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의 기자들>은 1993년에 <기자들> 이라는 소설로 먼저 출판된 것을 고종석 작가가 21년만에 다시 손을 보아 재출간한 책이라 한다. 나 또한 프랑스 파리로 교환학생을 갔다온 경험이 있고 잠시나마 한인신문에서 기자 비슷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서 산 기억이 다시 난다. 하지만 2014년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정신이 없었고 7월 한달도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8월이 되어 나는 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시야가 탁 트이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2012년 8월의 파리를 생각나게 하는 듯한 요즘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기쁘다. 덮어두었던 앨범을 다시 꺼내 보는 기분. 이 분의 삶이 곧 나의 삶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그 시절을 되돌아보기만 하면, 내 가슴의 아련한 두근거림은 멈출 줄을 모른다. 유럽에서의 그 아홉 달 동안, 나는 충일감이라는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살로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말한 <유럽의 기자들> 재단이 위치한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루브르 거리 33번지를 실제로 찾아보았다. 나의 생활로 비추어봤을 때 여긴 그냥 옷가게와 은행이 많은 북적북적한 거리였는데 다시 찾아보니 간판이 달려있지 않은 폭이 좁은 건물이었다. 오오..

그리고 이 재단은 실제로 존재하는 재단이었다. 프랑스어로 하면 Syndicat National des Journalistes(SNJ). 공식 웹사이트도 있다.

 

 책 첫 장 부터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1993년의 제도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공보과의 기자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발신: <유럽의 기자들> 재단

내용: <유럽의 기자들> 1992-1993 프로그램에 관한 건

<유럽의 기자들>이 1992-1993 프로그램의 지원자들을 모집합니다. ... 참가 기자들은 유럽을 현지에서 직접 배우고, 유럽 각국 간, 또 유럽과 다른 지역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며, 유럽공동체와 다른 유럽 국가들의 형편을 취재하게 됩니다. 프로그램은 전문가들에 의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 세미나와 열흘 남짓 걸리는 취재 활동의 되풀이로 이뤄집니다. 참가 기자들은 그 세미나와 취재 활동을 통해, 잡지 유럽<EUROP>을 만들게 됩니다. 참가 지원자는 적어도 다섯 해 이상 신문, 잡지, 방송 등 언론 매체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야 하고, 프랑스어와 영어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지원서와 관련 서류들은 92년 1월 15일까지 파리에 도착해야 합니다. 자세한 문의는 프랑스어나 영어로 된 서신을 통해 해주십시오.


"며칠 전에 편집국장 앞으로 그 공한이 왔대. 오늘 편집회의에서 그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6년차 이상 기자로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회사에서 장인철 씨밖에 없는 것 같아서 내가 장인철 씨 얘길 꺼냈지. 잘 생각해 보고, 지원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이런 제도가 있었다니.. 물론 지금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래 내용은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점이다.

  • <유럽의 기자들> 단체도 스태프와 기자들이 서로 반말을 쓴다. Sciences Po의 학생회, 정당, 동아리 학생들도 모두 서로 반말을 썼다.
  • 그리고 책을 보면 기자들이 프랑스어보다 영어가 더 편했기 때문에, 세미나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프랑스어가 사용됐고, 일상생활에서의 잡담은 대개가 영어로 이뤄졌다고 한다. '이런 영어 환경 때문에 결국 내 프랑스어를 아주 어설픈 상태에 정지시킨 채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 하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 '칼 포퍼도 영어로 책을 썼잖아. 프랑스도 마찬가지지. 미국에서 인정을 해야,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니.' 여기에 한국이 빠질쏘냐.
  • '영어나 프랑스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경우, 동포와의 사적 통화는 대개 그 귀에 선 언어로 하게 되는데, 그 언어란 폴란드어, 덴마크어, 불가리아어, 스웨덴어, 베트남어, 체코어, 아이슬란드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헝가리어, 일본어, 한국어 들이다.' 책에서 언급하는 다음 문장에 중국어는 없었다. 그건 1993년이었기 때문이겠지.
  • '한 여자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한 여자에게 슬픔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슬픈 이법이다.' 벨기에 친구 귄터가 그가 좋아하는 포르투갈 여자 이사벨과 맺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웨덴 친구 잉그리드와 혼성 복식 탁구 대회 결승을 한 주인공 장인철은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져주었다. 잉그리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과 스웨덴은 전세계에서 탁구를 제일 잘 하는 나라 군에 속한다는 것을 앎과 더불어 남자들끼리의 멋진 우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공공연해지자 이자벨이 따돌림을 받았다는 점은 가슴 아프다. 모든 인간 사회는 똑같구나.
  • 80-90년대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정치 상황을 한국 현대사 공부하듯 설명해주는 작가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다. 한편으로 이런 내용을 공부하지 않고 파리로 간 내가 참 무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불가리아 기자 페치야에 대해 '그녀는 정약용과 김소월과 이기영과 김대중과 김지하에 대해, 나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라고 서술한 점과 관련, 불가리아에 관심이 더 생기기 시작했다. '불가리아가 컴퓨터 전문가로 넘쳐나는 나라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환기된다. 불가리아 대학생들이야말로 세계 제일의 컴퓨터 해커, 바이러스 프로그래머, 백신 프로그래머들인 것이다.' 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 헝가리와 불가리아는 많이 닮았다. 내게 먼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와준 교환학생 시절의 헝가리 남학생과 불가리아 여학생이 생각났다.
  • 장인철이 껄끄럽게 생각했던 폴란드인 로베르트 바르셀로비치에 대하여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폴란드인은 코페르니쿠스, 쇼팽, 퀴리 부인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상도 하지, 동유럽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동포들이란 대개 서유럽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하기야 그들이 서유럽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이름을 얻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 역학의 무서움!' 이라고 말했다. 나의 교환학생 시절에도 폴란드의 한 남자애는 나에게 매정하게 굴었다. '정 문화'가 통할 줄 알았는데 걔는 정을 경멸하였다. 그러면서도 독일은 또 싫어하고.. 정치 역학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한국 버전이라면 갑신정변~갑오개혁 시기의 일본 유학파 김옥균 유길준, 미국 유학파 서재필이 지금도 추앙받는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시간을 중시하는 독일과 공간을 중시하는 프랑스. 내게는 그것이 마치 왜 음악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대개 독일어 이름을 지녔고, 왜 미술사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쓰여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왜 파리가 그렇게 기하학적으로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녔고, 왜 베를린이 뭔가 어수선하고 투박한 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민족심리학적 이유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 장인철의 집에 화재가 나 어렸을 때부터 모아놓고 밑줄을 긋고 공부했던 책들이 불에 타 없어졌다. 축적한다는 것의 허망함을 맛보았다고는 할까, 라고 한다. 나도 축적하는 것보다는 나의 언어로 글을 써서 사방에 퍼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터넷과 클라우드 드라이브에 감사한다.
  • "'외국에도 독일인들이 있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데." "나 자신이 외국에 살고 있는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 독일인들은 외국인들이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아주 비싼 값을 치렀다. 이제는 충분하다. 더러운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장인철이 동베를린의 독일 기본법 제16조 외국인들의 자유 망명 신청 헌법 개정 반대 시위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석한 프랑스 파리 거주 독일인 학생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재특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도쿄에서 열려서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직장인이 휴가를 내고 도쿄까지 가서 위의 문장에서 나라 이름만 바꾸어서 말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았으나, 그런 시위가 일어날 만큼 현실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 '그러고 나서는 말투를 갑자기 튀투아망으로 바꿔 덧붙였다.' "아니, 일카(일로나 의 애칭)라고 불러줘. 더 다정하게." 아 여자는 다 똑같아 ^^ 한편 이전에 나는 내게 먼저 반말을 쓰던 여자 동생들에게 왜 충분히 잘해주지 못했는가. 후회 막심..
  • '내가 이 나이에, 동갑내기 외국여자와 결혼해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 국제적 연대는 얼마나 꼴불견일까?' 현실의 벽을 알고 외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외지를 떠난 건 나도 마찬가지..그래도 1993년과 2014년에 한국 사회의 시선은 많이 달라져있을 것으로 믿는다. 결혼 생활의 남녀 평등적 관행의 정착과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 때문이다. 이는 완전한 자유 결혼까지는 어렵다는 말인데, 즉 한국인 남자가 국제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 여자'와 결혼을 해야지, 한국인 남자가 아내를 따라 외국에 가는 수준으로까지는 인식이 개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 '그러고 보니 그랬다. 마르크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내가 사회주의의 선구자라고 쓴 독일인들이, 모두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대부분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제3공화국이 내건 갈등의 증폭 원인이구나. 아울러 책에서 소개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대역사박물관에 가고 싶어졌다. '나라 없던 때의 유대인이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적 구호에 매력을 느꼈을 만도 한데.'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낀 1920년대의 우리 조상들을 연상시키는 이 발언을 장인철은 일본인 동료 사부로와 이야기하고 있구나. 싸움 나겠네 하는 생각을 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역시나 했다. '그럼 너는 일본의 문부대신이 조선인을 욕하듯 유대인을 욕할 수 있어야 마음이 편하겠구나.'
  • 에리봉의 뒤메질 변호 에피소드를 들으며 든 생각이지만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있어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한 뛰어난 학자에 대한 변호가 곧 그의 반유대주의 혐의에 대한 반박으로 수렴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유대인들의 힘이었다. 그 유대인들의 힘은, 그 얼마 뒤 미테랑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페탱의 묘에 헌화했을 때 유대인 단체들이 보인 격렬한 반발과 미테랑의 뒤이은 굴복에서도 다시 한번 씁쓸히 감지됐다.' 유대를 한국으로 고치면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 헝가리 사람들도 성-이름, 년-월-일로 표기하고 민속음악에서 5음계를 쓴단다. 더 알고 싶어졌다. 아래 내용은 지난 학기때 적은 2014년 5월 8일 주한헝가리대사 특강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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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인철, 주잔나, 주잔나 아들 토마슈 셋이서 스위스 여행에 가서 살라미를 먹으면서 이야기한 구조(構造)의 비유, 그리고 둘이서 '서로를 좋아해 걱정'이라고 토마슈가 못 알아듣게 프랑스어로 말하는 장면. 베스트 신으로 추가. 토마슈가 "엄마는 아빠의 아내가 아녜요. 아빠도 엄마의 남편이 아니고." 에서 "응, 그걸 탈구조라고 한단다." 라는 대사에 웃음.
  • 자크 랑그(랑)의 행정과 선전의 결과로 모든 장르에 걸쳐 '센터' '연구소' '극장' '문서 보관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했다. 주변문화를 정리하여 재즈와 전자음악이 음악학교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왰다. (La Gaîté Lyrique와도 관련이 있었다!! 아래의 관련기사 Le Nouvel Observateur 국립어린이극장이래 귀엽다..) 어쨌든 내가 좋아하던 장소들이 이 분의 추진 의지 덕택임을 알게 되었다.
  • OBS0452_19730709_013.pdf
  • "프랑스인의 문맹률이 20퍼센트에 이르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런 통계가 있기는 하다." "교육부 장관을 겸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책임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예컨대 일본이나 한국처럼 문맹률 제로가 될 수는 없다." 자크 랑은 한국과 일본을 이렇게 언급했다. 소설 속에 인용한 실제 발언이다.
  • '사부로의 이 욕구불만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방법은 하나야. 네가 도쿄로 돌아가서 <아시아의 기자들> 재단을 만드는 거야. 그리고 그 첫 번째 프로그램 참가자로 앨릭스를 뽑는 거지. 그런 다음에 네가 앨릭스의 일본어 기사 데스크가 되어 걔 기사를 난도질하면 돼. 하루에 세 번씩 '네 기사에는 논리가 없어' 하구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야." 영어를 못하는 사부로가 자신의 영어 기사를 난도질하는 미국인 앨릭스 얘기를 하자 장인철이 우스갯소리로 조언한 내용. 아시아의 기자들 진짜 만들면 좋겠다. 요스케 같은 친구에게 말해봐야겠다. 하지만 뒷맛이 씁쓸했다. "문제는," 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사부로가 말했다. "<아시아의 기자들> 프로그램이 생긴다고 해도, 거기서 쓰이는 공식 언어가 백이면 백 영어가 될 거라는 데 있어."
  • '묘하게도 유럽의회 의원들 대부분에게는 매스컴이 연일 보도하고 있는 독일 정계와 사회의 우경화가 별로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판도라의 상자이든 아니든, 이 거대 독일과 프랑스 집권당 사이의 강력한 유대는 유럽을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해왔었다.' 지금의 동아시아와 판박이네.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집단적자위권은 완전 다른 이슈지. 그보다는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 '사마리텐 부근이 미도파 앞길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렇다, 나도 파리와 서울을 (그리고 도쿄를) 지하철 역별로 일대일 매칭을 하는 작업을 교환학생 때 했다. 완성하지는 못했다. 관심있는 분들은 다운받아서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지 가감없는 비판을 해주기를 바란다. 실제로 나는 나비고 카드 덕분에 1존의 모든 지하철역에 내려보는 등 메트로 오타쿠 짓을 했다. 몇몇 사람들은 시간 아까운 것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그 시간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젊고 가난할 때에만 의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젊고 가난할 때 끝내 놓았으니, 나중에 돈을 조금 더 벌고 여유로울 때 파리에 다시 오게 되면 교환학생 때 보지 못했던 것들만 골라서 봄으로써 파리에 대한 이해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름 계획적인 마인드로 친구들과 만나서 어느 카페를 가자고 하면 나는 안 가본 동네를 구글 지도로 찾은 뒤 '얘들아 13호선 타고 메트로 어디의 1번 출구에서 봐'라고 이야기해서 기어코 그곳에 가곤 했다.
  • 파리도쿄서울_작업중.xlsx
  • 338쪽부터 기자는 어때야 하는지, 르 몽드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한국 신문의 문제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니 기자가 되고 싶은 후배들은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 장인철이 스페인어 공부를 위해 1백 통이 넘는 펜팔 편지를 주고받았던 스페인의 수사나라는 여자가 있었다는 점은 내가 일본어 공부를 위해 여러 명의 일본 여자들과 페이스북과 라인 메신저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점과 겹친다. 하지만 장인철의 대화는 나의 대화보다 훨씬 고상하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고, 나는 초급 일본어를 배우기 위한 신변잡기식 토크를 나열할 뿐이었다. 아버지 세대를 따라갈 수 없어 더욱 그 세대가 존경스럽다. 나중에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이지만, 나의 '쿠소 니혼고'를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준 남녀를 가리지 않은 일본인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상처를 받았을지 모르는 두 명에게 미안하다고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 자기 동포에 대한 욕설, 욕설까지는 아니어도 경멸이 얼마나 주변인들에게 혐오감을 자아내는지를 로베르트와 장인철의 대화 회고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프랑스 문화에 대한 한없는 숭앙 역시 해당된다. 한때 나는 로베르트와 같은 이런 부정적 태도로 빠질 뻔하였는데 YKRF 리더십포럼을 하면서 한국의 정체성 살리기가 우선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그 뿌리를 자를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그 순간 로베르트한테서 내가 정말 역겨워하던 한국인들을 발견했던 것 같다. 한국 대학들의 불문학과, 프랑스 문화원, 프랑스 회사 같은 곳에서 이따금 할 수 없이 스치게 되는 그 역겨운 한국인들을. 천박한 친미주의를 고상한 친불주의로 바꾸고 싶어 하는 골 빈 한국인들을. 자랑스러운 레지옹도뇌르족들을. 그것이 관성의 힘일까? 그 빌어먹을 관성의 힘 탓에 나는 친구 하나를 잃었다.' 이 문장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책은 장인철이라는 한국인 기자를 중심으로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세계 각국에서 온 각국의 기자들을 한명씩 소개하고 그중 몇명과의 에피소드를 자기 이야기를 하듯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한다. 나처럼 전세계 여러 나라에 대해 조금씩 다양하게 잡다하게 아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에게 정말 제격인 여러 나라 맛보기용 책이다. 그리고 그게 남자의 시점이고 공간이 파리이기 때문에 내가 이끌린 것이기도 하다. 책을 비판하자면 기승전결이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보통 소설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보면 옴니버스 영화처럼 장과 장의 흐름이 끊어져있다는 점이다. 기사를 취재한 도시별로 장이 나누어져 있어서 자기 기자 경험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지 소설가의 상상력과 창의성은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할 소지가 있다. 허나 꽤나 문학적인 책을 별로 접해오지 않고 정보성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해온(그래서 사회과학을 선택한) 나로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았다.

