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평방미터의 공간에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 드넓은 공간을 끊임없이 여행하며 정처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뿌리박고 있는 공간의 반경 1미터에 있는 사람들과 어찌 되었든 같이 살고자 부대끼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전자는 유유상종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후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100평방미터를 쏘다닐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다면 유유상종의 성격을 가지고 살면 된다. 내가 필요할 때 그 범위에 있는 사람들을 부를 수 있는 권력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특정한 종류나 성향을 더욱 드러내보여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더 열광하게 만든다. 


인터넷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성향을 더 드러내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인터넷에는 자유분방하고 마니아스럽고 고집이 센 사람들이 많다. 인터넷의 발달은 시간과 돈의 제약을 없애주어서 대면 커뮤니케이션일 필요가 없는 영역의 혁명을 가져왔다. 


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넓은 범위를 돌아다닐 능력이 한참 부족하다. 모든 사람이 각자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이 만날 수 있는 20명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가정할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20명을 원하는 시각과 장소에서 만나고자 할 때 자신이 있는 곳 주변에서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의 특정한 종류나 성향을 강조하면 나와 종류나 성향이 다른 사람이 나를 피하게 되므로, 나는 어떠한 종류나 성향도 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백색의 그릇처럼 되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유유상종이 맞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유유상종은 이상에 불과하고 현실은 자기 주변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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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됨

칼럼/관계 2013.09.20 14:08

 기업 회장, 외교관, 예능인, 그리고 그 외에 우리가 싹싹하고 말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래의 글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세련됨이 무엇인지를 규범과 같이 소개하는 17세기 프랑스 에세이다.


사교계 사람들은 모든 일에 대해,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진짜 사교계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전문적인 장인(匠人)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멋있는 신사라면 자신이 하려는 일에 완벽을 기하기보다는 그러한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는 생각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고 멋진 생활 습관을 가진 데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여유 있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어려운 일에 휩쓸리더라도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은 자신에게는 별 일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레, 『매력에 관해』


 전문적인 장인을 엔지니어로, 사교계 사람을 컨설턴트라고 하면 지금의 버전이 될까?

 하지만 그 둘의 접점에 설 수 있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세련됨 역시 위에서 말하는 멋있는 신사의 자질일 것이다.


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글이 있었으니 소개해볼까 한다.

새로운 문화 매개자들(문화활동 지도자, 놀이와 문화의 지도자 등)이 이루어낸 혁신적 방법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학교교육 방식을 거부하고 있는데, 기성 쁘띠 부르주아지계급이 학력자본은 상대적으로 많지만 문화적 유산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인 반면,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예술가도 이들에 포함된다)는 문화유산은 많은 반면 학력자본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사실을 간파한다면 그 이유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한 지식을 시험해보면 파리의 초등학교 교사들(지방의 소규모 초등학교 교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경영자들, 지방의 의사 또는 파리의 골동품상들은, 언제나 학교를 통한 취득 방식에 따라 다니는 신중함이나 조심스러움, 절도(節度)에 대한 의식(意識)과 같은 요소보다는 오히려 자신감과 후각(Flair) 더욱이 지식을 덮어서 감추기 위한 허세 등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함을 알 수 있다. .... 아주 특징적인 모습이나 외양, 언행, 자세, 독특한 말투나 어투, 매너나 상투어를 갖고 있는 한 리셉션이나 회의, 인터뷰, 논쟁, 세미나, 위원회, 협의회 등 오늘날 가장 중시되는 시장에서 그 나름대로 하나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최종철 옮김, 새물결, p. 178.


 회사 채용을 할 때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형 직원을 채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학점을 별로 안 보고 면접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난 기업이 CJ E&M이었다) 아울러, 기성 쁘띠 부르주아지계급과 같은 사람을 원하는 곳에서는 학력이 높을수록 좋을 것이다. (고시를 보는 모든 직종과 대학원 이상의 유명 대학 학위를 선호하는 기업 및 연구원) 자기 성향을 알고 그에 따라 내가 취득할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그렇게 목표를 달성한 나를 원하는 일자리가 곧 내가 가고 싶은 일자리임을 보장하기 위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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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자유사상 멘토의 세속적인 계약 : ‘스타의 강의

크레비용 2세의 « 몸과 마음의 탈선 »(1738)* 에서

 

 

     크레비용 2세의 « 몸과 마음의 탈선 » 안의 세번째 부분에서 보여지는 스타의 유명한 대화는 교양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방법을 구성한다. 성공한 남자인 베르삭은 경외의 대상이며 젊은 영웅 메일쿠르를 매혹시키고 이 글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탈선하고 규칙을 위반하는 전형을 가진 이 유혹자는 그가 정복하고 오해한 여자들에게 아첨을 받으며 그의 젊은 생도에게 사회생활의 성공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메일쿠르가 처음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될 그에게만 예약된 지식은 젊은 인간이 받은 교육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베르삭의 견해는 그 견해의 밑바탕이 되면서 그 견해를 돋보이게 하는, 바로 이전 세기의 정직한 이론가들과 도덕가들이 제시한 견해와 이어진다. 베르삭의 모든 실증은 세상적인 것은 타락했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베르삭에 따르면 그의 저서에서 정의된 예의범절의 규칙, 특히 슈발리에 드 메레의 저서에 있는 규칙은 젊은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계약 속에 이상화된 우주로 착각한다면 무지한 젊은이를 오로지 실패와 조롱거리로 이끌 수밖에 없다. 베르삭 그리고 소설의 화자에 따르면 정직은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직은 사회 속에서 욕망의 참혹한 현실과 세속적인 이야기를 장악한 이득이 보이지 않게 덮는 예의바른 용어들의 집합이다.  17세기 자유사상이 갖는 전형적인 관점에서 베르삭의 강의는 거짓된 가치를 낱낱이 드러내고 정직한 인간들의 사회가 가진 허울뿐인 성격에 대한 품위 있는 비판이다.

 

     그의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 베르삭은 우선 관찰하는 태도를 추천한다. 그것은 젊은이를 스스로 완벽하게 하고 우수한 형태를 정의하는 가치체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식의 태도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궁금한 것을 밝히고 단순화시키는 지식을 공유하게끔 하는 태도이다.

내가 오로지 너를 깨우치게 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는 너의 의심을 해소하는 것에 항상 진심으로 기쁨을 느낄 것이고 […] 그리고 네가 보아야 하는 그대로의 세상을 네게 보여주는 것에 기뻐할 것이다. (208)

     베르삭은 따라서 예의범절의 교수 역할을 하며 사회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 세상의 학문 »(ibid.) 의 기초를 젊은 영웅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 진심으로 » 반대하는 « 방법들 »을 가르쳐준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걱정 혹은 도덕적인 고려 없이 외면에 대한 존경을 요구한다. 메레에 의하면 정직이란 또한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유쾌하게 만들고 측정할 수 있는 자질을 확실히 굳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슈발리에에 의하면 정직과 도덕성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오네똠은 좋은 도덕성에 대한 영감을 유발하고 도덕성으로 가는 지침을 제시할 이성을 가지고 있는다. 반대로 베르삭은 그가 제자들에게 전수할 학문의 수많은 원칙들이 « 명예와 이성에 상처를 입힌다 »고 생각하며, 정직을 굉장히 폄하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정직은 오해를 통해 알게 되는 « 자질구레한 일들 »의 퇴적물에 불과하다. (ibid.)

     라 로슈푸코처럼 메레의 정직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행동을 규정하는 규범의 목적론적인 관점을 제안한다. 때때로 미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로 쓰이는 우수함은 정직의 기반을 구성하는데, 이는 정직이란 관습이나 대화 상대와의 조화에 대한 걱정이 지배하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순응적인 태도의 한 형태이며 하지만 그 자질이 선입견이나 용도 및 전통에 대한 존중과는 별개로 사랑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애매모호함은 라 로슈푸코의 저서에서 특히 강조된다. 그의 많은 규범들은 이득과 위선이 지배하고 선보다 악을 더 신뢰하는 사회적 우주를 구성한다. 하지만 잘못을 각성하는 이러한 관점이 냉소적인 실용주의로 연결되는 대신, 다른 규범들과 특히 특정 몇몇의 고찰들은 참된 미덕을 기르는 사회적인 행동의 이상향을 설명한다.

