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일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최대한 반응하여 기쁨을 극대화해야 한다. 누가 여자친구와 100일을 맞았다던가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던가 오랜 시간 준비한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던가 하는 그러한 이벤트는 일상의 지루함과 스트레스를 쓸어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은 일을 경험할 수도 있고 나의 주변 사람이 좋은 일을 경험할 수도 있으며, 나와 주변 사람이 함께 같은 좋은 일을 경험한다면 기쁨은 더욱 커진다. 일생에서 기분 좋은 일은 자연스러운 노력의 결과로 찾아올 때도 있지만 우리가 찾아내려고 주의를 기울여야만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서 기분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성대한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면 더이상 기분이 좋아질 일은 없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일상은 일시적이다. 일시적인 기쁨을 최대한 느끼지 않고 그저 방관하고 있다면 그 뒤에 다시 찾아오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따라서 최대한 기쁜 일 속에서 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더불어 즐거워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삶에서는 기분이 좋아지는 얘기도 쉽게 들려오지 않는다. 기분의 변화가 없는 평범한 대화는 많이 왔다갔다 하지만, 평소에 내가 마음에 두었던 여자 친구가 나에게 칭찬을 한다던가 학교 선배 혹은 교수님이 나에게 엄청난 제안을 하는 등의 대화는 드물다. 드문 만큼 그것으로부터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다만 어려운 점은 그러한 기분 좋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즉시 최대한의 반응을 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둔감한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분을 끌어올릴 기회를 그냥 놓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다.

  반면 기분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 일은 훨씬 많다. 기분이 안 좋아지는 얘기도 삶 속에서 우리의 귓잔등을 자주 때린다. 학교에서 있는 여러 가지 조모임과 회의가 대표적인데, 아무래도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조율하는 작업이 주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어야 하고 자기 말이 논리적으로 결함을 가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한 일에서 실수라도 생긴다면 곧바로 서로의 기분이 상한다. 일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다투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는 삶 속에서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우리가 느낄 때에는 그 일들에서 최소한의 불만족을 느끼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으로 이러한 일들은 표현 방법의 전환을 통해 최대한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다. 상대방을 비판하기 전에 이미 있는 장점부터 부드럽게 짚고 넘어가고, 중간중간에 유머를 던지면서 긴장을 해소하는 등 불편하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이나 대화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면 스트레스가 덜 쌓이게 된다. 물론 이 노력은 실천에 옮기기가 매우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이 노력을 잘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인생 전반에 걸쳐 꾸준히 하고 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것은 더 적게 생기고, 나쁜 것은 더 많이 생긴다는 점에서 경제 시간에 배운 한계생산체감과 한계비용체증의 법칙이 떠오른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적어질 것이고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희망을 가지고 그러한 일이 터졌을 때 그 일을 최대한 즐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힘든 삶이 더욱 가벼워지고 즐거워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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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는 가벼울 때도 있어야 하고 무거울 때도 있어야 한다. 아무런 걱정이나 문제가 없이 평탄한 시기에는 사람들과 만날 때 지극히 일상적이고 단순하고, 생각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고, 때로는 지극히 유치한 대화의 소재를 꺼내면서 수다를 떨면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 있다. 연예계의 가십, 좋아하는 레스토랑, 요즘 공연하는 대학로 뮤지컬, MT에 갔을 때 생긴 에피소드,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칭찬, 친구들과 게임이나 스포츠를 했을 때 생긴 일이나 자신의 기분, 현재의 기분이나 안부에 대한 묻고 답하기 등등 가벼운 대화의 소재는 참 많다. 하지만 집단 내에 문제가 생기거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이슈가 등장했을 때나,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진심을 표현할 때에는 가벼운 대화에서 무거운 대화로 넘어가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 제시, 지금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문제점 상정, 상대방의 정치적 식견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합리적인 지적,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기까지의 과정, 외로움이나 슬픔의 극적인 표현 등은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삶 속에서 가벼운 상황과 무거운 상황을 번갈아 경험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해 가벼운 대화와 무거운 대화를 한다.