책을 읽는 초반에는 '책을 다 읽은 다음 자기 전에는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을 다시 보고 자야겠다. 이 책과 이미지가 이어지기 때문에.....'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틀린 판단으로 밝혀졌다.

책을 읽는 중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게임에서 자물쇠를 해제한 보너스 스테이지에 들어간 느낌. 이 시점에서 취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내의 국내 대/공기업 취업을 이야기한 것이다.)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메인이 아닌 보너스 스테이지요, 오늘 내가 모처럼 내게 자유시간을 허락했기 때문에 자물쇠를 해제했다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프랑스에서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주프랑스한국문화원의 재정적 지원까지는 아니어도 번역 감수 등으로 일정 부분 기여를 받은 뒤 기관명을 삽입하고 프랑스에서 한국 관련 컨텐츠에 이 책을 추가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대학생들 중 유럽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우선 정외과 후배들에게 추천을 해야겠다.

밤새 책을 읽고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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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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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이제 그린카나 쏘카 등 카셰어링 서비스가 잘 정착한 듯합니다. 얼마 전 남산타워로 가는 버스를 친구랑 타고 가는데 옆에 하얀색 쏘카 레이가 지나가서 친구에게(미국인) '저게 지금 한국에서 운영하는 렌터카 서비스다. (앱을 켜고) 이런 식으로 예약해서 타는 거다.' 라고 설명해준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렌터카 서비스가 있습니다.NewsPicks(일본 친구가 알려준 IT와 경제 관련 뉴스 리더. 실제 관련 업계 직장인과 수백 건의 뉴스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듯한 이 앱 운영자들이 심도 있는 댓글을 올려 단순히 뉴스를 읽는 것 이상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에서 우연히 발견한 앱인데요, 제가 평소에 교통에 관심이 있고 또 관심깊게 보고 있는 큐슈 지역에서 탄생한 앱이라고 하니 여러분들께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서비스 이름은 veecl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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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네요. 각각 장단점이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후쿠오카 다카시마 소이치로 시장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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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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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은 가능하기 때문에 단일민족국가와 공통의 역사를 인지하면서 정치적 과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전협정 이래로 줄곧 논의된 통일인 만큼, 어느 쪽이 주도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통일 자체는 이제 남북한 모두가 동의하는 당위가 되었다. 하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주변국, 특히 현재 가장 대립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는 꼬인 중일관계의 갈등을 한국이 나서서 그들의 갈등적 이슈에 개입하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한반도 관련 이슈에 대해서만큼은 그 두 국가가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의 성공 여부의 분수령이 되는 이슈로서 중국에게는 주한미군 주둔, 일본에게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해 계속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했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유엔군, 즉 현재의 주한미군에 대한 중국의 입장이 상당히 전향적으로 선회했다는 점이 통일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중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주요 대상은 미국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반도 정책은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하위 틀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주둔에 관해서는 반기지는 않지만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현상 유지 차원에서 존중한다.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 김일성은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시기인 1994년 미군이 한국에만 주둔하지 말고 북한에도 주둔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1996년 이종혁 노동당 부부장은 미국 조지아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에서 주한미군이 남북한군 사이에 평화유지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주둔기간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라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조선일보」, 2001. 4. 17.)