     베르삭의 견해는 순응적 태도로서의 정직이라는 생각을 왜곡하지만 또한 자유사상의 세속에 대한 이론가들이 관심갖는 것을 지각하도록 허락한다. 표상의 주제인 오네똠은 그의 판단이 갖는 자유로움을 좀 더 잘 보존하기 위해 intus et libet, foris ut decet이라는 유명한 격언처럼 외면의 놀이로 표현된다. 슈발리에 드 메레의 라 로슈푸코와의 대화내용이 담긴 편지에서 격언들의 저자로부터 따온 주제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장소의 관습들에 몇가지 빚을 지고 있다. 그 관습들이 나쁜 것들일지라도 대중의 존경심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적으로만 빚을 진다. 우리는 그 관습들을 실행해야만 하며, 관습들을 비판하는 전지구적인 이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관습들을 수용하도록 유지해나가야 한다.

   크레비용의 소설은 베르삭의 역할에 관하여 젊은 메일쿠르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통찰력이 있는 교육가의 모습과, 화자에 의해 외면적으로 표현된 그대로 허영심 많고 경박한 성공한 남자의 모습 사이의 대조를 증거한다.

그가 끊임없이 속이고 고통을 준 모든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은, 허영심 많고 강압적이며 경솔한 그는 우리가 이전까지 보아왔던 사람 중 가장 대담한 댄디 보이이며, 결점들이 서로 대립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같은 결점들에 의해 여자들의 눈에 아마도 가장 소중하게 여겨진 사람일 것이다. […] 그는 있는 그대로이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는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다. […] 그는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의 정신이 갖는 우아함과 같은 우아함을 구성해주었고, 우리가 잡을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특징적인 멋을 낼 줄 알았다. […] 이 행복한 무례함은 자연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처럼 보였고 그에게만 적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72-73)

     감탄하는 젊은 남자의 눈에 비친 베르삭은 성공으로 온몸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유혹적이고, 특이하고, 무례한 그는 자연스럽기 때문에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한 강의는 부분적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이 성공은 계산과 책략의 걸작이며, 외모는 극단적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했다. 메일쿠르와의 대화를 시작하며 심각한 어조로 놀라는 그는 갑자기 선생과 제자 사이에 자리잡는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며 대답한다.

네가 가지고 있는 깨우치고자 하는 필요성은 나로 하여금 네게 나는 생각하고 사색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주게 압박한다. 나는 뿐만 아니라 내가 네게 말하는 것들과 내가 네게 말할 것들에 대해 네가 가장 단단히 비밀을 유지할 줄 알 거라는 헛된 기대감을 갖는다. (209)

     베르삭에게 순응주의의 필요성은 두 개의 보완적인 태도를 갖는데 성공하기를 원하는 인간을 요구한다. 첫 번째 태도는 세계를 관찰하고 성공이 의지하는 두 개의 영역을 특별히 연구하는 태도이다. 두 개의 영역 중 첫째는 명성을 쌓거나 무너뜨리는 여자들이며 둘째는 시대의 특징적인 « 용도, 흥미 그리고 실수 »이다. (ibid.) 두 번째 태도는 인간의 본성의 해체에 내재해 있다. 베르삭은 예의바른 외모로 부패한 우주를 감싸는 위선자의 견해에 대한 지지로서의 이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정직이 갖는 특정 단면들을 강조한다. 멋을 실재하는 자질들의 결과로 생각하는 메레, 라 로슈푸코와 라 브뤼에르와는 달리, 베르삭은 세상에서 덕성, 멋 그리고 재능은 […] 순수하게 임의적이다” (209) 고 확신한다. 세속적인 가치들의 허위를 조금 더 잘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신용이 있는 조롱이라는 표현으로 그것들을 지칭하며, “변덕에 종속된” “변하는 주제들”, 그리고 일시적이며 심지어 그것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 위험한 것들로 그것들을 정의한다. (ibid.) “조롱이라는 용어는 세속적인 판단의 자유와, 외면과 유행에 판단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일 사이의 단절을 강조한다. 우리가 조롱거리라고 판단하는 것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그의 제자들에게 베르삭은 뻔한 역설로 대답한다. “생각하고, 자주 사색만으로도 그들이 내재적으로 가장 많이 비판하는 실수에 빠지는 이들이여, 당신들에게 먼저 한 마디만 하지. 거의 모든 경우에서 우리 중 가장 깊게 사유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정신에 치욕을 주는 부조리한 의견들과, 형상을 망치고 제약하는 현상 유지의 책임을 지운다.” (210)

     이 모순에 대한 해명은 세속적인 것이 제안하는 마지막 일들에 내재해 있다. 즉 사회에 잘 보이고, 그를 통해 평판을 얻는 일이다. 정직에 대한 이론가들의 어휘는 새로운 뜻 정의의 표적이 되고, 그때는 라 로슈푸코의 특정 몇몇 격언식의 정의를 생각나게 하는 방식에 의해 비방하고 단순화를 한다. “조롱이 우리를 즐겁게 할수록 조롱은 우아함이고, 멋이고, 하나의 정신이다. 그리고 오로지 그 조롱을 한번 사용해야만 우리가 싫증이 나며, 그래야만 우리가 사실상 조롱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준다.” (210-211)

     설명된 정체성의 관계는 의미 작용들을 가져다 쓰고 있는 사회의 관점에 의해 바뀌는 의미 작용들의 상대적 성격을 강조한다. 단어와 사물 및 사상 사이에 변화하는 관계는 정직에 대한 견해의 기반이 되는 이상주의, 그리고 여기서 위선의 원인처럼 보이는 것을 문제삼는다. 예의를 차리고 고귀한 전통으로부터 세속받은 감정 관련 어휘는 크레비용 그리고 마리보의 작품 안에 등장한다. 이는 마치 의미들만이 혹은 허영만이 역할을 수행하는 편리한 관계의 장막과 같다. 두 저자들의 작품 안에서 발견되는 예의바른 언어에 대한 비판그리고 모든 언변의 상대적이고 동기부여를 받은 성격에 대한 증명은 여기서 세속적인 관계 총체에까지 펼쳐져나간다.

     이 세상은 가식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성공을 향한 길은 성공의 해체를 통해 뚫려있다. 베르삭은 오네똠의 이상향 안에 들어있는 환상, 자연스러움의 환상을 잡아낼 기회를 노린다. 메레와 라 로슈푸코의 작품 속에서 오네똠은 그의 본성을 완벽하게 하고 부자연스러움을 피함으로써 얻어지는 미적 성공을 구성한다.

     베르삭에 따르면 사기 치는 덕성과 표면적인 자질들의 거짓된 화폐가 오가는 우주 안에서 성공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자신의 행동에 완전히 영향을 주는 사람에게 돌아온다. 자유사상 멘토는 세속적인 정직 안에 들어있는 모순을 새로 강조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복종하는 것은 진정성과 반대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형상을 일그러뜨려야만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209) 하지만 그것은 본성을 더럽힐뿐 아니라 본성을 다시 한번 아예 타락시켜야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항적인 원칙은 잘못된 의견 하나를 고치면서 원칙이 제시되는 상황으로부터 그 권위를 끌어온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도덕성에 대한 무지를 보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항상 명성과 재물을 전혀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항상 덕망 있고 자연스럽게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 마음과 정신은 서로 상하게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으며, 그 과정에 모든 유행과 가식이 있다. (ibid.)

