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좋아하는 그 친구를 위해


여성들에게 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육체를 자각하는 방법으로, 이런 의미에서 자기-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응답에 응한 여성들에게 육체에 대한 의식은 종종 육체가 특별한 표현수단이라는 의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들은 춤을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언어로 체험한다... 게다가 설문에 응한 여성의 과반수가 이러한 활동은 원초적 에로티시즘, 또는 원초적 자기-에로티시즘(auto-érotisme)을 일깨우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육체에 대한 의식은 쾌락으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저도 제가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느끼죠... 춤은 내 자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해요" "...자신에 대한 탐구, 나 자신을 육체적으로 발견하는 것이죠" "그것은 육체를 통한 감각.. 일종의 말하는 방식이지요. 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죠" "일종의 자기-주장입니다..." "나는 춤추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내 자신을 자각할 수 있지요. 언젠가 2년가 그만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계속 무언가 모자란듯한 기분이었어요.. 춤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에요"


- 새로운 스포츠 방법의 목록 - 리브레리 알터나티브 출판사와 파라렐레즈 출판사에서 공동 출판한 『방법의 목록』에서 발췌


상처를 발견한 걸까. 상처를 발견한 다음에는 더 춤을 추고 싶어지는 걸까.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욕망은 상처를 더욱 강하게 느끼고 싶은 욕망과 섞여 있다. 어쩌면 다친 채로 지금의 슬픈 자아를 계속 끌고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누릴 수도 있다. 온몸이 성하고 편안한 상태에 있을 때 심심함과 불안감이 찾아오는 적이 있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춤을 좋아하는 그 모습은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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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을 한다면 음식점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 ⎡구별짓기⎦는 문화자본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수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홍대와 삼청동과 가로수길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었다.


사치품이나 문화예술관계 상품을 취급하는 장인이나 상인, 기성복 '부띠끄'의 경영자, '유명 메이커' 옷을 싸게 파는 의류점, 이국적인 옷, 액세서리나 민예품을 파는 상인, 레코드점, 골동품점, 실내장식가, 디자이너, 사진가, 혹은 레스토랑 경영자나 '카페' 경영자, 지방의 도기상, (학교를 나온 뒤에도 학생생활의 특징인 오락과 일을 혼동하는 상태에서 전투적 태도militantisme와 도락적道樂的 태도dilettantisme를 계속 구별하지 못하는) 아방-가르드적 서적상 등 문화적 재화와 서비스 판매자들은 모두 성격이 애매한 직업을 (따라서 판매의 성공은 최소한 상품의 질이나 성격만큼이나 판매자와 상품의 미묘한 차별화에 좌우된다) 문화자본에 대한 최대 이익을 되돌려 받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따라서 문화자본에서는 기술적 능력보다는 지배계급 문화와의 친밀성이,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훌륭한 취미를 가진 사실을 과시할 수 있는 기호(記號)나 표식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처럼 집중적으로 문화적 투자를 하는 새로운 유형의 장인과 상인은 가족에 의해 직접 전승된 문화유산으로부터 이윤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학교제도에서 배제된 지배계급의 자녀들에게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서울 내의 번화가에는 위와 같은 거리가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위에서 언급한 취향과는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위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문화적이다라고 하는 상점들이 모여있는 지역이 곧 '장champ'임을 인식하고 있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인터넷을 통한 광고와 입소문은 장이 한 동네에만 머무르지 않고 널리 확산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는데, 문화자본을 이용하는 사업의 이윤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남기려면 지금의 적은 수요를 고려했을 때 더이상 문화자본 시장의 공급을 늘리기가 조심스럽다.


경쟁적으로 홍대와 삼청동과 가로수길의 옷가게, 레코드가게, 악기가게, 디자인샵, 골동품점이 2년마다 모습을 확 바꾸고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키는 전통을 유지하지 못하는 걸 보면 한국에서는 문화자본을 이용한 산업이 많은 수요를 불러오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 사람들의 수많은 돈은 아울렛으로, 인터넷 쇼핑몰로, 애플스토어로, LTE 통신비로, 쾌적한 시설의 노래방으로, 스크린골프장으로 몰리고 있다. 그 돈은 소수를 엄청나게 배부르게 하였으나 문화자본의 유용성을 매우 떨어뜨렸다.


도대체 구로, 노원, 관악, 강북, 은평 지역에 문화자본을 이용한 산업을 뿌리내리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원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이 고민을 해왔고, 임대료가 비싸고 수요도 포화되어 있을까 걱정이 태산인 홍대/삼청동/가로수길의 자영업과는 차별화되어 한곳에서 오래 정착하며 꾸준한 고객을 모으는 아이템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외국인을 사로잡는 전통, 그중에서 고궁과 한옥 외의 전통적인 것이 무엇인가?

 외국인이 한국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을 최대 10만원, 가볍고 부피가 작아서 캐리어가방에 넣고 아무 고민 없이 귀국할 수 있는 것으로 판매하는 것은 어떨까. 삼청동은 비싸고 인사동은 뻔하다. 국립고궁박물관의 기념품점처럼 적절한 가격의 고품질이면서도 전통이 느껴지는 물건을 미소짓게 하는 인테리어와 직원들이 있는 곳에서 파는 엄청난 경쟁자도 있다.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은 먹을 것이지만, 먹을 것은 워낙 농수산물 시장과 재래시장으로 물류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다. 특정 국가에서 온 식료품 상점은 특정 국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이미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서울은 이미 글로벌해졌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서울에서 탄생한 서울스러운 전통 문물에는 익숙하지만 전주, 경주만 가더라도 새로움을 느끼고 지역 특산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 물건을 어디서 구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를 것이다.