     중국에게 한국은 매우 이중적 의미를 가진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은 중국 경제발전의 모델국가이자, 비중 있는 무역상대국이다. 지리적으로 인접국이며 문화적 동질성의 공유 때문에 정서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군사•안보 측면에서 한국은 냉전, 한국전쟁, 한미동맹 등 미국 변수와 북한 변수를 포함하는 부담스런 존재이다. 반면 북한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동맹국이며 전쟁을 같이 수행했던 동지애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경제위기와 북핵문제로 인해 동북아의 안보 위협을 가중시키는 등의 부담을 동시에 주는 상대이다. 북한은 많은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한 안보적 수단이자, 자국의 동북 지역 진흥을 위한 잠재적 자원 배후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한국과 북한 모두를 포용하고 싶어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적 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등 한반도에서의 갈등이 최소화되기를 희망한다.[각주:2]  또한 중국은 남북한과 외교관계를 모두 유지함으로써 현상 유지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 기조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반도 현상 상태가 급속히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각주:3]  한국의 언론인들은 중국이 한국과 북한에 동등한 관심을 가지고 동등한 협력적 조치를 취한다는 점을 줄곧 간과한다. 특히 한반도와의 관계 개선을 외교부에서 말했을 때 이를 한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축소 해석하거나, 한반도의 비핵화를 북한의 비핵화로 축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초보적인 국민들의 의식 개선은 이 부분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통일의 추진력으로 중국에게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중국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으로 한반도 내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이 개입하여 군사력을 소모할 유인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 후 전후 복구를 위해 중국에 대한 한국의 기존의 신규 투자가 끊길 것을 염려한다. 중국이 강조하는 것은 ‘평화’이다. 한중수교 공동성명에서도 중국은 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한중수교 공동성명),1992년 제5조.)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도 국가수반으로서는 최초로 “한반도 문제는 주변국의 이해와 협력 아래 남북한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면서, 한반도의 자주 평화 통일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힌 바 있다.[각주:4]  그런데 1992년의 한중수교 당시 중국이 취한 두 개의 한국 정책으로 중국은 북한과 소원해졌다. 당시 북한의 기근이 심화되고 1993년 3월 북한이 NPT를 탈퇴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원한 중국으로서는 북한과의 양국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끌고 나갈 추진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중국의 한반도 안보전략 기조에서 한중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 구축은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중국 방문시 발표된 한중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서 드러난다. 중국은 한중 양국이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김대중 정부 때 선언한 21세기 협력 동반적 관계보다 한 단계 높은 양국간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동의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정권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 통일 정책론을 보는 시각을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한미일 3국회의의 결과를 2003년 7월 한중 북경 정상회담에 전달한 일이었다. 아울러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고 나온 배경에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한 명분이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후로 명확해진 데 있다. 한국과는 경제적으로 긴밀해지는 반면 2003년 당시 중국은 미국과 협력하여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하고 안보리 결의안에 중국이 반대에서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각주:5]  중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상하는 통일 회의론자들이 근거로 언급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은 한반도의 통일이라기보다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일 영토 및 해양분쟁과 관련된 이슈로서, 안보 특히 한반도 38선 이남의 미군 배치에 대해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대치가 없다. 이는 한반도의 한국 주도의 통일을 중국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2003년 부시 정부 이래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중요성은 감소해 왔고, 주한미군이 제 2의 한국전쟁을 억지할 수 있다는 미국의 현실적 안보 위협도 사라졌으며, 오히려 주한미군의 보호와 타 아시아 지역에의 개입 준비를 위해 북한으로부터 더 먼 사정거리의 지역으로 후방 배치를 하는 등 한미동맹의 의미는 중국을 참여시키는 한반도 통일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 방식이나 과정이 남북한 합의에 의해 점진적으로 중국과 유사한 1국 2제의 형태가 되기를 희망한다. 과거의 중국은 일방에 의한 흡수통일 방식을 반대했으나 점차 현실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수용하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중국 고위 관료들이 한반도가 남한 주도로 통일돼야 하며, 이런 입장은 중국의 지도부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위키리크스』, 2010년 11월 30일.)[각주:6]  또한 중국은 남북한이 기존에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북한이 파기한 데 대해 내심 불만을 토로하였다. 중국은 항상 남북한 관계개선을 미북 관계개선보다 먼저 촉구하였으며 남북한이 이미 합의한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하기도 하였다.[각주:7]


     중국의 한반도 대치상태 해소와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에 대한 선호는 점진적인 관계 개선 방식이다. 이때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첫 단추인 주한미군 후방배치안에 대해 찬성하며, 미국이 조선인민군 후방배치라는 북한 측에 대한 보상(quid pro quo)을 제안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만족한다. 중국, 한국, 미국은 북한에게 비핵화 외에 특별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고 있지 않으며 이 상황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북한 간의 자주적인 합의형 통일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6자회담의 실패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및 유지, 그에 따른 남한의 핵무기 보유가 논의되는 상황이라면 중국과의 협력이 더욱 어려워진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한국 정부가 중국에 협력을 구해야 할 것은 이미 진행되는 경제적 협력이 아니라 탈북자 인도에 관한 협력이다. 국경지역 북한 탈북자를 정치적 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원하는 통일을 가장 빨리 이루어낼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탈북자가 반드시 한국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다민족을 통치하는 중국 중앙정부로서는 탈북자에 대한 시각이 한국과 다르다. 중국에게 탈북자는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티벳 지역이나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의 이민족과 같이 인식되기 때문에 한국과의 인식 차이가 중국으로 하여금 주저하게 하고 있다. 서독-헝가리-동독을 남한-중국-북한과 등치시켜 생각하는 것은 냉전 질서와 탈냉전 질서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했으므로 그릇된 방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헝가리와 같은 소련 눈치보기 혹은 공산권 붕괴에 대한 우려는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을 한국 정부는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사 이래 최고의 한중관계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이라도 막상 통일이라는 한국의 국익을 달성하고 나면 떠오르는 문제가 있다. 중국의 공공외교를 살펴보면, 통일한국의 민족주의적 영토 회복 움직임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를 사전 차단하려 할 수 있다. 중국은 통일 이후 조선족 자치 지역의 분리 독립 확산을 경계하고 있으며, 간도 지역의 고토 회복 운동 등의 부활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 고구려사 왜곡 작업을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역사 문제를 자국에게 유리하게 주장하는 외교적 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각주:8]  통일 이후 한국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주한미군이 아니라 중국과의 역사인식 차이에 따른 대립이다.


     일본의 경우는 한일관계가 건설적인 상태에서 일본이 지지한 대북정책을 보다 통일이 실제로 달성될 수 있도록 수정해도 한일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되게 하는 것과 전통적으로 유지된 비핵화에 대한 공감을 되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통일은 일본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발표된 한일정상 간의 공동성명에는 통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것은 양국 정상 간의 공동성명이 한일관계 발전에 초점이 두어졌다는 원인도 있으나 국민의 정부 이후 통일보다는 남북한 평화공존을 더 강조하는 통일정책을 한국 정부가 채택해 왔기 때문에 공동성명에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표현을 굳이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생각된다.[각주:9]  특히 주목할 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10월 일본 국회 연설에서 “한반도 통일보다는 먼저 남북한 간의 평화와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金大中•韓國大統領国会演説の要旨”『読売新聞』, 1998年 10月 9日.)고 언급하여 통일보다는 남북한 평화공존에 방점을 두는 통일관을 밝혔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2003~2008)의 통일외교는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일본 정부의 일정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2006년 4월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2006년 10월의 북한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북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서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고 나갔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각주:10]  반면 이명박 정부에서는 북한의 핵실험 및 천안함 폭침 사건 등으로 한일 간의 대북정책공조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한일군사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할 정도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필요성에 한일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각주:11]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 이후 한일 간에는 이산가족문제와 함께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동시에 언급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2012년 5월 이명박-노다 수상 간의 한일정상회담에서는 노다 수상이 납치문제에 관한 한국의 지지에 대해 감사를 표명하면서, 이산가족 재회문제를 포함한 인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계속 협력한다는 의지가 표명되었다. 이 정상회담은 한국은 북일 국교정상화를 지지하고, 일본은 남북협력 관계 및 통일을 환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한일 신시대 공동연구 보고서에서 등장한다. 즉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한일 양국이 지지하면서 나아가 남북한 통일도 일본이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외교가 가장 잘 표현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보고서에서 한일이 중국에 대해 통일을 지지하도록 희망한다고 밝힌 점에서 對일본 통일외교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각주:12]


     일본의 경우는 군사적 보통국가주의와 보수적 현실주의자들의 국제공헌론, 그리고 현재의 집단적 자위권 논의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입장과 결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군사적 보통국가주의를 한국이 묵인하는 대가가 필요하다. 오자와 이치로 일본 총리는 국제연합군에의 자위대 참가가 일본의 현행 헌법, 미일 안보조약, 유엔헌장의 틀 속에서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위대를 강화한다고 할지라도 양적인 확대가 아닌 질적인 확대를 지향하였다. 국제공헌에 군사적 역할을 인정하는 점에서 그의 생각은 기존의 보수주의자와 다르지만 국제연합에 자위대가 참가하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13]  외교적 국제정치력 신장을 주장하는 보통국가론은 즉각적으로 후나바시 요이치의 ‘지구시민파워’(global civilian power)나 다케무라 마사요시의 ‘작지만 빛나는 나라’와 같은 소프트 파워론을 등장시켰다.[각주:14]  지구시민파워론자들은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에 관해서는 일본은 원폭피해국가로서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며, 특히 북한, 중국에 대해서는 심각한 비판을 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일본의 미일안보동맹의 의존도를 줄이고 다자간 안보체제의 수집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며, 문민통제의 방위정책을 강화하여 비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는 군사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각주:15]


      일본의 재무장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는 등 일본 주변에서 전쟁에 돌입할 경우 자위대를 동원해 미국을 후방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북한은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중국 등 주변국과 함께 일본의 보통국화를 ‘군국주의 부활’, ‘재침 책동 노골화’로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일본의 재무장을 구실로 핵무기 보유를 역으로 합리화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각주:16]  미일안보동맹의 의존도를 줄임과 동시에 일본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내세워 일본 주도의 집단적 자위권을 확대하고 있는데, 사실 북한에게 이는 큰 위협이다. 한국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북한의 이익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지만, 주한미군에 의한 직접적 위협에 비해 북한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를 직접적으로 꺾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이 고려할 만한 선택지다.


     일본의 정권이 하토야마 총리의 민주당 정권으로 회귀할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에 반대되는 지역주의가 다시 대두할 것이다. 이때 한국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의 선결조건으로 한반도 통일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국력 차이와 관련없이 한반도 스스로 일방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한반도 통일 없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 통일을 지지해야 하고,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북한의 건설과 동북아 개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각주:17]  일본에 대한 한국의 견제는 중국에 대한 견제에 비해 더 강도 높게 이루어지는데 이는 미국의 입장과 같다. 조셉 나이 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는 최근 냉전종결 등의 전략환경의 변화와 함께 다자간 안보체제에 관한 미국의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독자적 노선을 다자간 안보의 틀 속에서 소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냉전 후 미국의 중대한 이익인 동아시아의 안정적 균형에 있어 위협세력은 현재 중국일 것이며, 장기적으로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중 연계일 것이다.[각주:18]  그러나 일중 연계는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결조건인 바, 미국의 양보를 구하는 것은 어떤 주변국도 할 수 없는 한국의 독자적인 과제가 된다.


