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11.27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2. 2016.11.23 도쿄 여행 단상
  3. 2016.11.07 양철통 속의 보석 2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At Day's Close: Night in Times Past) / 로저 에커치 지음 /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고대 그리스의 의식에는 밤을 새워 벌어지던 판키데스라는 축제가 있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치금지법으로 귀족 계급에게만 비단이나 공단 옷을 허용했다.


정신이 돌다 라는 단어로 moonstruck 이라는 단어가 있다.


영국 서부에서는 밤에 도깨비불 때문에 생기는 사고를 가리켜 '픽시 레드' (Pixy led, '픽시가 이끈' 사고라는 의미)라 했다.


술을 진탕 마시고 구덩이나 물이나 낭떠러지에 빠지거나 기절하거나 코를 너무 골아 미친개로 오인되어 총에 맞아 죽거나 하는 사고사를 컨셉으로 한 바, 즉 바 인테리어를 낭떠러지나 계곡이나 사냥총 등을 이용해서 하면 어떨까.


1720년 프랑스 오를레앙도 형편없는 하수 시설 때문에 어떤 길은 늪지로 바뀌었다.


프랑스에는 '파리의 흙처럼 더럽다' 는 말이 있다.


도시의 길거리에 등을 밝히고 다니는 사람들은 linkboys 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랜턴 운반자라는 의미로 porte-flambeaux 또는 falot 라고 불렀다.


런던에서 횃불꾼은 길거리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나쁜 평판을 얻었다. 영국과 달리 구체제 말의 파리에서는 횃불꾼들이 정치적 첩자로 악명 높았다.


덴마크에서는 집에 침입한 도둑이 동전 몇 개를 범행 현장에 놔두면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관리들은 시체를 건지기 위해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걸어두기도 했다.


개인적 명예에 대한 남성들의 숭배가 덜 확고한 영국이나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개인적 복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층 계급 내의 사회적 경쟁은 도박, 경마, 사냥과 같은 다른 분출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1666년 9월 2일 이른 아침 빵집에서 발생한 런던 대화재는 아직도 인류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고 있다. 동풍의 부채질을 받은 불은 나흘에 걸쳐 런던의 5분의 4를 태웠다.


미국에서는 1720년대 초 보스턴과 20년 뒤 뉴욕의 예에서 보듯 불만을 가진 노예들이 방화를 저질렀다.


1696년 스위스의 한 목사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해가 지는 저녁에 가축은 외양간으로 돌아오고, 숲의 새들도 조용해진다. 인간들만이 어리석게 자연과 일반적 질서를 거슬러 행동한다."


근대 초 전반에 걸쳐 밤이라는 위험한 영역은 교회와 국가의 감시를 벗어나 있었다. 유럽의 공동체들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행정 제도와 종교 제도의 사형대는 밤에는 잠이 들었다.


중세 이후에야 도시의 통행금지가 약간 느슨해져 오후 8시가 아닌 9시나 10시로 바뀌었고, 그것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기준 시간이 되었다.


베네치아에서 이방인은 치안판사의 허락 없이 하룻밤 이상 머물 수 없었다.


평판이 좋은 남자들도 어두워진 뒤에는 제약을 받았다. 예컨대 카탈루냐에서는 네 명 이상의 남자가 함께 걸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는 1702년의 법령에 의해 귀족들이 총기를 갖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하인들도 지팡이나 몽둥이를 빼앗겼다.


도시에서는 무기를 소지하는 것 외에도 복면과 가면을 포함하여 밤에 변장하는 것도 금지했다.


1415년 런던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법 조항은 만성절(All Hallow, 11월 1일) 전야부터 성촉절(Candlemas, 2월 2일) 까지 매일 밤마다 불을 밝히도록 한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1461년 루이 11세(1423-1483)의 명령에 따라 대로에 접하고 있는 집의 창문에 랜턴을 걸도록 했다.


1650년 이전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어떤 도시도 공금을 들여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파리(1667), 암스테르담(1669), 베를린(1682), 런던(1683), 비인(1688) 등을 필두로 1700년에 이르면 훨씬 더 많은 도시들이 길거리를 밝혔다.