 마니악한 취향의 지역 특산품을 고품질로 엄선하여 주기적으로 서울 내의 부띠끄샵으로 배송하여 전시하고 그를 내국인과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건 어떨까. 그 지역으로 직접 가야만 살 수 있는 것을 사려면 교통비와 시간이 들어가는데 그것을 절약하게 해주는 것이다. 삼국시대 디자인이 녹아있는 액세서리라면 잘 팔리지 않을까 한다. 이를 위해 삼국시대에 관련된 역사를 배운 다음 그와 연관이 있는 인테리어로 부띠끄샵을 꾸미고, 진열된 상품들이 박물관처럼 정지해있지 않고 현대 여성들의 화장대와 소통하도록 한다면 상자와 쇼핑백으로 포장을 잘 해주고 선물용으로 구입했을 때 추가적인 장식을 해주고 이 액세서리를 드라마나 영화에 사용한 사례를 사진으로 알려주고 모델에게 요즘 옷과 삼국시대 사극에 나올 법한 옷을 모두 입혀주어야 한다. 

 우리가 영국이나 프랑스에 가서 도자기용품이나 수제 향수나 마카롱을 구입하고 오는 것은 그 나라의 전통이나 과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기념품으로 과거의 흔적이 이어져온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여행이 과거의 흔적을 돌아보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행을 하는 목적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만 있으면서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산물인 서울만을 보고 쇼핑만 하고 놀고 먹고 돌아가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의 과거가 어땠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유적과 박물관도 함께 둘러본다. 서울을 방문하는 목적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을 때 쇼핑과 유흥의 비중이 감소하고 문화유적 답사나 옛날 문화 체험의 비중이 늘어나면 그와 동시에 상품 부띠끄샵과 같은 자영업 매장의 수도 늘어날 것이다. 외국인들이 '후진 나라 그냥 싼맛에 놀고 만다' 라는 생각에서 그 나라의 이미지가 좋아서 이미지를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가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환한다면 한국의 자영업은 외국인들의 그러한 마음으로 인해 한층 더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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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됨

칼럼/관계 2013. 9. 20. 14:08

 기업 회장, 외교관, 예능인, 그리고 그 외에 우리가 싹싹하고 말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래의 글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세련됨이 무엇인지를 규범과 같이 소개하는 17세기 프랑스 에세이다.


사교계 사람들은 모든 일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진짜 사교계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전문적인 장인(匠人)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멋있는 신사라면 자신이 하려는 일에 완벽을 기하기보다는 그러한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는 생각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고 멋진 생활 습관을 가진 데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여유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어려운 일에 휩쓸리더라도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은 자신에게는 별 일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레, 『매력에 관해』


 전문적인 장인을 엔지니어로, 사교계 사람을 컨설턴트라고 하면 지금의 버전이 될까?

 하지만 그 둘의 접점에 설 수 있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세련됨 역시 위에서 말하는 멋있는 신사의 자질일 것이다.


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글이 있었으니 소개해볼까 한다.

새로운 문화 매개자들(문화활동 지도자, 놀이와 문화의 지도자 등)이 이루어낸 혁신적 방법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학교교육 방식을 거부하고 있는데, 기성 쁘띠 부르주아지계급이 학력자본은 상대적으로 많지만 문화적 유산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인 반면,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예술가도 이들에 포함된다)는 문화유산은 많은 반면 학력자본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사실을 간파한다면 그 이유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한 지식을 시험해보면 파리의 초등학교 교사들(지방의 소규모 초등학교 교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들은, 언제나 학교를 통한 취득 방식에 따라 다니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움, 절도(節度)에 대한 의식(意識)과 같은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후각(Flair) 더욱이 지식을 덮어서 감추기 위한 허세 등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함을 알 수 있다. .... 아주 특징적인 모습이나 외양, 언행, 자세, 독특한 말투나 어투, 매너나 상투어를 갖고 있는 한 리셉션이나 회의, 인터뷰, 논쟁, 세미나, 위원회, 협의회 등 오늘날 가장 중시되는 시장에서 그 나름대로 하나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최종철 옮김, 새물결, p. 178.


 회사 채용을 할 때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형 직원을 채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학점을 별로 안 보고 면접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난 기업이 CJ E&M이었다) 아울러, 기성 쁘띠 부르주아지계급과 같은 사람을 원하는 곳에서는 학력이 높을수록 좋을 것이다. (고시를 보는 모든 직종과 대학원 이상의 유명 대학 학위를 선호하는 기업 및 연구원) 자기 성향을 알고 그에 따라 내가 취득할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그렇게 목표를 달성한 나를 원하는 일자리가 곧 내가 가고 싶은 일자리임을 보장하기 위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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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ign Policy Making in the US

Roger PERSICHINO

December 6, 2012

                                                    

 

 

 

 

 

Comparison of US Administration’s response to North Korea after May 2009 with the Administration’s initial foreign policy plan

            

Dongwook LEE

100040097


 

Usage of nuclear tests for North Korea is a signal where it wants to make neighbor countries and political counterparts reassess their prevailing strategies. The North was insisting that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would require the United States to disengage from its security commitments in Northeast Asia, remove its nuclear umbrella from South Korea, withdraw US military forces from the peninsula, and develop a US-DPRK strategic relationship paralleling the US-ROK alliance.[1] This paper tries to find out the difference between foreign policy to North Korea proposed by President Obama for his election campaign and what Bush was holding on till the end of his term, and the difference occurred after North Korea nuclear test. What is the most notable factor that formed Obama Administration’s foreign policy measures in response to the North Korea nuclear test? Which factor had the most influence just after two military provocations?