  흔히 진지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거운 주제에 관한 대화만을 즐겨 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 꼭 무거운 주제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지한 사람은 평소에 친구들과 같이 레스토랑에 가거나 당구장에 가거나 차에 탔을 때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자청하는 사람이다. 또한 연애관계에서도 상대방에게 시시콜콜한 혹은 한번 듣고 웃어넘기면 그만인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다가 '우리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아' '우리 다시 시작하자' 류의 진지한 말만 하여 대개 여성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얽혀 있는 원인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가벼운 대화를 잘 들어주는 성격에 있다. 만약 그들이 가벼운 대화조차 꺼려한다면 그들은 모든 주위 사람들이 꺼리는 대상이 될 것이다.


  항상 진지한 태도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 좋지 못하다. 사적인 인간관계는 90%의 장난과 10%의 진지함으로 이루어져 있고, 언제나 중핵(中核)인 진지함을 장난이 두껍게 둘러싸고 있다. 진지한 사람은 일에서는 성공할지 모른다.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일은 거의 모두 정확함과 신속함을 요구하고 상사와 부하와의 원활한 '공적인'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사람이 성실하다는 평과 함께 많은 대우와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같이 놀고 쉬고 먹고 마시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가벼운 소재로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심지어 진지한 대상을 풍자하면서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자세가 중요하다. 프로젝트가 끝나거나 한달 간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코엑스 안의 호프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열두명 정도 들어앉은 이곳, 모두들 즐거운 대화를 원하고 과거의 일에 관한 생각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이때 갑자기 말을 꺼내더니 '지난 번 프로젝트에서는 이런 점이 아쉬웠어. 다른 팀은 우리보다 이런 점에서 더 뛰어났는데, 나중에 윗사람들의 평을 들어봐야지.' 식의 무거운 소재를 늘어놓는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이란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소득, 직업적인 성공, 영적인 안정, 신체적인 건강, 지적인 성취 등에만 신경쓰는 존재가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자기관리에 치중해 있으면 얼마나 웃음이 없고 장난이 없는 메마른 삶이 펼쳐지겠는가.


  그래서 대화를 통해 대부분의 대화를 가벼운 주제로 채워넣는 일이 중요하다. 삶의 영역을 가벼운 주제의 대화에서는 내가 어떤 언행으로 대처한다 해도 항상 즐겁게 된다. 특별히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가벼운 주제의 대화에 빠져들어 있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웃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분위기가 별거 아닌 거 가지고도 하하 호호 즐겁게 웃는 분위기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가벼운 주제의 대화는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주고 웃음과 즐거움을 높여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가벼운 대화를 윤활유로 하여 사람들을 많이 사귀고, 따라서 우리의 일에서도 성공하고 사람들 만나는 기쁨도 더 많이 누린다면 삶이 더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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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인상을 잘 심어주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편협한 선입견을 심어주는 경우는 꽤 많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우리들은 종종 초콜릿이나 떡과 같은 먹을 것들을 돌리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런 음식을 받았을 때 곧바로 거절한다면 그 사람에게 첫인상을 좋지 않게 남기게 된다. 이렇게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거절이나 냉담, 무시, 조소, 이질감 등을 안겨준다면 앞으로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대화가 필요할 때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누구나 첫인상을 통해 저 사람이 나와 함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나와 동떨어진 길을 걸어갈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에 처음에 인간관계의 방향이 잡혀버리면 나중에 대화를 하거나 같이 행동을 할 때에도 서로 어긋나게 된다. 고의적으로 저 사람을 피하거나,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경우 내가 아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낸다거나 하면서 둘 사이의 진심을 이해할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이렇게 좋지 못한 첫인상이 서로에게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선입견을 주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한 오해는 점점 커진다. 오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오해는 상대방의 말을 잘 새겨듣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인데, 이것은 말을 듣는 사람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나 감정 등의 진심을 함께 들으려 하지 않고 대충 정보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대화를 할 때에 커뮤니케이션의 정도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즉 서로 아무런 접촉의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정보의 정확한 전달' 의 기능마저 떨어진다.