     노무현 정부 때의 노력이나 이명박-노다 공동성명과 대칭되는 내용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공동성명에서 한중이 일본에 대해 통일을 지지하도록 희망하는 내용이 들어가거나 혹은 공동연구 보고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면 통일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을 레버리지로 활용하여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는 전략이다. 여기서 내용은 비핵화를 중심으로 할 것이다. 일본의 반핵운동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걸쳐 있었고, 이것이 한반도의 비핵화 이슈와 맞물려서 한국 정부가 일본을 의식하여 비핵화를 공고히 할 개연성을 높인다. 1993년 5월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노동1호 미사일 실험을 강행했을 때 일본은 미국과 함께 북한을 맹비난했고 김일성 정권은 더욱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 바 있다. 강경한 북한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정권을 막론하고 한결같았으나, 지금의 변수는 아베 정권의 보통국가화, 원자력발전소 재가동과 군사적 목적의 핵개발 의도이다. 북일국교정상화가 북한과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공고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도 중국 레버리지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동의를 얻는 일은 소극적인 외교 행위이지만,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일은 한국 주도의 적극적인 외교 행위이다. 통일연구원의 보고서는 2013년 일본 학자 20명을 대상으로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통일공공외교에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였고, ‘북한 개혁개방’이 1위로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그 뒤를 ‘북한의 국제사회 편입’과 ‘북한 비핵화’가 이었으며, ‘북한의 민주화’는 가장 낮은 4위로 나타났다.[각주:19]  중국의 경우도 북한의 개혁개방은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한반도 통일 단계의 초기 단계로 이상적이다. 한반도의 통일이 지나치게 남한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일부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한국을 독자적인 행위자로 상정하지 않고 강대국 사이에서 복수의 강대국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중견국으로 간주하여 통일 가능성을 바라보았다. 중국과 일본의 현재의 영토분쟁과 역사인식 갈등은 한반도 통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대립점이다. 하지만 양국이 언제까지나 대립만을 하고 있다면 통일은 반드시 과정 중에서 한쪽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한국은 반대하는 쪽의 편을 들면서 과정이 중지할 것이다. 과정을 중지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쪽도 반대하지 않는 조건을 형성해야 하며, 그 조건은 곧 주한미군과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양국의 굳건한 동의와 신뢰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핵화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일본과 모순적인 태도의 현재 아베 정권의 입장 변화는 한국이 취할 최우선 과제이다.


참고문헌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연구총서 03-07 (서울: 통일연구원, 2003).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서울: 통일연구원, 2012).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연구총서 03-08 (서울: 통일연구원, 2003).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13).


  1.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64. [본문으로]
  2. 위의 책, p. 65. [본문으로]
  3.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p. 7. [본문으로]
  4.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66. [본문으로]
  5.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p. 28. [본문으로]
  6.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67. [본문으로]
  7.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p. 26. [본문으로]
  8.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75. [본문으로]
  9.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 p. 154.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53. [본문으로]
  11. 위의 책, p. 186. [본문으로]
  12. 위의 책, p. 155. [본문으로]
  13.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p. 8. [본문으로]
  14. 위의 책, p. 11. [본문으로]
  15.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p. 12. [본문으로]
  16. 위의 책, p. 62. [본문으로]
  17.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 p. 163. [본문으로]
  18.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p. 15. [본문으로]
  19.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 p. 18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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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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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련 국가와의 국경분쟁의 역사로 보는 향후 중국과 인도·북한의 국경분쟁 가능성 연구

I. 서론

     냉전 당시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국가들 중 소련이나 베트남과 같이 명백하게 중국에 반대 입장을 취하며 공산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국가들과 달리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줄타기 외교를 실시한 국가들, 즉 북한,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몽골과 중국의 정치적 관계를 살펴보면 여러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69년 중국과 소련은 전바오 섬(러시아명 다만스키 섬)에서 영유권 쟁탈에 따른 국지전을 치르었고, 1979년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공산주의 국가들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과 비슷한 생각을 갖던 유럽 특히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공산권 국가들과도 전쟁이 일어남을 보고 경악하였다. 하지만 북한,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몽골과는 국경 획정을 목적으로 한 무력 충돌이 냉전 시기 이루어지지 않거나 있더라도 방어적으로 진행되었다. 1960년 1월 말, 중국은 영토 할양을 한 뒤 버마와 국경 협정을 체결했다.[각주:1]  3년 후, 몽골(1962년), 북한(1962년), 파키스탄(1963년), 아프가니스탄(1963년)과의 국경 협정이 뒤를 이었다. 왜 마오쩌둥의 강력한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가들에게 강경책으로 일관하는 중국 일방주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군사적 능력의 비교우위와 열위를 통해 1960년대 초 중국은 주변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결정하였으므로 현실주의적 국제질서 하의 중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당시 중국이 국제연합의 회원국이 아니었고, 지리적 특성 상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은 국가와 국경을 마주한 중국은 상대국의 군사력의 우위와 침략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먼저 상대국에게 협상과 조약 체결을 권할 수 없었다. 무역과 인적교류를 통한 국민의 의사에 대한 존중, 행위자의 다각화를 통한 위협 해소는 공산당과 군이 일체가 되고 인민이 당의 결정 사항에 복종하는 중국 국내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중국은 자국을 침략할 것으로 생각되는 주변국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다. 하지만 위협을 없애기 위한 동맹을 체결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단일 국가 차원에서 공격 형태로 사용하는 것이 추가적인 안보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일종의 낭비라고 생각했으며, 중국에게 낭비가 필요없는 대표적인 국가는 인도와 북한이었다. 정치학자 Taylor Fravel이 제안했듯이, 중국은 주변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내부적으로 약하면 국경 분쟁을 타협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각주:2]
     냉전 시기인 1959년의 중국을 본다면 중국은 소련에 비해 군사적 열세에 있음을 자각했다. 소련이 중국의 영토 이익을 침해하는 가장 큰 위협인 상황에서 중국은 적극적으로 동맹을 규합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균형 정책을 취하기보다는 먼저 중국 자신의 영토를 군사적 충돌이 수반되지 않는 방법으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냉전 시기인 당시 중국과 비공산국가 간 동맹이 체결될 수 없는 제약도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 즉 소련의 편에 서지 않은 비동맹 인접국에 먼저 접근하여 쉬운 외교적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국공내전을 종결시킨 중국은 영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인도와 함께 저마다 소련과 미국의 패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제3세계의 대변인 역할을 자칭하고 있었다. 중국은 1959년 8월과 10월에 인도와의 국경 관련 갈등이 일어났을 때 소련이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여 이에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인도를 침공하지는 않았다. 대신 소련과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당시 김일성 정부가 같은 공산주의 정부로서 북한 체제 자신의 생존을 꾀하고 반대세력을 숙청하면서 소련보다 중국에 더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므로 무력으로 북한을 제압하려는 계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 사이의 영토 경계선 획정에 관한 조약인 조중번계조약은 2000년이 되어서야 그 내용이 한국 학계에 알려졌다.
     마오쩌둥 정부의 주변국과의 관계는 방어적 현실주의의 틀에서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에 따르면 적국의 행위 동기와 능력을 파악하고, 아국의 상황과 비교하여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울러 국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안보를 극대화하는 것이 국가의 우선 과제이다. 중국에게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제일의 국익이었으며, 이를 위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군사력을 사전에 준비하는 것은 제1차 국공내전(1927~1937) 부터 이어져 왔다. Paul Godwin은 마오쩌둥의 “핵심 교리적 원칙”을 그가 “공격적인 방어, 혹은 결정적인 관여를 통한 방어”라고 정의한 “적극적 방어”라고 적시한 바 있다.[각주:3]  중국의 인도와 북한에 대한 안보 정책은 일관되게 억제 혹은 강압 둘 중 하나로 전개되었다. 이때 차선책인 선제공격을 제쳐두고 중국은 이슈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선제적으로 억제하거나 강압하였다.