The United States  was pursuing three primary denuclearization objectives: to convince Pyongyang to relinquish its fissile-material inventory; to preclude the possibility of additional fissile-material production by the North; and to ensure the DPRK’s full compliance with its non-proliferation commitments.[2] According to US think tanks and policy analysts, the United States has four options in dealing with a nuclear North Korea:[3]

1.      Give economic aid and a security assurance if North Korea dismantles its nuclear program.

2.      Use a military strike against North Korean nuclear facilities.

3.      Let North Korea develop nuclear weapons.

4.      Starve the North Korean regime of money.

The ultimate goal remains nuclear abandonment by the North, but a more practicable objective is risk minimalisation, both in relation to the DPRK’s extant weapons and in any potential transfer of technology and materials beyond North Korea’s borders.[4] The United States has not yet deemed North Korean nuclear weapons a direct threat to US national security.[5] But its nuclear and missile programs remain a prospective threat against which the US continues to prepare, notably with respect to ballistic-missile defense.[6] Unlike Israel, India and Pakistan, the DPRK was a signatory to the NPT, the main cause of reproach from the United States. American officials had additional dealings with diplomats and technical personnel during the negotiations over Pyongyang’s missile development, the cancelled light-water reactor (LWR) project, and the now-suspended disablement of the DPRK’s nuclear complex at Yongbyon.[7] Intelligence data on the North’s earliest years of nuclear development was patchy and inconclusive, and more definitive evidence emerged only as the North pursued development of a complete nuclear fuel cycle, and when IAEA personnel were briefly able to undertake limited inspections at Yongbyon, the centre of the North’s plutonium-based program.[8]

If  the Congress were divided in two contrasting opinions, there would be no ability from the US to negotiate the nuclear crisis effectively with the DPRK. Sanctions managed by the Congress moved to practice after ironing out differences between Republican senators and representatives. Bipartisanship did not exist even though organized fact-finding trip to North Korea was conducted with senators from both parties. However, as more economic aid and stance similar to the Sunshine Policy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ere not a feasible track the Democratic party can take, Congress worked in a same direction as the UN Security Council, and mainly operated by Republican party in terms of relations with North Korea. North Korea Accountability Act of 2009 was introduced by four senators from the Republican party from Senat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in August after the nuclear test, making president Obama along with Secretary of State and Secretary of the Treasury to pressure North Korea in a state approach, although it failed to pass the Senate.

The  United States approaches to the North Korea’s nuclear issue through sanctions from the UN Security Council in response based on liberal idealism. Interventions sanctioned by an international system, notably UNSC and IAEA, dominated the abnormal relations between the two states so far covering both Bush and Obama administration. These began three days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and have been increased in its scope and subject for containment of North Korean regime.

President George H. W. Bush on 27 September 1991 announced that the United Sates would unilaterally withdraw all remaining US tactical nuclear weapons from the Korean peninsula and from US surface ships in the western Pacific.[9] IAEA safeguards that the North Korea acceded were due to preliminary South Korean withdrawal of nuclear weapons. The United States has pushed towards North Korea giving South Korean case as a justification of stopping nuclear weapons development, until the George W. Bush administration. With the capabilities it already had or was soon to complete by the early 1990s, Pyongyang today could have an arsenal of a hundred or more nuclear weapons.[10]

             Some policy analysts believe that North Korea’s pursuit of nuclear weapons reflects anxieties triggered by the end of the Cold War and the DPRK’s loss of explicit security guarantees from Russia and China.[11] Pyongyang selected the gas-graphite reactor technology, which was the best dual-use option for both civilian and military nuclear usage.[12] As a small nation which uses a strategy of a scorpion to make other two or more neighboring countries fight each other, a certain amount of exaggeration of nuclear abilities led to overcome political crises inside North Korea and strengthened its relation to international community. Although DPRK is called as a hermit state, its arms deal with countries normally hostile to the United States remains stable with appreciation of trade partner countries.

A US military withdrawal from the ROK had long been among Kim Il-sung’s foremost strategic objectives. As he remarked to Romanian leader Nicolae Ceausescu only a month before the Kissinger visit, ‘[I]n the absence of the Americans in South Korea or of any other foreign forces, the South Korean people could install a democratic progressive government, through its own forces, and the establishment of such a government would draw us very close to each other, so that, without fighting, we could unify the country.’[13]

Under the George W. Bush administration, North Korea and its leader were the target of contempt, dismissal and verbal attacks.[14] The politics of “naming, labeling and framing” set the two governments significantly back in any pre-existing bilateral progress.[15] Also, the Bush administration killed the Agreed Framework for domestic political reasons and because it suspected Pyongyang of cheating by covertly pursuing uranium enrichment.[16]

November 2000 election led to a dismissive tone of Agreed Framework initiated in 1994, leading to its complete breakdown in 2003. Hardened attitude of the Bush administration following the attacks of September 11, 2001 was apparent in the president’s highly personalized criticisms of Kim Jong-il, his characterization of North Korea as a member of the ‘axis of evil’. After Pyongyang decided to formally renege on its NPT commitments and restart its long-suspended plutonium enrichment program, the Bush administration made China as a mediator taking an offensive role to dissuade North Korea. This tradition goes back to 2002, when Then-Secretary of State Colin L. Powell pressed China to host three-way discussions because it was clear that Bush was opposed to direct talks, according to the book “Soldier: The Life of Colin Powell,” by Washington Post Associate Editor Karen DeYoung.

On bilateralism of the United States towards North Korea before its first nuclear test in 2006, president Bush maintained a multilateral approach such as Six-Party Talks in terms of getting information about North Korea’s nuclear enrichment program. In a CNN article on October 10, 2006, US Secretary of State Condoleezza Rice on Tuesday defended the Bush administration’s refusal to hold bilateral talks with North Korea in the face of Pyongyang’s claim of a successful nuclear test.[17] As scholars argue that Northeast Asia is a region that has every possibility of becoming the best trading bloc in the future, because of Japanese capital and technology, Chinese labor and money, Russian natural resources, and the Korean work ethic,[18] Bush administration maintained multilateral approach leveraging gains of regional cooperation even though his personality and thinking were the most hostile to North Korean dictatorial regime.