   

  둘째 오해는 서로가 말을 안 해도 둘 다 알고 있는 암묵적인 지침이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흔히 친구끼리는 같이 무언가를 해아 할 때 '너는 이것을 하고 나는 이것을 하겠다' 정도를 말해 놓으면 '언제까지 이것을 함께 하자' 같은 것은 둘 다 동의하고 있는 의리나 우정 등의 가치에 의해 자동적으로 알게 되어있다. 즉 서로가 말을 안 해도 둘 다 알고 있는 지침이란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둘 사이에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끊임없이 서로 도와주고, 자기 몫뿐만 아니라 친구의 몫도 신경 써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정도가 되겠다. 따라서 한 친구가 다른 친구한테 어떤 일을 도와달라고 할 때에 다른 친구는 그 '어떤 일'뿐만 아니라 그 일을 마친 다음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일도 같이 도와준다. 그런데 만약 A라는 사람은 B가 자신에게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고, B는 A가 자신과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서로의 암묵적 커뮤니케이션은 끊긴다. A가 B에게 어떤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B는 A가 도와달라고 한 그 일만 도와주고 바로 자신이 하던 일로 되돌아갈 것이다. A는 왜 B가 그 다음 일까지 도와주지 않았냐며 화를 낼 것이고 A가 생각하고 있던 우정이나 의리에도 금이 갈 것이다.


  정리하자면 친분의 정도에 따라 선입견과 오해의 정도가 달라진다. 서로 많이 알고 지내고 대화를 많이 한 사이라면 서로에 대한 선입견은 거의 없거나 완전히 없으며, 따라서 오해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서로 친하지 않고 서먹서먹한 사이라면 선입견과 오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아질 것이고, 이미 쌓인 선입견과 오해를 대화로 한꺼번에 혹은 조금씩 풀기에는 선입견과 오해가 너무 많을 것이다. 누군가 말은 오해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오해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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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내 주위의 사람들과 나의 생활 패턴을 비교해 볼 때 나의 그것이 주위 사람들과 많이 어긋났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예전에는 나 혼자 집단 속에서 잘 살아갔는데, 이제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템포를 맞추어 가며 생활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남들이 놀 때 내가 일한다는 자부심이나 만족감보다는, 남들이 다 노는데 왜 나만 일하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더 앞선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회 속에 발을 담그어 가는 나의 변해가는 모습을 내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동이 많아질수록, 같이 행동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사회성이라는 가치가 더 커진다. 자기가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여 자신만이 참여하는 일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혼자 하는 일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유대관계를 증진시킬 수 없다. 고작 내가 한 일에 대한 칭찬이나 피드백 등으로 표면적인 관계만을 사후에 맺게 될 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치는 주위 사람들과 행동을 유사한 형식으로 비슷한 시간에 맞추어가면서 같이 행동함으로써 발생하는 인간적인 관계이다. 연인들이 특별히 같이 할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같이 다니는 이유는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인간적인 관계의 증진'이다. 특정한 행동이나 일에 잠시 얽매여 있는 사람으로서 만나더라도, 그 만남이 지속되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유대관계가 점점 쌓여간다. 언제나 일할 수는 없는 인간이 일이라는 짐을 잠시 내려놓는 시간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 순간에 사람들 모두가 일에서 잠시 해방된 상태에 있다면 그때 인간적인 관계가 조금씩 자란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도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나 또한 그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나에게 좋다. 그 대화에서 빠진 상태에서 내 일만 계속 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하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따라서 내가 일을 끝냈을 때 나와 같이 기분좋게 휴식을 취해 줄 사람이 많이 없게 된다. 그 사람들은 그전에 다 휴식을 취했고 이제는 일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생활 패턴을 가진 사람을 자신과 다른 생활 패턴의 소유자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이 심리를 이용하여 내가 먼저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생활 리듬을 맞추어간다면 나는 사회성 높은 행복한 인간으로 점점 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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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해보기 전에 나는 연인과의 대화는 친구와의 대화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는 편히 말하던 나의 고민이나 나의 실수담이나 서로 놀리는 말들을 연인 앞에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평소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연인에게는 '완벽한 매너와 말솜씨로 무장한 사람'으로서 다가가야 한다고 믿어왔다. 