II. 1959년 중국과 인도

     인도의 경우, 중국은 이러한 대화 우선의 적극적 방어를 실천하였다. 국경 분쟁의 시초가 되는 사건으로, 중국은 티베트인들의 폭동을 인민해방군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티베트 달라이 라마와 추종자들을 인도가 정치적 난민으로 받아들여 보호하고,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이러한 정치적 난민 대우에 찬성하였다. 티베트인 폭동에 따른 중국과 인도의 관계 악화로 인해 중국은 동쪽 NEFA와 서쪽 Aksai Chin 지역의 국경을 정확히 설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각주:4] 국경 분쟁지역은 현재의 부탄과 버마 사이의 지역과 네팔과 파키스탄 사이의 지역 두 곳이었다. 인도의 영국 식민지 총독 헨리 맥마혼(Henry McMahon)이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1914년 설정한 선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으나 국제법적으로 중국과 인도 양국이 이를 동의한 적은 없었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내세우며 주변 공산권 국가들에게 반제국주의를 적극 주장하였고, 국경이 제국주의의 잔재로 인식된 것도 중국의 군사적 행동에 큰 요인이 되었다. 중국의 국익은 티베트인들의 폭동을 진압하고 인도와 상호 불가침 기반의 친선관계를 확립하며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었으며, 국경의 확장이나 인도의 공산화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가 많았으나 다자 협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대화 우선이라는 원칙은 평화적 대화가 아니었는데, 이는 중국이 맥마혼 선과 심라 회의[각주:5] 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방어적 현실주의는 티베트를 놓고 의견 충돌이 빚어진 인도에 보복하거나 인도로 세력을 팽창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증명된다. 1959년 4월 중국과 인도군이 국경분쟁지역으로 진주하였으나, 중국은 1950년대 초부터 관찰을 통해 사실상의 국경이라고 생각했던 히말라야 산맥에서 진군을 멈추었다.[각주:6]  오히려 맥마혼 선이 실제 지리를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중국에 선제공격을 한 것은 인도 쪽이었고, 이를 통해 국지전이 발발하였다. 네루는 티베트에 대해 미국과 영국과 세력을 규합했다는 중국의 선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959년 10월 15일 시작하는 중국-인도 간 대화를 제안한 중국은 1주일 간 국경지역의 인민해방군 진주를 실시한 뒤 이후 10월 27일에 저우언라이 총리 명의로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에게 분쟁 중지를 권유하고 3주간 당시 진군 상태를 유지하였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인도에게 11월 21일에 중국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국경 지역 인민해방군을 “국경 수비대”로 명명하여 “중대한 군사적 행동의 이미지를 줄이고자” 노력하였다.[각주:7]  인도는 소련과 미국 양측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인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네루는 항공작전 지원을 미국에 요청했지만 중국이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미국과 소련 모두 인도에 개입하는 것을 적극 막았기 때문에 결국 인도가 강대국을 등에 업고 반발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스스로 강대국이 아니었음을 인식한 중국은 국가의 최우선 과제인 안보에 집중하며 주변국의 대중국 동맹을 억제시키고 안정을 꾀하였고, 그 수단인 인민해방군과 인민해방군을 단독으로 지휘한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단일국가 중국의 현실주의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는 위협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는 다른 근거로, 1960년대 초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미국과 대만 문제, 소련과 신장 문제, 그리고 인도와의 국경 분쟁에 대해 위협을 과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각주:8]
     마지막으로 당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평가를 받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주변의 비동맹 약소국들 중 부탄, 네팔, 파키스탄 등은 인도네시아의 회담에서 일제히 중국을 비판했지만 그들이 중국에게 군사적 위협은 되지 않았다. 중국의 국익을 달성하는 수단은 레짐의 패권이 아니었으므로, 주변국에게 중국의 입장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자국의 안보를 공고화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인도와 중국의 협상 결렬에 대해 중국에는 여론의 개념이 부재하여 저우언라이가 권력에서 하야하는 일이 없었지만, 네루 총리는 강경파로부터 극렬한 내부 비난을 감수해야 하였다.

III. 1962년 중국과 북한

     북한은 인도와 달리 미국과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자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소련이나 중국 중 한 편에 의존하면서 김일성 특유의 주체사상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6.25 전쟁 후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강화하였고 1961년 7월 중국과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동맹관계로 발전시켰다. 한편 동년 소련과도 북소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중국이 인도와 북한과의 국경 문제에 개입하게 된 동기는 모두 소련의 선제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같다.
     중국은 59년에 무력충돌 사태로까지 비화한 중.인 국경분쟁을 경험하면서 주변국가와의 국경선 획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소련이 중.인 국경분쟁에서 중립을 취해 충격을 받고 60년대 초부터 아프가니스탄, 몽골, 북한 등과 역사적 과제로 내려오던 국경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 나섰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두산 일대와 압록강,두만강의 섬들에 대한 국경선 획정 문제가 제기됐다. 북한도 국경 문제가 향후 양국관계의 불씨로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각주:9]  1962년 평양을 방문한 저우언라이 총리는 3월 30일 당국자들과 함께 중국과 인도, 중국과 몽골, 그리고 중국과 북한과의 경계선 획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중국 지도부는 북한도 언제든 동맹관계를 끊고 소련과 다시 가까워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양국간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 상태는 그 어떤 국제기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한국] 사회에서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대가로 북한이 백두산 천지 일대를 중국쪽에 할양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통설처럼 여겨져 왔다. 이러한 주장은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대북(對北) 불신감에 의존해 하나의 '사실' 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할양설' 을 부정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정확한 증빙자료를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최근 들어서야 1997년 중국에서 발간된 '저우언라이 연보(周恩來 年譜) 1949~76' 와 95년에 발간된 '진의(陳毅)연보' 등을 통해 '조중변계조약' 이 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체결됐으며, 6개월 정도의 현지 탐측조사를 거쳐 64년 3월 20일에 '중조변계의정서' 를 체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각주:10]  즉 중국과 북한의 국경 설정은 같은 전쟁에 참가했다는 의식을 공유함에 따라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중국이 판단했을 때 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다고 방어적으로 생각해서 나온 결과이다.
     감소한 양국 간 적대관계를 알기 위해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한 시점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1962년의 중국이 그 이전인 1958년 김일성 주석의 요청에 의한 중국인민지원군 철수 직후부터 북한을 보는 시각은 적대적이었고, 김일성 정부가 공산주의 레짐 안에서 중국과 항상 동맹국 혹은 연합국의 입장에서 정책을 수행해나갈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1960년 11월 모스크바회의에서 국제공산주의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자 북한은 좀 더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참고로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일 뿐 수정주의, 교조주의, 주체사상 등 각국의 국내정치적 상황에 의해 변형되기도 했기 때문에 동맹과 다른 개념이다.
     중국은 방어적인 자세로 긴장 완화를 이용하여 국경 협정을 체결했으므로, 그것은 완화된 긴장의 결과였으며 이후에 점차 완화된 긴장의 원인이기도 했다. 조중변계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62년 가을부터 1964년 10월간 북한과 소련의 양국간 정부대표단의 방문이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964년 말, 북한과 소련은 통상협상을 체결하였다.[각주:11]  설상가상으로 1965년 4월 반둥회의 10주년 기념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은 자주노선을 천명하여 그때부터 중국과의 긴장이 높아지지만 한번 체결된 국경조약은 변함이 없었다.

IV. 결론

     마오쩌둥은 제3세계의 지도자 국가로 중국이 나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3세계국가와의 국교 수립을 집중적으로 수행했고, 이때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면서 냉전체제 하에 진영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중국과 동맹은 아니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중국의 소련 견제에 이바지했다. 중국에 적대적인 강대국의 주변국 지지가 강화되나 그 강대국으로부터 중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경우에는 주변국과의 적대관계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증가한 적대관계는 국경 지역의 방어적 국지전으로, 감소한 적대관계는 우호적인 국경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의 행동은 떠오르는 중국의 라이벌에 대항하여 먼저 동맹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며, 중국인민지원군을 경계를 맞댄 국가에 추가로 파견하는 것이 아니었다.
     2014년 현재 시진핑 정부의 국경 관련 정책 역시 이와 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중국은 국경 분쟁에 있어서는 남중국해에서 베트남, 동해에서 일본과의 갈등 양상에만 치중해 있다. 불분명했던 국경을 획정하는 단계에 있었고 동맹을 확대하여 중국을 압박하려는 거대한 소련의 힘이 존재하던 1960년대에 비하면 중국의 방어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는 국가의 수도 줄어들었으니 다자적 레짐을 만들기 위한 협력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는 낙관적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며 중국에 압박을 가하는 일본 그리고 미국이 점점 더 1960년대의 소련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 시기에 오면서 중국은 북한을 관리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하는 대국의 책임을 가진 중국은 북한의 평화 유지에도 관여할 필요성이 있고, 그래서 북한에 대해 방향성을 바꾸더라도 해서 북한을 타이른다. 한편 인도는 2014년 대선 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긴밀한 협조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군사동맹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특정 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균형 정책이 수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1960년대 소련의 대베트남 이데올로기의 전파나 2010년대 일본의 대인도 경제적 인프라 구축 지원 활동은 모두 균형 정책의 일환이다. 북한 역시 납치자 송환과 경제적 제재 해제를 골자로 일본과의 협력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이 인도와 북한을 대상으로 한 외교정책은 그 두 국가가 중국에 대항하는 대국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명확한 듯 보였던 국경은 다시 1960년대 상태로 회귀할 수 있으며, 대국과의 동맹을 통해 직접적 위협을 느낀다면 중국은 최초의 방어적인 상태에서 언제든 공격적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삶에 관계한 전세계인들은 직시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M. Taylor Fravel, Strong Borders, Secure Nation: Cooperation and Conflict in China’s Territorial Disput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논문]
박종철, 「1960년대 북한·중국의 ‘긴장된 동맹’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Allen S. Whiting, “China's Use of Force, 1950-96, and Taiwan”, International Security, Volume 26, Number 2, Fall 2001.
Lorenz Lüthi, “Sino-Indian Relations, 1954-1962”, Eurasia Border Review Special Issue, Spring 2012.
Paul H.D.B. Godwin, “Change and Continuity in Chinese Military Doctrine: 1949-1999,” Conference on PLA Warfighting, 1949-1999, Center for Naval Analysis, Alexandria, Virginia, June 3-4, 1999.
Xuecheng Liu, “Sino-Indian Border Dispute and Sino-Indian Relation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ume 55, Number 1, February 1996.
[신문기사]
이종석, 「중앙일보 입수 '조중변계조약서' 의미」, 『중앙일보』,  2002.2.23.
“Red Chinese Sign Pact with Burma”, NYT, January 29, 1960, 4.


  1. “Red Chinese Sign Pact with Burma”, NYT, January 29, 1960, 4. [본문으로]
  2. M. Taylor Fravel, Strong Borders, Secure Nation: Cooperation and Conflict in China’s Territorial Disput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본문으로]
  3. Paul H.D.B. Godwin, “Change and Continuity in Chinese Military Doctrine: 1949-1999,” Conference on PLA Warfighting, 1949-1999, Center for Naval Analysis, Alexandria, Virginia, June 3-4, 1999. [본문으로]
  4. Lorenz Lüthi, “Sino-Indian Relations, 1954-1962”, Eurasia Border Review Special Issue, Spring 2012, p. 105 [본문으로]
  5. 1914년 인도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 지역의 도시인 심라(Simla)에서 영국의 헨리 맥마혼과 인도 외교부 대표들이 인도와 티베트 거주지역 사이의 경계선인 맥마혼 선을 확정짓는 심라 협의(Simla agreement)를 체결한 양국간 회의 [본문으로]
  6. Xuecheng Liu, “Sino-Indian Border Dispute and Sino-Indian Relation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ume 55, Number 1, February 1996, p. 26 [본문으로]
  7. Allen S. Whiting, “China's Use of Force, 1950-96, and Taiwan”, International Security, Volume 26, Number 2, Fall 2001, p. 113 [본문으로]
  8. 위의 논문, p. 128 [본문으로]
  9. 이종석, 「중앙일보 입수 '조중변계조약서' 의미」, 『중앙일보』, 2002.2.23. [본문으로]
  10. 위의 기사. [본문으로]
  11. 박종철, 「1960년대 북한·중국의 ‘긴장된 동맹’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p. 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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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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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성미산마을은 주민들의 친밀도, 서울시와 언론에 알려진 유명세, 지속가능성에 대한 모범 답안 제시 등으로 여러 마을공동체 중 귀감이 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마을은 주민의 개인적인 특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어떤 것이 좋은 마을인가에 대한 전형은 없기에 성미산마을에게도 고유의 특성을 이해한 뒤 개선점과 발전 계획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본 글은 마을복지, 마을문화, 마을경제의 세 가지로 나눈 성미산마을의 20년 장기 프로젝트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한다.

