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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과의 관계는 항상 밀접해야 한다. 내 할일이 있기에 잠시 관계에서 도피하는 건 좋지만, 의무가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는 오히려 더 친구들과 친해져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가 된다.
 
  유머를 나의 마음 속에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유머는 인간관계 형성의 기본이다.
 
  내 할일에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소홀해지지만 않는다면, 내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친구들과 밀접해지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너무 잘난 사람은 남들의 시기를 받고, 그런 사람은 대개 혼자 쓸쓸히 인생을 보낸다. 우리 학교의 모든 친구들은 잘난 친구들이다. 다 충분히 잘난 모습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지만 숨기고 있을 뿐이다. 대인관계를 위해서 잘난 점을 숨기자.
 
  공부만 하고 목소리가 작고 사색적인 사람을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으며, 이는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다만 이런 사람이 양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교적이기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이상적이다.
 
  모두들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니 내가 먼저 목소리를 높이고 유머를 곁들여 다가가자. 친구들은 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않다.' 정상적인 사람은 새로운 친구와의 연결에 항상 열려있고, 주변 사람들과 만날 때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 스타일은 분명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이 스타일과 사교적인 모습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다.

  사교적인 모습이란 워낙 광범위한 것이라 모든 사교적인 모습에서 하나를 골라 나의 스타일과 연결시키자.
 
  같이 겨울 바다에 가 바다만 물끄러미 쳐다볼 수 있는 사람보다는 같이 파리 시내를 즐겁게 대화하며 활보하고 그곳의 모든 주위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며 같이 그 주변에 빠져들 수 있는 사람이 좋다. 가만히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한 곳을 응시하는 진지한 모습은 예술의 감상과 같은 사적이고 독자적인 분야에 한정시켜버리자.
 
  진정한 비호감은 가식적인 웃음이 섞인 친절한 말투,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난 너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다.
 
  일단 모두에게 누구누구야 하고 친근하게 부르려 하기보다는 이름 세글자를 불러보자. 그게 오히려 편한 인간관계 형성에 좋다.
 
  공부 외의 일에서 친구들과 같이 속한 어떤 일을 만들자. 그 일이 무언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거나, 긴급한 문제이거나, 구성원 모두에게 성취감을 주는 일이라면 매우 좋다.
 
  친구 얘기(제3자에 대한 험담)를 해서 같이 웃고 떠들지 말고, 나와 네가 모두 겪을 만한 인생 이야기나 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자. 즉 솔직해지면서 인간미가 드러나는 대화를 하자.
 
  비판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비판하는 사람을 내가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Acquaintance와 Friend의 차이는 서로 같이 속한 일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다. 싸이월드에서 그냥 일촌과 관심일촌 사이의 차이와 같다. 두 명의 Friend 사이에서 같이 한 일 혹은 같이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에서 이야기의 주제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두 사람의 상호작용으로 서로의 마음을 투명히 할 수 있다. 한편 Acquaintance끼리는 같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다만 형식적으로 같은 그룹에 속해 있거나 기타 방법으로 관련만 지어졌을 뿐이다. Acquaintance였던 사람이 Friend로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고, 어제의 Friend가 오늘의 Acquaintance로 될 수도 있다.
 
  나는 학교의 수많은 Acquaintance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고 1층에서 12층까지 올라갈 때의 적막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민족사관고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개인이 Acquaintance들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기숙사 생활과 우리는 KMLA Family라는 사상이 마치 모든 사람들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듯이 도덕 규범을 주입시킨다. 나는 이것을 반대하고, 내가 거부하더라도 이러한 생각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다. 학교의 모든 사람이 KMLA Family라는 명제는 절대 거짓이다. 이것은 학교의 제도를 정착시키고 모든 학생들에게 의견을 전파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명제이자 하나의 용어일 뿐이다.
  가끔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불편하다. 다른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는 상황에 있을 때 나는 불편하다. 혼자 지내는 개인적인 영역과 시간은 인간의 삶에서 꼭 필요한데 기숙사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가 어떤 특별한 일을 위해 모이는 모임은 활기차며, 모두에게 행복을 준다. 다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아무 연관성이 없는 상태에서 단 몇분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불편하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게 불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친구들과 사소한 대화 하나 주고받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은 과연 잘못된 일일까. 나의 본성은 혼자 있고 싶어한다. 혼자 있으면서도 남들과의 인간관계를 충분히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내 본성은 단점이 아닌 특성이다.
 
  Acquaintance보다는 Friend가 훨씬 더 좋고 편하다. 그러나 억지로 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내 할일을 해 나가면서 친구들이 생기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나와 같은 일에 소속된 사람들, 곧 Acquaintance에서 Friend로 전환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일이다. 그들에게 인간미를 보여주고, 서로 꺼리는 주제의 제시를 꺼리며, 서로의 인격을 존종하고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2006. 11. 27.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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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프랭클린 플래너를 쓰다가 항상 느끼는 점은, 내가 세워놓은 계획이 항상 분에 넘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쉽게 제어할 수가 없는 것이며, 나의 계획적인 삶을 향한 욕망이 과다한 것은 마치 자연스러운 듯하다. 하지만 계획이 과다하다고 그것을 모두 실현할 수 있지 않기 때문에 분에 넘치는 계획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한다. 또한 나의 계획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점은 내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독서하는 시간과 학교가 요구하는 공부를 하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여 결국 내 의무에 소홀해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속하여 움직이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를 명확히 하고, 의무를 이행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에 힘쓰고 그에 따른 피로는 말끔히 풀기 위하여 우리가 보내는 시간을 성격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을 분류하여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파악한 다음에는 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을 산출함으로써 수치화하여 실천 가능성을 높이는 작업이 뒤따르게 되었다.
 
시간 분류
  그래서 여느때와 같이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나의 삶과 함께 운행하는 24시간 속에서 내가 속해 있는 일의 종류에 따라 시간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의무를 이행하는 시간, 자신을 발전시키는 시간, 쉬고 놀고 자고 자신의 컨디션과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시간,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시간, 그리고 특별한 일에 참여하는 시간 이렇게 5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 시간 속을 통과한다고 전제하였다.
 
  사소하여 하루의 계획을 세울 때 리스트에 올릴 이유가 없는 일들은 여기서의 논의에서 제외하도록 한다. 그러한 일들이 특별히 프랭클린 플래너에 의해 조직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 일들을 하면서 다른 일들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데 중대한 방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들은 우리가 계획을 할 때 넉넉히 남겨둔 시간을 채워넣도록 작용한다.
 
1 의무이행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 / 학교가 주는 과제를 수행하는 시간 /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시간 / 종교활동을 하는 시간 / 혼정과 아침운동 같이 학교에 소속됨으로써 고정된 시각에 보내는 시간 / 청소검사에 대비하여 청소하는 시간
  이 시간 속에서 우선순위 A에 해당하는 일을 하라.
 