     이 부패는 신중함의 결과인 것처럼 제시된다. 세속적인 성공과 자기만족의 걱정은 우수함이나 때때로 세속적이고 미적인 완벽에 대한 탐구의 형태로 참가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회적 특권이 필수불가결한 요구사항을 구성하는 우주 속에서 서로 유지하기 위한 필요성에 대응된다. 이 신중함과 성공에 대한 탐구 사이의 연계성은 궁정에서의 삶이 갖는 요구사항을 생각나게 하는데, 특히 그라시안의 Oraculo Manual 안에 형성된 것과 같이 생각나게 한다. 베르삭의 견해는 한편으로는 궁정의 삶이 갖는 특징을 반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의 전통을 비판하는 움직임에 속하는 현실주의 사상의 노선에 속해있다. 자연법의 문제에 적용되는 홉스의 반이상주의는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의 영역에서 이곳에서 그의 동등한 대상을 찾는다. 행동의 규범은 끝에서부터 혹은 인간의 완전함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고, 대신 규범에 영향을 끼친 행동들로부터 연역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보존할 방법을 찾으며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생존이란 획득하고 유지하고 심지어 명성을 쌓아나가는 일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먼저 신중함과 그가 소중하게 얻은 것들을 보존하고자 하는 걱정에 의해, “방법이 […]  부족한것은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성공한 인간은 스스로의 형상을 일그러뜨려야 한다. (208) 덕성과 공공에 노출된 자연스러움은 그것들을 애매모호하게 소유하고 있는 이를 비난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ibid.).

     사회적 거리두기 현상의 전략적인 수용에서 자기만족의 예술이 생긴다. 이러한 멋에 대한 경멸적이고 실용적인 관념은 사회에서 도달하기 쉬운 목표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데 왜냐하면 그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완벽에 대한 탐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메레와 그라시안이 제기한 우수함과 모방할 수 없는 게 뭔지 모른다는 사고방식에 의해 베르삭은 충분히 잘 확산되지 않고 실행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 몇가지 규범들을 대체한다. (211).

     그 규범들의 첫째는 외면적으로 세속적 삶에서 여자들의 힘에 굴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르삭에 의하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 동시에 가장 멋있는 방법보이는 여자들에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 안에서 오로지 여자들을 유혹하는 자만이 멋있고, 그들을 만족시키는 정신의 종류는 사실 무엇이 되었든 여자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유일한 주체라고 믿지 않는 것이다.” (ibid.) 이 조언에서 멘토는 세속적인 삶 안에서 여성적인 영향력의 배타적이면서도 임의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그는 냉소적이고 폭로적인 방법으로 여인들의 상업활동을 탐구하는 데 정직하게 성공하고싶어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슈발리에 드 메레의 몇몇 원칙들을 언급한다. 이 이전 세기의 작품들은 여인들을 찬양하면서 고급스러운 시류 이후에 귀족 사회 안에 널리 퍼진 여성들의 이 역할을 말해준다. 섬세함의 결정자인 여자들은 도덕의 제련 활동에 참가한다. 사랑받는 대상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는 예의는 궁정의 사람과 오네똠의 섭렵이라는 이상향에 매우 잘 맞는 욕망과 정서의 통제를 제안한다. 하지만 크레비용의 시대에서는 이 이상주의가 욕망과 허영의 회전목마를 간접적이고 암시적으로 지목하도록 예정된 단순한 일상 언어의 지지와 같이 보이기 때문에 이상주의의 가치는 분명히 떨어진다.철학자들의 내각에서 마리보는 이러한 언어를 감언이설의 사전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 언어가 없다면 조잡하고 악하게 보일 것들을 번역하고 사랑스럽게 고치는 역할을 한다. 환상을 깨는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세속적인 삶에서의 여성의 헤게모니는 더이상 실재하는 자질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 없다. 정확히 베르삭의 세속적인 자유사상은 변경과 조정의 행태가 권력의 의지에 따른 행위의 기반이 된다 생각하는 임의성의 비판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건 단지 여자들이 원하는 대로 모두 해주도록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침내 그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는 행위이다.” 라고 베르삭은 그의 대화 상대에게 선언한다. (ibid.)

     세상에서 지배적인 허위와 우발성은 자유사상의 실행에 필요한 조건들이다. 위선자로 비판을 받은 정직에 대한 견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사상적 조정자의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 견해는 타인들을 간파하려는 방법을 찾으며 궁정의 삶이 갖는 특징적 태도를 숨기는 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타인들을 속이기도 해야 한다. 이 충격적인 조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정의된 신중함의 예술이 갖는 논리적 수순과 같이 보인다. 라 로슈푸코는 격언 245에서 자신의 사교적 기교를 숨길 줄 아는 것은 매우 큰 기교다라고 분명히 인정하며, 그라시안의 Oraculo Manual« 무지한 척할 줄 알기 »를 언급한다. 베르삭은 동일한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타인이 조금 더 스스로를 드러내게 유도하고 타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스스로의 판단력과 정신을 상기시켜주지 않기 위해 타인에 대해 아는 것을 숨기라고 조언한다.

사람들이 네게 보여주는 악덕에 의해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 말고, 절대로 사람들이 너를 간파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발견했다고 자랑하지 마라. 자신이 아는 것들을 모두 보여주기보다 자신의 정신에 대한 열등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보통 더 낫다. 고찰로 이끄는 것에 의지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척하며 숨기는 일과, 너의 이득을 위해 너의 허영심을 희생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211-212)

     또한, 순응주의는 다른 사람들을 간파하는 데 실패하면서 조금 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을 추측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것들을 발견하고 스스로 타인의 의향과 열정을 숨기도록 언행을 조심하는 예술은 타인에게 적용되는 이득과 감정을 발견해야 하는 아첨꾼의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베르삭의 냉소적인 조언들은 임의적 조정의 끝을 보는 이전 세기의 도덕가들이 가진 신중함의 원칙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궁정인과 오네똠이 갖는 이상적이고 심지어 유토피아적이기도 한 몇몇 개념들을 반박한다. 사실 베르삭은 대화 상대에게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깨닫게 만드는 것을 포기하라고 조언한다. 그들을 알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시험을 보려는 정신을 상기시거나 그들에게 교훈을 주는 체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다. 이성적인 사람은 악덕함을 비판하는 대상의 잘못된 점을 고쳐주기보다는 대상의 결점을 숨겨주며 지원하고 그 결점을 못본 체한다. 만약 인간을 공부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오로지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면서 발생하거나 타인을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실수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때로는 타인을 보다 확실히 판단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타인을 따라하는 것처럼 행동하라. 우리가 갖는 최선의 예시와 우리의 찬사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우리 앞에서 발전하고, 우리의 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의견에 기울일 수 있도록 하게끔 도와주자. 이는 자신을 버릇없는 체하게끔 놓아두어야만, 다른 사람의 버릇없음이 전혀 빠져나가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ibid.)

     이와 비슷한 영역의 관련 서적에 등장하는 궁정의 삶과 세속적인 삶의 도덕화는 베르삭의 체계에 비추어보았을 때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그 영향력이 17세기의 정직에 대한 계약에 의해 결정된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의 책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깊게 젖은 궁정인의 역할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궁정인은 폭군의 « 교화 »를 꾀하고 그의 조언들을 통해 도덕적, 정치적 악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에 철학에 좀더 가까이 가려 한다. 이 권력의 도덕화는 또한 정신론의 논의에서 오귀스트를 마치 부정의, 불관용 그리고 잔혹성이 재물에 대한 호의로 잊혀질 수 없는 폭군과 악덕한 참모들에 둘러싸인 사람으로 묘사하는 슈발리에 드 메레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메레에 의하면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보통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의해 놀라지만 « 폭군의 재능 »에서 « 더 위에 있는 가치를 잡아낼 줄  아는 » 사람들을 구별하게 되는데 이는 « 정직이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듯 » 통치하는 사람들의 « 부정의한 야망 » 의 결과이다. 타인을 만족시키고 예의범절에 굴복할 것이라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카스틸리오네도 그의 뒤를 따른 메레도 낡은 철학의 유산인 권력과 사회적 관계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는다.