     마을복지 분야에서는 점점 이 마을에서 비중이 높아지는 고령자에 대한 지원과 공동 돌봄 활동이 시작된다. 지금 성미산마을의 초창기 역사부터 죽 지켜본 사람들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을 강력한 유인 동기를 가지고 끈끈한 유대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마을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하다가 나중에 그 헌신을 할 수 있는 건강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 마을에서 주류로 등장한 세대가 그 1세대를 소통이 힘들다는 이유로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일 것이다. 성미산마을에서조차 세대간 갈등이 재현되는 것을 이 마을의 설계자들 중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세대의 요양 관련 필요성이 생기면 그에 따라 당시에 공동육아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그 노하우를 변형시켜 공동요양 활동을 기획하여 실행할 것이다. 핵가족과 맞벌이가 앞으로 더 심화되고 연금이 줄어들 것으로 가정한다면 마을공동체가 가진 사회적 자본은 더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고 마을공동체를 운영하는 제도는 점차 정교해진다. 20년 뒤의 성미산마을은 마을 사람의 인생 전 시기에 걸쳐 답을 내릴 수 있는 성숙한 협력이 가능한 곳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획득하는 안정성은 곧 마을의 전통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이어질 것이다.

     마을문화 분야에서는 성미산마을과 다른 마을의 교류활동을 진행한다. 단순히 한 번의 만남으로 두 개 이상의 마을이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미산마을 안의 숙박시설과 모임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곳에 다른 마을 사람들이 몇일 동안 투숙하며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도 마을공동체 관련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한다. 이는 마치 국교 수립 후 대사관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마을과 마을이 서로 계약을 맺고 특정 건물은 다른 마을에게 전적으로 사용권을 이전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권 이전은 두 마을끼리 서로 할 수도 있고, 세 개 이상의 마을끼리 고리형 네트워크를 만들어 수행할 수도 있다. 지리적 근접성이 사람들 간의 친밀도를 높인다고 한다면 이렇게 두 개의 마을을 하나의 공간에 접붙임으로써 서로의 마을문화가 전파되어 수용되고 교집합 혹은 혼합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상대 편의 에너지 자원관리에 관한 노하우는 상대 편 마을의 집중적인 토론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을 성미산마을이 추가적인 노력 없이 직접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 마을 주민이 성미산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일정 기간동안 직접 현장에서 관찰하며 자문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경제의 차원에서는 성미산마을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 수준이 보장된 정규직 일자리로 일하도록 하는 수익구조를 만든다. 이 청년들은 2명에서 5명 정도 규모로 이루어지며, 집세를 모두 면제받고 마을 안에서 먹고 마시는 비용도 면제받으면서 주변의 직장인 또래들과 같은 수준의 가처분소득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 청년들은 단순한 마을활동가를 넘어서서 제2외국어 능력을 이용한 해외의 마을공동체와의 교류, 강연이나 TV 및 라디오 출연, 책 출판, 회의 참여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현재 존재하는 청년마을연구소가 20년을 보고 각 마을에 별도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의 업무 경험은 향후 경력사원으로 이전하는 데도 도움이 되게끔 직장의 사회적 명성을 점차 드높이는 데에도 힘써야 한다. 업무량이 과중해지면 마을 사람들이 파트타이머로 참가하여 수당을 받는다. 외국계 기업에 가고 싶었지만, 교수나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고위공무원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한 전형적인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고스란히 마을공동체의 질적 발전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면 그보다 우아한 창직(創職)이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마을공동체 내의 이러한 청년 집단을 2012년부터 유행했던 ‘IT 기반 스타트업’과 같이 저작권과 투자금(혹은 출자금) 그리고 브랜드 가치를 가진 법인으로 만들어야 하며, 그를 위한 초기 자본은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한 관계 자본이 될 것이다. 마을 차원에서 돈을 버는 것을 죄악시한다면 청년이 마을에서 일하는 것은 마을 구성원인 아주머니들이 사실 직장에서 돈을 버는 남편의 돈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나 청년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비참한 일일 것이다. 마을을 설계하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는 것은 지속 가능한 마을에 대한 적신호이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서 유리된 마을공동체가 아니라 점차 가속화되는 경쟁체제를 포용하는 마을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상 소개한 성미산마을 발전방향에 입각하여 현재의 시점을 토대로 한 상상을 20년 후 시점까지에 걸쳐 진행해보았다.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가 30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일부라도 지금의 상황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예측력이 현실에 부합하도록 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이는 곧 지금 이 마을공동체를 관찰하는 우리들의 예측력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확한 미래를 짚어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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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v=WSRLOh-vAtk


외교의이론과실제 (김우상 교수님) 토론 내용


1)Heine 대사가 말한 club diplomacy와 network diplomacy는 어떻게 다른가요?

Heine 대사는 club diplomacy는 몇명의 정부 관계자가 비공개로 협상을 진행하여 문서 형태의 결과물을 만드는 형태의 과거의 외교행위로 정의한다. 그에 비해 network diplomacy는 보다 많은 수의 이해관계자, 즉 NGO와 국제무역기구 등의 기관도 참여하여 협상을 진행하며 협상 과정을 공개하고 문서 형태의 협정뿐만 아니라 협상의 목표를 협정 타결을 넘어선 무역과 관광 등의 증가로 확대하는 현대의 외교행위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경우는 해외의 무역에 관해 해당 주재국 네덜란드 대사가 직접 현안에 대해 회의를 진행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네덜란드 정부와 기업과 상호작용을 통해 회의 내용을 보고한다. 또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경우에는 BRICS 국가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은행을 만들자는 상징적인 결의 이상의 행위를 진행한 바 있다. Heine 대사에 따르면 이처럼 현대의 외교관에게는 특히 무역 증진이라는 중요한 역할이 있는데 그들이 이를 잘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2)moderate 역할의 David Malone은 basic objective of diplomacy를 무엇이라고 하였나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좌장이 말한 외교의 기본적 목표는 양측 모두의 이익을 위한 공동의 합의 범위(common ground)를 만들기 위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통적인 외교에서 현재의 외교로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어려움에 부딪쳤다. 첫째는 외교를 위한 다양한 대안 메커니즘의 등장이다. 예를 들어 남수단은 국제연합에서 비정부기구의 도움으로 회원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기존의 수단의 입장에서 보면 수단이 원하는 합의를 위한 환경 조성에 방해를 받았으므로 국가간 외교행위에 새로운 변수를 만난 셈이다. 둘째는 다양한 목소리의 등장이며 그중 특히 언론의 역할 증대다. EU는 모든 EU 소속 외교관 및 의원들의 행위를 미디어(EurActiv)가 촬영하고 보도하므로 오히려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게 만든다. 언론이 강화되어 말하기 전에 침착해지고 먼저 들으라는 주변 외교관들의 조언도 늘어나고 있지만, 막상 천천히 결정을 하려 하면 미디어가 해당 외교관의 무능을 탓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언론은 타국 언론과의 내용 비교를 통해 오히려 공동의 합의 범위를 늘려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양보하지 않는 양측 국가 혹은 양측 비정부 행위자의 대립이 있을 때 사실을 보도하는 여러 국가 언론이 가세하면 세부적인 행위의 법적, 도덕적 잘잘못을 판단하고 잘못한 측이 조금씩 양보를 하게 만들어 언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대중 독자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합의 범위가 만들어질 것이다. 국내정치의 영향력이 커져서 비공개 협상으로는 어느 한 쪽도 양보를 할 수 없는 고착 상태가 지속될 경우 그 고착을 깰 수 있는 힘은 협상 당사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오며, 이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영토 및 역사 분쟁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Numata 대사는 basics of diplomats을 무엇이라고 했나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Numata 대사가 말한 외교관의 기본적 자질 중 첫째는 일본이 미국과의 양자관계를 넘어 G8과 G20과 같은 다자관계가 중요해진 현실을 수용한 것과 같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국가의 이익을 위해 호소하는(appeal) 능력이다. 둘째는 국제사회를 고려하면서 국가 내부의 외교관에 대한 압력을 위험요인으로 인식하나 국가 내부에도 양보하는 관용이다. 첫째를 위해 일본은 인터뷰에서 대사가 언급한 것처럼 2차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 큰 비중을 두면서 그동안 얻은 경험을 세계로 확장하여 최근 도쿄아프리카개발국제회의(TICAD)의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경험을 활용하였다. 그 결과 과거 원조에 치중하던 TICAD는 이제 일본과 동등한 입장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투자 대상지로서 일본과 협상에 나서는 형태의 국제회의로 변모하였다. 한편 둘째는 일본 외무성이 어떻게 자민당을 비롯한 극우세력의 요구에 영향을 받아 주변국을 대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망언과 정치과정에 참가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혹은 뛰어난 외교관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국가일까. MIKTA의 중견국 외교는 G4와 커피클럽의 대응구조와 결합하면서(한국은 커피클럽에 소속해 있다) 한국이 일본과는 다른 국제사회 내 위치에서 충실히 구체적으로 자리잡음을 보여준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안보에 관련된 국내정치적 목소리를 폭넓게 수용하여 국내정치와 일관된 외교행위를 보여주고 그에 따라 국내적으로 외교관을 평가할 때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두 가지 한국의 사례를 보아도 Numata 대사는 외교관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잘 짚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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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왕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뉴스가 두 개 나왔습니다.