 -> 한국, 중국, 일본은 거리 조명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했는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동양의 문화는 과거로부터 왔는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야경대원들은 '새벽 별'(morgenstern)이라는 이름의 못 박은 철퇴로 무장했다.


야경대원이 순찰중에 해야 할 또다른 일은 집주인이 문을 잠갔는지 점검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훈련받은 경찰의 창설이 어려웠다. 경찰도 상비군처럼 독재적인 통제권하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야경대원들은 '야경'이라는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화려한 옷깃이 달린 비단옷을 입고 허세를 부리는 수비대가 아니었다.


파리에서는 야경대원을 조롱하여 어설픈 작자(savetiers)나 '평발'(tristes-à-pattes)이라 불렀다.


사실상 산업혁명이 있기 전까지 저녁 시간은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모두 법의 감시를 벗어나 있었다. 카르보니에의 우아한 말로 표현하자면, '법의 공백'(vide de droit)이었다.


밤에 작성한 계약, 서약, 유언은 모두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시인 에드워드 영은 "밤에는 무신론자도 신을 반쯤은 믿는다"고 단언했다.


한 독일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불이 친구를 만들어준다고 한다. 불을 지피느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기 때문이다."


영국 전역에서 즐겨 행해진 놀이는 '내가 촛불을 들고 거기 갈 수 있을까?' 였다.


재무장관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러 마차를 타고 가던 조너선 스위프트는 "달이 빛나 우리 마차는 전복될 위험이 없었다"고 말했다. 달이 없으면 밤의 향락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1792년 노퍽의 낸시 우드퍼드는 이웃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달이 뜨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집으로 저녁 먹으러 오지 않겠다고 했다."


영국 일부 지역에서는 해가 진 뒤 처음 뜨는 별인 '저녁 별'(Vesper, 실지로는 금성)을 '목동의 램프'라고 불렀다.


고요한 밤에는 모든 소음이 더 크게 울려퍼졌다.


데카르트는 "밤에 등불 없이 험한 길을 가본 경험이 있다면, 지팡이를 쓰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것" 이라고 썼다. "이 지팡이를 사용함으로써 주위에 있는 여러 물체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나무인지 돌인지 모래인지 물인지 풀인지 진흙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근대 초 영국 가정에서도 밤에 갖가지 시간대가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시간대는 일몰, 문 닫을 때, 촛불 켤 때, 잠잘 때, 자정, 한밤중, 닭 우는 때, 동이 틀 때로 이루어졌다.


자정부터 오전 3시 사이를 고대 로마인들은 인템페스타(intempesta), 즉 시간이 없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근대 초의 자료를 보면 영국 북부에서 밤에 휘파람을 부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속죄를 위하여" 자기 집 둘레를 세 바퀴 돌아야 했다.


1602년에 영국을 방문한 한 독일인은 "영국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이웃집을 철저하게 감시하겠다는 서약에 묶여 있다"고 평했다. 도시에서 낮에 커튼을 치면 확실히 의심을 샀다. 뉴잉글랜드 한 이주민은 이웃집에 커튼이 쳐지면 "창녀 커튼"이라고 불렀다.


영국의 직조공들은 의류 산업의 번창에 부응하여 겨울철에도 때로는 밤 10시까지 직기 앞에 앉아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리옹의 남자 직조공은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했고, 비단 공장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단사, 제화공, 모자 제조업자, 염색공 등이 오랜 시간을 일했다. 스코틀랜드에는 "시민이 잠드는 시간이 제화공의 저녁식사 시간" 이라는 속담이 있었다.


궁핍한 여인들은 집에서, 혹은 더 흔하게는 남의 집에 세탁부로 가서 빨래를 해주며 살림을 꾸렸다. 과부 메리 스토워는 "달빛이 아주 환한 밤" 새벽 2시에 리즈에 있는 어느 집에 가서 빨래를 했다. 런던의 앤 팀스는 "생계를 위해 11시부터 12시까지 밤늦은 시간에 빨래한다"고 말했다.


