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의 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무대 위로 밀어올리는 남자들이 있다. 커다란 목소리로 그 시간 동안만큼은 모임 속의 모든 이들을 단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들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점점 흥분해간다. 그들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쌀쌀한 날씨에는 분위기를 더 띄우자며 먼저 외투를 벗고, 밤이 깊어갈수록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씩 가까이 다가가 서슴없이 본능에 충실한 한마디를 던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나름대로 헌신적인 사람으로 평가하고 그와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려 하면 그는 오늘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먼저 병나발을 분다. 몇 번 소리를 지르고 하늘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욕을 해대고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끌어안고 있다가 이내 그는 정신을 잃고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많은 여자들은 아무런 로맨티시즘 없이 그와 약간의 대화를 나누다가 저 멀리 사라지는 그를 보고 이내 제 갈길로 다시 찾아간다.

  방금 이야기한 상상의 인물인 '그'가 조금 더 자신의 평소 이미지를 차분하게 관리해 왔다면, 게임과 장기자랑과 술과 같은 순간의 쾌락을 위한 도구에 심취하여 자신의 깨어 있는 정신을 죽도록 내버려두지만 않았다면 그가 관심을 가졌던 주위의 이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남자는 적극적이어야 하지만 언제나 '그 이성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성의 이미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 한다. 대학교의 MT와 같이 긴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유흥을 즐기는 활동 속에서 과연 주목받는 일이 가치있는지는 의문이다. 제 한몸 가눌 수 없이 대중의 박수와 환호를 먹고 사는 마당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의 적극적인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심심해하지 않고 즐거워하게 만들기 때문에 긍정적이지만, 즐거워했던 사람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적극적인 그 모습이 도를 넘어섰을 때 그에게 등을 돌린다. 이성의 경우 이 현상은 더욱 심하다. 동성 친구들은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그를 친구로서 동정심을 가지고 부축해 줄 수 있겠지만, 이성 친구는 그러한 부축을 선뜻 자원할 용기와 근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단체 속의 사람들이 함께 노는 '짧은' 시간에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적극성을 보이는 남자보다는 평소의 '긴' 시간에 '자신'만을 대상으로 하여 열심히 접근하는 남자에게 훨씬 더 큰 호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기의 이미지가 가벼운 이미지로 손상되어도 좋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보다 굳건히 자신의 무거운 이미지를 고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자의 남자를 향한 농담과 비방과 조롱이 자연스럽게 먹혀들어가는 남자들이 연애에서 성공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남자들의 크나큰 착각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던 여자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연속해서 보인다고 실제로 그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인 줄로 여기는 착각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행위가 곧 적극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곳에서는 착각하는 남자들의 수가 배로 증가한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주목받는 이들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마당발의 성격을 띠고 동시에 이러한 착각을 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남자도 없다. 만약 자신의 성격이 소심하여 술을 매개로 좋아하는 이성과 친해지고 싶다면 반드시 장시간동안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를 많이 해라. 혼란스러운 MT방에서 긴장이 풀어진 여자들이 바로 넘어올 것이라는 기대는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원래부터 옳은 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적극적인 모습은 참 좋다. 놀라움과 기대감이 결여된 일상에서 잠시 사람들과 탈피하는 일도 좋다. 하지만 적극적인 사람은 평소의 자신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되돌아갈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자신의 좋은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소수자나 약자의 모습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강조한다면 주위의 사람들과는 동성과 이성을 불문하고 깊은 인간관계를 가지기 힘들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특별히 술을 조심해야 한다. 잠깐 동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을 거닐며 사람들의 호응을 주도했던 이들이 몇 시간 뒤 저 뒷구석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처량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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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모습만을 보이려 애쓴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개인이나 집단과 충돌한 적은 없다. 적어도 내 얼굴에 달린 두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드넓은 초원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내가 먹을 만큼의 풀만 뜯고 유유히 활보하는 한 마리의 양처럼 나는 살아왔다. 난 내가 풀을 뜯어먹음으로써 다른 양들이 엄연한 피해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의 배를 채우고 내가 사라지는 순간, 나의 시야가 자취를 감춘 그 초원에서 다른 어떤 양 한마리는 나 때문에 자신의 먹을 풀을 빼앗기고 만 셈이 된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사람들과 이미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은 생각해보면 수도 없이 많은 듯하다. 아무리 나의 입장으로 생각해서,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고 여기더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말과 행동이 모욕이나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나를 평소에는 좋아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싫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던 친구들은 어느날 나를 피하고 나에게 매서운 눈총을 보내고 쓴소리를 한마디 던지고 사라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나에게 직접 대면하여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난 너 때문에 지금 많이 서운하다. 그날 왜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그런 말 한마디를 던질 수가 있니' 같은 말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에게 서운한 마음을 무언의 행동 패턴으로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무언의 반응을 빨리 관찰하고 나에게 서운했던 이들에게 '누구누구야, 요즘 나에게 서운한 일 있어? 도통 보이질 않네. 예전에 내가 말실수 같은 걸 한 적이 있다면 말해봐. 나도 모르는 나의 실수가 있었나봐.' 정도의 말을 던져 주어야 한다. 그러한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으면 나와 나에게 서운한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된다. 소위 '서로 쌩까는' 현상이 대두하는 것이다.