  나와 같은 고등학생에게 의무로 주어진 일은 공부이고, 그렇다고 이 공부가 모두 의무는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신문을 읽을 수 있고 책을 볼 수 있으며 연습삼아 글을 써 볼수도 있다. 이런 모든 일은 다 공부에 속하지만 내가 속한 기관인 학교에서 필수로 요구하는 일은 아니다. 직장인에게는 회사의 업무가 의무이며, 의무를 이행하는 일은 자신의 하루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의무, 그리고 그 의무를 이행하는 시간을 우리의 삶에서의 다섯 가지 조각 중 하나로 명명하였다.
 
 자신이 공식적으로 소속된 기관에서 하는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일종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을 하는 시간도 의무 이행에 포함되며, 심지어 교회나 절 등 종교활동에 참가하는 것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의무 이행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국 의무 이행에 해당하는 시간은 항상 그 요일 혹은 한 달 안의 그 날에 고정되어 있고,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항목에 딸린 시간이 24시간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루의 계획을 세워서 의무 이행에 해당하는 시간만 충실히 보내도 당신은 그 날을 성공적으로 보냈다는 말을 할 수 있고,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안감과 불이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 특별히 자기발전 항목에 소속되지 않는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학교에서 읽으라고 요구한 책을 읽는 시간, 학교 공부를 위해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시간 등이다. 나의 경우 학교가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아도 학교의 공부를 위해 꼭 보아야 하는 학습 자료를 읽는 일은 자기 발전을 위한 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고쳐야 할 일이다.
 
  의무를 이행하는 일은 중장기 목표설정에 포함되기 적절한 일이다. 열심히 일한 자가 목표 달성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 열매가 눈에 명확하게 보인다는 것은 곧 그 열매의 가치가 널리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매의 가치를 널리 인정받게 하는 일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설정한 자기 발전 관련 일이 아닌 자신이 소속한 학교 혹은 직장에서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다.
 
 
2 자기발전
독서(책, 성경, 신문, 블로그 포스트 등 모든 종류의 글)하는 시간 / 음악 감상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예술을 감상하는 시간 / 친구들과 모여서 또는 혼자 운동하는 시간 / 블로그에 글을 쓰는 시간 /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시간 / 남에게 도움을 주는 시간
이 시간 속에서 우선순위 B에 해당하는 일을 하라.
 
 자기발전을 위한 시간에 소속한 일들은 불규칙적으로 발생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프랭클린 플래너가 지시하는 바와 같이 신체적, 사회/감정적, 정신적, 영적 심신단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시간은 마음이 정결한 인간이라면 이 시간으로 최대한 하루를 많이 채우고 싶은 욕구가 의당 들게 만드는 시간인데, 그 때 주의할 점은 하루 24시간을 편성할 때 하루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자기발전에 해당하는 일은 '반드시 몇 달 안에 이루어 내겠다' 라는 식으로의 중장기 목표설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무가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에 자기발전을 위한 중장기목표를 완벽히 실현하려 하면 자칫 의무를 모두 이행하는데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달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을 1권에서 4권까지 읽겠다는 다짐을 할 때에는 상당히 조심해야 하며, 이러한 목표의 성공은 모든 날에서 내가 열심히 책을 읽어야만 가능하다. 즉 목표의 성공을 보장하는 때는 한 주 혹은 한 달의 말일이고, 하루 안에 목표의 성공 여부를 단정지을 수 없다. 책을 읽겠다며 자신이 해야 할 학교 업무에 소홀해진다면 그것은 곧 독서계획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어떤 종류의 자기발전 관련 일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해 나갈 것인가는 중장기 목표설정으로 적절하다. 예를 들어 팔굽혀펴기를 이달에는 매일 30회, 다음달에는 매일 50회 등으로 늘려나가겠다는 계획은 충분한 실천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 하루 안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자기발전을 위한 시간은 언제든 신축적으로 바뀔 수 있는 시간이며 불규칙적이고, 목표달성의 여부는 하루 안에 알 수 있다.
  
 
3 정리휴식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시간 / 책꽂이와 책상과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 시간 / 컴퓨터 파일과 폴더를 정리하고 유지보수하는 시간 / 밀려오는 피로를 이기기 위해 잠시 수면을 취하는 시간 / 지식의 축적이나 인생의 깨달음이 목적이 아닌, 단지 재미와 안락을 위한 독서 혹은 영화감상
이 시간의 대부분에서 우선순위 C에 해당하는 일을 할 것이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의무를 이행하고 자신의 발전을 이루는 일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희적 동물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또한 인간에게는 피로라는 괴물이 늘 붙어다녀 이것을 조절하기 위한 시간 또한 필요하다. 따라서 만든 카테고리가 하루 24시간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조각 중 하나인 '자신의 컨디션과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일은 피로를 풀기 위해 수면을 취하는 시간이며, 보통 20~30분이 적당하다.
 
4 기본욕구
샤워, 목욕, 세수하는 시간 / 식사하는 시간 /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 / 낮잠이 아닌 규칙적으로 수면을 취하는 시간
 때로는 기본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A로 정해 놓을 때가 생기는데, 그 경우는 대부분 꼭 한 끼 식사를 챙겨야 할 때이다.
 
5 특별행사
 A 학교 공식행사를 진행하는 시간 / 외부에서 긴급한 요청에 의하여 발령을 받고 일하는 시간
 B 아는 사람의 권유로 안 가면 안되는 영화관, 극장, 콘서트 등에서 보내는 시간
 C 나에게 매우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으나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행사
 
 특별행사는 위에서 말한 4가지 시간을 명백히 침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행사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우리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매우 불규칙적이고 또 매우 의미가 큰 이러한 행사들은 필요하다. 그리고 특별행사가 있는 날에는 대개 의무 이행과 자기 발전에 해당하는 일의 비중은 특별히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작아지기 마련이다.
 
수치화 작업
 시간 분류가 끝났으면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수치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 가용 시간 산출
 위에서 말한 시간이 모두 프랭클린 플래너의 task list에 어떤 '할 일' 로서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시간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모든 시간으로서의 시간이다. 우리는 프랭클린 플래너를 효과적인 시간 관리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그 목적에 맞게 시간 관리가 요구되는 시간만 task list에 올리면 된다. 수치화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나를 견본 모델로 삼아 알기 쉽게 하였다.
 
 수치화의 단위는 시간의 단위이므로 시간(hour)가 적당하다. 30분의 경우 0.5로 표기하면 되고, 30분 이하로 소요되는 일은 따로 수치화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실천해 낼 수 있다. 그래도 실천 가능성에 의심을 품는다면 0.5↓ 로 표시하는 등 다른 방법이 있다.
 