1퍼킨=40리터, 1배럴=4퍼킨=160리터


많은 사람이 지루한 일을 이웃이나 가족과 함께하며 만족스러워했던 것은 당연하다. 때로 그들의 동지애는 술로 굳건해졌다. 더 중요하게는, 밤은 즐거움과 유희를 억압하는 수많은 규칙과 의무, 낮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 무엇보다 밤은 정신의 한 상태였다. 친숙한 얼굴과 주고받는 도움 속에서 형식적인 겉치레는 물론 두려움과 모멸의 감정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웃고 일하다보면 어색함이나 거리낌 같은 감정도 물러났다. 웨일스 속담에 아침의 '존'이 밤에는 친근한 '잭'이 된다고 했다. 같이 일하며 횃불이나 램프를 같이 써서 소중한 연료를 아낄 수 있다는 것도 한 가지 이점이었다. 남녀가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해 훈훈한 화롯가에 둘러앉았다. 일을 완수하는 것 이상으로,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기를 나누는 일이 꼭 필요했다. 그렇게 침침하고 비좁은 상황에서 밤에는 친밀감과 동료 의식이 깊어졌다. 영국에는 "밤에 나눈 말은 아침의 말과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여러 아낙네들이 물레와 실 감는 막대기를 들고 이웃집에 모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그런 목적을 위해 겨울철마다 '작은 쉼터'(écreignes)라는 임시 오두막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몇십 년 동안 스포츠 경기나 종교 축제 같은 전통적인 대중 여흥이 줄어들면서 술집의 인기가 높아졌다.


'물의 시인' 존 테일러는 술을 "벌거벗은 사람의 가장 따뜻한 옷"이라고 했다.


술집에서는 성적 만남도 이루어졌다. 얀 스테인(Jan Steen),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Adriaen van Ostade) 등 북유럽의 화가들이 묘사했듯, 이 붐비고 침침한 곳에서 남자와 여자는 술을 마시고 구애하고 수작을 떨었다. 1628년 한 영국의 비판자는 성적 희롱질을 막기 위해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녀가 근처의 헛간이나 변소에서 섹스를 했음을 폭로하는 재판 기록도 있다. 날씨가 좋으면 근방의 어두운 들판도 이들에게 좋은 장소였고, 인근 교회 묘지도 섹스 장소로 이용되었다. 결국 술집은 가정생활의 대체물이었다.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더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던 반면, 북유럽과 중앙 유럽에서는 성관계에 대해 더 관용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애정에 탐닉할 수 없었다.


로마에서 모든 계급의 연인들은 랜턴을 든 행인이 다가오면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불을 돌려요"(Volti la luce)라고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실잣기 모임은 긴 겨울에 함께 즐기고 구애를 하기 위한 더 일반적인 자리였다. .. 이런 밤샘 모임에서 그녀들에게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는 멋진 남자들을 만나거나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이런 모임에서 결혼이 많이 성사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여성들만 모이는 모임도 때로 젊은 남자들의 참석을 허용했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생겨난 '번들링'(bundling)이라는 관습은, 이러한 열정과 그 열정을 통제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번들링은 연인들이 여자 부모의 집에서 섹스는 하지 않고 밤을 새우는 관습이었다. 번들링은 구혼의 중간 단계로, 그에 앞서 함께 산책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구애 단계(wooing)가 있었다. 구애 단계에서 서로 애정을 확인해야 젊은 남녀는 번들링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 번들링은 네덜란드 일부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에 퍼져 있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그것을 '담소하기'(queesting)라고 불렀다. 이러한 밤의 구애는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성행했다. 사실 독일 농촌의 한 목사는 심방 보고서에서 소녀의 침실의 '불빛을 찾아가는 것'(zu licht gehen)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밤에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자유라고 간주되었다"고 기록했다. 17세기 사부아의 한 주민은 '알베르주망'(albergement)이라는 관습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젊은 농부들이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자들과 함께 밤늦도록 시간을 보내다가, 집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침대를 같이 쓰자고 요청한다." 그러면 보통 "여자들은 거절하지 않는다."