Before the Obama administration, president Bush tried not to provoke North Korea directly through diplomatic clash. Instead, the United States managed to leave a very ineffectual diplomatic channel with stubborn policy principles. The stalled multilateral negotiation has turned out to be a failure where each member brings its own issues to the community agenda.[19] Senior Vice Foreign Minister Kang, who acted as the lead North Korean negotiator for the Agreed Framework, claimed that Pyongyang sought a bilateral agreement with both countries sitting ‘knee to knee’, but it is very doubtful that the DPRK anticipated or desired serious negotiations with the Bush administration.[20]

DPRK’s nuclear test secured the bilateral channel with the United States, which DPRK failed to erect during Bush’s first term. After DPRK resumed energy assistance from the US with bilateral talks, under the terms of the denuclearization action plan of February 2007 announced at the Six-Party Talks, the North agreed to ‘shut down and seal for the purpose of eventual abandonment the Yongbyon nuclear facility’ and to allow IAEA personnel to monitor and verify Pyongyang’s compliance with its commitments.[21] But because of small anticipation for the United States to change their interests, agreement of North Korea turned out to be a makeshift.

During the visit of 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James Kelly to Pyongyang in October 2002, the US for the first time accused the DPRK of pursuing uranium enrichment.[22] But at a later time, the status goes to zero again. Following the initial 2002 altercation with the Bush administration over North Korea’s alleged uranium enrichment program, as part of its response to UN sanctions following the April 2009 missile launch, Pyongyang announced that it would now pursue enriching uranium for domestic LWR program.[23] On 10 January 2003, the DPRK announced its ‘automatic and immediate’ withdrawal from the NPT and its ‘complete free[dom]’ from the restrictions of the safeguards agreement within the IAEA, simultaneously claiming that ‘in the current stage, our nuclear activities will be limited to only peaceful purposes, including electricity production.’[24] When investigating the reason of opting out of NPT for North Korea, it is most plausible that it wants to be equal to the US in terms of relations in Northeast Asia.

After a year-long absence from the Six-Party Talks, Pyongyang returned to the negotiations, culminating with release of the joint statement of 19 September 2005, with Beijing the principal drafter of the document.[25] However, after that Washington and Pyongyang quickly released unilateral statements with starkly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their respective obligations.[26] During 2007 and 2008, North Korea curtailed some of its nuclear activities, including the shuttering and subsequent disablement of the Yongbyon reactor.[27] Bilateral negotiations turned out to be a deceit from one side where solutions to correct the fact lead to another deceit. President Bush’s first term was plagued with strategic and diplomatic errors that gave North Korea a free hand to accelerate the development of its nuclear program.[28]

Since Kim Dae-Jung and Roh Moo-Hyun, the two former presidents of South Korea supportive for North Korea in humanitarian and economic aids did not take North Korean nuclear development in account in terms of military strategy, the Bush Administration did not have to calculate South Korean government’s behavior in order to change the originally set policy orientation towards North Korea. However, antipathy between the two Koreas started to affect late Bush administration and Obama administration thereafter till present. Rather than Obama’s election, election of South Korean president Lee Myung-Bak and his policy change to take the same approach according to the original policy orientation that prevailed from the beginning of Bush Administration was the reason for growing tension between the two Koreas and the leading military provocation in Cheonan and Yeonpyeong Do. However, North Korean nuclear test in May 2009 also does not bear its relation to president Obama’s election in late 2008.

Unlike the case of South Korea in which personality of a president forced another country’s foreign policy to change, United States had a set of foreign policy towards North Korea consistently regardless of a new president’s personality. George W. Bush, Donald Rumsfeld, and Dick Cheney used the term ‘axis of evil’ for North Korea, but Bill Clinton and Barack Obama refrained from using that term. Nevertheless, that does not alter the US vital interests towards North Korea, and only approaches between the two camps were different. In a closer look of this procedure, administrative branch has more peculiarities because congressional support for traditional US foreign policy towards North Korea remained consistent with the UN Security Council.

Pyongyang had high expectations for Obama, and expected him to be different from George W. Bush. The election of a dialogue-oriented president tends not to add UN Security Council sanctions or resolutions towards North Korea so that it deems the new president favorable, but as North Korea does not change its foreign policy directive, so that of the United States cannot change either. With President Obama’s criticism of Pyongyang’s missile (or satellite) launch in his Prague speech on April 5, 2009, North Korea responded with a second nuclear test the following month, on May 25, 2009.[29] When the first nuclear test in October 2006 was partially successful with a yield of slightly below 1 kiloton, the second was more successful with an estimated yield of 2 to 4 kilotons. A realist standpoint considering the United States as a whole, or as a state while looking through changes in North Korean state can give accurate analysis to find out the most notable factor for change in foreign policy towards North Korea from Obama Administr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Obama administration, it asserted that its fundamental policy objective with the DPRK is ‘a definite and comprehensive resolution’ of the nuclear issue,[30] exactly the same as that of Bush administration holding firm of vital American interests. At that time resuming Six-Party Talks was always at hand, even though North Korean hostility to Lee Myung-Bak and reticence of Hu Jintao to initiate softer policy of South Korea were already two main obstacles. This solution of multilateralism almost vanished throughout North Korea’s efforts to save its current regime through a significant nuclear test and two military provocations. Six-Party Talks stopped abruptly just after the nuclear test, and did not start again since then.

In early 2009, North Korea forcefully expanded its claims to standing as a nuclear-weapons state.[31] In abrupt, unequivocal fashion, the DPRK walked away from every denuclearization commitment made during the latter years of the Bush administration.[32] Along with a nuclear test with upgraded warhead compared to 2006, it simultaneously reactivated the reprocessing facility at Yongbyon, which stopped operating the year before. Every major nuclear test has changed the foreign policy direction of US, and at that time the change was radical.

The April 2010 US Nuclear Posture Review implies to expect the emergence of leaders in North Korea who did not see the system’s fundamental identity tied to retention of nuclear weapons. But in current situation of failing the yearly goal of economic growth, the current leader has to remain the status quo in terms of nuclear policy in order not to fail additionally in political terms. Current leadership of North Korea is called a ‘no landing’ scenario – that is, the perpetuation of the existing system based on the unquestioned power and authority of the Kim family and of the ruling elites that support it, retention of its nuclear weapons capabilities, and a measure of economic recovery.[33] The United States also keeps a policy of waiting till North Korea forgoes possession of nuclear weapons and the means to produce additional fissile material in exchange for US security and economic commitments, a view that never corresponds with response from North Korea.