 보통 평일에는 내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가용 시간'이 일정한 값으로 고정되어 있다. 평일에는 뜻밖의 일이 생겨 내가 수월하게 행해 나가기로 계획해 놓은 일을 망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계획이 안정적이다. 하지만 주말에는 의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기고, 무언가 특별한 일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가용 시간이 매우 가변적이다. 따라서 나는 평일에 해당하는 가용 시간 산출을 설명할 것이고, 주말에 해당하는 가용 시간은 자주 바뀌므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선 내가 프랭클린 플래너를 사용하기 위해 task list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시간을 24시간 중에서 추출해 내어야 한다. (A,B,C로 명명된 작업을 수행하는 시간이 곧 가용 시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고정되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내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시간만을 남겨 두어야 한다. Study Planner와 같은 다른 플래너에서도 이러한 시간 값을 산출하는 일을 매우 중요시하지만 그 값을 산출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그 과정을 나를 모델로 설명해보려 한다.
 
 24시간에서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제외한다. 수면 시간은 모든 사람마다 다른데, 나의 경우 12시에서 다음날 아침 6시 30분이므로 6시간 반이다. 나중에는 조금 더 길어질 수 있겠으나 아무튼 가장 중요한 사실은 수면 시간은 매일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고정은 시간대의 고정과 소요 시간의 고정을 뜻한다.) 24-6.5 = 17.5
 
 이제 항상 고정되어 있는 시간을 마구 제외한다. 06:30~08:00 는 내가 아침 운동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고 등교하기까지의 시간이므로 제외한다. 17.5 - 1.5 = 16
 08:00~08:30은 어드바이저 타임으로서 (월요일은 제외하고) 내가 이 자투리 시간에 무언가를(의무 이행이 대부분. 예를 들어 단어 외우기) 할 수 있으므로 가용 시간에 포함한다. 오전 수업은 08:30~12:20인데, 이 중 쉬는 시간이 총 40분 있지만 오전 수업의 쉬는 시간에는 내가 보통 편히 쉬므로 결국 4시간에 해당하는 값을 제한다. 16 - 4 = 12

 12:20에 기숙사로 올라와 점심식사를 30분 동안 한다. 12 - 0.5 = 11.5 그럼 1시다. 13:00~13:30은 오후 수업을 준비하고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시간이므로 가용 시간에서 제외한다. 11.5 - 0.5 = 11
 13:30~17:30이 오후 수업 시간이다. 11 - 4 = 7 그러나 오후 수업의 쉬는 시간에는 내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므로 가용 시간을 인정한다. 7 + 0.5 = 7.5 그리고 화요일 7,8교시, 수요일 8교시, 금요일 7,8교시는 내가 자습시간으로 쓰는 IR 시간이므로 화,수,금요일에는 가용 시간을 1시간 더한다. 지금은 일단 7.5로 값을 정하자.

 17:30~18:00에 저녁식사를 30분 동안 한다. 7.5 - 0.5 = 7
 그럼 이제부터 시간이 남는다. 저녁 식사 후 내가 자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이 때 나는 의무 이행에 관한 일보다는 자기 발전과 정리 휴식에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19:00~21:00는 1자습 시간으로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이다.
 21:00~22:00는 혼정과 12층에서의 휴식과 기도모임이 있는 시간이므로 가용 시간에서 제한다. 7 - 1 = 6
 22:00~24:00는 2자습 시간으로 내가 또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현실성을 높이기 위한 보너스 여유분을 마련한다. 1시간을 가용 시간에서 제하는데, 이 1시간의 의미는 나의 능력이 부족할 때/일의 예상 소요시간을 실제 소요시간이 초과했을 때/순간적으로 밀려오는 피로에 인해 행위 능력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넉넉하게 준비해 둔 시간이다. 그렇다면 결국 평일의 가용 시간은 6 - 1 = 5시간이다. 나는 5시간 안에 A,B,C에 해당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계산 과정으로 5라는 값을 산출해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계획을 세웠는지 알았다. 내가 보통 하루에 계획한 일의 총 소요시간은 6~7시간이기 때문이다.
 
2 task list에 있는 모든 일의 개별적인 소요시간 예상
 이 작업은 자신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정말 중요한 작업이다. 내가 그 일을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잘 예상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 예상시간은 나를 압박하기보다는 나에게 넉넉한 여유를 주도록 설정하는 것이 현실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task의 내용을 한 칸에 기입한 다음 오른쪽에 예상소요시간을 적어놓는다.
 
결론 
  가용 시간을 활용하는 것, 곧 프랭클린 플래너를 활용하는 것은 내가 속한 기관, 그리고 나의 특성에 의해 그 성향과 스타일이 결정된다. 모두 다 다른 모습으로 가용 시간을 산출하고 플래너에 할 일을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프랭클린 플래너로 우리의 삶을 조금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짧고, 짧기 때문에 계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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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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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모든 고등학생들은 다 공부를 하겠지만, 오늘 느낀 점을 간단히 남겨보고 싶다. 소위 공부를 한다는 몇개의 외고와 국제고와 그리고 자립형 사립고에 다니는 학생들을 향해 말을 해본다.

 친구들끼리 모였을 때 그렇게 얘기할 것이 공부밖에 없는가? 자신만이 관심을 갖는 다른 삶의 영역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삶의 목표가 수능 480점 이상으로 맞기와 S대학에 가는 것인가. 이것은 오늘 내가 프랑스어 시험 (Diplome d'Etudes en Langue Francaise, DELF)을 보러 갔을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나서 말하는 것이다. 많이 수다를 떠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혀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이면 곧 가식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자기 기만과, 부러운 친구에 대한 시샘과,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는 걱정이 있을 뿐이다.
 
공부를 잘 하고 옆에 있는 친구를 누르고 일어서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라 하더라도, 꼭 그 목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를 친구이자 경쟁자인 사람들 앞에서 늘어놓아야만 하는가. 공부에 관한 얘기는 속으로 삭혀두고 차라리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고 요즘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화제를 공부에서 다른 쪽으로 돌리고 그와 더불어 자신의 스타일이 묻어나오는 대화를 할 때, 그 때 그 사람은 곧 호감가는 사람으로 바뀐다. 친구가 경쟁자인 모순적인 상황에서 아예 벗어나 버리는 방법이 곧 인간적으로 주위 사람과 화합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은 남들과 대화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일단 공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고등학생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도 최대한 겸손해야 하고, 단점은 되도록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남의 장점은 칭찬하되 내가 비굴해지지 않게 해야 하며, 남의 단점을 꼬집어서 그것을 화두에 적나라하게 내세우면 절대 안 된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 대화에 참여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결국은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쟁자들끼리 모였을 때 대화의 화제를 경쟁과 연관시키면 안 된다. 그것은 마음을 피폐하게 하고,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을 속부터 타들어가게 만든다.
 