[1]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장관 한국 제외하고 일본, 중국, 몽골 방문
http://headlines.yahoo.co.jp/hl?a=20140330-00000018-rcdc-cn
헤 이글의 중국 첫 방문이고, 한국은 헤이글 장관이 2013년 9월 29일 방문했기 때문에 방문하지 않는다 합니다. 불과 6개월 전이라구요? 아니죠. 6개월 동안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에게 오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미국에게 '우리 안올게'라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여기 댓글 보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진짜 한국이 약소국 아닌가 하면서 우울해집니다.)

[2] 조선과 일본, 1년 4개월만에 정부간 공식 협상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3/30/0503000000AKR20140330031852083.HTML?template=2087
오늘 (30일) 중국에서 진행된 협상으로 2차 협상은 내일(31) 주중일본대사관에서 진행됩니다.
양측 수석대표는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 vs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입니다.

[3] 北,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에 "낯간지러운 수작"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5854

한국은 한국 주도의 통일을 얘기하고 있을 때 주변국은 이렇게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청와대에 없을 때,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데 쏠려 있을 때 말이죠.

통일 이슈에 대해 지금 뚜렷한 미국과 일본과 중국의 지지 의사가 보입니까?
미국은 미국 주도의 한미일 삼각 공조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고,
한 국은 일본의 북한 대상 경제지원을 허가하면서 중간에 협상 대상자로 끼어들어 남북일의 협력구도를 만드는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그저 한국 주도의 통일 이야기만 하면서 '남북이 주변국 신경 안 쓰고 화합하는' 담론만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일본의 지지의사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국은 통일 과정에서 일본의 참여를 원하지 않을지 몰라도, 북한은 원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 은 한국이 북한붕괴론을 근거로 통일대박론을 만들었다며 근거가 빈약하고 '그건 너희 나라 입장에서만 생각해서 만든 결론이야.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100&key=20140330.99002041529) 중국의 순망치한 개념은 아직도 남아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얼마 전 있었던 오바마 대통령 주도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얻은 것은 있어도 (참고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3/27/0601080100AKR20140327003100071.HTML) 한국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한국의 미국과의 관계가 특별히 좋아졌느냐 하면 딱히 그렇다고 하는 한국 내부의 긍정적 평가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국 중 어느 나라와도 특출나게 관계가 좋아지는 것이 아닌 상태가 오히려 한국이 균형외교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제1차 러일협상(베베르-고무라 각서)에 의한 조선의 러시아군과 일본군 주둔 승인과 같이 주변국들이 한국을 겨냥한 양자간 협의는 진행중이지 않기 때문에 독단적인 한국이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주변국들의 야합이 한국의 국익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는 상황이라는 게 다행이고, 또 그 상황을 유지해야 하는 게 한국의 숙명이기도 합니다.

다만 한중일 구도에서 역사 인식 이슈로만 보면 한중 vs 일 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외의 이슈에 대해서는 중일 vs 한 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 외의 이슈'를 더욱 발굴하여 대비하는 한국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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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목요일 오후 1시 연세대학교 외솔관 110호 강의실에서 김재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장님의 강연이 열렸다. 현재 시민사회운동과 사회적기업에 대한 수업을 듣고 있으며 저번 방학 때 관련 인턴도 했었기 때문에 나는 꼭 참가해서 강연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다음은 강연을 들으며 내가 쓴 노트다.



오늘 오전에 청년위원회 회의
대통령실 사회적기업육성T/F
이정훈 교수님이 섭외 담당

사회적기업이란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 판매하여 돈을 버는 기업이지만 활동의 동기가 사주나 주주의 이익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는 기업

목표: 사회적 목적 추구(지역개발, 취약계층 일자리 사회서비스 제공)
수단: 영업활동 수행 (제품 판매 및 서비스 제공을 통한 수익창출, 지속가능한 조직)

선진국의 사회적기업 등장 배경: 70년대 이후 유럽 복지국가 위기 -> 정부, 비영리단체, 영리기업 역할 강화 -> 재정부담 심화, 서비스 질 저하, 영리성 우선 추구
70년대 오일쇼크 후 복지나 사회서비스에 대한 수요 폭증. 복지자본주의였는데 국가가 재원의 한계를 드러냄. 
그럼 정부는 효율적인가?  그렇지 않다는 많은 반론들이 있음. 그래서 시장을 이용하자. (80년대 레이건, 대처..)

office of civil society 미국 시민사회청
영국 캐머런 총리실 내 big society
프랑스 올랑드 사회연대경제부 

한국의 사회적기업 육성배경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업률, 양극화 문제 -> bottom-up 운동이 시작. 미국 유럽의 사례를 참고함.
고령화와 저출산, 전통가족구조 해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공헌활동의 관심 증가
2007년부터 사회적기업육성법. 고용노동부가 주관부처. 인증제도. 1800개의 예비사회적기업, 2000개의 총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정책도 사회적기업진흥원이 맡고 있음. 그런데 이건 기획재정부 소관 사업.
사회적 협동조합은 인가, 신고제도.

2010년 하반기 한국 사회적기업 정책변화의 3대기조
1. 민간주도 
 대한민국만큼 신속하게 복지화를 이룬 곳이 없다. 인증제도는 유례가 없는 제도.
 직접적인 지원으로 임금 등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의존성이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사회적기업가들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운동을 해야 한다고 동감을 함. 
2.지역혁신 및 개발
 대도시 조차도 피폐화되어 있음. 모든 자원이 수도권으로 빨려들어오고 있음. 스페인 빌바오를 가니까 시장님이 한국을 너무 미워한다 함. 빌바오의 경쟁력은 자동차 철강이었는데 현대 포스코에 뺏김. 그래서 구겐하임미술관을 만듦.
3.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 구축
 한국 기업은 착한 기업이라 하는데 착하다고 다가 아니고 지속적인 비즈니스모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 고객 선택을 잘 하고 핵심 역량을 갖고 핵심 전략을 갖고 가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회적기업은 비전과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성장해 왔다.
소셜벤처경진대회 (중고등학생부, 대학생및일반인부) 를 주최함. 글로벌부문을 통해서 우승팀은 버클리 GSVC로 감
350개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1년), 2000-4000만원 지원. 최대 2억까지 펀딩 받을 수도 있다. 
business opportunity를 social issue에서 찾는 게 social business. 
사회적 기업도 자원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음. 융자가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 기금도 운영하고 있지만 시민사회단체와의 관계 강화를 하고 있음. 지자체와의 관계 강화도 하고 있음. YMCA YWCA 경실련 로타리클럽 등등
오바마도 social worker 경력이 있다. 학생사회개발단 운동 (알렌스키? 교수의 제자). 시카고는 미국 흑인들의 정치적 수도. 
기업의 핵심은 회장. 회장이 배우는 학문을 경영전략이라고 함. 원장님은 경영전략을 학교에서 가르침. 

전략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
전략 / KSF / 조직적 정합성 / 최고경영자의 역할
전략이 바뀌니까 CSV개념이 나온 것이다. 

회장이 감옥에 가니까 재단 만들자. 그러면 국민들이 감동 받냐고요.
원장님이 임원들 데리고 강의하는데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게 맞냐고 의심을 품지만 나중에는 동조했다.
지속적인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지. 
talent war (top 10% recruitment & retention) 이 중요한 게 아니라 ordinary people을 통해 extraordinary result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가치에 기초한 전략 관점>
근본적 가치 또는 신념
가치를 반영하고 구현할 수 있는 경영관행을 설계
 - 그렇게 하면 망해요. 라고 CEO들은 생각하는데 맞다. 실제로 망한다. 그런데 그 두려움에만 머물러 있으면 진보할 수가 없음. 
 - 한국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는 2004-2005년에 왔다. 이때쯤 되면 원장님이 말 안해도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핵심역량 구축을 위해 이 관행들을 활용
가치를 구현하는 전략을 창출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활용하라
최고경영자의 역할

기업도 수익을 만들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윤을 만들어야지. 그런데 숨쉬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있어도. 숨쉬는 건 필수적인 조건일 뿐이지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주는 충분조건은 아님. 마찬가지로 기업의 목적이 생존에 급급하다는 이유로 profit이 아닐수도 있음. 

베니스의 부를 일군 건 샤일록이 아니라 상생연대. 베니스의 ‘콜레간차’
15살만 되면 남자들은 다 배 탄다. 콜레간차는 수익을 창출하고 배분하는 시스템. ‘연대’로 번역.
해상무역은 상선을 만날 수도 해적을 만날수도 있음. 선장이 1/3을 떼먹음. 국가는 수익을 보장한 게 아니라 체제를 보장했음. 
자영업은 초과공급임. 쉽게 창업하라 이런 말 하면 안 됨. 
국가예산 360조 중 100조가 복지예산. 대부분은 국민연금. 우리나라가 복지예산이 제일 낮은 건 사실. 30조의 사회서비스 예산이 잘 운영되고 있는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니들이 알아서 해 시장에서 라는 느낌으로 30조 푸는 거 아닌가. 30조 어떻게 쓸지만 바꾸면 사회적 기업가에게 사회서비스라는 새로운 market이 열린다. 
시오노 나나미 ‘바다의 도시 이야기’

창조경제는 ICT로 열릴 수도 있지만 사회적기업의 창조경제도 가능하다. 
사례
복지/돌봄 서비스형
교보다솜이재단 (간병서비스)
YMCA 서울아가야 (영유아 돌봄서비스)
프랑스 파리 L’Usine 
프랑스 Traiteur Ethique : 쉐프가 꼬르동블루 교수. 160명이 근무 종료 이후에 외식업체로 정규직으로 취업. 
아띠제를 인수하려 했던 TE. 
청년 소셜벤처형
공신 (교육불평등 사교육해결 자기주도학습법강의. 인도네시아 마하멘토. 온라인 스트리밍은 KT가 지원했었다.)
시지온 (2009년 9월 라이브리 개발)
빅워크
R&D혁신형: 제너럴바이오 (LG생활건강 출신 엔지니어. 신소재 원천기술개발. 지역주민 고용. FDA인증도 했다)
마케팅 디자인 혁신형: 에코준
협동조합형
SK행복나눔재단 행복도시락, 제주도슈퍼마켓협동조합
국제개발협력형
E3Empower, D.Lamp사업, d.light (적정기술 제품 제조 판매하여 개발도상국에 빛 에너지 공급)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도 저개발 국가 가서 직접 개발협력을 함.
단순한 donation은 절대 안 함. 
신장투석 필터
solar sister 태양열충전배터리

사회적기업은 사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일자리를 중심으로 한다. 착하다.
원장님은 여기에 불만이 있다.