But North Korea seeks legitimation by the United States, and demands affirmation and acceptance of the United States. That is decreased military alliance with South Korea and Japan, and accepting North Korea as a nuclear-weapons state such as Israel. At the first time Obama was elected as president, Arab states and North Korea had a neutral or welcoming stance compared to a well-expected antagonism towards John McCain. Also for this year’s election results for giving Obama a second term, Chosun Sinbo, a pro-DPRK journal in Tokyo also reported the results as ‘neither side won, but it is true that Romney’s hard line deserves to be reprimanded.’

There have been repeated oscillations in inter-Korean relations, sometimes including clashes between the two militaries, of which North Korea’s March 2010 sinking of the ROK Navy corvette Cheonan was the most lethal of these episodes.[34] Pyongyang’s November 2010 shelling of Yeonpyeong Do (a ROK-controlled coastal island) constituted the first use of North Korean artillery against South Korean territory since the Korean War.[35] The main reason of the Cheonan attack was interpreted as to reestablish support for Kim Jong-Il’s rule especially by the military after November 2009 clash on NLL. However, current stalemate does not give any measures in either military retaliation or bilateral talks. The Yeonpyeong Do attack is interpreted as a result of explicit revelation conducted by a former director of the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Siegfried Hecker in terms of recently constructed centrifuges used for uranium enrichment, during his trip to North Korea in mid-November. After the politically neutral discovery, the blatant fact of recent violation of UN sanction with pursuit of another route for nuclear weapons led to doubtful and hostile discussion conducted by US and South Korean officials, which led to public address and media exposure. After Cheonan and Yeonpyeong Do military provocation, the Obama administration condemned its behavior along with the address of G8 group of industrialised nations meeting in Toronto in 2010. According to an agreement made between Lee and Obama in Seoul in November 2009, and a 25-minute talk over the phone on simultaneous reactions of US and South Korea, Secretary of State Hillary Clinton along with Secretary of Defense Robert Gates held the first-ever two plus two security talks with their South Korean counterparts. Moreover, the U.S. Freedom of Information Act and the Japanese equivalent will be [is] legally bound to shed light on this incident twenty five years from now [2010].[36]

With economic sanctions along with UNSC resolution to reaffirm its denuclearization commitments, US wanted to hear North Korea’s response opening a channel of dialogue as former president Clinton’s visit to Pyongyang in August 2009 shows. However, president Obama himself never succeeded a direct bilateral talk with the North Korean leader Kim Chong-Un yet. With the singular exception of China, various neighboring countries and the United States were engaged in deliberations and consultations about North Korea, not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37] As China-DPRK bilateral relations remain strong that no other country can follow that level of deeper interaction, United States relatively lag behind of its diplomatic ability. A new leader Kim Chong-Un trying to strengthen his inner political circle with holding firmly a nuclear card cannot risk his political path by abruptly opening talks with a US counterpart. After the leadership change in North Korea, neither secretary-level talks nor summit talks are currently available. Rather, president Obama visited US military camps in South Korea and made a public address condemning North Korea’s behavior with no much change in stance. Holding back of food aid and other economic support are the only measures designed for stability and anti-nuclear proliferation at best.

Bush administration preferred multilateral approach using Six-Party Talks, but also went on a bilateral discussion table when North Korea made a provocative action so that appeasement was needed afterwards. President Bush and members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during his two terms preferred justified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 with consensus of other neighboring countries. But in Obama administration, even that attempt did not take place. Obama administration did not change much from its previous administration, but it became more reticent while seeking consequences if the North Korea abolishes nuclear weapons and thus fall. What made a significant difference was the nuclear test in May 2009, and military provocation of Cheonan and Yeonpyeong do are subsequent results with no major change from May 2009. As no significant nuclear-generated power supply for improving people’s lives in North Korea is being conducted, the dual purpose that North Korea suggests is already an excuse. The answer to denuclearization does not lie in increasing threat towards North Korea, in which it will accelerate its drive for nuclear weapons development as a result. When North Korea believes that fundamental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was improving, then it is willing to slow down. In an interview with the news media in 2009, US Secretary of State Hillary Clinton stated “we should try to step back and see North Korean issues as the forest instead of the trees.”[38] Looking at a forest, US can consider approaches other than direct sanction to limit nuclear proliferation, as improved transportation network replacing old North Korean infrastructure is constructed with support by government-corporate cooperation, named North Korean Development Bank, is being suggested by think tanks in the US. If Obama administration wants to make a diplomatic move, getting out of current stalemate, choosing alternatives other than war while differentiating from Bush era is going to be another Sunshine Policy or is very difficult to achieve.

 



[1] Jonathan D. Pollack, No Exit: North Korea,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Security, Routledge, 2011, p. 160.

[2] Ibid., p. 134.

[3] Suk Hi Kim and Bernhard J. Seliger, “U.S. Policy Options on a Nuclear North Korea”,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245.

[4] Ibid., p. 209.

[5] Ibid., p. 205.

[6] Ibid.

[7] Ibid., p. 23.

[8] Ibid., p. 19.

[9] Ibid., p. 106.

[10] Siegfried S. Hecker, “Lessons from N. K. Nuclear Cris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218.

[11] Jonathan D. Pollack, No Exit: North Korea,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Security, Routledge, 2011, p. 14.

[12] Siegfried S. Hecker, “Lessons from N. K. Nuclear Cris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226.

[13] Ibid.

[14] Mikyoung Kim, “Violence from Within: North Korea’s Place in East Asian Community Debat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188.

[15] Ibid.

[16] Siegfried S. Hecker, “Lessons from N. K. Nuclear Cris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227.

[17] “Rice : Bilateral talks with North Korea won’t work” (CNN, October 10, 2006).