종교 당국의 주기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번들링은 유럽 일부 지역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18세기에는 성서를 개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신교 운동인 경건주의(Pietism)가 전파되면서, 많은 지역에서 문맹률이 급격히 낮아졌다.


폴란드에서는 "절제란 낮을 위한 것, 저녁과 밤에는 즐거워야지"라는 노래가 불렸다.


이사크 드 뱅스라드의 <밤의 발레>(Le Ballet de la Nuit, 1653)만큼 귀족들의 밤에 대한 친밀감을 열정적으로 표현한 찬가는 없다. 루이 14세를 기리기 위해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뱅스라드의 초기 발레 중에서도 가장 호사스럽다. 화려한 의상과 스펙터클한 무대가 어우러진 바로크의 장관 속에서 젊은 왕이 직접 몇몇 배역을 맡았다. 아주 적절하게도, 최후의 막에서 왕은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나와 떠오르는 태양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거지와 도둑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밤의 발레>는 천국이라는 정교한 배경에 신성이 가득한, 밤 생활의 초월적 모습을 제시했다. 여러 차례 공연된 이 발레는 궁정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18세기 초에는 런던의 래닐러(Ranelagh)와 복스홀(Vauxhall)같이 조명 장식이 있는 유원지를 비롯하여, 우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 크게 늘었다.


격식을 차리는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가면무도회는 근대 초 궁정의 억압적인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였다. ->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가면무도회를 하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100명 이상 모인 곳에서.


가면무도회장은 부도덕, 불경, 음란 및 모든 종류의 죄악을 저지를 기회를 파는 상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가장 타락한 창녀와 가장 방탕한 난봉꾼이나 사기꾼이 단돈 27실링에 최고의 귀족이나 귀부인들과 어울릴 특권을 산다.


비행을 저지르는 귀족들의 행동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회에 순응하고 위선을 행하는 것을 경멸하는 강렬한 개인주의를 대변했다.


1599년 런던의 극작가 조지 채프먼은 "이 도시에 사는 수백의 귀부인들은 밤에는 한량들 사이에서 춤추고 환락에 빠져 있다가, 아침에는 마치 새로 세례받은 듯 정숙한 여성이 되어 남편의 침대로 들어간다"고 썼다.


몽테스키외는 아침에 대해 "때로는 남편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 아내의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라고 했다.


"희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Nec spe, nec metu


밤은 사회적 풍경에 혁명을 일으켰다. 어둠이 권력자들을 더 평민적으로 만들었다면, 수많은 약자들은 더 강하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제임스 2세 지지파'(Jacobites)와 같은 정치적 국외자들이 밤에 작당했을 뿐 아니라 불안이 고조된 시절에서는 경쟁 파벌들이 어둠을 틈타 선동적인 전단을 돌렸다. 1688~1689년의 격렬한 명예혁명 시기에 런던 길거리는 아침마다 전단지로 뒤덮여 있었다. 몇 년 뒤 하노버 왕조 계승 위기 시에 쿠퍼 백작부인 메리는 이렇게 말했다. "비방을 늘어놓는 팸플릿이 뿌려지지 않고 지나가는 밤이 없다."


유럽 전역에서 견습공 제도는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자 청소년을 사회에 적응시키는 대중적 수단이었다. 낮에 그들은 주인의 지배 아래 있다가 밤이면 벗어났다. '밖에 눕기'(lying-out)라는 말은 종종 집안의 통행금지 시간을 무시하고 밤시간 대부분을 집밖에서 보내는 견습공들에게 쓰는 말이었다.


버지니아를 여행했던 한 사람은 보통 노예들이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쉬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집을 나와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6~7마일을 걸어 흑인들이 춤추는 장소로 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놀랄 정도로 경쾌하게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는 기록을 남겼다. -> 그러한 장소에서 마케팅을 한다면 효과가 크지 않을까.


시체 도굴꾼을 영어로 resurrection man이라고 한다.


런던에서는 증권 거래소에 아이들이 많이 버려녔다. 파리의 어머니들은 버리는 아이들에게 성별과 생일과 이름을 적은 꼬리표를 붙였다.