즉 연인에게는 불만을 표해서도 안 되고 항상 과장된 반응을 보여야 되고 몇 초 동안이라도 침묵이 오가면 절대 안 되는 줄 알았다. 이제 와서 그런 옛날의 신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달았으나, 전에는 정말 심각하게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의 나의 처세를 두 가지로 갈라놓는 데 주력했다. 연인이나 친구나 지금의 어린 나에게는 그저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괜히 내 머리를 말도 안 되는 생각과 이론으로 채워놓고 사람들의 특성이라는 자극에 따라 내가 반응하도록 나를 디자인해 왔었다. 그리고 그러한 '디자인'은 내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에게 다가갈 때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긴장감의 결과는 여자에게 부담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갖는 언행의 범위는 친구와 연인 관계가 공유하는 범위에 연인 사이에서만 가능한 언행의 범위를 합친 것이다. 집합 A와 집합 B 그리고 그 사이에 교집합 C가 있다면, A가 친구 관계에서의 언행의 범위이고 B가 연인과의 언행의 범위이다. 풋풋한 대학생 시절에는 교집합 C가 무궁무진하게 넓다. 활동의 자유가 허락된 우리들은 대학생 시절에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도 계획하고 실천하지만 주위의 영향을 받고 나서도 계획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B-C 즉 친구에게는 할 수 없지만 연인에게는 할 수 있는 언행의 범위는 대학생 시절에는 그리 넓지 않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 둘만의 밀실이 넓어지고 둘 이외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경향도 조금씩 커진다. 꼭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드라마를 시청한 결과 그러한 답을 내렸다. 결국 대학생인 나에게 연인을 향한 처세와 친구를 향한 처세는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고 친구와 대화하듯 연인과 대화하는 능력이다. 끊임없이 연인의 일상과 상황을 알려 노력하고 그러면서 대화의 양을 늘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 항상 좋은 것만 주려 고심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갔을 때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친구들과의 대화 + 알파'가 연인들과의 대화라면 그 '알파'는 중간에 가끔씩 들어갈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는 '알파'를 중심으로 보여주느냐 아니면 '자연스럽고 평범한 대화'를 중심으로 보여주느냐에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의 모든 대사는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지루함과 평범함이 대부분인 현실 즉 일상 속에서 비일상으로서의 '알파'를 만들고 찾아내고 같이 즐기는 일이 우리의 일생 중에서 얼마나 작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과거의 나처럼 연인과의 대화는 드라마처럼 특별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자극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의 경우에는 더하다. 대학생이 되어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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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이 언제 어디서 모이자고 멤버들에게 연락을 주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자기가 먼저 모임 장소에 10분 전에 도착해서 먹을 것까지 세팅이라도 할 것같이 펄쩍펄쩍 긍정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아리에서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적인 약속을 취소한 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감정으로 '그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진짜 가고 싶은데 그때 과외가 있다며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겠다고 선언하는 적극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자나 커뮤니티 공지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동아리의 아무도 모른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동아리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집단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 동아리는 그 사람에게는 '세컨'으로서의 동아리, 즉 더 중요한 다른 집단에서 충실히 활동한 다음 시간이 남으면 그때 활동을 개시하는 동아리이다. 동아리보다 중요한 다른 동아리, 애인, 혹은 친구가 있다면 그 동아리의 중요성은 묻혀버린다. 그 사람은 그 동아리에 대한 애정을 완벽하게 쏟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동아리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가 힘들 때 우리는 그 동아리를 세컨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자신은 열심히 활동하려 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태도와 능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그럴 때에는 자신이 가치없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그곳에 대한 애정이 사라져 자신의 넘치는 애정을 다른 곳에 쏟게 될 것이다.