     베르삭이라는 인물에게는 세상에서 좋은 성공이나 나쁜 성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명성을 쌓고 유지하는 단 한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더욱 잘 지배하기 위해 임의적인 규칙에 굴복하는 것이다. 세속적 행동의 규범과 도덕적 선입견 사이의 극명한 단절은 젊은 메일쿠르를 위험한 환상으로부터 치워내는 것만큼이나 쉽게 그를 설득하는 자유사상가가 완전히 가정하고 있다. « … 세상과 (도덕은) 항상 서로 합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보다 더 자주 우리가 다른 사람의 희생 없이는 홀로 성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 (217-218)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는 사회 내에서의 생존을 위한 조건처럼 보여지는데 이는 특권의 상실이 사회에서 죽음의 한 종류와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특권이 순수하게 임의적이고 실재하는 자질과는 독립적이기 때문에 특권은 자질이 아니라 방법 혹은 테크네에 의해 얻어진다. 베르삭은 그의 대화 상대에게 특권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얻어 정리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특권에 의해 생산된 효과에서 벗어난다. 이 실용주의는 궁극적이지 않고 기계적인 인간관계의 관념에 의해 지지받는다.

베르삭은 사람들은 그들을 놀라게 하는 것에만 감응하고, […] 특이성만이 인간들에게 그 효과를 생산해낸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특이해질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닮고자 하는 대상이 사상이건 방법이건 너무나도 아무도 닮지 않는 척할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하는 오직 하나의 결점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장점보다 더욱 더 많은 정직함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사람의 걸작품이란 특이성,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예술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의문의 대상이 된 모방 능력의 동맹 관계이다. 이 특이성이 없으면,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놀라게 할 수 없으며 그로 하여금 모방하게 하는 정신의 유연성 없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족을 가져다줄 위험을 갖는다. 프로테가 말했듯 그래서 사람은 모든 형상을 취하면서 하나로 고정될 수 없는 상태로 있어야 한다. “멘토의 단언에 따르면 당신이 모든 것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무엇인지 추측하기 쉬운 데는 전혀 변함이 없다.” (212) 진실하지 않음과 순간에 따른 변화는 이 보여지기 위한 예술에서 핵심 요건이다. 성공한 사람은 시늉만을 하면서 시늉의 대상이 갖는 실수와 결점에 대해 그 자신은 관람자가 되고 그래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을 확신한다.

     효과를 생산해내는 것에 관하고 결과를 추적하는 것에 관하지 않은 베르삭의 방법은 세속적인 삶의 다른 영역들에 적용된다. 대화 속에서 대화를 독점하고 관객들에게 재고할 시간을 남기지 않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야 한다.” (216) 베르삭은 비방을 계속한다. “좋은 말투의 핵심은 설득하기 위한 방법이므로 세심함 없이 실행되어야 한다. 사실, “아무것도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 않고, 아무것도 당신의 쾌락과 당신의 정신에 대한 더 고상한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219) 좋은 동료로서의 말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베르삭의 견해에 따르면 정직이라는 단어가 그 순간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되든 도덕적인 의미로 해석되든 상관없이 더 이상 정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비방에 더욱 집중하며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므로 서로를 구별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한 멍청이가 악의를 향해 자신을 바꾸었을 때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정신의 소유자보다 더욱 더 존경을 받는다…” (ibid.) 정직을 연구하는 이론가들은 정직이 타인을 상처입힐 수 있을 때 조롱을 비판하는 데 합의한다. 베르삭은 정직이 협박의 효율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모른 체하기, 가식 그리고 경박함은 잘 지내는 사람들의 관계 유지를 위해 차용되어야만 한다. 정직의 원칙들은 이 세속성의 강의에서 가치를 잃었다. 왜냐하면 서로를 비방하려는 동기에 의해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좋은 말투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아야하고 또한 현학적인 태도에 반대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거나 아니면 그의 경박함, 무지 그리고 정신의 메마름을 장점의 한 가지인 척하는 경우이다. (220-221) “좋은 말투는 억제된 집단 내에서 차별화를 가져오는 특징, 혹은 카스트와 같은 인식을 위한 적절한 규약의 한 종류처럼 보인다.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의 말투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말투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서만 그 좋은 말투를 찾을 수 있다고 제대로 결정되어 있다.” (218)

     오네똠의 귀족적인 모른 체하기, 카스틸리오네에 의해 정의된 스프레짜투라의 유산인 여기에서 우아한 건방짐은 교만한 태도의 신호인 지배적인 영역에서의 선입견의 효과인 것처럼 표현되었다.

아주 많은 겸손과 함께하는 깊은 수준의 무지는 진실로 성가신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극도의 자만과 함께라면 나는 당신께 그 무지는 아무런 거리낌을 갖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나저나, 당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걱정될 정도라면 당신은 보통 누구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219-220)

     여자들 사이의 관계들은 베르삭에 의해 동일한 냉소주의로 표현되었다. 왜냐하면 대소동이 있어야만 그들의 관심을 상기시킬 수 있고 재고할 기회가 부재해야 어떤 불가항력적인 열정이 그들을 이끌 수 있다고 그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게 더 어울린다. (217) 귀족 계층을 기리는 점진적인 상승의 예술은 여기서 공감의 한방에 희생당한 유혹당한 여자를 설득하고 그에게 손쉬운 핑계를 제공하는 무모함과 끝이 없는 파렴치함에게 공간을 내준다. (ibid.)

     세속적인 관계는 부패를 만드는 주인에 의해 만들어지며 이는 권력관계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때는 지배받는 것이 지배받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므로 관계가 아무렇게나 가치를 정하여 지배하게 된다. 이는 정직에 대한 연구가들의 원칙들이 사상의 거짓됨에 의해 쉽게 속지 않기 위해 해체해야 하는 사상들처럼 표현된 이유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겸손에 가치를 매기려는 걱정, 남들을 만족시키려는 가장 큰 걱정은 세상 속의 위험한 태도처럼 낙인찍힌다. 그 태도는 그 태도를 연약함의 위치에 놓아두는 사람들을 데려오고, 그 태도는 대화 상대들의 지배적인 의향이 자유롭게 파고들 공간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213) 베르삭에 따르면,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한다고 당신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 자신에 대해 말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조금 더 겸손하면 당신은 그들의 허영심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ibid.) 세속적인 관계에 대한 탈 환상적인 이 세계관은 실행에 옮기기에 위험이 따를 뿐더러 거짓됨으로 얼룩진 미덕을 보는 관점에 대한 의심이라는 필연적 귀결을 낳는다. 재물이 많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라 로슈푸코의 몇가지 특정 격언들을 회상하게 한다.

나는 [..]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가치를 매겨야 한다고 생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사람이 스스로의 입을 다물면서 그 자신이 사회에 대해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비판받아야 하는 대상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겸손하기로 강요받았다고 믿는 교만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지 알지 못한다. (ibid.)

     베르삭의 조언들은 간접적으로 거짓된 덕성을 드러내는 견해가 냉소적인 태도의 전초기지로 기능할 수 있는 사실을 조명하고, 세속적인 도덕가들이 문제삼을 수 있었던 의심을 이해하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짜 정당화는 베르삭의 견해에 의하면 지배의 위치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의 관점에서 부차적이다. 세속적인 행동은 한 가지 선택지, 지배하는가 지배당하는가 중 하나만을 갖게 한다. 신중함, 남을 불만족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 배려심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능욕하게 북돋우며, 평판에 대한 자비가 없는 이 싸움은 전략적으로 공격적인 태도 외의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들을 쉼없이 우리의 자존심이 원하는 대로 정화시키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다. […]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을 호의적으로 만들려 애쓰는 광경을 볼 때보다 우리를 심각하게 판단하는 경향을 갖는 때는 없다. (ibid.)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장면을 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장면을 강요해야 하는 필요성은 다른 위험을 동반한다. 자신의 자존심에 따라서만 움직이려는 진실된 사람은 성공이 그의 열정에 대한 영구적인 통제를 요구할 때 위험하다. 베르삭의 만족감에 대한 찬양은 순수하게 이런 행동의 바깥에 존재하는 특성을 강조한다. “우리의 장점을 내적으로 방지당하지 말자. 나는 그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가진 체할 뿐이다. 특정한 자부심이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말투에, 우리의 몸짓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에 묻어나오게끔.” (ibid.)