영국 서부와 웨일즈의 불법 거주자들은 더 영구적인 거주권을 주장했다. 기원이 불분명한 어느 지역 관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카반 우노스'(caban unnos)라는 진흙 오두막을 하룻밤 사이에 황무지나 공유지에 지으면 주거를 허용했다. 그 작업은 해가 지고 나서부터 뜨기 전까지 완성되어야 했고, 친구나 가족이 도와주는 것도 허용되었다.


경제적 빈곤이 밤의 무법을 낳았다. 토비아스 스몰렛은 "모든 평민은 도둑이고 거지이며, 나는 극도로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다고 믿는다"고 쓴 바 있다. 범죄는 긍지와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즉, 집을 늑대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범죄를 낳았던 것이다. 가난한 선생 존 캐넌은 "어떤 가난한 악마에게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낮에 위축되었던 것을 밤에 만회하는 도둑질은 견습공, 하인, 노예로 산다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 손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그럼 도둑질을 막으러면 밤에 심리적으로 풍족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즉 회식과 클럽.


밤의 조직 대부분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으로서, 내부에 계급이 있는 것도, 자체의 행사를 거행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길드와 달리 확립된 위계질서도 통일된 회원 자격도 확고한 행동 지침도 없었다. 그들이 개인적 자율과 자기 확신이라는 가치를 강조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회원들은 우정을 나눴다. 소집단으로 떠돌아다니던 부랑아들은 서로를 '형제' 또는 '친구'라고 불렀으며, 어떤 자들은 동료를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영혼에 걸고" 맹세했다.


일부 젊은이들 집단이 공동의 도덕을 침해한 바람피우는 남녀, 폭력적인 남편 등을 벌함으로써 사회 통제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밤은 누비던 프랑스의 '샤리바리'(charivari), 이탈리아의 '마티나타'(mattinata), 영국의 '스키밍턴 라이드'(skimmington ride)는 도덕을 어긴 자들에게 야유와 비난을 쏟았고 때로는 육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은 젊은이들 스스로 언젠가 해야 할 결혼의 성스러움을 재확인시켜주었다. 같은 이유로 미혼남들은 자기 지역 처녀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경쟁 지역 젊은이들과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견습공들은 무리를 지어 매춘굴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찰스 2세는 그 소식을 듣고 못 믿겠다는 듯이 "그럼 그들은 왜 거기를 가나?"라고 물었다.


영국 농촌에서는 한 해 추수가 끝난 뒤 농장주들이 일꾼들을 불러 저녁에 잔치를 베푸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러한 '추수 만찬'은 음식과 술과 동료애를 관대하게 베푸는 것으로 유명했다. 헨리 번에 따르면 "이 만찬에서는 하인과 주인이 똑같으며, 모든 것이 평등한 자유에 따라 행해진다." 그러나 물론 이런 행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시적인 휴식일 뿐,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해야 함을 예고했다.


사육제 후에는 엄격한 사순절 기간이 뒤따랐다.



(계속)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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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단상

연구/일본 2016. 11. 23. 22:47
대학교 3, 4학년 때의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아 도쿄를 다시 찾았다. 친구들과 만나서 한 이야기들 외의 혼자 다니면서 얻은 여러 가지 작은 단상들을 잊지 않기 위해 써둔다.