  모든 동아리의 초기는 활력이 넘치고 생산적이다. 동아리의 설립 멤버들은 자신들의 모든 대학 생활을 그 동아리에 헌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가 많고 동아리에서 즐거움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그 동아리는 초기 멤버들에게 우선순위 1순위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동아리는 점차 회원들의 가입과 탈퇴를 자유롭게 규정하여 놓는다. 이것은 동아리의 정체성과 제도의 발전과 함께 같이 신장되는 긍정적인 자유이지만 그 동아리가 어느 누군가에게 '잠깐 놀다 갈 동아리'로 인식되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정한 동아리를 '세컨'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한두 명일 때에는 동아리 전체의 운영과 유지, 즉 생명에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동아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동아리에 대한 우선순위를 2위, 혹은 3위로 설정한다면 그 동아리는 당연히 시들해진다. 그리고 시들해진 동아리는 얼마 못 가 곧 문을 닫게 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시들어진 수많은 집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지만 평생 한 번 만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과 1학년 교양 수업의 조모임을 같이 할 때, 그 조모임 커뮤니티는 그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을까. 또 일년에 한 번 있는 행사에 참가해서 그 행사 관련 커뮤니티에 가입했을 때, 그 커뮤니티는 어떤 우선순위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질 것일까. 사람들은 평생 친구, 평생 몸담을 동아리에 최고의 애정을 줄 것이고 그러한 커뮤니티는 사소한 한 때의 반강제적인 집단으로 여기고 매우 강제성을 띤 모임이 있을 때에만 참석할 것이다. 물론 조모임 커뮤니티 같은 예시는 낮은 우선순위를 가진 집단의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입한 동아리를 살펴보아도 그 정도의 애정 결핍과 낮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 동아리는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복수 개의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의 우선순위를 한 동아리에만 부여하지는 않는다. 세 개의 동아리 모두에 똑같은 애정을 가지고 그곳에서 똑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 세 동아리의 우선순위는 모두 '높음'이고 세컨으로서의 동아리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설정이지만 현실에서는 제일의 우선순위가 두 개 이상의 동아리에 부여되기가 힘들다. 정말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 동아리 활동을 한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컨으로 밀려나는 동아리들이 많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컨 동아리의 우선순위를 다시 1순위로 바꾸던지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그 동아리의 구성원인 이상 나는 그 동아리의 행사에 꾸준히 참가하고 다른 멤버들을 동료를 넘어선 친구로 맞이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동아리를 탈퇴해야 한다. 동아리는 방안의 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고 물과 영양분을 주지 않으면 금세 시들게 된다. 동아리는 순간의 즐거움, 때에 따라 바뀌는 자신의 욕구 충족 때문에 가끔씩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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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보면 같은 동아리 내의 친구나 선배와 의견 충돌을 빚을 때가 있다. 특히 음악 동아리의 경우 그러한 의견 충돌은 개인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고질병으로 남는다. 어떤 성향이 이 동아리 안에서 '적합하다' 혹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이상 한 성향만 받아들이는 태도는 주관적인 아집에 불과하다. 실제로 단순히 동아리의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한 음악 성향만 강제하는 사람이 몇 있다. 그 성향이 그 동아리의 정체성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성향이 아닌 단순한 그 선배 개인의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후배들은 많은 불만을 갖는다. 선후배 사이뿐만 아니라 동기들 사이에서도 성향의 차이는 의견 일치와 일의 진전에 큰 차질을 빚어낸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가 선행되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 방법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팀을 구성하여 팀과 팀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 독자적인 일을 추진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두번째 방법에 비해 조금 더 실용적이고 '성향 불일치 이후에 더 유용한' 방법이다. 동아리의 구성원이 매우 많을 때에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을 갖는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가입과 탈퇴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동아리(오디션이 있는 동아리를 제외하고)이기 때문에 같은 동아리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다. 그래서 동아리 내에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까이 하기 마련이다. 첫번째 방법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를 자연스레 동력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 동아리 안에 2~3개 정도의 팀이 있으면 적당하다. 하지만 만약 동아리 내에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특별한 성향을 가진 소수가 발생하거나 혹은 여러 팀 구성원의 인원이 너무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면 첫번째 방법을 쓸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노력의 기회와 그에 따른 똑같은 만족감을 주는 것이 동아리의 원칙인데, 위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차별받고 억압받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성향이 다른 멤버들의 성향과 너무나도 다르고 특별하다면 자신의 성향을 고집하는 마음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다른 멤버들에 비해 더 많이 해야겠지만 말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이지만 그만큼 실현 가능성도 낮은 방법이 첫째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처음부터 동아리의 성향을 결정하는 방법이다. 