     여기서 설명하는 인물은 극장과도 같이 보이는 공동체의 공간을 전복시키고 때때로 관객 혹은 희극인과 같은 느낌으로 오네똠의 이미지를 왜곡한다. 이 인물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예상하며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는 기다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베르삭의 견해에서는 사회적인 놀이의 수락은 세속적 가치의 몰이해와 열정의 섭렵에 대한 걱정에 기반한 이중성의 일정한 태도와 함께 한다. 성공하려는 자에게 필요한 결점인 자만심을 찬양하며, 멘토는 젊은 영웅에게 다른 사람에게 속아넘어감으로써 스스로에게 더이상 속아넘어가지 못하게 되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선의로서 건방지고 원칙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자만심을 사유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유혹의 손길에 바쁘고 무례함이 갈때까지 가서 성공 자체에 절대 취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큼 성공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선의의건방진 이, 진정성으로 허영심을 가진 사람은 그의 열정에서 멀어지게 하는 힘에 치인다. 자유사상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인정하고 이를 지배 전략의 기반으로 삼는다면, 그 사상가는 그의 본성을 숨기고 열정과 가식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위한 옳은 태도를 선택하려는 계율의 결과인 내재적 자유를 확인한다. “나는 내가 겉으로 보이는 것, 극렬한 아픔 없이는 내가 정신을 망치는 결과에 다다를 상황과 굉장히 다르게 태어났다.” (214)

    자아는 전략적 목표에 의해 거짓을 꾸미고 행하는 열정의 모방을 채워야만 하는 빈 공간처럼 보인다. 베르삭에 의해 정의된 세속성의 이상향은 금욕적인 사람이 주는 깨끗한 본성으로부터 박탈당한 채 남을 속이고 조종하는 능력 안에서 분명함과 권력을 찾는 사람이다. 현학자인 멋진 청년의 신앙고백은 이 관점에서 모순적이다. 세상에서 얻은 신용, 배려심 그리고 성공은 순전히 임의적인 기준 위에 놓여있으며 곡해할 수 있는 규범들에만 대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삭은 제자들에게 거짓된 것들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특히 여자들을 유혹하고 정복 리스트를 늘리기 위해 소유해야 하는 능력의 특출난 성격을 강조한다.

정신 속에서 다양성, 그리고 스스로 찾은 순간이 당신을 요구하는 성격을 갖기 위한 항상 제약 없는 확장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상냥함이 있는 부드러움, 풍성한 관능, 교태 섞인 수작은 어떻게 가질 것인가감정 없이 열정을 가지고, 측은함 없이 울고, 질투심 없이 동요하는 이런 것들이 당신이 즐겨야 하는 역할들이고, 당신이 되어야 하는 역할들이다. (215-216)

     세속적 성공이 유혹된 아름다움의 카탈로그에 펼쳐지는, 많은 재물을 쌓은 이 사람은 오네똠에게 적절한 변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유연성시기적절함에 대한 센스 그리고 예의바름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습적인 역할의 레파토리를 사용하는 것은 위선과 조작에 속한다. 베르삭의 실증은 특정한 특징들이 잘 알려진 가치의 비방과 규범으로의 복종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형상을 찾는 연구 사이의 모순을 이해하도록 허락하는 현실주의적 사상에 붙어있다. 전통, 저서 그리고 옛날 것의 철학이 갖는 이상주의의 권위에 대한 문제 제기는 모든 사회적 행동의 목적론적 세계관에 의심을 품게 한다. 우리가 사실처럼 생각하는 것들을 위한 이 기본적인 가치들의 거부는 효율성, 권력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확신하기 위한 방법을 지키기 위한 능력, 그리고 하나의 영웅심의 형태를 추구하는 데서 끝난다. 마키아벨리부터 시작하는, 정치 및 법 철학의 영역에서 끝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고 대신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적 조류는 에너지와 힘에 대한 찬양으로 이끈다. 홉스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사상을 선포하는 쾌락주의적 및 공리주의적 개념에 따르면 강한 권력이 시민의 안전과 편안한 삶을 보증한다. 그라시안에 따르면 오네똠과 초인은 개인적인 권위의 환상에서 탈피한 연구에서 같은 개념으로 합치한다.

     크레비용의 시대에서 이러한 현실주의적 조류의 영향력은 소설 속에서 고전적 이상주의, 귀중히 여겨진 가치들 그리고 영웅들과 오네똠의 인물들에 의해 확대된 귀족사회에 대한 패러디와 비판으로 이끈다. 특히 마리보와 크레비용의 작품 속에서는 진실을 담지 않는 예의범절의 언어에 대한 반항을 설명하지만 이 안에서 애매모호한 활용은 부패한 고귀함으로 스스로를 이끄는 자유사상가들의 견해의 특성이다. 처세술의 규칙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다시 쓰여지고 예의바름과 도덕성의 세련됨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에 고귀함을 특징짓는 징후들은 소설과 희극이 반영하는 사회적 상상 속에서 가치를 크게 잃은 것처럼 보인다. 1737년에 초연된 거짓된 친구에서마리보는 백작 부인의 칭호를 경멸하는 부르주아 계급을 조명하고 사회적 조건의 덕성을 구별해낸다. 희극의 유일한 귀족 등장인물인 백작이 필요한 경우 하인들을 매수하여 돈으로 산 결혼을 종결지으려 할 때 돈에 의해 부당하게 취급된 열정적인 영웅들의 역할은 피폐해진 평민 도랑트에게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작품의 중심 인물, 이 능동적인 의지와 조물주와 같은 차원의 조종의 예술의 에너지를 보유한 사람은 하인 뒤부아다. 크레비용은 젊은 멋쟁이들과 수작부리는 여자들이 때때로 동앙젹인 장식과 환상적인 고가구에 관심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를 귀족의 세계에 한정짓는다. 그는 풍자적이고 가치를 절하하는 방법으로 고전적인 이야기의 예의범절의 틀 속에 머물러 있고, 몇몇 이야기의 외설적인 특성은 언어의 정직함과 이야기의 목적이 되는 상황들의 외설 사이의 어긋남을 정확히 제공한다. 행복에 대한 개인적인 도덕성, 부르주아의 영웅들, 갑자기 출세한 사람이라는 주제 등은 로마네스크적 세계에서 낯선 것들이다. 사회적 변이를 반영할 수 있는 가치들에 대한 행동 규범에 기반하지 않은 채, 자유사상 멘토의 인물상은 전통적 도덕성과 고전적 이상향에 반대되는 우수함과 영웅성의 형태에 대한 연구와 함께 세속적 관계의 냉소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세계관과 함께 존재할 수 있게 한다. 라클로와 사드의 세기에서의 나중 시대처럼 크레비용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그의 이야기에서 가능한 대상과 같은 센티멘탈리즘과 부르주아적 정직에 대한 거부를 강조하며 부패한 귀족 사회를 표상한다. 만약 이전 세기의 오네똠의 인물상이 특정한 가치 절하를 겪었다면, 베르삭의 강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만족시키고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에게 의해 강요된 매혹을 주장할 것이다. 오네똠과 자유사상가는 방법의 외면성과 선입견으로 무마된 판단의 내면성 사이의 단절이라는 같은 전통에 관련되어 있다. 각각은 이 적응성과 소피스트와 궁정인을 특징짓는 타인을 추측하는 재능을 소유한다. 그의 마지막 소설 아테네의 편지에서 크레비용은 메레가 젊은 청년들의 귀감이라고 생각하던 알치비아드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1771년에 표현된 이 인물은 오네똠의 자질에 대해 스스로를 변장시키고 유혹하는 능력만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의 세속적 성공은 양성간의 전쟁에 의해 획득된 승리에 한정되어 있다. 다중의 재능을 가진 영웅은 공허함과 반복으로 비판을 받는 잔인한 유혹자가 되었다. 1738년에 베르삭의 견해는 전 세기의 이론가들이 가진 오네똠의 이상향과 위험한 관계 속의 비극적인 궁지 사이의 한 단계를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는 냉소적인 태도로 사회적 기능을 잃었지만 소설의 독자에게 꿈을 꾸게 할 힘은 잃지 않은 궁정 귀족의 옛날의 전유물인 거대함과 영웅주의와 우아함에 대한 미적 가치들의 향수를 설명한다.