  자신은 남들에게 항상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제공하고 웃음을 선사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을 주선해 주며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좋게 다가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나의 가치관이 아닌 그 사람의 가치관이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했다고 자만하는 사이 다른 사람은 벌써 나에게 약간의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내가 주도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는 다른 사람을 한번 더 감싸주고 그들에게 한번 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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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도 수강신청이라는 것을 했다. 떨리는 감도 없지 않았으나 침착한 마음으로 그러나 민첩함을 가지고 진지하게 수강신청에 임했다. 모두 알다시피 연세대학교의 수강신청은 인터넷의 대학 포탈사이트에서 오전 9시 정각이 되면 일제히 시작한다. 핸드폰 시계를 기준으로 하면 된다. 나는 첫 단추를 잘 꿰기 위해서 수강신청 한달 전부터 나만의 예상 시간표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학교의 제도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 신입생들에게 주어진 책자를 열 번 정도 읽어 숙지했다. 결국 나의 노력이 조금 더 민첩하게 수강신청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래에 나의 2007년 수강신청 과정을 자세히 적어놓을 것이니 나도 다른 사람들도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Step 1 내가 들어야 하는 교과목을 알아두자

학부생인 나는 학부기초, 학부필수(이해과목), 계열기초(입문과목), 학부선택, 전공탐색 이렇게 다섯 과목을 듣고, 사회과학계열이므로 최대 18학점을 신청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제도는 숙지한다.


Step 2 같은 반 혹은 같은 친구들끼리 듣는 과목을 알아두자

나는 OT 둘째날에 주위 사람들과 같이 듣는 과목을 정했고, 우리 사과 6반의 경우 정치학입문과 통계학입문은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Step 3 timetabl.com에서 목표 시간표를 만들자

자신이 신청해야 하는 과목들이 좋은 교육과정과 좋은 교수님과 적당한 동선과 적당한 시간을 가지고 있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과목들이 겹치지 않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timetabl.com을 쓴다. 포탈사이트에 들어가 수강편람을 보면 과목에 보라색 화살표가 있는데, 그것을 꼭 보고 성적 평가 요소를 유심히 본다.


Step 4 수강신청하기 좋은 곳을 찾아보자

연세대학교와 가까운 PC방에 가자. 집에서 수강신청할 경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인터넷이 빠르다고 신뢰할 수 있는 PC방에 가자. 이러한 곳에서 자기의 개인정보를 누출하지 않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Step 5 로그인하고 준비하자

오전 7시부터 로그인할 수 있다. 이미 수강신청된 과목도 있을텐데, 그 과목이 마음에 들면 절대 그대로 놓아두고 그렇지 않으면 과감히 삭제한다. 이제 나의 희망과목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배정인원이 빨리 없어지는 과목, 즉 시간이 편하다던가 교수가 좋다던가 하는 그러한 과목, 같은 시간대라는 점에서 대안 선택의 폭이 좁은 과목, 전공신청이나 졸업요건을 고려했을 때 학점이 높거나 교과목의 측면에서 중요한 과목을 희망과목 리스트의 위에 올려놓는다. 자신이 신청할 이상적인 과목들을 앞서 말한 요소를 고려하여 순서대로 희망과목 리스트에 추가하고, 그다음 대안과목을 그 밑에 추가한다. 학부선택과 채플은 가장 밑에 놓는다. 과목을 정확히 클릭하는 연습을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미리 해놓아도 괜찮다. 메신저는 모두 끄고, 잡다한 악성코드 검사나 광고창 등이 등장하지 않는 안전한 환경을 조성한다. 오직 인터넷 익스플로러 3개의 창만 띄워놓는다. 포탈, 수강신청내역, 희망과목리스트. 특히 로그인을 한 뒤 희망과목리스트 창을 띄워놓고 다시 로그아웃했다 로그인하여 희망과목리스트 창과 수강신청내역 창이 서로 소통하지 않도록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마지막으로 점검할 것은 창의 위치인데, 희망과목리스트 창과 수강신청내역 창이 겹치지 않게 놓는다.

오전 8시 50분이 되면 정신을 집중시킨다. 8시 59분이 되면 본격적인 긴장을 시작하고, 핸드폰 시계를 기준으로 59분이 되었을 때 즉시 스톱워치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1분을 잰다.


Step 6 누르자

오전 9시가 되면 바로 희망과목 리스트의 첫째 과목을 누른다. 이때 모든 학생들은 연세대학교 포탈 서버에 Queue되어 있을 것이고, 서버는 밀리세컨드 단위로 공정하게 배정인원을 채워나갈 것이다. 첫째로 클릭한 과목의 수강신청 인원이 초과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다. 첫째 과목을 클릭하고 나면 수강신청내역 창이 하얗게 변하는데, 밑의 게이지가 올라가는 것을 유심히 살펴본다. 게이지가 올라갈 때에는 다른 과목을 절대 누르지 않는다. 가만히 게이지를 보면서 다음 과목의 학정번호 위에 마우스를 올려놓고 있으면 된다. 게이지가 4개 정도 차면 수강신청내역에 과목이 등록된다. 등록을 본 즉시 희망과목리스트의 다음 과목을 누른다. Step 5에서 말한 희망과목리스트의 순서 결정요소를 잘 지킨다면 한번 인원초과로 인해 다른 과목들에서까지 인원초과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원초과를 비롯한 모든 메시지창이 나오면 그것을 순수하게 클릭으로 없애지 말고 엔터키로 없앤다.