  하지만 대화의 주제를 공부에서 다른 것으로 돌리면 전체적인 대화의 분위기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뀐다. 내가 경험한 새로운 사실을 남에게 알려주면 다른 사람은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기쁨과 그것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친구들과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보는 것도 참 좋다. 자신이 이번에 기회가 생겨 보러 갈 프랑스 뮤지컬 '돈 주앙'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학교의 새로 생긴 커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너는 국사 잘 해서 좋겠다. 나는 언어 GG 친다' 따위의 말보다 훨씬 가치 있다.
 
 특히 자신이 전문적으로 잘 하는 분야에 대해 그것을 남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대화에 참여할 때 자신을 그 대화에 묻어나오게 만든다. 즉 자신의 스타일을 남들이 알 수 있도록 하여 준다. 자신이 수동적으로 좋아하는 TV 속의 연예인에 대해 충성스런 팬으로서의 한마디를 남기는 것과 자신이 이번에 새로 쓴 습작 소설의 줄거리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 중에서, 후자가 조금 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깊게 만들어주고 일방이 다른 일방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깊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고등학생은 많은 공부를 하지만 그러한 시공간적 배경에 의해 자신의 독특한 인간성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경쟁의 사회에 내몰린 이기적인 페르소나들의 집합이 아닌 본능에 충실한 인간의 집합으로 모여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만의 색깔,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니고 그것을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어 남들과의 관계를 표피적인 관계가 아닌 심층적인 관계로 만드는 능력은 우리들이 일생에서 항상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공부와 경쟁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주되 내가 먼저 하지는 않는다. 그런 종류의 얘기가 진행되는 곳에서는 빨리 빠져나오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의 대부분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이기적인 공부 기계의 모습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것에 너무 진저리가 나서 이렇게 몇 문단을 써본다. 물론 세상의 많은 고등학교에는 자신이 열심히 하는 공부를 인생에서의 제일의 얽매임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입혀 나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친구들이 수두룩하게 많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게 나는 진지하게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친구들끼리 서로 모여서 공부와 경쟁에 대한 얘기만 해도 서로가 가까워지는 기분과 서로에 대해 깊게 좋아하는 마음을 느낀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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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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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은 활자로 인쇄된 책만을 읽고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완벽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활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그 활자를 읽고 내가 어떤 풍경이나 상태나 동작을 영사기에 투사하듯이 이해의 도면을 구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17세기 유럽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인간의 모습과 그 주위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요란하게 바뀌는 TV의 화면과 같은 것들과 접하지 않는 사람은 글만으로 이해하는 세계의 영역을 좁게 한정지어 놓기 마련이다. 형이상학적인 저서는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묘사하여 주므로 활자를 읽으면서 단순히 생각만 함으로써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수필이나 소설이나 희극과 같은 대부분의 글에서는 글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배경 지식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직접 경험을 통해 자기 주위의 세상이 가진 모습을 보고 듣는다. 그리고 직접 경험으로 얻은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책을 읽어서 활자만으로도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그렇기에 단지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전에 내가 과연 그 책 속의 활자를 통해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배경 지식이라 함은 곧 이미지를 말한다. 한국에서 살던 사람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고, 따라서 한국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저절로 쌓을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한국에 관한 문학 작품이나 혹은 한국의 시사 이슈를 밝히는 글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한국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미 직접 경험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알고 있기에, 올바른 영상을 바탕으로 활자 하나하나에 상상력의 흐름을 주입시켜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6세기의 중국에 대한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똑같은 글을 읽고도 6세기 중국에서 생활해온 사람과는 다른 영상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은 완벽한 이해에서 약간 멀어지게 된다. 약간 멀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래도 6세기 중국 사람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추측하여 떠올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 어렸을 때 만화나 TV 등을 통해 중국의 문화를 간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여기서의 간접 경험은 오직 활자만을 통하여 얻는 간접 경험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중국 소설의 예를 가지고 계속 논의를 전개하자면, 한국 사람인 나는 6세기 중국의 참모습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활자를 통해 이해를 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내가 영화나 만화나 TV 등을 통하여 중국 사람들의 복식이나 중국의 자연 경관, 혹은 건물의 모습,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 대한 인터뷰 등을 많이 접해보고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록 활자를 통한 이해의 반경은 더욱 넓어진다는 사실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양한 매체와 끊임없이 접하여 지금 자신이 발을 딛고 생활하는 세계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도 간접 경험을 통해 확실한 이미지를 쌓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 찍기와 영화 감상을 좋아하고, 자신의 서재나 연구실에 외부 세계의 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 조형물이나 장식품을 놓아두는 이유도 곧 그들이 간접 경험을 자연스럽게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앞서 정의한 배경 지식이 하나도 없더라도 활자만을 통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영역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영역은 형이상학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고, 논리의 싸움이 전개되는 토론의 장이거나 학습이 선행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영역이다. 하지만 흔히 추상 명사라고 하는 단어들과 한자로 이루어진 많은 관념적인 동사들-우리가 논술에서 많이 볼 수 있는-또한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을 이미지로서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결국 그 단어들의 조합인 한 편의 글 또한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간단하고 당연하기까지 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면, '협상' 이란 단어를 읽고 나서 조금 더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장면이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 좋다. FTA협상을 진행하는 TV 뉴스를 평소에 보아 두었거나 학교의 임원으로서 협상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활자에서 '협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
 
  결국 어느 장르의 글에 상관없이 인간은 활자만으로는 상상력으로 대표되는 생각을 깊게 전개할 수 없고, 따라서 항상 다양한 매체와 접하면서 오감을 모두 이용하여 활자를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책보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보다 여행을 좋아한다. 간접 경험은 아주 조금만 있어도 괜찮다. 티끌만한 간접 경험의 씨앗을 바탕으로 하여도 거대한 한 권의 책을 완벽하게 이해할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이 때 티끌만한 씨앗은 나의 순수한 상상력에 의해서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고, 그 나무는 가지에 알찬 이미지를 담고 있는 열매를 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열매의 껍질을 까서 활자와 함께 섭취하여 '완벽한 이해'에 도달한다. 인간이 아무리 생각을 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아무런 input 없이 진리를 향한 output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인간은 활자를 통해 생각의 날개를 펴기 전에 다양한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과 자신의 곁에 있는 세계를 통한 직접 경험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물론 교양인이나 지식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느끼면서 만족하는 데 그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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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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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나는 언제나 따분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어떤 말을 해야 사람들이 웃을 수 있을까, 진지함에서 벗어나고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모든 친구들이 지금 열중하고 있는 어떤 즐거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와 같은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기는 하다만 결국 나의 입은 진지한 말만 하고 곧 입을 다문다. 마치 국어나 영어나 제2외국어의 교과서에 나오는 대화만에 국한하여 말하는 듯하다. 즉 그들의 생활 자체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사무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받는 수준의 대화만을 하는 듯하다. 친구들에게 무언가 지식을 설명하고, 내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나 오늘 ..했다' 식으로만 말하는 수준의 대화만이 오간다. 이런 대화로는 친구들과 '생활의 영역'을 공유할 수가 없다.
 