 

캬롤 도르니에



* 알랭 몽텅동 편집, « 오네똠과 댄디 » (튀빙겐, 1993, Gunter Narr Verlag), 107-121쪽에 등장.


  이 글을 번역하면서 나는 지금 내가 만나는 인간 사회에도 베르삭의 가르침과 오네똠의 정의가 그대로 적용됨을 느낀다.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은 가식적이고 무례하다. 그때그때 말하는 게 다르다. 내 주위에는 오네똠이 너무 많다. 번역을 하면서도 주위의 몇명이 현재 상황에 그대로 대입되는 걸 느꼈다. 

  17세기에 등장한 자유사상은 내가 좋아하는 '쿨함'과 잘 연결되는 느낌이다. 도대체 쿨해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 이 글과 같이 쿨함을 구성하는 요소를 하나하나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면 참 멋있겠다. 이러한 설명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고 철학자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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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야구/소프트볼을 진짜 많이 하는데 매번 즉각적으로 사람 수를 채워 억지로 끌고 나가는 듯한 처신이 항상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보았는데.. 답이 어느 정도 나온 것 같다. 일상적으로 하는 체육 활동인 야구를 계획표에 등재된 진짜 하나의 '행사'라고 간주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다.

1. 야구하는 시각을 정하고 시간(몇회까지)을 정한 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 의사를 물어본다. 아래 애들이 하기 싫어하는 눈치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강제하거나, 사람이 없으니 없는 인원을 땜빵해야 한다고 눈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면 청소를 안 한다거나 과자/음료수를 주겠다고 설득하여 참여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참가가 약속된 사람들에게는 야구를 위해 몇시 몇분까지 모일지 확실히 알려준다. 이렇게 하면 생활관 이탈시 보고에서 시간을 질질 끌 수가 없게 된다.

2. 좋은 글러브(충분한 개수의), 충분한 물, 여유가 된다면 과자/음료수, 충분한 야구공과 소프트볼, 마운드 바닥에 물이 고였을 때를 대비해 공을 닦기 위한 수건 등의 물건을 충분히 준비한다.

요 두 가지만 지켜주면 훨씬 즐거운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뭐 나도 이제는 큰소리 칠 수 있을 정도의 단계에 왔으니 의식의 전환에 불을 지펴보자!!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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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거의 1년만에 다시 편지를 쓰면서 나는 지금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의사소통 도구의 홍수 속에서 편지를 왜 굳이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미 전화로도, 싸이월드 방명록으로도, 미투데이 글로도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와 나인데, 전달이 오래 걸리고 바로 답을 받아볼 수도 없는 편지만이 가진 아름다운 매력은 무엇이기에 나는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일까? 나는 편지지에 한 문장 한 단어 써내려가며 편지 아니면 안될 말들만 걸러내고 추려서 정성어린 깨알같은 글씨를 새겨넣어 가며 이 시대의 편지의 역할과 입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모두가 손글씨보다 키보드가 편한 이 시대에 어려운 손글씨는 그만큼 정성을 나타낸다. 나의 타자 실력은 이제 550타를 거뜬히 넘게 되었다. 블로그는 잠시 쉬었지만 미투데이라는 걸 하면서 군생활 중 정말 짧게 주어지는 몇 분의 시간 안에 평소 가지고 다녔던 농축된 말들을 빠르게 풀어나가는 일이 하루의 일상이 되었다. 문서의 서식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디자인 요소를 넣어서 사람들 앞에 예뻐보이게 하는 기술도 컴퓨터를 항상 끌어안고 사는 지금의 일 때문일까 상당히 성숙해졌다. 하지만 나의 손글씨는 바쁘게 전화 내용을 대충 끄적거릴 때에나 써서 그리 예쁘지 못하다. 평소의 날림체가 나의 급한 성격과 웬만한 사소한 일은 대충 처리하려는 습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편지를 쓰는 그 순간 펜촉에 시선이 집중되고 마치 표적지를 바라보며 사격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나는 긴장을 하였고 볼펜에는 힘과 정성이 들어갔다. 한장을 꽉 채웠을 때에는 뿌듯했으며 이 글 쓰려면 시간 꽤나 걸렸겠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한 장의 글을 블로그에 그대로 옮겨적으면 모니터의 반 장 정도밖에 채우지 못할 정도로 졸렬할 뿐이다. 하지만 손글씨로 쓰여진 글은 문장력에 상관없이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노력이 느껴지는 것처럼 손글씨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에서 정성과 진실함이 느껴진다.

  편지는 아날로그다. 잉크가 만들어낸 글씨는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인터넷에 올라가는 모든 것들은 아무리 비공개를 하고 '비밀이야' 체크를 하더라도 결국은 서비스 공급자의 서버에 그대로 저장되고 누군가는 네트워크 장비와 서버를 침투해 들어와 내가 꽁꽁 숨겨둔 글을 훔쳐볼 수 있게 되어 있다. 더구나 그 훔쳐보기를 경험해보고 인터넷 네트워크에 올라온 정보의 기분 나쁜 공개성에 흠칫 놀란 나로서는 더욱 더 아날로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친구와 네이트온이나 싸이월드를 통해 쪽지나 방명록을 주고받을 때에는 그 친구와 단둘이 닫힌 방 안에 있는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 방에 아무도 없고 분명히 그와 나의 이야기를 엿보려고 마음 먹은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은 사람 북적거리는 명동에서 20m 밖에 있는 사람에게 소리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편지, 이 편지는 나의 손을 떠나면 꽁꽁 봉투에 담겨져 있다가 그의 손에 바로 쥐어진다. 편지는 매체를 통하지 않으므로 가장 사적인 의사소통의 도구다. 그렇기 때문에 편지에 가장 사적인 내용을 채워넣으면 그 편지의 독보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나 오늘 ..했다?' 혹은 '지금 나는 이러이러한 기분이 들어.' 같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하기에는 편지지가 너무나 아깝다.