[18] Suk Hi Kim and Bernhard J. Seliger, “U.S. Policy on a Nuclear North Korea”,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250.

[19] Mikyoung Kim, “Violence from Within: North Korea’s Place in East Asian Community Debat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189.

[20] Jonathan D. Pollack, No Exit: North Korea,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Security, Routledge, 2011, p. 140.

[21] Ibid., p, 151.

[22] Ibid., p. 138.

[23] Siegfried S. Hecker, “Lessons from N. K. Nuclear Cris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218.

[24] Jonathan D. Pollack, No Exit: North Korea,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Security, Routledge, 2011, p. 140.

[25] Ibid., p. 146.

[26] Ibid., p. 147.

[27] Ibid., p. 133.

[28] Ed Shin, U.S. Diplomacy with North Korea During the Bush Administration, Woodrow Wilson School of  Public and International Affairs, 2009, p. 1.

[29] Mikyoung Kim, “Violence from Within: North Korea’s Place in East Asian Community Debat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189.

[30] Jonathan D. Pollack, No Exit: North Korea,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Security, Routledge, 2011, p. 204.

[31] Ibid., p. 157.

[32] Ibid.

[33] Ibid., p. 192.

[34] Ibid., p. 17.

[35] Ibid., pp. 17-18.

[36] Mikyoung Kim, “Violence from Within: North Korea’s Place in East Asian Community Debates”,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190.

[37] Jonathan D. Pollack, No Exit: North Korea,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Security, Routledge, 2011, p. 177.

[38] Suk Hi Kim and Bernhard J. Seliger, “U.S. Policy on a Nuclear North Korea”, The Survival of North Korea, Suk Hi Kim, Terence Roehrig and Bernhard Seliger (ed.), McFarland & Company, 2011, 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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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집을 어떻게 장만할 것인가라는 사람들의 질문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항상 전세가 아닌 월세로 15평 이하 되는 원룸에서 살겠다고 이야기한다. 집이 넓고 또는 집을 소유하는 것은 40세가 될 때까지는 사치이며, 그 전에는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집에 불필요한 가재도구를 들여놓지 않으며 외부의 서비스를 최대한 이용하고, 창고나 옷장처럼 쓰는 공간을 가족 집 창고로 대신하여 왔다갔다하면서 필요한 물건만 옮기는 등 집의 크기를 최대한 압축하자는 생각이다. 나는 도시 속을 갈망하고 도시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자만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로 내 집은 허름해도 좋다고 본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노원구 상계동은 예나 지금이나 매력적인 선택이다. 주변에 수락산과 중랑천이 있고, 건물과 거리는 조금씩 리모델링되어 세련된 모습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매력적인 곳은 중구 순화동과 광화문 일대다. 역사 유적에 둘러싸여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교통 이용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도시 생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향유하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화한 채 밖으로 한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가 주는 공감에는 절반밖에 동의할 수가 없다.


"나는 내 자신의 집에, 즉 내 자신이 디자인한 자그마한 집에서 살기 위해, 1/4에이커 정도 되는 자그마한 땅뙈기의 한가운데 있는 집에서 물과 그늘과 잔디와 침묵을 즐기며 혼자 살기 위해 기꺼이 루브르 미술관, 뛸러리 궁전, 노트르담 - 그리고 방돔의 열주(列柱)까지 덤으로 끼워 - 을 포기해버릴 생각이다. 그리고 집 안에 조각을 하나 들여놓을 생각이 들더라도 주피터나 아폴로 - 이처럼 멀쑥한 사람들은 이런 장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 또는 런던이나 로마, 콘스탄티노플 또는 베니스의 풍경을 걸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한 장소에는 전혀 살고 싶지가 않다! 나는 그곳에다 내게는 없는 것 즉 산, 포도밭, 목초지, 산양, 소, 양, 추수하는 사람들과 양치기를 두고 싶다.

- P. J. Proudhon,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p. cit., p. 256.

 

 여기서 동의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들의 거부와 자그마한 집에 대한 찬미다. 겸손하면서도 쿨하기를 원하는 나는 무조건 작은 집에서 적지만 모두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되고 배치된 물건들에 둘러싸여 살고 싶다. 어떻게 디자인이 잘 되었지만 사치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물건을 살 때 자기가 추구하는 일관된 디자인의 물건을 골라왔다면 그 물건들이 세월에 걸쳐 축적되었을 때 한 장소에 멋있고 조화롭게 배치될 수 있다. 물론 조각같은 사치품은 절대로 들여오지 않는다. 나는 나의 삶과 가장 밀접하다고 보는 전자제품과 악기를 가지고만 디자인하고 그것으로 끝낼 것이다. 다른 것은 새로 구입하는 일 없이 예전 살던 집에서 모두 가져올 예정이다.



 하지만 침묵을 즐기거나 귀농과 같은 선택을 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귀농은 분명 도심에서 그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의 질을 바탕으로 사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것이다. 그러나 귀농보다 더 검소하게, 왁자지껄하고 바쁜 곳의 후미진 곳에서 언덕 위에 집이 있다거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등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객관적인 삶의 질보다는 주관적인 만족감에 따라 산다면 비용이 더 적게 들 수도 있다. 집에 관한 비용을 최소화하고 옷과 문화생활의 비용을 높이며, 공동체적인 삶으로 들어가 도심 속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게 나의 목표이다. 파리에 있을 때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그리고 현실적인 자금 제약으로 인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서울 한복판에서 이어나가고 싶다.


 혜택을 많이 받는 서울 한복판에서 큰 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치이므로, 작은 집에 월세 들어 살면서 겸손함, 그리고 매달 월세를 내면서 나중의 내집마련을 위한 자금운용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면서 항상 도전할 거리가 주어져있는 주거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울 권역 도시 지역의 주상복합이나 큰 아파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아예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갈 것인가. 20대 중반과 30대 초반에서조차 이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사회 통념에 자신의 생각을 고정시켜버리는 것은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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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Wikipedia)


 이케다 하야토 전 일본 총리에 대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를 발견해서 적는다.


