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강(세느강) 유람선


  이번 수학여행 때 가장 뇌리에 깊게 자리잡은 추억이자 파리의 야경을 최대한 낭만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센강 유람선 관광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약간의 노독을 쌓은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무언가 재미있는 관광을 원했다. 그날 밤에 유람선을 탄다는 말만 듣고 아무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였다. 그러나 한 번 유람선을 탄 후에 나의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감동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Bateaux-Mouches라는 큰 간판이 번쩍이는 곳에 우리의 유람선 선착장이 있었다. 우리 민족반 말고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려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탄 유람선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유람선이었나보다는 추측을 해본다. 선착장에 갔을 때의 시각은 저녁 7시 반으로, 해는 서쪽에 지고 서쪽 지평선에서 달아오르는 잔열의 붉은색(amber)이 엷게 타오를 뿐이었다. 파리에서는 산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지평선이 선명했다. 유람선 티켓을 끊고 유람선에 올라타자 차가운 파리의 공기가 전해졌다. 그 때의 날씨는 매우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람선의 이동 속도에 맞추어 체감온도는 떨어지고, 게다가 강물이 밑에 있어서 더 춥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람선을 탄 다음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야경 모드로 해서 친구들을 찍으니 친구들은 선명하게, 배경은 흐릿하게 나오는 게 매우 마음에 들었다. 다만 가끔씩 반짝거리는 에펠탑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사실, 그래서 동영상으로 담았다. 우리가 유람선에 승차한 지 15분이 지나자 유람선은 큰 엔진 소리와 함께 선착장을 출발했다.

  나트륨등의 노란 불빛이 야경에 흡수되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황금빛 도시를 만들어내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네온싸인이나 큰 전광판, 광고판 등은 없었고, 오직 소박한 5층 이하의 건물이 즐비했다. 그 소심한 건물들이 빛을 아무런 불편 없이 수용함으로 인해 파리의 야경은 더욱 그 가치를 발휘한다. 에펠탑이 큰 몸집으로 유람선을 타고 가는 우리들을 계속 지켜봐 주었다.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과 파리 시청, 루브르 박물관 세 건물 중 하나도 보고 여러가지 건물들을 보면서 강 위를 달렸다. 낭랑한 한국어 Audio guide 또한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다리 밑을 지나갈 때마다 유람선과 다리 밑 사이로 메아리치는 그 시원한 폭포수 비슷한 소리는 꼭 예전의 롯데월드 놀이기구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날씨가 추워서 배가 코스의 반 정도를 가고 다시 선회할 때 나와 친구들은 밖으로 트여 있는 2층에서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따뜻한 1층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우리는 귀여운 프랑스 4살짜리 꼬마아이와 즐겁게 놀았다. 어머니가 아주 미인이신 걸 보니 그 꼬마아이도 나중에 멋진 남자가 될 게 눈에 보였다. 그렇게 즐겁게 대화도 하다 보니 어느새 유람선은 선착장에 도착해 있었다. 유람선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할 때에도 유람선의 감동은 잊혀지지 않았다.


유네스코


  나의 꿈은 외교관이다. 막연히 외교관이 아니라, 나도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장래희망을 설정하고 있다. 우선 외무고시를 패스한 다음 (이게 어렵지..) 여러 나라로 발령받다가 영국의 1등서기관을 거친 뒤 최종적으로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이 되는 것이 나의 장래희망이다. 대사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직종(외교관)을 계급에 상관없이 꼭 쟁취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나의 장래희망 때문에 이번의 유네스코 공식 방문은 나에게 많은 motivation과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해 주었다. 내가 이런 국제 기구에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유네스코 방문에 참가했고, 따라서 얻은 것도 많다.

  유네스코 건물은 높지 않았고, 생각보다 소박하게 생겼다. 본부라고 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소박하고, 따라서 더 정이 간다. 나는 이런 소박한 아이보리색(흰색이 아니다) 콘크리트 건물에서 일하고 싶다. 유리창이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몇십층 짜리 고층 빌딩 보다는 더 편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관광객들도 많이 다녀간다는 흔적이 보였다. 처음에 우리는 대강당에 들어가 사진을 몇장 찍고, 그 다음 유네스코, OECD에 근무하시는 한국인 분들과 담화를 나눌 장소로 갔다. 버튼을 누르고 발언할 수 있는 마이크가 모든 자리에 비치되어 있어서 신기했다. 나는 국제 기구이고 또 본부이기 때문에 시설과 환경이 어마어마하게 깨끗하고 세련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고, 오히려 소박한 게 편하다.