착하다: 품질이 낮다. 가격이 턱없이 비싸다. 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를 앵벌이 취급하지 말아주십시오.’
-> 사회적 품질 (원칙있는 생산, 사회적 가치), 지불 가치 있음, 착하다는 이미지는 가져가나 부정적 요소 제거 

이제는 사회적 혁신, 이런 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세상.
지금까지 사회적기업 관련 1700억밖에 안썼다.

사회적 기업 서비스 파는 건 명품 파는 것과 비슷함. 보이지 않는 가치를 더 소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덴하우스 사례 - 감동적인 이야기, 제품 속성 이외의 이야기, 제품과 상관없이 무조건 구매하는 충성고객 존재, 기능적 가치만으로 사회적기업을 평가할 수 없음

서민정책 강화를 위해 정책자문 한 원장님


컨트롤타워는 사회적기업진흥원뿐만 아니라 대학과 시민단체가 하고 있다. + 중기청. 여러가지가 있다. 
지금은 맞춤형 아카데미
환경형 사회적기업, 문화예술형 사회적기업...

power of unreasonable people 이라는 책. 버나드 쇼가 한 말.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맞춤. 비이성적인 사람은 끝까지 나에 세상을 맞춤.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짐.


다음은 강연을 들으며 생각난 질문이다.


졸업하고 대기업 안 가고 사회적기업 차려서 지원을 받은 다음에 나중에 대기업 경력직으로도 갈 수 있는 게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도로 지금 인식이 바뀐 건가요?

예 바뀌었네요. 하하하하하하^^^^^^!!!


앱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친환경 환경파괴 따질 수 없는 것), 대기업에 B2B로 납품하는 제품에서는 어떻게 보이지 않는 자아실현의 가치를 파악할 수 있을까?


행복동행 전략의 일환으로 대기업과 ICT기반 벤처기업이 revenue sharing을 하고 있는데 CSV의 V중 금전적 수익이 없으면 CSV가 성립 안하는 것인지? 지속가능하기만 하면 성립된 것인지?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 취약계층을 취업시키면 수익을 낼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까? 프랑스 Traiteur Ethique의 경우, 행복도시락의 경우..


[내가 한 질문]
지식집약적 산업의 사회적기업에서 취약계층을 취업시키는 게 힘들지 않느냐?
공신은 지식집약적 산업이지만 고용창출은 안함. Traiteur Ethique는 노동/자본집약적 산업이라 성공한 걸로 보임.


고용노동부 일자리 지원은 취약계층에게만 한시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중.  그리고 전문직에 대하여 일거리를 제공하기도 함. 전문직은 원하는 임금 수준이 있기 때문에 고용 창출이 어려움. 
기업에서 전제할 것은 직무 역량을 갖출 때 채용이 가능하다는 점. 다만 OJT를 통해 스킬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지식집약적 산업에서 고용창출도 가능함. 사실 TE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위주로 뽑은 것임. 장애인들은 기업에 대해서 부가가치를 높인다기보다는 단순한 업무, 스토리 만들기. 현실적으로 고려를 해야 함. 


이날 질문을 한 사람은 정치외교학과 2명, 행정학과 1명 포함 총 5명이었다. 사회과학계열 학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에 원장님을 뵙고 내가 말씀드린 건 바로 이 점이다. 지금 사회가 이러한 담론을 주류 담론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과학계열 학생들은 이 담론을 메시아처럼 받아들인다고. 신자유주의, 경영학과 중심의 세상이 이제 균형을 찾아간다고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무리 중 하나로 좋아하고 있다. 솔직히 좋은 건 좋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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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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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활동에 관심이 있는 주민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중에서도 실제로 참여하는 주민과 참여하지 않는 주민으로 나뉘는 것은 왜일까? 실제로 참여할 때는 언제고, 의사가 있어도 참여하지 못할 때는 언제일까? 협력하고 싶은 우리가 실제로 협력하는 건 언제고, 협력하지 않는 때는 언제인가? (1,200자)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주민들이 상호의존적일 때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에 에 따라 가능하다. 이는 서울시가 마련한 마을공동체만들기 지원 프로그램에 각각 함께 만들고 소비하는 ‘경제공동체, 공동체 활동지원 사업, 신나고 재미있는 문화공동체’ 의 3가지 분류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주민 개인 혹은 3인 이상 주민단체가 신청하여 이루어지는 현장상담 및 조사, 사업선정 및 주민안내, 사업실행계획 제출, 사업비 교부, 보조금 정산 등의 과정은 마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와 같이 많은 개인적 노력을 요한다.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완전히 자비로만 충당하는 것은 보통의 소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회비를 걷는 것은 마을 주민들에게 회비를 낸 만큼의 보상을 동등한 비율로 가져다줄 것이라는 보장과 감시 장치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 자신의 가처분소득을 명예를 위한 기부도 아닌 이러한 분야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위해 모두가 동등한 양의 노동력과 금전적 자본을 내놓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협력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무임승차자가 등장해도 그 무임승차자가 야기하는 비용을 감수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만이 참여한다. 또한 소득이 높은 사람이나 마을공동체 이론에 보다 정통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면 마을공동체의 권력구조는 기업의 위계질서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데 동의를 빨리 해서 신뢰가 있는 집단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거두게 하는 보상 체계를 정립하는 것도 실제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요소다.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부업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여있다고 가정할 때 협력의 조건을 논의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으로 보인다. 3인 이상이 모여 추진하는 팀 프로젝트인만큼 3인이 협력했을 때 드는 비용이 혼자서만 뛰어들고 다른 사람은 배신했을 때 드는 비용보다 작아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한 번의 행사 개최를 통해 공동체의 더 많은 이익을 보려는 경우에는 아담 스미스의 논의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개인적인 행동이 개인에게 보상을 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도 편익을 가져다줄 때 협력으로 이어진다. 나만의 아이템을 가지고 장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간보는 시장’이 이 경우에 속한다. 시장의 판매자로 참여하지 않고 구매자로 참여한 무임승차자에게 많은 편익이 있지만 무임승차자는 결국 금액을 지불한다.


   교육 프로그램, 청책 포럼, 푸드뱅크, 마을축제 기획단은 일회성이 아닌 최소 6개월 이상의 장기적인 사업으로 추진될 개연성이 높다. 이 사업들은 모두 공유지의 비극을 낳을 소지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경우에는 처음에 협력에 실패하여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관심을 가진 행위자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초기 상태를 개선하고자 그 다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운영하는 사람의 집단이 정해져 있고 서로가 친분을 통해 감시를 같이 수행하며 매주 혹은 매월 단위로 주기적으로 진행되면서 협력의 정도를 중간에 계속 평가하는 특징을 갖는다. 세 가지 특징이 모두 만족되어야만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고 이 중 하나라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집단에서 제외된다.


   마지막으로 어떤 프로그램에서든지 기획을 위한 회의를 할 때는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자신의 의견이 갖는 파급효과가 커져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필요성이 높아지고 그 결과 회의가 빨리 끝나고 결정된 내용이 분명해지고 많아진다. 회의의 결정은 참가자 및 외부의 무임승차자에 대한 공공재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참여했을 때 체감하는 이득은 줄어들고, 이에 따라 반복 게임을 통해 협력으로 이끌 추동력도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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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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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를 죽인다.


 1889년생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1914년 26세에 독일군의 바이에른 16보병연대에 지원한다. 그보다 2년 전에 스탈린은 볼셰비키가 러시아 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해 나온 뒤에 레닌에 의해 당중앙위원회에 공식 임명된다. 1879년생 스탈린이 1905년 27세에 볼셰비키 대표로 핀란드 회의에 가서 레닌을 처음 만남으로써 그의 정치생활을 시작했으니 두 명의 정치계 입문 시기는 비슷하다. 정치계 입문 시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정의함을 논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1919년 31세의 히틀러는 바이마르공화국(도이치국) 정보선전부로 들어가고, 1920년 32세에 그가 속했던 독일노동자당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으로 개명한다. 당시 러시아에는 트로츠키가 붉은 군대를 조직할 때다. 당 내부에서 두 명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 히틀러는 1923년 35세에 뮌헨 폭동으로 당을 해산 위기에 몰기도 했으나 1925년 다시 자력으로 나치당을 세우고 히틀러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1932년 그가 44세 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30명 나치당이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낸다. 한편 이 시기 1925년 초 47세의 스탈린은 1929년까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부하린을 제거하는 국내 정치투쟁을 벌인다. 제 3자가 누구를 죽일지는 국내 정치투쟁을 위해 그 사람이 누구를 죽이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혔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나치당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베르사유조약을 거부하고 국가의 치욕으로 여기는 나치당의 근본 사상은 빠른 공업화, 일국사회주의, 소비에트 당의 다른 공산주의 당에 대한 절대우위라는 소련공산당의 근본 사상에 비해 정당으로서의 정당성이 부족하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비겁함만이 우선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히틀러는 1929년의 대공황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선동한 기회주의자였으나, 적어도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면서 독재체제를 구축해가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학살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를 따져보아야 하는데 스탈린이 먼저 시작했다. 1930년에52세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토지 소유자들을 약 1만 명 죽였다. 히틀러는 선제공격으로 1939년 51세 때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을 1941년 53세 되던 해에 깨고 난 다음부터 인종차별 개념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을 뿐 1939년 이전에는 국내적 군비확장과 전쟁 준비에만 신경썼다. 나이로 따지면 두 명 모두 비슷한 나이에 학살을 시작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두 명 모두 독재자였으나 학살을 보다 이른 시기에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렇지만 더 악랄하고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판단한 사람은 히틀러다. 스탈린의 변형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국내의 농업정책이 굴락의 학살을 일으켰지만 이는 내치의 문제이다. 제3자는 외치를 먼저 보아야 하기 때문에 홀로코스트가 먼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히틀러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보너스 (느리게 걷는 여행 중 발견한 것들):

바로 이 기사네 ! Hitler vs. Stalin: Who Killed More? (New York Review of Books)

60년만에 공개한 히틀러 자택 (시스템클럽 휴게실)

국제볼셰비키그룹 한국어 홈페이지 (토플 iBT만 있는줄 알았는데 이것도 IBT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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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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