 나와 친구들이 '생활의 영역'에 같이 포함되어야 긍정적인 대화가 서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어젯밤의 자습시간 같이 한 방에 모여 스타크래프트를 한 아이들 예닐곱명은 다음 날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같이 스타크래프트라는 '생활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의 잡담을 통해 친구가 곁에 있음을 알게 되고, 당연히 그 잡담은 모두를 웃게 만드는 성질을 갖고 있다.
 
 친구들의 생활을 가지고 평소에 친구들과 잡담을 주고받는 일은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자와 같다. 얼마나 작은 일상의 일부이며 또한 그래서 때로는 그 가치가 무시되기도 하는가. 잡담은 매우 긍정적인 대화의 종류다. 하지만 잡담이 인간관계를 더 굳게 만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전제는 잡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과거 혹은 현재에 어떤 공통적인 경험을 함께 겪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생활의 영역'에 같이 포함되어 있거나 과거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교과서적인 단순한 정보 전달 형식의 대화, 아무런 인간관계의 발전의 에너지를 갖지 못하는 대화는 친구들과 공유한 '생활의 영역' 이 좁기 때문이다. 나를 다시 돌이켜 보았을 때, 평소에 나는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친구들과 많이 만나고 같이 생활을 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공통적으로 몰두한 일(즐거움을 주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나는 학교에 소속되어 있고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친구들과 모여 서로가 모두 웃을 수 있는 잡담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이유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는 나의 소심한 성격이 남겨놓은 잔해가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생활의 영역'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응, 어제 너 .. .했다며. 재밌었어?' 등과 같은 이야기만 튀어나올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청자가 방관자인 화자에게 취할 수 있는 반응은 다분히 교과서적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교과서적인 대화가 오가면 그 사람들은 절대로 인간관계를 더 공고히 할 수가 없다. 서로의 생활을 자극하는 즐거운 대화를 해야 한다.
 
 단 주의할 점은 이 대화가 그냥 잡담을 하는 수준에 머무른 대화이기 때문에 서로를 진지한 상태에 빠뜨려 울게 하거나 혹은 사랑스럽고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랑을 고백한다거나, 시험을 못 본 친구에게 진지하게 위로를 건넨다던가, 당연히 칭찬받을 일에 대해 칭찬하고 축하할 만한 일에 대해 축하해 주는 그런 대화는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긍정적인 '잡담' 이 아니다. 그것들 나름대로 반드시 필요한 때가 있고, 그래서 인간관계를 더 굳혀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남용되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그런 진지한 말밖에 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이 진지한 말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확고한 인간관계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런 진지한 말도 교과서적인 말에 포함된다. 소심한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진지한 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은데, 그것은 경계해야 할 제일의 대상이다. 소심한 사람이 일상에서부터 많은 친구들과 사귀기 위해서는 진지해지는 악습을 '깨부수어야 한다'.
 
 진지해야 할 때에는 진지하고, 평소에는 풍부한 유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성공한다. 그 사람은 때로 입에 종일 욕을 달고 다닐 수도 있고, 평소 행실이 그 공동체에서 정한 규칙이나 규정을 어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사무적인 면에서의 성공에서 역효과를 불러올지 몰라도 '생활 속에서의 성공'에서는 성공을 지지하는 촉매가 된다. 내 주위에도 이런 모습을 가진 친구들이 꽤 많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에게서 '일상 생활속의 대화에서 주위 친구들을 강력하게 끌어모을 수 있는 능력'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나를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평소에 소심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삶의 모습 중에서 다분히 교과서적이고, 평이하고, 진지하고, 남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선사해 주는 페르소나만을 친구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평소에 교과서적으로 살고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나의 약점이 있으면 과감히 드러내되 그것을 유머러스한 화술을 통해 즐거운 웃음으로 환원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 나는 나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그것이 한순간의 조롱의 대상이 될 뿐 지속적인 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롱은 상당히 부정적이고 웃음은 내 딴에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이제 나의 문제점을 찾았다. 교과서적으로, 모범적으로만 살려 노력했던 나의 자기 기만적인 페르소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순간이다. 내가 왜 쉬는 시간이나 혹은 어떤 이벤트가 시작하기 전의 기다리는 시간에 대여섯명의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잡담을 주고받지 못하는지 알았다. 이것은 단순히 소심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뇌를 감싸고 있는 교과서적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부족한 대화 기술과 나의 약점을 숨기려는 비겁한 페르소나가 결합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으니 지금부터 나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고 친구들과 함께 어떤 공동체에서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그리고 나아가서 적당히 풀어진 마음을 통해 유머 감각을 얻어야겠다.
 
  소심한 성격을 다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PS : 간지는 진지와 전혀 다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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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은 그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폭넓게 꿰뚫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의 담론을 마치 홈이 파져있는 선로를 따라 모노레일이 움직이듯이 끌어나가면 누구나 그 의견을 일차적으로는 수용한다. 비판은 발언이 끝난 후에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과 그 발언을 대조해 본 후에 이어진다. 즉 어떠한 불완전한 주장이라도 정당성을 가진다.
 