  한국인 세 분과 같이 담화를 나누었다. 그분들이 처음에는 진부한 강의를 하다가 세 번째 분, 가장 국제 기구에서 일하는 사람 답지 않으신 분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 말을 하셨다. 학벌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학과를 택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국제 기구의 한 부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외국어 실력과 글쓰기, 말하기 실력이며 그리고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이라는 게 이분의 주장이다. 정말 와닿았다. 막연하게 국제관계학, 힘의 논리 등을 배우고 외국어 조금 잘해서 아무런 열정 없이 국제 기구나 외교통상부 등에서 근무하는 것보다는 정말로 어떤 한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근무하는 쪽이 훨씬 낫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내 진로인 정치외교학과는 도대체 어떤 공부를 하는가. 전문가를 만들어주지 않는 학문을 나는 원하지 않는데, 정치외교학과가 자칫 그러한 학문이 될까봐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파리의 국제기관에서 모임을 가지려면 모이는 날로부터 두 달 전에 신청을 해야 하고, 신청을 해도 모임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은 별로 없다는 게 한국인 인사들의 공통적인 주장이었다.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높이 평가해 주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그분들은 또 유네스코에서 ASP(A 무슨 Students' Program)를 실시하는데, 그 첫번째 수혜자가 우리 학교가 될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 세 분들에게 국제 기구와 외교에 대한 막연한 인식을 좀 더 명확하게 해주는 지식을 배웠다. 유엔총회는 9월~12월에 열리고, 현재 유엔의 신탁통치 활동은 중단된 상태이다. 유네스코는 정치,경제,국방 문제 외의 교육,과학,문화에 대한 국제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1946년 11월 4일 설립한 유엔 부속 국제 기구이다. 유네스코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예를 들자면, 미취학 아동을 돕기라던지 군사적 대립 상황이나 기관간의 마찰로 파괴될 위험에 처한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하기가 있고 또 문맹인을 없애기 등이 있다. 현재 유네스코가 회의를 통해 예산과 인력을 투자해 도움을 지원해 주는 나라는 거의 다가 아프리카, 아시아의 후진국이다. 회의를 할 때에는 한 국가의 대표로서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그에 따른 통계 자료와 뉴스 자료를 구술한다. 최종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주장과 문제의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대학원 인턴십 과정으로 실제 UN이나 UNESCO 기관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운영하는 인턴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경쟁력을 쌓아 후에 국제 기관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경험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세 분들은 입을 모았다. 미국에는 UN대학도 있단다. 그분들이 UNESCO 소속 한국 공무원 선발 과정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나는 깜짝 놀랐고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경쟁률은 300:1이고, 그 중 20명을 뽑고 (6000명이 지원한다는 말인가??) 인터뷰를 통해 다시 8명을 뽑는다고 했다. 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인가. 이래서 외교가에 종사하려면 4~5년이 걸린다.

  이러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지식도 배울 수 있어서 나는 매우 좋았다. 우리 나라 국력을 신장시켜야 하고,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붕 뜬 말들은 이제는 식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질문을 했고, 그에 따른 만족할 만한 답을 얻었다. 아주 귀하신 분들과 함께 보낸 귀중한 시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유럽 수학여행
2008. 2. 4. - 2008.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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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이다. 내가 벌써 고2가 됐다.
  고2가 되니까 대학 준비하는 일도 바빠진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문제를 푸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항상 긴장된 삶을 산다. 이제 조금씩 즐거움을 찾는 근원의 샘물이 줄어들고 있다. 목이 마르다. 이렇게 학교에서 공부만 하고 앉아 있는 나를 내가 보니까 갈증이 난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목마를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친구들과 선배,후배들과 같이 기도모임을 통해 친교를 나누고 같이 기도한다. 인간의 정신적, 영적인 활동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만 같다. 특히 나같은 고등학생은 여러 방면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쉬운데, 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바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활동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체적 활동인 운동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고2가 되어서 더욱 사색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 사색을 통해 생각을 더욱 깊이 하는 호수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호수가 된다면 더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어제 조기졸업하신 9기 선배님들과 만나서 얘기를 했다. 연대에 진학하신 선배님들이 모여서 같이 스페인을 갔다왔다 한다. 반면 나는 이제 고통의 시작에 접어들었다. 그들이 모두 겪은 고통을 나도 겪에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점점 더 목이 말라오는구나. 하지만 형들의 격려를 받으며 올해를 열심히 보낼 거란 다짐을 굳혔다. 그리고 올해에는 조용히 사색하면서, 주님을 만나면서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낼 거라고 결심했다.

2006.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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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학여행
2006. 2. 4. - 2006.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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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는 반나절밖에 머무르지 않아 조금 아쉽지만