  자민당 내 이케다의 경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노 반보쿠(大野伴睦)는 관료 출신의 정치가를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오노가 싫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오노도 이케다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이케다 군은 관료 출신임에도 소심하지 않다. 세상을 아는 친구라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절찬한 바 있다.

  1949년 이케다가 요시다 내각의 대장성장관 시절, 예산 편성이 끝나면 이케다는 주계국主計局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잔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주량이 엄청난 이케다였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분위기는 늘 좋았다고 한다.

  국회에서 한 답변도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대장성장관 시절에 무역 자유론자인 이케다에게 한 야당의원이 물었다. "이케다 당신은 농산물 수입 자유화에 대해 항상 전향적인 발언을 하는데, 자유화로 당신 고향인 히로시마의 레몬도 망하게 될 겁니다. 그래도 자유화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 이케다는 한 마디로 답했다. "히로시마의 레몬은 맛이 없습니다." 그 순간 질문한 야당의원도, 듣고 있던 여당의원, 각료들도 이케다의 발언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고 일순 정적이 흘렀다고 한다. 자기 고향의 농산물을 맛없다고 했으니 다음 선거에서 표가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케다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답변을 마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내려가 버렸다.

  이런 말들을 예사로 하는 것이 이케다였다. 애매한 말투로 요리조리 피해가는 일반적인 정치가들과는 궤를 달리 했다. 이런 점들이 오히려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가 이케다를 다시 보게끔 했다. 이케다는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가가 아니라 소신 있는 정치가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출처: 『이케다 하야토 -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 권혁기, 살림.


꼭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어도 이렇게 쿨한 성격은 그 사람의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성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반드시 이렇게 솔직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는 않으며, 누군가는 영리하게 가식을 보이더라도 당장의 이득을 지지자들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호탕한 성격의 사람을 선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 신경쓰지 않고 내 갈 길이 분명해서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변함없이 나를 응원해준다면 당장의 이득으로 큰 주목을 받거나 큰 돈을 만지지 않더라도 편안한 내 '구역',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모두에게 거짓된 것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면 누구나 영원한 그의 편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각자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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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이버스페이스총회란?


세계사이버스페이스총회(Conference on Cyberspace)는 경제성장과 발전, 사이버보안, 사회문화적 혜택, 사이버범죄, 국제안보, 역량강화 등 사이버 관련 사안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국제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장관급 국제포럼입니다. 영국 정부의 주도로 1차 총회가 런던(2011), 2차 총회는 부다페스트(2012)에서 개최되었으며, 3차 총회는 금년에 우리 정부가 서울에서 개최합니다.



Perfume이 지향하는 이미지와 맞닿아있는 2013년 세계사이버스페이스총회


 

최근 2013년 7월에는 Cannes Lions International Festival of Creativity(칸 국제광고제)에서 Perfume의 글로벌 웹사이트가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칸 국제광고제는 세계 최고의 광고 축제로 한국의 제일기획과 일본의 덴츠 등의 광고 업계에서는 이미 그 중요성을 알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곳의 수상작들은 말이 필요없는 뛰어난 수준의 작품들입니다. 다양한 Perfume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Digital Creation Director인 Rhizomatiks의 마나베 다이토(真鍋 大度)의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일본의 엔터테인먼트와 디지털 아트가 어떻게 융합되었는지를 이곳에서 전세계 광고 창작자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날 행사의 공연 영상을 보시면 TV 출연, 일본 공연, 아시아 투어에서 보여주던 아이돌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감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계적인 창법과 악곡 진행,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컨셉을 최대한 살려 프랑스와 유럽의 광고업계 관계자들에게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3명의 여성스럽고 귀여운 멘트는 전혀 들어가있지 않으며, 오로지 비디오 프로젝션이 보여주는 홍보와 정보통신기술과의 융합이 퍼포먼스의 핵심이었습니다. 비장미 넘치는 3명은 8분간의 리믹스가 끝난 뒤 아무 말 없이 인사하고 퇴장합니다.

 

올해 10월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세계 90개국 1,000여명의 장·차관급 고위 정부 대표와 국제기구 대표, 그리고 기업 CEO 등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인 점을 고려했을 때,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경제·사회적 혜택을 개도국들도 누릴 수 있도록 개도국의 사이버역량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하는 열린 국제회의이고 기존에 없던 제도를 새로 만들려는 창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 국제 행사임을 감안했을 때 세계사이버스페이스총회에는 클래식이나 전통음악과 같은 전통적인 국제회의 식전공연의 틀을 깰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주최하는 행사이므로 전통 공연을 할 수도 있지만 '사이버스페이스'나 'ICT' 그리고 '국제행사'에 초점을 맞추어본다면 아날로그 악기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한국 외의 국가에서 온 아티스트를 초청하고 노래와 춤과 악기연주 외의 다른 기술적인 요소를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제가 생각한 아티스트는 2개, 독일의 Kraftwerk와 일본의 Perfume이었습니다. 둘 다 왔다면 굉장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누가 좀 더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단언컨대 Perfum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Kraftwerk의 전자음악은 1970년대 후반의 선구자로서의 전자음악이지만, Perfume의 전자음악은 21세기의 20대와 10대 감성에 초점을 맞추어 음악, 가사, 의상, 무대 세팅의 4가지에서 지금의 정보통신기술이 가져온 문물을 향유하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My Color와 575의 가사가 가장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한국 정부가 일본의 아티스트를 많은 한국 아티스트들을 제쳐놓고 국제회의 식전공연에 초청한다면 경색 국면에 있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대중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것입니다. 물론 공연에 초청하고 한국이 마련한 무대를 빌려 일본이 자국 아티스트를 더욱 세계에 알리는 기회를 갖는 것과 양국 정부간의 수산물 수입 및 영토 분쟁에 관련된 제도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최근 9월 15일에 열린 한일축제한마당과 같은 성격으로 전혀 다른 영역에서 협력 무드 조성을 도울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공동개최할 때에 비해 한일관계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도 냉랭합니다.