가끔씩 '로그인..' 으로 시작하는 에러 메시지를 만나 강제로 로그아웃 당할 때가 있다. 이때에는 침착하게 다시 로그인을 하고 빨리 희망과목리스트를 띄워놓고 계속 일을 진행하면 된다. 또한 가끔 내가 신청해 놓은 과목들이 순간 모두 사라지면서 0학점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포탈 서버의 데이터 전송상의 문제일 뿐 행정적으로는 내가 한번 신청한 과목이 안전하게 보존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Step 7 정리

학점을 모두 채우고 과목을 올바르게 모두 등록한 뒤에는 안전하게 모든 창을 닫아야 한다. 애써 등록한 과목들 실수로 취소하지 말자. 가만히 창을 닫아주면 된다. 내가 등록한 과목이 안전하게 보존되었는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걱정이 된다면 주위의 프린터로 시간표를 인쇄하여 물증을 확보한다. 언제나 로그인 상태에서는 자신만 컴퓨터를 다루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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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으로 나는 첫 단추를 꿰었다. 만족스러웠고 그날 나는 기분 좋은 상태로 사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술을 과하게 마셔서 그런지 집에서 울렁임을 못 참아 분출하기는 했지만, 해독 작용을 하는 여러 건강식을 밤에 먹고 다음날 아침에도 먹으니 개운했다. 대학 생활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정말 알고 싶은 내용이 들어있는 책은 밤새 읽어도 졸리지 않듯이, 정말 익숙해지고 싶은 대학 생활은 항상 그곳에 몸을 담고 있어도 힘들지 않다.

* 전공 수강신청은 또 다르죠 ㄲㄲ
속편 출시예정?? 힘이 닿는다면 함 해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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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고 있다. 그의 생각에 100% 동조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주제에 대한 그의 짧은 소견에서 나의 등허리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기쁨을 샘솟듯 맛본 적이 몇 번 있다. 평소에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다 과연 이 생각이 정당한지 의심만 하고 있던 나는 히틀러를 만나 기분이 좋다. 바로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든다는 삶의 원리를 나는 참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당을 만들기 전에 점점 붕괴해가는 독일 민중의 우매함을 비판하는데, 그중에서 그가 지적한 것은 방안에만 틀어박힌 세대의 출현이었다. 신체의 발달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편한 인생을 위한 낭만에 젖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퇴폐적인 풍속에 빠지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둘째로는 교육과 훈련으로 해악의 총체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은 결국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신체에만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 개별적인 예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국민 대중에게 주목할 때, 이 명제는 특별히 전적으로 타당하다.

  전전(戰前)의 독일에서는 사람들이 신체를 부당하게 다루고, 정신의 일면적인 단련에 의해 국민이 위대해지기 위한 보다 확실한 보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중부 독일의 작센 루르 지방에서는 이른바 지식층으로부터도 이 유태적 질병에 대한 진지한 저항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그들 자신이 곤궁해서가 아니라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허약한 육체는 종종 인간을 비겁하게 만드는 첫째 원인이 된다.

  순수하게 정신적인 가르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신체적 단련을 소홀히하면 젊었을 때부터 성적 관념의 싹틈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스포츠나 체조에 의하여 강철같이 단련된 청년은, 순전히 정신적인 양식만을 섭취하며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자보다 관능적 만족의 요구에 있어 우월하다. 합리적인 교육은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건전한 청년이 여성에게 거는 기대는 젊었을 때 이미 타락해 버린 겁쟁이의 기대와는 다르다. 교육은 이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전체 교육은 청년의 자유시간을 신체의 유익한 단련에 이용하도록 하는 데에 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들은 주어진 일을 한 뒤에는 육체를 단련하거나 강건히 하고, 장래 자신의 생활상이 너무도 나약하다고 여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준비하고 인도해 주는 것이 청년 교육의 과제이며, 이른바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만이 과제는 아니다. 자기의 신체를 관리하는 것이 각 개인에게만 국한된 사항이라고 믿는 관념을 제거하는 것도 교육의 과제이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운동의 중요성을 무시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한 달 정도 생활한 자신이 슬슬 부끄러워졌다. 겨울이라는 추운 계절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올 겨울에 내가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운동을 즐겨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어두운 조명 아래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을 뿐, 신체의 건강을 위해 화창한 아침에 조깅을 한다던가 혼자 농구 연습을 한 적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러한 모습으로 겨울을 보냈기 때문에 몸도 조금 쇠약해지고 눈도 침침해진 것 같다. 2월 초부터 열심히 드럼을 연습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음악 활동이지 운동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서 하루빨리 고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공부를 잘하면서 분위기 있는 남자'가 가장 멋있는 남자라는 착각이다. 나의 이데아가 표상하는 이 남자는 운동을 잘 못하고, 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맹점이다. 공부도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근력을 적당히 키운 '몸짱'이 진정한 남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과 날렵한 움직임으로 경기장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으로 나의 '분위기에 홀린 두뇌'를 깨워야겠다. 건강한 정신을 받아들이고 나의 인생에서 조금 더 진일보할 수 있도록 건강한 신체를 인생의 기반으로 다져놓자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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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나와 부대껴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잘 지낸다. 이 '잘 지낸다'라는 표현은 '서로 아무런 문제 없이 각자의 독립된 활동을 추구할 수 있고 가끔 공식적인 자리에서 협력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나의 노력은 긍정적인 효과로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나와 별 탈없이 잘 지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친구의 약점을 놀려 친구와 나 모두를 즐겁게 만든다던가, 직업에서의 활동 외에 사생활에서의 활동을 거의 모두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낯을 가리는 나의 성격 때문일까 걱정이다.