피치항공, 하네다 공항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온 프랑스와 독일 대학생들이 3박 4일로 인천을 출발해 도쿄로 가는 여행 일정을 짜고 같은 대학교끼리, 혹은 다른 대학교와 같이 모여서 많이 가는 모습이었다. 완전 파리식의 빠른 속도의 프랑스어를 너무나도 오랜만에 접해서 거의 들리지 않아 절망했다는..
 그리고 스튜어디스는 갈 때도 올 때도 전원 일본인이었는데, 키가 작아서 기내수하물 수납 칸의 덮개를 닫기 위해 통로측 좌석의 옆에 붙은 발판을 딛고 올라가서 닫는 모습이 뭔가 귀여웠다. 한국 항공사는 예전만 해도 채용 규정에 키 몇cm 이상이라는 제한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없어진 걸로 안다.
 비행기를 타면 안에 배경음악을 무슨 경쾌한 비트의 남자 가수 노래로 한곡반복으로 틀어주는데 그것도 귀여웠다. 찾아보니 ケツメイシ 케츠메이시 라는 가수다. (http://utaten.com/news/index/8097)
 하네다 공항에서는 한중일 삼국 국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처음 건네는 말이 항상 일본어였다. 우선 ‘안녕하세요.’ ‘다음 손님 오세요.’ 는 일본어로 한다. 그 다음에 승객이 일본어를 하면 쭉 일본어로 말하고, 영어를 하면 쭉 영어로 말한다. 일본어를 하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승객에게는 긍정적인 내용과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인 내용은 일본어로 이야기해주고, 부정적인 내용(무엇은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무엇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어떻게 하셔야 됩니다 등)이나 필수적인 고지는 영어로 이야기해준다. 
 
남자 때를 밀어주는 아줌마

 새벽 3시에 리무진버스가 아사쿠사의 공중목욕탕에 도착했다. 내가 간 곳은 8층짜리 쇼핑몰 건물의 맨 위 2층을 이용하는 한국의 찜질방과 같은 시스템의 장소였다. 마침 때를 밀어주는 코스의 입장권이 있어서 그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다. 3시 반부터 1시간 때밀이로 카운터에서 예약을 했고 직원은 가지고 있는 시간표에 자와 연필을 사용하여 내 이름을 빈칸에 적어넣었다. 때밀이를 하는 곳은 남탕으로 들어간 다음 그 안에 있는 방이었다.
 한국과 같이 샤워를 하고 탕에서 몸을 불린 뒤 때밀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데 뭔가 한국과 달리 불투명 처리를 한 유리창이 있는 방이다 보니 자연스레 제공된 옷을 입고 들어갔다. 이때까지는 안에 아줌마가 계시다고 알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자 아줌마께서 계셔서 나는 흠칫 놀랐으나 ‘저, 3시 반에 예약한 사람입니다만’ 이라고 일본어로 말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는 ‘혹시 한국분이세요?’ 라고 한국어로 답해주셨다. 카운터에서는 아무런 설명을 못 받았는데 알고 보니 때를 밀어주시는 분은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였다. 그래서 불투명 처리가 된 유리창이 있었구나, 생각하고 옆의 문 앞의 표지판을 보니 개방 금지 (열지 마시오) 라고 써있었다.
 부산 억양을 쓰시는 아줌마께서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파트타임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중요한 부분만 수건으로 가리고 나머지는 알몸인, 게다가 테이블 3개 중 방 안에 나와 아줌마만 있는 경험이 처음 1분 정도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웠지만 이내 내가 필요한 서비스만 받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줌마도 사실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20대 남자가 여기 오는 건 드물지만 40-50대 아저씨들은 전 과정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방문한다고 설명해주셨다.

아카사카의 호텔

 처음에 호텔을 예약할 때는 단순히 서울의 종로 느낌의 장소를 찾고 싶어서 2년 전 호텔인 한조몬에서 가까운 아카사카를 선택했다. 이곳이 한조몬보다는 조금 더 번화가인 것 같아서 예약했다. 그 이유뿐이었는데, 실제로 도착해 보니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 눈에 보였다. 신오오쿠보만 도쿄 내의 한인 타운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이전에 고급 한식당이 종류별로 들어서 있던 곳이 아카사카라고 한다. 오래 거주한 개인사업자처럼 보이는 부동산 사무소, 법무 사무소, 네일아트 전문점, 마사지 전문점 등도 함께 위치해 있었다. 대학생과는 다른 성숙한 어른의 정서가 물씬 풍겨서 좋았다.

