간적 낭비는 줄어든다.
생산하는 양이 미미한 이유 외에 또 다른 이유로는 일의 빈도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손님이 와야만 하게 되는 일들, 예를 들어 대여장부를 기록하거나 창고의 물건을 빼서 가져다 주거나 하는 경우 하루에 손님이 몇 명이 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분명한 건 대여장부 기록이나 창고의 물건 빼기에 소요되는 시간이 1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여장부를 꽁꽁 숨겨 놓거나 창고를 잠가 놓고 열쇠를 저 먼 곳에 두는 바람에 1분도 안 걸릴 일을 3분 걸려 처리한다면 그것은 비효율이다.
사실 사소한 일 하나까지도 수많은 준비과정을 필요로 하는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 놓은 수많은 비밀번호, 규칙, 설정, 조절 장치와 같이 절차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한 장 찾아서 공문서의 hwp 파일에 첨부하고자 한다면 일단 인터넷 PC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고 CMOS와 윈도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인터넷 로그인 프로그램에 로그인을 하고 인터넷PC 전용 USB메모리를 사용하여 사진을 저장해야 한다. 그 다음 그 USB 메모리 안의 내용을 다른 PC를 거쳐 공문서를 쓰는 PC로 복사를 총 3번 해 와야 한다. 50킬로바이트의 사진을 한 장 가져오는 데에도 10분씩 걸린다. 겨우 이거 하는 것 가지고 이렇게나 의미 없는 많은 절차를 밟아야 하느냐는 푸념이 하루에 대여섯 번씩 터지지만 규정에 따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규정으로 금지되지 않은 영역의 소요시간이 짧은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환경을 바꿈으로써 빠른 접근성을 확보하도록 만들 수 있다.
반면 일의 소요시간이 긴 경우에는 준비과정이 있어도 상관없다. 우선 소요시간이 긴 일은 그 일을 하기 전에 충분한 검토와 계획을 수반한다. 언제 누가 있을 때 어느 장비 혹은 도구를 사용하여 그 일을 해내자는 시나리오가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일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아 중간에 갑작스럽게 취소되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를 테이프에 백업하는 작업이 계획되어 있고 백업을 하기 위해 관리자가 서버의 초기 설정을 명령어를 통해 바꾸고 있는데 갑자기 백업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즉 준비 과정과 절차가 길더라도 그 과정과 절차에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분하더라도 준비는 꼭 필요하기 때문에 싫지는 않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사진을 인터넷에서 퍼오기 위해 인터넷 PC를 켰는데 사진이 필요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솟구친다. 그 외에 인터넷으로 블로그를 작성하는 일도, 개인폴더의 엑셀시트에 읽고 싶은 책을 적어넣는 일도 소요시간이 길기 때문에 준비 과정의 클릭 수가 많아도 상관이 없다.
소요시간이 짧으면 접근성을 좋게 만들도록 노력하고, 소요시간이 길면 접근성이 좋지 않아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일상 업무를 하나 하나 생각해 보면서 불필요한 과정으로 소요시간을 늘리고 있지는 않나 점검해서 짧게 끝낼 수 있는 일들을 진짜 짧게 끝낼 수 있도록 물건을 옮기고 파일을 옮기는 사소한 작업만 해준다면 보다 피곤하지 않은 업무가 가능해지며 의미있는 시간들로만 하루를 꽉 채워나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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