  나는 지금 나와 연결된 모든 사회집단에서 잘 지내지만 소원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마치 모든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 노력하다 특정한 몇몇 사람들에게 엄청난 친밀감을 안겨주지 못하는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처럼, 나는 대중에 해당되는 나의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을 취하고만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친구들을 놀리거나, 그들의 인생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거나, 재밌는 사람이 되어 친구들 사이에서 시종일관 대화를 주도하지는 않는다. 이 세 가지 일에 통달하고 싶지만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나의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단정한 말투와 성격을 다듬는데 만전을 기울인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내가 땅으로 엎어지거나 눈물 콧물을 동시에 흘린다거나 친구들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일은 전혀 없다. 이것이 이미지 관리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자신에게 새삼 놀랐다.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정치인도 아닌데 왜 나는 이미지 관리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정했다. 잘 지내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곁에 많이 두어 나의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고 싶다는 간절한 목표 아래에서 나는 결심했다. 우선 이미지 관리를 그대로 놓아두고 이 시대가 원하는 '재밌고 웃기는 사람'의 캐릭터를 배워나가야겠다. 하지만 내가 모든 사람들 앞의 개그맨이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개그맨은 대중에게 호소할 뿐 특정한 개인들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언행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친구들이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칭찬하고 격려하며, 친구들의 외모를 유심히 살펴보아 친구에게 정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겉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내 이야기를 듣는 친구들이 모르는 다른 친구들의 해프닝을 일화로 들려주며, 물질의 도움을 받아 내가 가진 스포츠/음악/미술에서의 능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과정에서 가끔 예상치 못한 말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유머와 개그로서의 말은 '단지 말뿐이므로'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을 가져다주더라도 실제로는 아무런 실현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와중의 나의 진실된 의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는 조금 더 친구들과 친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진심으로 다가가면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다.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털어내면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솔직하게 다가온다. 친구는 그런 존재이다. 하지만 틀에 박힌 진심의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 역동적인 시대에서 적당한 유머는 필수적이다. 진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말뿐인 유머와 개그로 수시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다. 단지 잘 지내기만 하는 친구들과 서로 가지고 있는 '서로에게 잘 보이려는 벽'을 허물고 그들과 소원한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도록 만드는 유머와 개그는 오늘날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묘약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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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나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인 사고방식의 오류를 안고 살아갔다. 나에게 지란지교, 관포지교, 죽마고우, 백아절현과 같은 네글자의 고사성어가 가르쳐주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정과 지혜는 21세기의 험한 사회에서 너무나도 부적합한 것처럼 보였고, 개인과 가족만이 행복하면 자신의 인생 또한 즐거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바로 지금인 줄 알았다. 즉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중간에 곁가지로 다가오는 수많은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피를 나눈 가족들과는 사뭇 다른 이들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들과 나 사이에 영원히 이어지는 끈은 없었고, 나는 다른 이들에게 내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들을 대하는 나만의 특별한 자아를 가지고 그들과 대면했다.


이와 다르게 나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는 서로가 진실된 모습만을 보여준다.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와 가족들은 서로 자신들의 약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약점을 서로 감싸주는 과정에서는 상담원과 고민하는 학생 사이의 서먹함이 아닌 즐거움이 담뿍 드러난다. 또한 부시시한 머리로 함께 정겹게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보여준다.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어깨에 티끌 하나 앉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쓰며 사업차 만남을 할 때의 예절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서로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는 '친교'가 우세한 집단이 바로 가족이다. 나아가 이러한 친교를 바탕으로 하여 가족들은 서로의 단점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하고, 서로의 장점에 대해서 칭찬하기를 즐긴다.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서 남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자아는 없다.


친구들 대여섯명이 모여 같이 놀러나가는 자리나 학교 선배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집에서와 같이 행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남들이 최근 어떤 일을 하고 지내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직 그 만남 속에서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모임이 파할 때까지 호감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적극적으로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거나 간단한 게임의 진행을 맡아 많이 이야기한 적은 있더라도, 그러한 일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나의 생활과 매우 유리된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남들을 즐겁게 해주고 남들에게 호감을 주려는 나의 노력은 근본적으로 그 바닥에 '예절'을 깔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가는, 쉽게 말해 그들의 프로필을 작성하는 일인 대화(Conversation)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며 공감대를 만드는 대화는 곧 친교로 발전하는데, 친교를 만들어야만 하는 친구들 사이의 모임에서 나에게는 친교보다 예절이라는 가치가 우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이렇게 기억했을 것이다. 적극적인 척하는 소극적인 아이, 남에게 좋은 면만을 보여주려 애쓰는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자기 비판을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꽤나 피하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만난 사람이고 또 언젠가 우연히 떠날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인생이라는 '주막'에 수많은 '나그네들'이 오고 갈 것이라는 이러한 사상체계는 매우 잘못되었다. 나의 주막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나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의 가족이 아니면서도 나와 몇년씩 같이 지내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이들이 주위에 꽤 많다.