  과거에 잠깐 생각났던 건데 전화로 말하거나 방명록을 통해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말이냐며 생뚱맞다는 느낌이 든다면 느긋하게 편지로 이야기하면 된다. 앞뒤 맥락도 없이 외워놓은 대본을 갑자기 낭독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 지금 현재 그와 내가 긍정적으로 지내고 있는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야 된다거나, 명랑한 대화만 주고받던 그녀에게 응큼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거나, 평소 말싸움이 잦아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피하는 상황에서 사과를 빨리 해야 하거나 할 때 편지는 해답이다. 일상 대화에서 쉽게 나오지 않는 말이 편지에서 나온다. 편지에서는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지연을 남긴다. 아무리 바로 옆 동네로 편지를 써도 최소 반나절에서 하루가 걸린다. 서로 얼굴을 보고 있거나 전화를 하고 있거나 둘 다 네이트온에 로그인해 있을 때에는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그쪽에서 대답이 오지 않으면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왜 대답을 안 하냐는 생각에 상당히 걱정되고 불안해지고 불쾌해진다. 싸이월드 방명록 역시 우리가 언제나 24시간 접속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지연을 남기지는 않기 때문에 편지와 조금 다르다. 편지에서 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대답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본 다음 하라는 숨겨진 당부의 말을 같이 한다. 편지에서 내가 어떤 화제를 꺼내더라도 그것이 생뚱맞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

  마지막으로 편지는 정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결코 가벼울 수 없다. 모든 감정은 평소의 의사소통보다 더욱 진해지고, 생각은 더욱 더 질서와 논리를 갖추게 된다. 철학적인 사색이나 공상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해줄 때에도 편지 이외에는 적합한 수단이 없다. 일상 언어에는 어울리지 않는 특정한 주제의 에세이 형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자 할 때, 충분한 설명을 통해 한번 내 뜻을 전한 다음 오해의 피드백이 생기지 않을 것을 간절히 원할 때, 그때 편지를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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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방송에서 한 20대 초반의 남자가 사연을 보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고등학교 때에는 여자에게 말 한 마디 못 붙이던 숫기 없는 그가 대학교에 들어와 2학년이 되어 한 후배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처음 그녀를 본 이후부터 호감이 생겼고 그녀가 먼저 자기를 학교 복도에서 처음 불러 같이 밥을 먹자고 했을 때 그녀도 자신을 조금은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달 뒤 중간고사로 바빠지기 전에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는데 뜸을 들이던 그녀는 좋다는 말을 전해와 같이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둘이서 처음으로 본 거라 많이 떨렸고 그때 이게 나의 첫사랑이구나 생각했단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중간고사 때문에 각자 공부로 바빠졌고 그 이후에는 문자도 받지 않고 먼저 약속을 잡지도 않는 뜸해진 그녀가 섭섭하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나는 군대에 들어온 일병이다.

 싱거운 첫사랑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이 미성숙한 남자의 사연을 받은 DJ는 이렇게 답했다.

 "많이 간절하지 않으셨군요. '아이 뭐 그때는 아프더니 이제는 괜찮네요.' 이정도로 끝나면 그건 아직 아픔을 겪은 게 아니잖아요. 뭐 여자애가 저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되는 거에요.
 첫사랑, 누구에게나 있는 첫사랑이라는 거는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다시는 이렇게 사랑할 수 없겠구나, 이게 나의 첫사랑이구나, 평생동안 나의 술자리에서, 또는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나의 아이를 붙잡고도 늘 한번쯤은 꺼내야 할 첫사랑. 정말 열심히 온 마음을 다해서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움직여서 했을 때, 그래서 그게 끝났을 때 너무나 앓고 힘들었을 때 그걸 이제 처음 사랑했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군대도 갔다오시고, 더 필요하실 때, 애인의 필요성을 느끼셨을 때, 그럴 때면 아마 OO씨가 노력을 해서라도 여자들과 말도 좀 섞고, 장난도 좀 자연스럽게 치고, 그런 성격으로 점점 변해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10. 03. 14. '푸른밤 문지애입니다' 중에서..

문DJ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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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에 초보인 모든 젊은 남자들을 위해 이 논문같지 않은 작은 논문을 써 보냅니다. 전화를 했는데 그녀가 전화를 안 받는다면? 남자의 마음에는 각종 추측과 상상이 나래를 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때일수록 이성적인 판단을 차근차근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의 작은 글은 제가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직후 휘갈겨 쓴 글을 약간 손본 것입니다. 전화 건 사람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경고하는 글이지요.
...
  전화를 항상 손에 들고 다니며 하루 중 무슨 일이 있어도 걸려오는 전화는 모두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화가 울리든 말든 일단 자기 할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전화를 책상 위에 내팽개쳐 놓는 사람도 있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반드시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전화를 받는 것이 의무라면 그 전화의 목적은 공적이어야만 하면 업무에 관련되어야만 한다.

  부재중 전화가 상대방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답신 전화를 할 것이다. 이 때 그 사람이 부재중 전화 기록을 그냥 보고 만다면 그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선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라 답신 전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또한 답신 전화를 해도 받는 사람이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일 것임을 미리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경우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따지려 드는 것은 그 사람의 삶과 시간을 나의 명령에 구속시키고자 하는 매우 권위적인 행동이다. 그 사람을 진정 좋아한다면 최선의 방법은 침묵한 채 계속해서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간대, 일과에 매여 있지 않은 시간대를 먼저 헤아리고 그 시간대에 전화를 걸면 나를 극도로 혐오하지 않는 이상 일단 전화를 받게 된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가 나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라는 멘트를 듣는 것은 용기내어 전화를 건 자에게는 분명 좌절이다. 한 가지 의문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수신자가 수신거부를 했을 경우에는 송신자의 전화에 과연 어떤 메시지를 알려주는가다. 만약 그 메시지가 정말 상대방이 부재중이 아닌데도 부재시의 멘트와 같다면 그 메시지는 본래 의도했던 목적인 송신자의 안심과는 달리 수신자의 진심을 송신자에게 왜곡해서 전달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핸드폰에 벨소리가 울리는데 전화 건 사람이 꼴도 보기 싫어서 수신거부 버튼을 눌렀는데 전화를 건 사람의 수화기에는 마치 상대방이 부재중인 것처럼 자동응답 메시지가 나온다고 상상을 해보자. 그건 작은 기계적 장치가 인간관계를 틀어버리는 크나큰 문제이다. 핸드폰 기종 그리고 이동통신사마다 수신거부시 전달하는 메시지의 형태가 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가식적인 예의가 지극히 필수적이지 않은 이상 수신거부시에는 솔직하게 자동응답 메시지로 "상대방이 당신의 전화 수신을 거부하였습니다." 라고 말해주어야 훨씬 깔끔할 것이고 전화를 하는 사람의 각종 상상을 애초에 단절시킬 것이다.

  전화는 사람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싫어지는 경우, 혹은 싫어하는 사람이 갑자기 좋아지는 그 전환점은 대면 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전화를 통해서 진심의 핵이 전달되는 경우는 없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포옹이나 키스가 이루어지거나 혹은 상대방을 홱 돌아서거나 상대방의 뺨을 후려치기 전의 한마디는 전화나 문자와 같은 정보통신 매체를 통해 도저히 실어나를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언제나 통신 매체는 무거운 진심이 전달되기 전의 상황 구성을 위한 도움만을 줄 뿐이고, 혹은 이미 노출되고 서로 나눈 진심을 다시 재현하거나 그 효력을 유지할 뿐이다. 전화 통화만으로 관계의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힘들고 그 시도는 유치하다. 전화 한 통화를 통해 관계의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쉽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진실한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고려와 예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난 말하고 싶다. 사귀자는 전화를 받았을 때, 혹은 헤어지자는 문자를 받았을 때 받은 사람의 기분은 어떠한가? 처음 전화나 문자를 받은 그 순간 그 전화나 문자는 절대로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중에 그 내용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기분은 '찝찝하거나 더럽다'. 전화나 문자를 통해 오고가는 말들은 그래서 가벼워야만 한다. 무겁지 않은 일상 속의 질문, 대답, 이야기, 묘사, 감탄 등의 대화가 전화라는 통로에 걸맞는 전달 물질이다. 그러므로 우리 남자들은 여자에게 전화를 할 때 괜히 무게를 잡지 마는 것이 현명하겠다. 무게를 잡는 순간 대부분의 여자는 부담을 갖고 불쾌하게 느낄 것이 자명하다.

  전화를 대면 대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때라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먹고 당장 전화로 무언가를 바꾸고자 생각하지 않는 게 제일 현명하다. 인공적인 요소가 모두 사라지고 감추어지기 전에는 서로의 마음 속에 있는 진심이 쉽게 고개를 들지 않는다. 인공적인 요소로 치장된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미적 감상, 혹은 팬덤(fandom), 혹은 자기도취이다. 무조건 여자의 얼굴 사진만 보고 인간적으로 끌리는 남자, 스포트라이트와 환호성을 받는 화려한 스타에게 마음이 쏠리는 여중생, 멋지게 차려입고 돈을 많이 들여 이벤트를 해주고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 인터넷 채팅을 통해 소개받은 남자의 글을 보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각한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아니다. 깊게 들어가 봤자 사랑의 전 단계일 뿐이다. 진정 사랑하고 싶다면 직접 마주보고 만질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결국 에로스의 판정승을 이야기하고 싶다.