동아리의 모토와 정체성을 먼저 밝혀 놓고 멤버들을 소집하는 것이다. 음악 동아리의 정체성이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동아리가 전통적으로 고수하는 어떤 성향이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구성원들의 수많은 성향을 정리하고 규합하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멤버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표출하기 전에 동아리 전체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재즈 동아리의 예를 들자면, 우리 동아리가 퓨전 재즈는 지양하고 대부분 스탠다드 재즈를 지향하기 때문에 컨템포러리 재즈를 좋아하는 나는 그러한 성향을 조금 억제하고 스탠다드 재즈를 더욱 더 좋아하려 노력했고 지금은 스탠다드 재즈에 푹 빠져 있다. 강제로 나의 성향을 억제하고 수정한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그러한 강제에 따라야지만 이 동아리가 나에게 호의적으로 효용과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성향을 바꾸었다. 물론 처음부터 전통으로 규정되어 온 동아리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성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동아리의 몇몇 구성원들이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성향이고 '점'으로서의 성향이다. 동아리에는 '선'으로서의 성향이 동아리의 역사를 꿰뚫으며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한 성향이 규정되어 있지 않고 동아리 안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자신들의 자유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동아리가 가장 좋지만, 조금 더 동아리 구성원의 현실적인 단합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정체성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모든 국민들은 '우리는 똑같이 한국 사람이고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할 것이다' 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뭉칠 수 있었다. 분명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이던 그때 응원의 함성을 단순한 소음 쯤으로 치부하던 사람들이 몇몇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붉은악마 대중'에 반발하지 않았던 것은 그 사람들 또한 대한민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응원을 하러 거리로 뛰어나가는 성향이 어느 정도 강제로 작용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고 자연스레 단합에 순응했을 것이다. 이처럼 단체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단체의 의견 일치와 단합에 있다. 무한한 자유가 보장된 대학생들에게도 단체 활동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공통 성향을 창출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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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에 와서 새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도 우리는 몇몇 사람들과는 한 번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계속 만남을 이어간다. 아무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 살 수 없다 해도 우리는 대학교에서 혼자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를 하고 그와 친해지려 한다. 같이 조모임을 해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만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과 조금 더 친해지고 싶고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만난다. 마주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친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그 사람을 계속 만나는 우리들의 모습은 가만히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들이 대학교에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 사람과 있으면 즐겁기 때문에 만나고, 그 사람과 내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만나고, 서로 물질적, 지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이득을 가져다주니까 만난다. 과거에 같이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학연이나 지연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과거에 함께 했던 일이 하나도 없어도 괜찮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여도 괜찮다. 다만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리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앞서 말한 세 가지 기준으로 저울질한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더 만나고 싶기도 하고 그 사람과 그만 만나고 싶기도 한다. 동아리에서 서로 생전 못 보던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우리 친구하자!' 라고 해놓은 다음 그들 둘이 꾸준히 만날 것인지 여부는 그러한 기준이 충족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소개팅에서 만난 이성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우리들 중 어느 두 사람이 서로 같은 집단이나 일에 소속해서 꾸준히 마주치거나 혹은 같은 고향에서 자라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들의 만남의 초기 단계에서는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되지 뭐. 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만남의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계속 즐거움과 도움과 이득을 주어야 관계가 유지된다. 이러한 관계는 냉정한 Give & Take의 관계와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쉽게 자신의 참모습을 건네주지 않고 약간의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 만남의 초반에는 이러한 냉정한 내적 판단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상대방의 냉정한 판단을 염려하면서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즐거움과 도움과 이득을 주기 위해 자기를 갈고 닦은 다음 상대방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상대방은 그 사람에게 기쁨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과의 훗날의 만남을 기약할 것이다.