오래 되고 참된 사귐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가족과 같이 생각하고 나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가능하다는 뻔한 진리가 이제 눈에 선하다. 물론 가족은 친구와 다르다. 가족들에게 내가 가져다주는 물질적,정신적 혜택은 친구들이 받을 혜택과 큰 차이를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나의 성품, 특별히 대화하는 태도나 화제의 종류는 가족들이든 친구들이든 상관없이 같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조금 바꾸어서 친구들이 또다른 가족이고, 예절보다 친교가 우선시되는 인간관계의 폭을 더 넓힌다면 어떨까. 진실된 자아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얻는 즐거움 또한 무한으로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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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세련되었다고 믿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며 매일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에서는 다른 누구보다 꼼꼼한 솜씨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들에게 동정의 눈빛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경쟁하지 않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일 것이고, 그들을 굉장히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경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남의 도움을 전혀 요청하지 않고 야무지게 자신들의 일을 처리한다. 서로 도와주면서 쌓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혜택은 그들과는 먼 이야기이다. 그러나 혼자서만 살다가는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렇기에 사람은 주변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중 서로 약점을 드러내고 서로 약점을 감싸주기 위해 부조하며 살아가는 것은 남을 도와주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사회'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그 사람과 더욱 가까워졌다는 뿌듯함이 대부분이다. 조선 시대에 특히 발달했던 상부상조의 전통은 한 마을 안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살아가도록 해 주었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도록 하는 일종의 제도로 작용했다. 법과 도덕의 중간 성질을 가지고 있는 '禮'로써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도해냈다는 점에서 상부상조의 전통은 단순히 도덕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지금의 많은 TV 드라마, 그중 여러 가족들의 삶을 깊게 다룬 드라마를 보면 극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부모님이나 형제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자신들의 약점을 다른 인물들과 드라마의 시청자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곧 어려움에 빠졌던 인물은 다른 인물의 도움을 받아 기쁜 웃음을 지으며 어려움을 극복한다. 그 인물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는 멋진 남자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약점이 드러난 인물에게 까탈스럽게 굴던 여자 주인공이 진심으로 화해를 청하기도 한다. 지금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특히 인정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도와주며 서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최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개인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가구 단위, 혹은 개인 단위의 경제력을 늘리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려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았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거나, 먹을 양식이 부족하거나 하여 사람들은 서로 도와주기 위해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점차 개인 혹은 핵가족 한 가구 단위의 인간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중요해짐에 따라 서로 도와주면서 느끼는 따뜻한 인정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들은 우선 자신에게서 약점을 찾지 못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남들의 능력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조금도 열등한 능력이 없다. 그들이 남들보다 열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거나 혹은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 관련된 능력이다. 또한 그들은 당장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 너무나도 완벽을 꾀한다. 자신이 혼자의 힘으로는 끝내기 힘든 일이 있다면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노력하여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일을 완수한다. 어려움이 있을 때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융통성보다 자신이 이번 기회에 스스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자존심이 더 우세하게 된 셈이다.


  자신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원칙처럼 고수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쌓아가는 인간관계에 대해 무지하다. 뛰어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으므로 자신이 도움을 받지는 않는다. '완벽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람은 남들에게 도움을 받는 일 전혀 없이 자기보다 부족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만 한다. 완벽한 그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회사나 같은 학교에 소속해 있어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이 상황에서 도움을 받기만 하고 도움 줄 여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남을 도와주려는 호의가 다른 사람에게는 굴욕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있다.


  인간들이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려면 둘 이상의 인간들이 모두 자신들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해야 한다. 약점이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의 말은 거짓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한번쯤 느끼게 되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며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은 삶을 보내게 된다. 자신을 일부러 '완벽한 사람'으로 못박아버리려는 마음은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게 되는 결과로 인하여 자신의 인간관계를 빈약하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열등감과 우월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이 자신 혼자 알아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그때부터 열등감과 우월감이 조금씩 생긴다. 약점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드러내야 솔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온다. 그렇게 인정을 쌓아가며 서로 도와주는 삶이 가식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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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으로 행동하고 단체의 규범을 준수하라 (K양)

  다른 사람과 친밀함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남 앞에 떳떳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말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응수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나는 우선적으로 지금 나의 생활 환경에서 요구되는 도덕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인간은 건전한 대인관계를 만들기 위해 개방된 공간에서 살아간다. 개방된 공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감시할 수 있고, 서로의 언행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자신이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이 도덕성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같은 학교에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학교의 규칙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 친구들과 대인관계를 얽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의 규칙이 여기서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규칙을 어기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비판이 매우 잔혹하다는 것이다. 물론 사소한 규칙을 많이 어겨 선생님 혹은 학생자치위원회에게 지적을 많이 받아도 대인관계에는 아무런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의당 지켜야 하는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의 이미지는 추락하고 결국 그 사람은 개방된 공간에서는 친구를 사귈 수 없다. 그는 친구를 만든다 하여도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 결국 같은 단체에 소속한 개인들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면 개인들은 그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예의를 갖추고 만나야 한다. 대규모의 인간들이 함께 규칙을 어긴다면 그 관계는 병든 인간관계이다.