  면접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사설과 칼럼 등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 나갈 경우에는 그것이 사실적인 사례에 대한 조망이 부족한 불완전한 주장이라도 정당성을 갖는다. 그 담론을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당연히 최근 벌어진 시사의 모든 소식, 지금까지 인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온 사회과학자의 이론, 그리고 지금까지 있어 왔던 모든 정치인이 가졌던 사상과 주장을 모두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펴는 사람은 항상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사회 현상이나 사건의 호수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한 컵을 떠올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모노레일의 노선이 아닌 그것과 90도로 교차하는 다른 노선에 대해서는 차마 그 노선을 달릴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은 불완전하고, 언제나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규범적 진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발언 혹은 글인 이상 반증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 의견이나 주장에서 문제는 그 사람이 호수에서 담아오는 한컵이 얼마만큼 많은 물을 담아오는가다. 즉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의 양이 중요하다. 누구나 모든 인간이 딛고 서 있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근거를 채취하여 발언을 뒷받침하는데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면, 근거가 많을 수록 그 사람의 주장이 더 많은 설득력과 정확성을 얻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물컵이 정말 손에 앙증맞게 쥐어질 정도로 작고, 이 컵으로 저 멀리 있는 지식과 사실의 호수에서 물을 떠온다 해도 그것이 나의 의견을 뒷받침하는데는 너무 미약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일단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피력해야 하는 때가 오면 용기를 내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일단 내가 파 놓은 모노레일의 노선을 따라 달려야 한다. 면접과 같은 실제 상황에서도 답변을 시작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내가 끌어올 수 있는 지식을 모두 끌어 온 후에,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논의를 전개해야 면접에서 최소 요건인 발언의 완성은 달성할 수 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사실적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서 오직 언어적인 측면에서만 그것을 들었을 때 조차도 그 발언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논의를 하는 주제에 따라 사실적 근거를 많이 끌어오면 끌어올수록 더 좋은 의견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고, 도저히 내가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지식을 끌어오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반면 자신만의 논리성을 갖추는 일은 어느 경우에서나 필요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나도 이 '사실적 근거' 가 어느 지식의 범위까지를 포괄하는지는 확실한 입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내가 신문을 읽지 않고도, 유명한 저자의 책을 읽지 않고도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나는 사실적 근거를 많이 끌어오는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나의 생각도 치밀한 사전 조사가 없이 말한 것이지만 일단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내가 현실 속에서 많은 사례와 근거를 끌어올 수 있다면 논의는 더욱 풍부해지고 면접의 경우에는 면접관에게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현실의 정황을 완벽히 꿰뚫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주눅들기보다는, 일단 용기를 내어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세상의 흐름이 계속 생산하는 이론과 사건과 특정인의 주장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불완전한 주장이라도 그것을 경청하는 것은 청자와 독자의 제일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면접을 준비하는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2006. 10. 18.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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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높은 곳에서 땅을 딛고 아래의 풍경을 늠름하게 주시하던 때는
저번 유럽 여행 갔을 때 스위스의 Rigi Kulm에 올라갔을 때일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보다는 낮아도 나는 여기까지 올라섰다.
 
눈을 높이면 성공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평소에 나의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고 나의 취향과 사상과 행동 방식을 드높이면 성공한다는 말이다. 전자는 익히 들어왔을지 모르지만 후자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것이다.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그 때 상황에 따른 의지에 좌우되지만, 나의 취향과 사상과 행동 방식은 삶의 변화가 있지 않는 한 고등학교 3년 동안 계속된다. 지금 당신이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 있어서 닿을 수 없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올라가서 이미 밟아온 길을 여유롭게 관조하고 있을 것인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따라 결정날 것이다. 성공을 위한 열쇠로 조금 더 좋은 가치의 사물과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는 주장을 나는 이 글에서 하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나의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실천하는 일은 물론 의무가 아닌 일에도 손을 뻗치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진 밥만 먹고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에 인간은 항상 주위에 더 먹을 것이 없나 찾아 떠나야 한다. 나에게 이미 주어져 있거나 내가 조금의 노력으로 쉽게 쟁취할 수 있는 것들에 만족할 때 나는 그곳에 머물고 추가적으로 발전할 기회를 잃게 된다. 발전이란 성공을 위한 열쇠이다. 그런데 그 속뜻이 매우 추상적이고 또한 속뜻의 의미를 밝히는 길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기에 나는 발전의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 나만의 길을 걸으며 설명하려 한다. 그것이 곧 '나의 취향과 사상과 행동 방식을 더 좋은 것으로 드높이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도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예를 들어 그런 반발을 무마시키려 한다. 나의 기분에 맞추어, 지금 내가 임하고 있는 일의 내용과 시간의 추이에 맞추어 음악을 듣고 그 결과 내가 살아가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얻게 되는 사람과 주위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즐기려는 의사 없이 나이트클럽에 이끌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괴로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은 동등한 학력과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취향과 사상과 행동 방식이 다르다. 물론 여기서는 전자의 사람이 후자의 사람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전자의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후자의 사람보다 '좋은 것'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아간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나이트클럽이 좋을 수도 있다. 지금부터 내 개인적인 의견이 개입될 수도 있다. 주의하기 바라고 또한 아래에 써진 내용에 대해 비판을 가하지 않길 바란다. 아래의 예는 단순히 더 나은 취향과 사상과 행동방식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구분짓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

- 책꽂이와 책상에 책과 학용품을 배치하는 데 있어서도 주제별로, 책의 크기별로 책을 꽂아놓고 자주 쓰는 학용품과 자주 쓰지 않는 학용품을 분류해 놓는 사람이 있는 한편, 아무렇게나 꽂혀있고 놓여있어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 하루를 마감하며 기분 좋게 친구들과 생맥주를 한 컵 정도 깔끔하게 마시고 좋은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 한편, 고기집과 소주집과 노래방을 자정이 넘도록 전전하며 비틀거리는 사람이 있다.
- 기숙사에 치킨을 시켜서 친구들이랑 같이 먹고 깨끗이 치운 뒤 콜라를 마실 때 쓰던 컵을 수세미로 열심히 닦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치킨 포장지를 방 한구석에 몰아놓은 뒤 바닥에 묻은 양념을 완전히 닦지 않고 오히려 피해가는(..) 사람이 있다.
- 대학교의 입시 전형을 밟는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대학교 입학 후의 즐거운 생활에 대해 상상을 자제하고 지금의 일에 충실하는 한편, 다른 사람은 벌써부터 대학에 들어가면 무슨 옷을 새로 사고 어떤 관광지에 자주 돌아볼지에 대한 허풍 섞인 꿈에 잠긴다.
- 인테리어와 패션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주방기구나 옷을 살 때 나의 모습에 어울리고 주변 환경에 어울리고, 또 주방기구와 옷이 서로 잘 어울리도록 주의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무턱대고 주방기구와 옷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들이 모여서 주방과 코디를 이룰 때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들 모두가 눈이 높은 사람과 눈이 낮은 사람을 결정짓는다.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즉 나는 사람에 따라 눈이 높을 때 보는 광경과 눈이 낮을 때 보는 광경에 대한 정의가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다르고, 사람들이 각각 다르지 못하면 사회가 완전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소위 성공이라고 하는 개념의 하위에는 성공하는 사람들이 갖추는 취향과 사상과 행동방식이란 것이 있고, 그것은 비록 모든 사람이 다르게 세상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꽤 불변적인 하위개념이다.