  인간이란 속으로는 이렇게 냉정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단순한 우연을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갈 수 있다. 우리들은 나이를 먹고 넓은 사회로 나갈수록 오랜 환경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계보다는 호감과 능력과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분석해서 형성한 관계를 더욱 많이 갖게 된다. 그만큼 타인이나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서 만드는 관계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자기 관리와 자기 쇄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당신이 넓은 세계에 나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엄청 많을지라도 그 사람들은 당신과 예전에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남'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 남이었다가 친구나 애인 사이로 바꾸는 과정에 즐거움과 도움과 이득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선행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이것은 결코 슬픈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해주는 고마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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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는 아무래도 시험일 것이다. 학점이 대학 생활에 있어 우선적으로 취득해야 할 가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좋지만 일단 나의 객관적인 능력의 척도를 높이고 남과의 관계에서의 능력도 더불어 높아지는 것이 올바른 자기 발전의 순서다. 우리는 수많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만 대학생의 경우 가장 커다란 가치인 학점과 인간관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공부에서 손을 놓고 친구들과 끊임없이 만난다. 그 때가 우리가 말하는 '평소'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평소에 사람을 잘 사귀어 놓아야 내가 위급할 때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나 외로울 때 같이 있어줄 사람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친구를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시험이 임박하지 않았을 때에는 공부보다 친구 만나기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들의 처세는 달라진다. 그동안 열심히 친구들을 만났으니 이제는 인간관계를 번성하게 하는 작업을 멈추고 잠시 쉰다. 남들에게도 잘 보이면서 자기 몫 또한 확실히 챙기는 멋진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삶의 패턴을 유지할 것이다.

  평소에는 자기 스스로 세워 놓은 공부 계획도 취소하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나 MT나 여행 등에 참가하여 이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가 개개인에게 차별된 이득을 주는 일이 등장했을 때는 속된 말로 '버로우 burrow'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친구들과 만나는 일을 멈추고 공부에 힘썼을 때 이러한 행동 패턴의 변화가 비난받을 만한 행위는 전혀 아니며, 그렇다고 '버로우'를 통해 평소에 쌓아 왔던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신경을 써야 할 때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적시적소에 행동하는 바람직한 인간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버로우'를 통해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영역으로 탈피했을 때 우리들이 취하는 모든 자기 발전의 활동은 나중에 다시 공적 영역으로 되돌아갔을 때 자신을 남들 앞에서 빛나게 하는 토양이 된다. 평소에도 '버로우'의 시간은 있다. 밤늦게까지 신촌에서 놀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의 사적인 시간은 시작된다. 이때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먹고, 피로한 몸을 잘 씻고, 한가하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느라 못했던 복습을 한다면 사적인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하면 무언가 주위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데 있어 부적절할 것 같은 모든 행동을 '버로우'할 때 끝내는 자세, 이 자세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태도이며 특히 대학생에게 필요하다.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 어떻게 본다면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누린 사람, 참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생활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생각의 틀에 숨어있다. 공적인 영역에 흠뻑 빠지다가도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는 삶의 패턴, 성장과 후퇴를 반복하며 서서히 발전하는 경기변동의 그래프를 그리며 진행되는 모습은 성공적인 삶을 위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상황을 잘 파악하여 자신이 '버로우'를 해야 할 시기나 기간을 적시에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열쇠를 가지고 제대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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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 들어와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많은 가치들이 둥둥 떠다닌다. 공부, 반 활동, 옛 친구들과의 만남, 동아리, 연애, 종교활동, 스포츠와 휴식, 문화생활, 학교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토론..... 이 많은 일을 모두 24조각의 시간 케익 속에 부어넣고 싶지만 때로는 밀려오는 과제물과 조별 모임, 친척 사이의 행사, 예상치 못했던 불상사 등으로 우리가 이미 계획했던 대로 모든 가치들을 섭렵하기 힘들 때가 있다. 하나의 가치에만 집착해도 좋을 것은 없다. 우정이 과해서 사랑이 부족해지거나, 공부가 과해서 휴식과 종교활동이 부족해질 수 있다. 매주 어느 요일 언제에는 꼭 어떤 일을 하자고 계획을 해도 내가 세워놓은 그 계획이 다른 일로 인해 무산될 때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먹을 만큼의 케익 조각만을 준비해 놓는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먹을 케익은 많이 남겨놓는다. 그 케익이 딸기 케익일지 치즈 케익일지 초코 쉬폰 케익일지는 내가 결정하지 않을 때가 많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는 그 시간들이 어떤 가치를 위해 소비되는지 또한 내가 관여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도 뺏어먹지 못할 나만의 케익이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나의 하루는 만족스럽고, 나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 다음 기분 좋게 다른 친구들과 새로운 맛의 케익을 서로 나누어 먹고 바꾸어 먹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기뻐한다. 나는 혼자 있게 되는 시간, 즉 집에 있거나 공강이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에 나만의 시간을 마련해 두고 사람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잦은 금요일 밤과 주말에는 스스로 무언가를 계획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주도하는 행사가 있다면 그 반대겠지만 말이다.