 내가 머물던 Centurion Hotel Residential 정문을 지나는 길의 이름은 Esplanade Akasaka. 프랑스를 그리워하는 동양인들의 정서는 내게 참 가깝고 친근하다. 아르누보 양식을 약간 따온 듯한 가로등의 디자인과 같이 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서래마을의 주된 도로도 이곳처럼 폭이 좁고 아스팔트 대신 돌길이었다면 훨씬 운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TechCrunch Tokyo 2016

 한국에서도 하는 행사라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지만, 하나 한국과의 차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부동산 건설업체의 부스’ 다. 도큐부동산 이라는 회사인데, 이 회사는 도쿄 내의 사설 철도를 운영하면서 철도와 역사, 그리고 역사 주변의 빌딩 건축을 담당한다. 한국도 코레일의 자산개발사업 부문이 있으니 비슷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도큐부동산이 부스에서 보여준 조감도 영상은 젊은 감성의 원대한 포부를 담고 있었다. 시부야 히카리에를 필두로 시부야 근처의 비슷한 느낌의 고층빌딩을 4개 더 짓고, 그 모두를 주상복합 건물로 활용하고, 시부야 역과 지하로 연결하고, 그리고 스타트업을 위해 작은 사무실 형태로 분양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시부야 109 (동대문 밀리오레 같은 빌딩) 쇼핑몰 건물도 도큐부동산이 지은 건물이라 하였고, 소개 영상에 대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제시대부터 이 회사는 시부야를 거점으로 하여 건설 사업을 진행해 왔다. 자사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한다.

호우세키바코 宝石箱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를 거쳐서 오카다 유키코, 키쿠치 모모코, 모리타카 치사토 등의 음악을 들어오며 아, 자드 이전에 이런 음악 세계가 있었구나 하고 기뻐하던 나는 2013년 드라마 아마짱 의 하루코 (주인공인 아키 의 어머니) 의 고향 집 2층 다락방, 혹은 하루코가 20대 초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도쿄 안의 아이돌 카페와 같은 곳이 있나 찾아보았다. 아마짱 드라마 안의 아이돌 카페와 같은 모양의 간판을 쓰는 동명의 카페가 있었으나 내부가 별로여서 더 찾아본 결과 시내에서 조금 멀지만 가장 풍부한 물건 진열로 분위기를 낸 곳을 찾았다. 세타가야구 치토세카라스야마 千歳烏山 라고 하는 생소한 주거지역에 덜렁 하나 있는 카페다. 
 이 카페의 이름은 ‘보석상자’ 이다. 하루코의 다락방과 같은 컨셉이다. (드라마 이후에 카페를 열었는지 못 물어봐서 트위터로 멘션을 해봐야겠다.) 시부야에서 1시간 걸려 도착한 뒤 안에 들어가니 아르바이트생인 점원 1명과 여자 손님 2명이 있었다. 내가 들어와 자리에 앉고 20분 뒤에 대학교 2학년으로 보이는 연애 초기처럼 보이는 학생 2명이 들어왔다. 안에는 80년대에 출판된 소설책과 만화책들이 약간 있고 지금도 월간 잡지 형태로 나오는 레트로 문화 잡지가 쌓여있었다. 

 나는 자주색 크림소다를 시켜서 마시면서 (크림소다가 얼음 위에 소다를 쏟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건지 이때 알았다) 책들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을 나중에 읽어보기 위해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배경음악은 한번은 여자 곡, 한번은 남자 곡으로 성별이 번갈아가면서 나왔는데 가끔씩 내가 아는 곡도 나와서 좋았다. 나중에 찾아볼 곡은 음성녹음으로 갈무리해두었다.
 계산하고 나오기 전에 점원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로 이곳에 나같은 뜨내기 관광객도 오냐고 물어보니까 근처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온다고 했다. 점원은 내가 유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둘째로 트위터에 가끔씩 일찍 가게를 닫는다는 트윗이 있어서 이번에도 조마조마하며 확인하고 왔다고 왜 가끔씩 일찍 가게를 닫냐고 물어보니까 아르바이트생이 자기 한명밖에 없어서 자기가 다른 일이 생기거나 아프면 가게를 닫는다고 한다. 오모테나시와는 다른 뭔가 쿨한 느낌의, 단골 해달라고 무언의 강렬한 추파를 던지는 듯한 카페의 아우라에 끌렸다.