유연하게 흘러가는 기분 좋은 대화를 주도하라 (C군)

  대화를 할 때에는 청자의 기분을 항상 좋게 해 주어라. 새로 단장한 머리 스타일이나 패션과 같은 사소한 겉모습에 대해 칭찬을 해주고, 다른 사람이 겪은 기분 좋은 일을 다시 그 사람 앞에서 언급해 줌으로써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어라. 청자가 수치심이나 열등감을 느낄 만한 기억을 되살리게 하지 마라. 자신은 이러한 노력을 하지만 만약 자신이 청자로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혹은 같은 활동에 참여할 때 주위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을 경우에는, 그 상처를 일단 겉으로는 숨겨라. 그리고 다음에는 그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사람에게 쏟아붓던 호감을 잠시 끊어 놓아라. 즉 같이 대화를 하기는 하지만 칭찬과 같은 움직임은 자제하라는 뜻이다.

  말은 대인관계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겉으로 표현하는 대화, 직접 보여주는 행동, 마음 속의 결심 등이 내가 정의하는 '움직임'인데, 내가 주도하는 움직임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의 80%는 언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언어가 가장 중요하고 대화가 인간관계를 위해 필수적이다. 따라서 기분 좋은 대화를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으로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향상시키기 전에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다른 사람과 만나기 전에는 그 사람과 이야기할 화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고, 특히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고 그 사람에게 호감을 선사할 만한 주제를 구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화제가 적시에 적절하게 등장하고, 또 풍부하게 번성해나가도록 하는 것은 자신이 평소에 얼마만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가에 달렸다.


의무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자신의 스타일을 투사하라 (K선생님)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는 평소의 심각한 상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 혹은 '볼 건 다 본 사이' 의 경우에는 서로의 심각한 내적 고민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 혹은 이제 막 친해진 사람과 만날 때에는 얼굴에 즐거운 낯빛을 띠고 서로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의 의무에 대해서는 관심을 끄고, 다른 사람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의무는 내가 누구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설레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반면에 의무에서 벗어난 자기 스타일은 호기심과 설레임과 기대감이 하나로 응축된 즐거운 촉매제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온다.

  나아가 자신의 의무와는 무관하나 자기의 스타일을 말해주는 취미와 특기를 실제 행동에 옮김으로써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든다면 더 좋다. 만약 자신이 방관자의 입장에 서서 특별히 활동에 참여하는 일 없이 다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 하는 대로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화의 힘을 유지하면 된다. 한편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적극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진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을 행동에 투사하면 된다. 예를 들어 공부만 하던 사람이 평소에 다른 친구들과 연습하던 라틴댄스를 가지고 학교 친구들이 모이는 파티에서 공연을 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이미지를 공연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되고 그 사람의 인지도 또한 높아진다. 평소의 고리타분한 모습에서 벗어나 해방된 인간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때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은 시종일관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평소의 모습에서 180도 바뀐 새로운 모습으로 신선하게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은 평소에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보다 배가된 인기와 친분을 얻게 된다. 단 이때 의무에서 벗어나 자기 스타일을 투사한 사람은 자신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과의 충분한 대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만약 자신과 대면한 사람이 심각한 상태에 빠져 주구장창 자기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저번 시험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한다.  "이거 이제 좀 많이 까먹었어. 조금 있으면 대학 포트폴리오 준비해야지. 너는 그동안 학교에서 한 일 중에 서류에 끼워넣을 만한 일들 많이 해봤어? 나는 없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만들어보긴 해야겠다." 항상 이러한 종류의 말만 하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있어도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는 즐거운 교제를 위해서는 의무를 대화의 테이블에 올려놓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과의 교제를 늘리려면 때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제쳐두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하다. 때로는 사적인 일과 공적 자리에서의 만남이 겹치는 시간 등으로 상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에는 신중한 판단으로 사적인 일의 비중을 최적화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면 의무가 대인관계에 우선한다. 나아가 내가 친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적다고 해도 아직 그 사람과의 친분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의무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만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해야 하고, 결국 그러한 노력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친밀한 정도가 장기적으로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도록 만들어 준다. 의무에서 벗어난 여유로움과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개인적인 스타일은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상당한 점수를 얻게 해줄 것이다.


유머를 가진 다음 본능에 충실하라 (Y선배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깨끗한 모습, 남을 위해주는 모습, 나를 낮추는 모습만 보여주려 하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폭넓게 사귈 수 없다. 깨끗한 모습은 비록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본래 모습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가식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인간적인'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내 생각에는 인간적인 사람은 '수많은 매력과 성격의 장점을 가지고, 그에 반하는 수많은 결점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이다. 그리고 본능에 충실한 사람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한 어떤 행동을 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다.