  공부의 경우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는 긴 시간 동안 신문이나 TIME지를 읽고, 공강 시간에는 혼자 집중하여 학과공부를 할 수 있도록 조용히 연합신학대학원 도서관으로 향한다. 다른 시간에 공부 외에 다른 가치에 나를 맡기기 위하여 학생의 본분이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학문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시간대에 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의 케익도 나만 먹기 힘들 때가 많으므로 수업이 끝난 직후부터 3시간 동안에는 공부와 같은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 씁쓸한 맛을 내는 '공부' 케익은 너무 써서 일정량만 먹지만 매일 꼭 먹는다. 운동과 휴식도 마찬가지다. 매주 3회 운동하고 여러 가지 영양제를 섭취하는데, 이 일은 반드시 규칙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므로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는 저녁 9시에 배정해 놓았다.


  대학에 오고 나서 으레 만나게 되는 수많은 정기모임과 뒷풀이와 MT는 나 스스로의 계획만으로 이루어진 삶을 힘들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런데 단순히 타인의 의지가 나의 계획에 간섭하는 것에 화를 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타인을 존중하는 배려심을 발휘하는 동시에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나만의 계획을 단순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주 어느 요일 몇시에 정기적으로 하는 일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두 계획해 놓았는데, 이것이 현실성을 갖지 못하게 되면서 차츰 융통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약속을 불문하고 모든 약속은 아무리 늦게 해도 약속 날짜 5일 전에 하게 되기 마련이어서, 나는 약속을 하는 순간까지 자유롭게 남겨두었던 시간들을 그때 되어서 정리해 나가면 된다. 갑작스런 약속이 찾아온다면 그 약속은 단호하게 거절해도 된다. 약속을 그렇게 늦게 한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사람들과 만나는 일' 케익은 우정과 사랑을 담고 있는 매우 달콤한 케익 조각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 내가 하루에 꼭 먹기로 결심한 케익 조각들을 못 먹게 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술은 과하면 안 된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가치가 꼭 약속을 통한 행사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중에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은 생각해보면 참 많다. 마주치면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이라도 대화를 꼭 하기를 바란다. 특히 문자메시지의 경우는 잘게 쪼개진 시간에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일이다. 작은 아이스크림 숟가락으로 케익을 떠먹는 정도지만 하루 중에 아예 '우정과 사랑' 케익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하나만 더 말하고 싶은데, 사랑이냐 우정이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내가 주도해서 우정과 사랑에 해당하는 케익을 하루에 일정량 항상 준비해놓고 있는 이상 그 고민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여자친구들을 만난다고 해서 내가 우정보다 사랑을 중요시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언제나 '언젠가는 끝날 가능성이 있는' 사랑보다는 '영원한' 우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정을 확인하고 쌓아갈 때는 학교나 바깥에서 친구들과 만나거나 혹은 전화나 문자 등으로 이야기할 때뿐이다. 즉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자신의 하루 중 일정량 준비해 놓고 그 시간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만들거나 나만의 시간으로 채우지만 않는다면 나는 충분히 우정을 지키면서 사랑까지도 성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케익을 잘 먹는 법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여러 가치들이 서로 간섭하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 케익 안에 스며들도록 하면 되고, 그 중에서 매일 반드시 먹어야 할 케익을 따로 잘라놓으면 된다. 다채로운 가치를 추구하여도 우리 대학생들은 시간에 쪼들리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다채로운 가치의 추구는 잡다한 관심사를 만드는 일과 전혀 다르고 이 둘을 헷갈려하면 안 된다. 인생을 조금 더 풍부하게 보내고 싶고 성공하고 싶다면 적은 시간에 많은 가치를 얻어내려 노력하고 자기가 감당할 만큼의 약속만 잡고 앞서 말한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는 시간 분배를 계획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수많은 위치 중에서도 대학생의 위치에 선 사람의 경우에는 골라 먹을 수 있는 케익의 맛이 가장 다양하고 풍부해서 다른 때보다 훨씬 신중한 가치 선택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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