 고등학생인 나로서 가장 사유하기 쉬운 대상은 공부다. 공부를 좋아해서 조금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는 학생과 공부를 의무로서 받아들이고 시험 성적에만 집착하는 학생이 있을 때 누가 더 눈을 높인 위치에 섰는지는 각자 판단해 보기 바란다. 사실 공부에 대해서 눈을 높이면 성공한다는 말을 주된 주장으로 하고 싶었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면 항상 학업에 대한 보상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공의 열쇠는 공부라는 말이 참이 아니고, 그 확률을 따지는 데 있어서 0%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의 욕구를 참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눈을 높인다면 어느 분야의 취향 혹은 사상 혹은 행동 방식에서 눈을 높일까, 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어디에 눈을 높일지는 각자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높다' 와 '낮다' 를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그것들에 대해 눈을 높여야 하는 일이다. 사소한 나의 습관이나 나의 태도가 지금 나의 눈높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선 그것들부터 돌아보라.

2006.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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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가끔씩 뒷자리에 앉는 나는 앞에서 엎어져 조는 친구들을 본다. 선생님이 계속 진도를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상습적으로 엎어지는 친구들은 오늘도 엎어져 있다. 나는 상습적으로 특정한 시간에만 엎어지는 친구들이 그 습관을 왜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게 되었다. 사실 나도 과거 화학 시간에 수업 시간의 80%를 엎어져 보냈지만, 나와 내 친구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 이렇게 글을 써본다.

 인간은 항상 외부의 세계와 소통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듯하다. 자신이 오늘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삶을 끌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와 에너지를 느끼는 때가 바로 외부와 내가 대화를 통해 소통할 때이다. 학교의 수업시간, 나 혹은 내 친구들이 그 시간에만 유달리 엎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선생님과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만 조용히 있으면서 내 주위 360도 전 영역을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말을 듣고 속으로 내가 선생님과 일대 일로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서 나의 머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가득차야 한다. 매 순간마다 나의 주도적인 응답으로 수업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응답이 현실에 표출되는 것이 바로 선생님의 의견에 비판을 가하거나 모르는 것에 질문을 하는 일이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이 쌍방으로 이루어지듯 아니면 나와 내 자신의 선생님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지듯, 나는 내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주어진 일인 공부에 온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어떤 일에 몰두하여 졸리지 않게 된다.

 외부와 소통한다는 것은 곧 내가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어떤 특정한 요소에 신경을 곧추세워 경청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즉 내가 외부와 소통하고 있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엎어져 자거나 저 멀리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릴 수 없다. 일종의 의무가 나에게 주어지면서 내가 조금 더 긴장을 하고, 그 결과 졸음은 싹 가시고 나는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 나의 발전을 하고 있게 된다. 한 예로 국제 연합의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가지 않게 최대한으로 긴장하고 주변국의 대표자들이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그런 모든 외부와의 소통 활동을 위한 정신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회의장에서 엎어져 자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외부 세계에 참여하면서 한 인간은 좁게는 발언자로서의 자질을 기르게 되고, 넓게는 자기 발전을 실현한다. 발전하는 나를 본 친구들은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나와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게 되며, 나는 더 나를 존중하게 된다. 내가 나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면서 조금 더 노력하여 발전해야겠다는 의지는 더욱 굳어지며, 힘들고 피곤하고 졸릴 때에도 그 의지로 즐겁게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참여를 통해, 바깥 세계와의 소통을 통해 내 자신의 발전과 타인과의 인간관계의 발전을 동시에 누릴 수 있으며, 계속되는 참여가 이어진다면 발전 또한 확실하고 지속적인 것이다.
 
 그러니, 가만히 책상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나로부터 '사고하는 나'를 저 멀리 하늘로 날려 보내지 말고, 생각하는 내가 바로 앞에 있는 친구 혹은 선생님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도록 하자. 바깥 세계와의 즐거운 소통은 약간의 긴장을 유발하여 삶을 더 건설적으로 끌어나갈 수 있게 만들 것이니.

200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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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근현대사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나는 책에서 배운 내용이 옛날이나 혹은 지금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적용될 때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비단 책 속에서만 있었던 어떤 지식의 단편이 아니고 나의 눈을 책에서 세상으로 조금만 옮겨 놓아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책에서만 보아 왔던 지식을 '현실화' 시킬 때, 나는 더 그 지식에 대해 정확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공부는 현실 속에서의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매력적인 존재로 보일 것이다. 또한 과장된 주장을 막기 위해 현실 속에서의 학문을 추구하는 자세는 조금 더 시험 성적을 올리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태도이기보다는,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공부를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던 독재 체제, 그리고 약 31년간 지속되어 왔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야당 정치인의 투쟁, 이런 것들을 단순히 근현대사 과목의 시험이나 심층면접을 위하여 외워야 하는 지식으로 생각하지 말자. 내가 딛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땅, 서울시청 앞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면 서울시청 앞이라는 공간 속에서 근현대사에서 배운 지식이 줄줄이 펼쳐질 것이다. 법과 사회 교과서에서 따분하게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던 행정법과 행정 구제제도에 관한 부분을 좀 더 재미있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인터넷으로 항고 소송에 대해 사정 판결을 하는 법원에 구경 정도는 해보는 것이 좋다. 경제 시간에는 소득 불평등이 어쩐다 하고 여러 미국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것들을 단순히 이론으로서만 외우려 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이 이론을 발견하려고 해보자. 정말 불평등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통해 몸소 체험해 보고, 그로서 현실에서의 소득 불평등이 얼마나 심한지 뼈저리게 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보자.

  그런 점에서 나는 입시준비를 위한 학원에서 선생님이 나누어 주는 유인물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학생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책이나 A4 프린트에 주어진 내용만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 체계를 만들어간다. 자신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진짜 현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선생님의 말이나 저자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비판을 하더라도 그 비판은 자신의 생각이 대부분이어서 때로는 현실의 본 모습과 외람되어 있을 때도 있다. 결국 현실과 책을 하나로 보지 않고 공부는 오직 공부일 뿐이라는 인식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반발은 이렇다. 혹자는 이렇게 내 담론에 받아칠 수 있다. '그렇다면 수학이나 물리/화학 같은 딱 떨어지는 이과 과목이나 세계사, 외국 문학과 같이 직접 경험을 통해 지식을 구체화할 기회를 갖기 힘든 과목은 어떻게 할 거냐?' 그렇다. 한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일종의 '메타포' 같은 것들을 통해 이과 과목과 세계사 혹은 외국 문학을 좀 더 잘 이해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우선 전자의 이과 과목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과 과목도 필요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과 과목에 대해 '더 나아간 흥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 말하자면 간접 경험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고 싶다. 나는 내 담론 속에서 입시학원 프린트 혹은 EBS 속성교재 속의 내용과 '생생한 간접 경험' 을 구분한다. 전자는 정말이지 활자 그 자체다. 활자로서 외우도록 강요하고, 현실과 연관지어 공부를 즐겁게 만들 여지를 정말 조금만 남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세상은 넓다' 같은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세계 사람들의 모습과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계사 책에서만 보던 피라미드를 TV 속에서 보면서 고대 이집트 문명을 좀 더 깊게 알아보고 싶은 애정이 들게 된다.