  사실 본능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을 정의하기에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본능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내숭의 반대가 본능이다.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가지는 호감은 대화를 통해 일차적으로 나타난다. 그 사람은 말을 내뱉을 때마다 다른 사람을 웃게 한다. 웃어야 하는 상황이 떠오르면 그 웃음을 속으로만 감추고 있지 않고 즉시 다른 사람에게 말 한마디라는 매개체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능에 충실한 사람도 일상생활 속의 유머러스한 요소를 잡아내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으며, 아무런 유머 없이 본능에만 충실하면 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욱하는 성질의 인간'이라는 칭호를 달게 될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성격이 좋은 쪽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때는 대화가 주축이 되는 모임이다. 자신의 솔직함과 유머러스함을 보여주는 대화는 오랜 시간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체득해야 할 것이다. 대화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처음 말을 꺼내는 동기에도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모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대화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도록 만드는 대화의 기술이 바로 본능에 충실한 대화법이다. 그런데 그러한 특성 때문에 본능에 충실한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인간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들기 위한 의도로 내뱉은 말인데 만약 그 속에 유머의 요소가 아무 것도 없으면, 모임 속의 상황은 살벌해지고 청자들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에 분노하고, 결국 말을 내뱉은 사람은 무언의 질타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이 내가 말하는 'Weird한 상황'의 요지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에 충실하지 않으려 한다. 말을 내뱉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그 거리에 따라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구별해야 한다. 또한 단체 속에서 공유하는 정서에 자신을 맞추어 놓고 다른 사람의 정서 또한 그 정서로 합일을 이끌어야 한다. 만약 모임 속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가 없다면 그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는 미숙하다고 평가할 만 하다.

  위에서 말했듯, 말을 내뱉는 사람의 힘든 내적 쇄신이 수반되어야 유머러스하면서도 본능에 충실한 언사(言使)가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소심함에 빠져든다. 그러나 몇 번 질타를 받아보는 것도 훗날에 유머 섞인 대화를 잘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질타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성을 띠라는 말이다. 때로는 적극적인 성격이 그 사람의 수많은 단점을 덮어주는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다. 주위에 있는 많은 유명한 친구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그들만의 단점을 명확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지켜보고 싶은 움직임을 기대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점을 명확히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단점이 쉽게 보이지 않는 소심했던 사람들이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서 무슨 쓴소리를 받겠는가. 적극적으로 변하려는 결심과 마음의 동요 또한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다른 사람과 많이 부딪쳐 본 사람은 점점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결국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대인관계의 성공을 이룬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솔직한 면을 드러내어 화합과 갈등을 수도 없이 반복하게 되면 사람의 성격이 무뎌진다. 그러한 노력이 한 모임 안의 사람들에게 골고루 행해졌을 때에는 그 모임 속에서 공유하는 정서가 형성된다. 인간관계는 자신의 움직임을 도화선으로 시작한다. 모든 말과 행동에 일단 자신있는 마음을 가지고, 나의 말과 행동이 좋은 영향을 가져온다면 그것을 체득하며, 그것이 나쁜 영향을 가져온다면 그것을 반성하고 버리자. 이러한 노력은 자신에게 기쁨과 상처를 동시에 안겨준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내적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은 본능에 충실한 사람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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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지식은 내가 책의 글을 읽고 이해하기 위하여 도움을 주는 지식을 말한다. 배경지식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우리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그 글을 잘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순간 튀어나온다. 지금 내가 말하는 책은 소설책 뿐만이 아니라 어떤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는 글, 그리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 자료 등도 포괄한다. 즉 모든 종류의 글이다.

  글은 글이 보여주는 상황을 100% 묘사하지 못한다. 영화가 스크린에 투사하는 활동사진과 음향이 어떤 한 상황을 100% 묘사한다 가정했을 때 글은 묘사가 필요한 100개(난 이것을 묘사 단위라고 부르겠다) 중 가장 중요한 50개만 묘사해줄 뿐이다. 혹은 100개를 모두 묘사하긴 하지만 독자가 스스로 상상을 통해 더 묘사해야 할 여지를 남긴다.
우리가 글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이 묘사하지 않은 50개까지도 상상해낼 줄 알아야 하고, 그것(상상)을 위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작가는 100개의 묘사 단위가 모두 존재하는 상황에서 50개만 뽑아 글에 표현해낸다. 우리는 그 50개를 상상의 시발점으로 삼고 나머지 50개도 상상해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100개 중 50개를 뽑는 일에 주의를 다하고, 우리는 50개에서 작가가 느꼈던 100개를 도출해 내는 것에 주목한다. 따라서 서로 역할이 정반대이다.

 
나에게 있어서 상상은 곧 영화의 장면을 내 머리에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인간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쉽게 전달해준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영화 장면 생성은 곧 완벽한 글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상상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주어, 명사, 동사, 부사, 형용사 등이 글 속에서 어떤 장면을 생성하는 재료로 작용하는 지 명확히 알고 그 단어들을 바탕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여러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문장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내가 생성하는 장면이 뒤엉키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상상을 할 대상은
첫째 눈에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
둘째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
셋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것,
넷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이다.

시각적인 묘사 단위 외에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의 묘사 단위는 위의 네 가지 상상의 대상에 상황에 따라 해당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상을 하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첫째 눈에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인물들의 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공간이고, 의견을 피력하는 칼럼에서 말하자면 현 상황 속에 들어있는 모든 물건이다. 글에서 추상명사 외의 명사의 역할은 눈에 보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형용사가 덧붙어서 명사에 의미를 추가한다. 추상명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준다.