 

공연을 한다면 공연 형식을 칸 국제광고제에서 보여준 형식과 같이 합니다. 국제광고제를 진행한 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에 비해 코엑스의 회장 시설이 결코 떨어진다 할 수 없고, 비디오 프로젝션을 위해 필요한 장비는 서울에서도 조달할 수 있습니다. 리허설은 10월 16일(수) 저녁에 한 다음 위치와 화면 조정을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굴욕 외교?

 

제가 생각하기에는 한국에서 한일 친선 행사가 아닌 이상은 일본 아티스트를 초청하기를 매우 꺼려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와 정치는 다르지만, 이 경우에는 정치의 영역 안에 문화의 영역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므로 온전이 식전 공연과 같은 문화적인 행사도 정치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측에서 '한국 정부가 주최하는 행사인데 이를 계기로 한국의 K-POP 같은 것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해야지, 반대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주최측에서 몇천만원을 써가며 Perfume을 모셔온다면 그것이야말로 굴욕 외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목소리가 올라올 것이 너무나도 눈에 선합니다.


무엇보다 정부를 공격할 힘을 가지고 있는 언론은 정부가 1,000~2,000만원 상당의 공연 아티스트 초청 비용을 국내에서 소비하지 않고 외화로 유출하였을 경우 기회를 잡고 비판적인 글을 쓸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한국은 수입 및 외화 소비에 대해서는 유학과 여행을 제외하고는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개인도 기업도 아닌 정부가 나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무모한 선택입니다.


2013년 10월 17일(목)~18일(금)에 2013년 세계사이버스페이스총회가 개최되므로 식전 공연에 대한 내용은 이미 확정되고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내용은 그저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걸,' 이라는 즐거운 상상에 불과합니다. 8월 초에는 이 주제에 대한 블로그 글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작성하여 네티즌들의 서명을 받고 그것을 세계사이버스페이스총회 준비기획단에 전달하여 이전에 해본 적이 없던 공연 아티스트 초청 작업을 현실로 옮기려는 도전을 시도하려고도 했으나, 결국 시간이 많이 지나 소심하게 블로그 글로만 마음 속 이야기를 전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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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ase Of You

James Blake

Enough Thunder



A Case Of You.pdf



Just before our love got lost you said

"I am as constant as a northern star"

And I said "Constantly in the darkness Where's that at?

If you want me I'll be in the bar"


On the back of a cartoon coaster

In the blue TV screen light

I drew a map of Canada Oh Canada

With your face sketched on it twice


Oh you're in my blood like holy wine

You taste so bitter and so sweet

Oh I could drink a case of you darling

Still I'd be on my feet oh I would still be on my feet


Oh I am a lonely painter

I live in a box of paints

I'm frightened by the devil

And I'm drawn to those ones that ain't afraid


I remember that time you told me you said

"Love is touching souls" Surely you touched mine

'Cause part of you pours out of me

In these lines from time to time


Oh, you're in my blood like holy wine

You taste so bitter and so sweet

Oh I could drink a case of you darling

And I would still be on my feet oh I would still be on my feet


I met a woman She had a mouth like yours She knew your life

She knew your devils and your deeds

And she said "Go to him, stay with him if you can

But be prepared to bleed"


Oh but you are in my blood You're my holy wine

You're so bitter, bitter and so sweet

Oh, I could drink a case of you darling

Still I'd be on my feet I would still be on my feet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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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으면 글 써보세요!!

CROISEMENTS: 프랑스어권 동아시아 인문과학 평론지
2014년 제 4호 여행, 이웃 
논문 기고 안내
Croisements의 제 4호는 동아시아의 '여행, 이웃'을 주제로 합니다.
국가, 영토, 공간은 오늘날 한계 혹은 경계의 개념을 모호하게 하는 복합적인 영향력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문화적, 정치적, 전략적, 경제적 영역은 서로 좁은 범위로 관계되어 있어서 종종 안정적인 정체성을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긴 전통 안에 새겨진 여행은 인간, 사상, 물건의 실제적이고 또한 가상적인 이동에 관해 공간을 관계시킵니다. 유토피아, 탈출, 추방, 富 혹은 이타성의 순환은 현실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의 능동적인 혹은 수동적인 발견을 나타냅니다. 여행자는 중심에서 어긋나는 행위자이며, 세상에 다가가는 규범과 독특한 방법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웃은 필요한 상대물입니다. 인간과 사상은 유목민이면서도 동시에 정주민입니다. 그리고 영토 안에 자신을 기입하려 하고, 지도 안에 발자국과 존재감과 확신을 나타내려 합니다. 또한 방랑의 자유에 양보하는 것 같은 공동체의 삶도 그려집니다. 여행은 지도를 만드는 여행자 스스로가 종이 위에 새긴 경계선을 뛰어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경제학, 정치학, 법학, 역사학, 지리학, 인류학, 사회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영화학 역시 우리에게 이 복잡성을 연구하기 위해 많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이 세상에 자신들을 투사하고 살아있으면서 경쟁적으로 바뀐 공간을 분배하는 규칙과 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croisements@france.or.kr 로 2013년 11월 30일까지 논문을 접수받습니다.
논문은 이번 호 코디네이터가 수합하고 분량 조절을 하기 전에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받습니다.
요약문을 제외한 본문은 최대 7000 단어로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논문과 함께 프랑스어로 170 단어의 요약문과 요약문의 영문 번역, 그리고 저자의 짧은 소개글을 첨부해주시기 바랍니다.
보충 설명: http://croisements-revue.org/recommandations/

생각나는 주제는..
1) 최근 전 중공군 참전용사의 한국 방문과 중공군 유해 환수
2)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른 한중일 간 국경의 모호화 (중국과도 무비자 협상중..)
3) 동남아시아의 도시문화는 어떻게 한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까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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