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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모습만을 보이려 애쓴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개인이나 집단과 충돌한 적은 없다. 적어도 내 얼굴에 달린 두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드넓은 초원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내가 먹을 만큼의 풀만 뜯고 유유히 활보하는 한 마리의 양처럼 나는 살아왔다. 난 내가 풀을 뜯어먹음으로써 다른 양들이 엄연한 피해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의 배를 채우고 내가 사라지는 순간, 나의 시야가 자취를 감춘 그 초원에서 다른 어떤 양 한마리는 나 때문에 자신의 먹을 풀을 빼앗기고 만 셈이 된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사람들과 이미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은 생각해보면 수도 없이 많은 듯하다. 아무리 나의 입장으로 생각해서,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고 여기더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말과 행동이 모욕이나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나를 평소에는 좋아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싫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던 친구들은 어느날 나를 피하고 나에게 매서운 눈총을 보내고 쓴소리를 한마디 던지고 사라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나에게 직접 대면하여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난 너 때문에 지금 많이 서운하다. 그날 왜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그런 말 한마디를 던질 수가 있니' 같은 말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에게 서운한 마음을 무언의 행동 패턴으로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무언의 반응을 빨리 관찰하고 나에게 서운했던 이들에게 '누구누구야, 요즘 나에게 서운한 일 있어? 도통 보이질 않네. 예전에 내가 말실수 같은 걸 한 적이 있다면 말해봐. 나도 모르는 나의 실수가 있었나봐.' 정도의 말을 던져 주어야 한다. 그러한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으면 나와 나에게 서운한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된다. 소위 '서로 쌩까는' 현상이 대두하는 것이다.

  자신은 남들에게 항상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제공하고 웃음을 선사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을 주선해 주며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좋게 다가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나의 가치관이 아닌 그 사람의 가치관이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했다고 자만하는 사이 다른 사람은 벌써 나에게 약간의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내가 주도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는 다른 사람을 한번 더 감싸주고 그들에게 한번 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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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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