  I got dressed. 라고 누가 말했다면 그 사람이 입은 옷의 모습까지도 상상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 옷이 하늘거리는 연두색 드레스여야 그 상황에 어울린다면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에게 연두색 드레스를 입히고 영화 장면에 집어넣어야 한다. 정말 연두색 드레스인지는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지만, 드레스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보조적으로 추가되는 '묘사 단위'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연두색 드레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사진을 통해서도 혹은 실제로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상상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평소에 많은 시각 자료를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은 아무리 묘사가 정확하고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글 자체는 수천 수만 개의 단어들이 '독자'와  '이해의 대상'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종이에 불과하다.

  둘째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인물들의 행동과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 등이다. 특히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에서 누가 따옴표 속의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상상해 내는 것은 중요하다. 글에서 동사의 역할은 우리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을 상상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사가 덧붙어서 동사에 의미를 추가한다.

 내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하나의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을 때 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상상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장면 안에 2개 이상의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이들을 한꺼번에 같이 떠올리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씩 상상해서 장면 안에 채워넣되 2개 이상의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가지 묘사 단위들이 동시에 묘사되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추상명사와 추상형용사를 기반으로 묘사해주는 것들이다. 위치를 나타내는 전치사도 셋째 묘사 단위와 관련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다고, 추상적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이해가 힘들다고는 말할 수 없다. 추상적인 것들이 글에 등장한다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결국 그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가시화하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가장 단순한 예로 surprise라는 명사이다. 혹은 He was surprised with joy. 와 같은 경우다. 그가 희열을 느끼며 놀랐다면 그의 제스처는 어떨까, 그의 표정은 어떨까 등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상상은 글에 있는 50개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는 글에서 대부분의 경우 셋째 묘사 단위는 어떤 큰 범위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는 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격세력이 맥아더의 동상을 쓰러뜨리려 했고, 미군 평택기지를 반대하는 시위대는 국군을 구타했다. 이 사건 뒤에는 북한의 촉수가 있었을 것이다.' 라는 문장에서 촉수가 바로 셋째 묘사 단위이다. 촉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우리가 상상해야 하고, 한 편의 짧은 글은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촉수가 상징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상상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배경지식에 달려있다.

  넷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의 전개, 상황의 선후 관계, 심리 상태의 변화와 같은 것들이다. 소설에서는 심리 묘사에서 넷째 묘사 단위를 건드린다. '난 너를 저주한다.' 라는 문장이 글 속에 들어있을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저주한다니 어떻게 저주하지?' 그리고 그때 저주의 주체가 이전에 경험했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쉽게 '어떻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넷째 묘사 단위에 대한 이해가 쉬운 편인데, 문제는 이 '넷째 묘사 단위'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에 너무나도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의 오피니언, 사설, 칼럼 영역은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많이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추상적인 논리의 전개에 많이 쓰인다. 한 예로 주장이 깨졌다. 와 같은 말에서 '깨졌다'는 단순히 접시가 깨지는 것과는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에서 쓰이는 동사는 단순히 사물이 주어가 되었을 때의 의미와는 다르게 추상적인 개념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다. '남한이 체제와 동맹의 끈을 풀다.' '북한이 민노당이란 진보정당을 겨냥한다.' '당이 당 속의 적색 기운을 씻어낸다.' 와 같은 예문에서 '풀다', '겨냥한다', '씻어낸다' 등은 운동을 하다가 신발끈이 풀려졌을 때의 '풀다'와 오늘 잡아먹을 꿩을 '겨냥한다' 와 손에 묻은 케찹을 '씻어낸다' 등과 같은 쉽게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묘사 단위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상상력이 글의 이해력을 좌우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Power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경험론을 믿는 사람이다. 경험론이라는 말이 나의 생각을 100% 포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나는 미리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경험이 있어야 책과 글을 읽을 때에도 이해가 잘 된다고 믿는다. '생생'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풍부한 '상상'의 날개를 펴간다면 글을 읽을 때마다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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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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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말을 할 수가 없다. 인간관계는 대화로 생겨나고, 대화는 곧 언어로부터 출발하고, 언어 안에는 곧 뼈와 살이 되는 지식이 담겨 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그 이야기에 동조해주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과 말을 할 수가 없고 그 사람과의 인간관계 형성도 불가능하다. 내가 공부하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에는 많이 알아야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많이 알면 알수록 친구들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우리 국어 선생님께서 계속 소설책과 역사책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하신 이유도 결국에는 폭넓은 공부로 얻은 지식을 가지고 글을 생산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내 글을 다른 사람이 읽고 나면 그 사람은 그 글에 대해서 나와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야기가 곧 인간관계 형성의 씨가 되지 않는가. 인간이 점점 성장하면서 교양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다면 깊은 주제에 관한 대화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많이 아는 지식의 분야와 다른 친구들의 것이 다를 때에는 내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내가 친구들의 관심사를 맞추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 형성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친구들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자신에게 특별히 와닿지 않고 흥미가 없는 주제의 지식이라도 그 지식을 알고 있으면 더 주위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 친구들의 관심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자. 주위 사람들을 알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주위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공부를 많이 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고 있어야 어느 주제에 대한 대화가 튀어나와도 그 대화에 참여하고 언어로써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결국 공부를 평소에 많이 해두면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잘 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주위 사람들을 자신 주변으로 몰려들게 한다. 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이다. 꼭 학문적인 서적을 정독하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라 공부는 생활의 일부이고 주위 사람들과 깊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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