 나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에 걸쳐서 수십 차례 다녀온 현장학습이 참 좋다고 여긴다. 현장학습 가지고 공부 더 잘하는 거 아니다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일단 내가 지식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접합하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것으로 학문의 반은 성공한 것이다. 정말로, 심지어 대학로를 걷다가 파랑새극장 옆에 있는 흥사단 건물을 본 경험도 나중에 내가 역사를 조금 더 공부하려는 의지에 보탬이 된다. 그러면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수많은 사회탐구 과목을 배울 때, 책에서 얘기하는 것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서 '현실 세계도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데, 참 신기하네.' 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공부가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의 만사(萬事)에 대해서 아는 것의 지평을 넓혔다는 뿌듯함과, 현실을 설명하면서 똑 떨어지는 이론을 만들었을 때 그 명확함과 정교함에 대한 감탄과,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동시에 느껴진다. 일상 속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학문의 자세, 참 이상적인 공부 방법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항상 안주해 있는 이 현실과 책 속에서의 학문을 하나로 생각해서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을 했다고 여긴다. 국소적인 예시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치학을 정말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에 몸을 담고, 경제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증권회사 혹은 무역 관련 업종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국 역사를 잘 알려면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를 하면 된다. 꼭 이러한 직업을 성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데, 그렇다면 참여연대에 직접 가입하거나 혹은 우리나라의 여러 비정부기구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고, 직접 소규모 주식투자를 해보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조선시대 유물을 관람한다면 어떨까. 책에서만 보아서 실제로 경험은 해보지 못했던, 그래서 잘 이해가 깊이 와닿지 않았던 내용이 이제는 구체적인 현실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보다는 로크의 경험론과 비슷하다. 데카르트라면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고, 세상을 인지할 것이다. 생각하면서 존재하는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크라면 모든 사람이 흰색 도화지와 같은 생각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경험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완벽히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로크의 주장과 같이 어떤 지식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직접 현실을 경험하여 지식을 현실 세계에 투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여러 학문을 일상에서 와닿게 해줄 수 있는 도시 같다. 적어도 한국과 연관된 점이 있는 학문에 있어서는 그렇다. 신도시나 소규모 지방 도시와는 다르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로 나가기만 하면 조선 시대의 도읍지였던 한성의 유적이 있고, 헌법재판소와 한국은행과 청와대와 서울시청이 있다. 세종로는 때때로 시위하는 노동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광화문역 7번 출구를 지나며 볼 수 있는 많은 거지들, 북악스카이웨이 쪽에 있는 늙은 부자들과 강남 타워팰리스의 신흥 부자들, 그리고 달동네의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보기만 해도 우리 사회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모든 학자들과 학문을 배우는 모든 학생들, 그들은 모두 인간과 인간이 모인 사회와 인간 주위의 자연과 이런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세계까지도, 우리가 '세상' 이라고 말하는 것 속에서 참모습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나의 의견을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직접 세상의 모습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공부를 즐겁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고, 진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의 학문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공감을 하거나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나는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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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Realistic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루에 얼마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얼마만큼의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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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빨간 글씨로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잤는 지 쓴 것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사람은 항상 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제 스스로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을 조사해서 그 시간들의 평균값으로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을 정했습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시간은 하루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루에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최대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야 합니다. 26일 플래너의 MAX 11이라고 제가 써 놓았습니다. 이는 제가 26일에 최대 11시간 정도 공부할 거라 예상하고 적어놓은 것입니다. 제가 글씨를 조금 못 쓰지요^^ 그리고 오른쪽에 계획을 써 놓은 곳을 보면 공부에 관한 일(저에게는 A로 분류되었습니다) 옆에 예상 소요 시간을 적었어요. 그리고 이 시간을 더하면 11시간, 즉 제가 하루에 최대로 공부할 시간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지요. 이렇게 자신의 공부 시간을 예상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공부 계획의 현실성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공부를 단위 시간 당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겠네요. 방학 초라서 그런지 성실하게 거의 모든 계획에 체크를 남겼습니다. ('장렬히 체크를 남기고 쓰러진' 계획도 있기는 하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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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 Weekly Compass도 같이 끼워놓았습니다. 이번 방학에는 혼자 공부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목표에도 공부에 관한 것밖에 없네요. 이처럼 Weekly Compass에 일주일에 내가 할 공부의 양을 적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 내가 일주일에 꼭 끝내야 할 공부, 즉 목표가 됩니다. 이 목표를 성취한다고 나는 열심히 살았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충분히 더 힘을 내면 이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면 저는 왜 목표를 이렇게 제 잠재 능력보다 낮게 설정했을까요.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자기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을 때의 70% 정도를 목표로 설정하면 좋을 듯합니다. 추가로 말하자면 저에게 일주일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입니다.

  한약 먹고 운동 하는 것도 자잘한 것이지만 적어 놓았네요. 이때는 한자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벤트' 를 고려하여 저의 하루 공부량을 줄였습니다. 전에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계획의 현실성을 높이고 성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하는 일 모두를 플래너에 적어야 한다고 제가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저는 플래너에 쓰여 있는 task list를 보고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에 공고하였듯이 제 사적인 내용은 모자이크 처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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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 자신이 저의 능력을 정확히 예상하지 못하였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제 8월 5일 속지를 통해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때 상암월드컵경기장에 있는 축구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7시부터 9시까지 경기가 있구요, 출발 시각은 5시, 도착 시간은 11시로 예상했고, 그에 맞추어 공부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공부 따로, 축구 따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축구를 본 후에도 기운이 남아돌아서 밤까지도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9시에 축구가 끝나자 저는 기운이 빠졌고 (비록 한국 FC 서울 팀이 일본 FC 도쿄를 3:0으로 이겼지만 -지정석에서 보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오세훈 서울시장과 악수도 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밤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정된 계획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가 없었구요, 또 전날에 너무 늦게 자서 8월 5일 너무 늦게 일어났습니다. 크게 이 두가지 원인으로 저는 이날 힘들어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플래너를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제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모두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플래너가 좀 더 이뻐보이고-그 때에는 아마 플래너가 저를 발전시키는 마법같은 다이어리로 보이겠지요-더 플래너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죠. 저는 지금 바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 이렇게 공부 투성이의 계획밖에 없지만, 여러분들은 공부는 물론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일들을 '현실성을 바탕으로' 플래너에 적어놓고 그것을 실천하였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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