게이오 대학 축제 三田際

 게이오 대학 친구들과 알고 지낸 지가 4년이 넘었으나 그들이 대동제를 모르듯 나도 그들의 대학 축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때가 겹친 만큼 직접 찾아가서 경험해보고 친구들을 축제 장소로 불러서 상징적인 장소에서의 재회를 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세 가지, 외부 주류 반입이 허용되지 않은 점과, 기업의 상업활동을 위한 판촉 부스가 없다는 점, 그리고 졸업생으로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축제를 보러 왔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가 한국 대동제와의 차이점으로 보인다. 집에 와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해보니 80년대에는 한국도 기업의 판촉 부스 없이 순수한 대학생들의 기획으로 축제 전체를 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80년대의 대학축제를 되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맛만 다셔본다.



 내가 갔던 날은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이었다. 행사 시간이 10시부터 18시라고 해서 나는 에이 설마, 18시 이후에도 뭔가 계속 뒷풀이 같은 게 있겠지 했는데 정말 18시 정각에 끝났다. 17시부터 시작한 ‘후야제’ (전야제가 있다면 후야제도 있다) 가 정확히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축제 집행위원장인 남자 대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희열의 절규를 하며 축제에 와준 재학생들, 졸업생들, 집행위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내가 있던 한국 대학교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여행 후

 잘 놀고 의미있는 만남을 갖고 집에 왔는데 후쿠시마 지진과 한일정보보호협정 두 가지에 가슴이 아프고 씁쓸하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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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3국의 노래방, 별실, 요정을 보면 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폐쇄적으로 만나는 숨기는 문화가 보인다. 영미권은 반대로 넓은 풀밭의 야외 좌석, 바닷가에서 즐기는 파티, 선상 회합, 동네 앞 펍과 같이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서로를 볼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콩고는 어떤가? 콩고는 동아시아 3국과 같이 겉으로는 좋은 것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레스토랑과 바를 숨기고 있다.

 겉보기에는 매우 허름하고 투박해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금으로 장식한 벽면, 외국의 멋진 장소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장식, 30년이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켜온 큼지막한 가구, 주인의 생활과 세월이 녹아있는 옷과 식기구가 가득하다. 간판도 어두운 밤에는 잘 안 보여서 찾기가 힘들다.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프랑스어권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곳의 간판은 형광등이 안에 들어간 한국식 네모 간판도 네온싸인도 아닌 나무 위에 페인트로 글씨를 쓴 간판이 대부분이다. 조명이 있어도 백열등이나 할로겐등 몇 개를 옆에 달아놓을 뿐이다.

 벽은 또 어찌나 높은지 기본으로 3m를 넘는다. 그 위에는 넘어오지 못하도록 철망, 전기선, 깨진 유리병 조각 등을 잔뜩 심어놓았다. 한 공간과 그와 이웃한 공간 사이에는 신용을 찾아볼 수 없다. 신용은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뿐 그 신용이 물질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도둑질에 관대한 문화는 그 반작용으로 도둑질이 쉽지 않은 물질적 환경을 만들었다. 대신 벽의 바깥쪽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폐허의 공간이지만, 그만큼 벽의 안쪽은 모든 것이 축적되는 공간이다.

 군부대같은 벽과 허름한 간판만 보면 가지는 선입견을 깨야만 킨샤사 구석구석의 좋은 곳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양철로 만든 커다란 문을 열고 보석상자를 열고 들어가면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세간에 떠벌리지 않았던 레스토랑과 바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안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안에 화려한 보석이 충분히 있으니 보석상자는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혹은 화려한 보석을 누구에게나 쉽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혹은 화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겉을 후줄근하게 방치해둔다.

 일본어에 ギャップ萌え(갭 모에)라는 말이 있다. 저 사람은 남성적일 것 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여성적인 면이 있다거나, 저 사람은 평소에는 투박해 보이는데 데이트를 할 때는 의외로 앞서가는 패션을 보여준다거나 할 때 겉모습의 선입견을 가끔씩 깨주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 갭 모에가 있다고 말한다. 킨샤사라는 도시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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