  앞서 열심히 논했듯 관계의 변화를 위한 무거운 말은 대면 중에만 적절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 공간에서 만나지 못하면 '연애의 시작과 전개'는 불가능하다. 장거리 연애는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하고 여기서 군인과 대학생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전화의 가장 값진 용도는 따라서 대면을 위해 약속을 잡고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확인하는 사전 탐색 작업이다. 유쾌하게 농담도 던져가면서 이 사전 탐색 작업에 열중해 보자.

  전 군대에 있으므로 연애는 나중에나 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전화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진짜 사랑의 전 단계까지는 도달할 수 있겠지요. 잡념이 저를 감쌀 때엔 그 생각만 하며 남은 나날들을 보내야겠습니다. 저와 같이 맘 졸여하시는 모든 남자분들 힘내세요! 사랑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용기 내어 다가서서 보여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TAG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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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항상 일을 잘하고 있을 때 더 잘해야 한다, 혹은 지금은 잘하지만 언제 실수를 낼지 모른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싫어했다. 일을 어느 정도까지 하면 잘 하는 것인가라는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이 불분명한 기대치 혹은 미래에 대한 주의깊지 못한 추측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므로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척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 여러명의 종합적인 의견을 수렴했을 때 그 결과물은 각각의 상대적 평가 중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군에서는 그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군에서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미터기가 아니고 '궤도'다. 궤도 위에 올려놓여 있기만 한다면 정상으로 판단되고, 그보다 더 좋아도 상관없지만 절대로 그보다 나빠서는 안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더 잘 하면서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여유있게 지내도 되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적인 최소 기준선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절대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조직의 모습이다. 과정이 아닌 결과를 통해 판단하되 결과 이후의 모든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궤도를 벗어난 이들에게는 호된 질책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직 구성원들을 판단하게 되면 심리적 요소에 의해 집단의 분위기를 요동치게 하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이고 평온한가 아니면 이상하고 불안한가, 이 두 가지로 명확한 이분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집단의 분위기라는 것을 경기 호황이나 침체의 곡선처럼 생각하느냐 정상과 이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추측이 사라진다는 점은 이분법의 크나큰 장점이다.

  이분법은 공산주의에 어울리는 평가 척도이다. 아무리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더라도 받는 월급과 식량은 평등하다. 남들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기준에 미달한 것이므로 회의를 통해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는다. 그런데 군은 공산주의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이 같고 같은 종류의 물품을 사용하며 집단으로 일한다. 청소는 모두가 깨끗이 해야 하고 경례와 같은 기본적인 예절도 모두에게 요구된다. 물자가 남으면 좋은 것이고 부족하면 큰일난다. 일을 다 끝낸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며 그냥 '정상'일 뿐이다. 비교의 심리가 크나큰 죄악으로 느껴지는 체제 속에서 군은 존재한다.

  한편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시장은 그와 다르다. 호황과 침체는 개인들의 상황이 모두 다르고, 개인들이 서로 비교하며 경쟁하여 우열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것을 찾고 나쁜 것을 쫓아내려 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기대하게 되거나 혹은 더 나빠질 것을 우려하게 된다. 개인을 보살펴줄 조직의 규칙이나 제도가 군만큼 온몸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과연 군 안에서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지를 감히 규정할 수 있을까? 한편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이 아닌지는 얼마나 쉽게 정의할 수 있는가. 궤도를 벗어난 롤러코스터는 조치 후 다시 궤도에 올려놓으면 되고, 이미 궤도를 돌고 있는 것들은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상관없이 궤도 위에 있다는 것만을 유지하면 되게끔 현상 유지를 추구하면 된다.

  나아가 정상과 이상의 이분법을 통해 조직 구성원들을 바라보며 그에 따라 정상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조치하는 부지런함은 구성원들의 평가자들에게 필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지속적인 확인과 조치로 현 상황을 항상 기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조금만 실수가 생기기 시작해도 곧 큰 문제의 상황, 즉 정상이 아닌 이상에 직면하게 된다. 상황이 점차 나빠진다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나빠지든 많이 나빠지든 두 경우 다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 틀이 평가자들에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한동안 가만히 있었으니 이제 애들을 잡아보자'와 같은 험악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가자들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조직 구성원들에게 기대와 추측을 금하고, 조직 구성원 각각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책무 중 정상 궤도를 벗어난 것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여 불안감을 없애야 전체적인 조직이 순탄하게 움직일 수가 있다. 위의 사항을 따르지 못하면 그 때부터 조직 안의 절대적 기준은 희미해지고 조직은 너무 풀어지거나 너무 험악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하지 않고 모두가 다 같이 잘 하자는 이상을 좇아야 한다.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기준 이상을 달성해서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성취의 연속이 바로 군 생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정상과 이상의 이분법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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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zenovelist.tistory.com zeno 2009.10.30 2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은 베버가 말했듯이 전형적인 공산주의 조직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아무리 그날 좋은 일이 있어도, 대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어도,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해도 경례를 받아주는 선임들의 60%는 무표정이거나 우울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얼굴로 경례를 받아주게 된다. 경례가 너무나도 기본적인 습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 보통의 의례가 경례자와 수례자 두 사람의 기분과 태도 그리고 속마음에까지 영향을 주기는 힘들다. 선임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거나 둘 사이에 사고가 터져서 사이가 멀어졌다면 경례가 아닌 비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그리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수례자의 표정이 언짢아보이면 당장은 그 상황을 개선할 어떤 방법도 없음을 알고 일단 경례를 마무리하여 원래의 마음과 행동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불필요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평소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 후임들에게 오해를 사는 선임들도 꽤나 있다. 그들은 나에 의해 직접적인 악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후임의 입장에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표정이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습관조차 지켜주지 않는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선임의 평소 어두운 표정은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신 또는 후임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고칠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경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감이다. 불필요하게 주눅들지 않고 내가 먼저 목소리를 크게 하고 눈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의 태도에서 상대방의 태도와 표정은 중요하지 않으며, 경례 중에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이다. 자신감 있게 경례하는 후임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렇다고 경례 하나로 평소의 잘못이 용서된다거나 평가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례는 기본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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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주기만 한 사람, 헌신적으로 계속해서 매달린 사람, 그에게 곧 들이닥칠 무서운 기분은 자존심의 상처와 무기력한 자아의 체험이다. 하지만 그 기분이 피부에 와닿도록 하는 원인에는 자신에 기인한 것보다 주위 사람들 또는 환경이 주는 외부 시선의 요인이 더 크다. 남의 눈치를 보는 순간 그래도 이만큼 주었으니 이제는 받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보상심리가 싹트고 그에 따라 왜 나에게 문자나 편지가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남의 눈치에 신경쓰지 않으면 보상심리 또한 작동하지 않는다. 눈치를 보지 않게 만듦으로써 자존심의 상처는 상당량 줄일 수 있고 그에 따라 나의 일에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

  남의 눈치에 신경쓰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랑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숨겨야 하고 되도록 화제로 꺼내서는 안 된다. 현재 내가 좋아하거나 작업 중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내가 쌓고 있는 공적의 세부적인내용을 설명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불필요한 말이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보답해주고 열정적으로 응답하여 그 사람이 남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고 내 자부심도 높여주기 전까지는 금물이다. 나의 사랑 가꾸기와 헌신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들은 사람이 나의 헌신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옆에서 듣고만 있는 경우에도 그러한 경청은 나를 방해한다. 나 자신이 타인의 경청을 인지한 다음 스스로에게 헌신을 주저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공든 탑은 혼자 쌓아야 한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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