원래 일정이 그렇다 보니 후회는 없다. 오히려 볼 것 다 본 것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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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중 산의 여왕이라 불리우는 리기 산을 올라갔다. 톱니(?)가 달린 기차를 타고 천천히 산을 올라가 해발 1752m인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지금 이 사진을 봐도 스위스의 상쾌한 공기가 온 몸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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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쩨른의 빈사의 사자상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게 왜 '빈사'의 사자상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굶어죽었으니 '아사'의 사자상이 더 적절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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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교각인 카펠교. 130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다리의 중간에서 스위스의 호수와 멋진 마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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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을 가장 멋있게 볼 수 있는 Trocadero 광장에 왔다. 이 때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늘에 감사한다. 에펠탑이 이렇게 멋있는데, 왜 옛날 사람들은 처음에 이것을 혐오했는지 참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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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북서쪽으로 8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사무실,상업지구인
라 데팡스. 내 뒤에 신개선문 그랑 다르슈Grande Arche가 있다.
전위예술-_-의 일종으로 구름을 표현한 구조물이 보인다. 그랑 다르슈는 엄청 크지만
그렇다고 그 큰 건물을 단순한 문으로 쓰지는 않는다. 현재 미술관으로 쓰고 있다.
또 문 중간에 표를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의 최상층으로 갈 수도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파리 전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는 관계로(돈을 아껴야 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문 앞에는 아주 커다란 광장이 넓다랗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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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데팡스는 많은 수의 '구역' 으로 나뉜다. 지금 나는 4구역에 있다. 주위에 쇼핑몰도 있고 커피숍도 있었지만 나는 사진을 찍는 것 자체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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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본부도 들렀다. 예복 정장을 착용하고 말이다.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인 국제 기구에 직접 들어와 보니 나는 저절로 경건해지고
나의 비전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외교쪽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외국인들과 토론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외교이고 그들의 일이지만, 이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나에게는 아득하기만 하다. 나에게는 좀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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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으로 갔다. 지금 나는 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장애로 그 장엄한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숨결을 완벽히 실감할 수는 없었다. 첫째로 궁전의 하이라이트인 거울의 방이 공사중이었고, 둘째로 겨울이고 또 춥고 흐린 날씨가 있었다. 하지만 내부의 금으로 장식한 침대며 가구며 벽, 천장, 문 등 모든 것들이 나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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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에 왔다.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이 건물에서 나는 현대미술을 접했고,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사람을 해부해 놓고 그것을 전시해 놓는, 피가 낭자한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의 모습이 예술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솔직히 현대미술은 마음에 안 든다. 대신 나는 오르세 미술관의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의 인상주의 화가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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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지식이 부족하여 루브르 박물관을 피상적으로밖에 접하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다. 그래도 모나리자와 니케아 여신 조각상을 보았기 때문에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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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기대를 많이 한 프랑스. 그리고 가장 기대를 충족시켜 준 프랑스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파리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호텔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러 모로 보았을 때 가장 좋은 여행지가 바로 프랑스 파리였다고 나는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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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학여행에 다녀왔다.
정말 재미있다. 세상은 넓고, 즐거움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민족사관고등학교 10기 민족반 대부분과 국제반 일부분이 모여서 함께 간 수학여행에서
총 5개국-영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네덜란드-을 다녀왔다.
사진 다 올리려니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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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외에는 관련이 전혀 없었던 내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KLM Royal Dutch Airlines라는 비행기를 탔을 때, 새롭고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처럼 젊은 승무원뿐만 아니라 아주머니 승무원들도 많아서 인상적이었고, 오히려 외국인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까지 12시간 정도 걸렸고, 시간의 흐름은 8시간 늦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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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폴 공항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는 다시 환승을 하여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갔다.
네덜란드의 첫인상은 매우 차분했다. 구름이 아주 짙게 끼고 비가 약간 와서 우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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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튼 스쿨에 갔다. 우리 학교의 최명재 설립자님께서 영국에 가셨을 때 이튼 스쿨의 학칙과 교육 시스템을 본받아 우리 학교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비록 우리가 갔을 때에는 학교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저 멀리 잔디구장에서 하키를 하는 고등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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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템즈강이고 내 뒤에는 국회의사당과 빅벤이 있다. 건물 참 멋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1300년대에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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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병들이 교대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비가 안 와서 근위병 교대식을 무사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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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미이라)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2000년 전 몸뚱아리에다가 그 얇은 리넨 천을 감싼 것을 지금 나한테 보여준다니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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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로제타 스톤이라고 세 가지의 고대 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중요한 유물이다. 반쪽은 어디 갔는지 까먹었지만 유리창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선명한 상형문자는 나를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대영박물관에서 이것만 보면 성공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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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열광한 수학여행의 꽃, 뮤지컬 '맘마 미아!'
역시 영국이 맘마 미아의 원조 국가다. 특히 이 Prince of Wales Theatre는 맘마미아를
몇십년동안 계속 공연해 왔다고 한다. 주인공의 딸이 너무 귀엽고 매력적이었는데 가까이서 보지 못하여 아쉽다. 관객들은 대부분 50대의 유럽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같은 뮤지컬을 보고 나서 50대인 그들도, 10대의 후반에 접어든 우리들도 모두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뮤지컬은 가장 기억에 남는 좋은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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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왔다.

  어제 11기 아이들이 왔다. 원래 오늘 오는 거였는데 계획이 바뀌었나 보다.

  아직 학교가 어떤지 잘 몰라 하는 것 같다. 우리 학교에서는 인사가 참 중요한데, 아직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법을 잘 몰라서 그런가보다. 중학생 티를 벗지 못해서일까, 가끔 옆에서 관찰하는 선배의 입장에서 보면 못마땅한 말과 행동을 하는 친구들이 몇명 있었다. 이 아이들은 우리 학교의 전통인 선후배 문화 중 '혼정실에서의 1시간'을 과연 알고 있을까? 2월 말 쯤에 있을 것 같은데, 그 후로는 11기 후배들이 인사를 잘 했으면 한다. 10기처럼 여러 번 혼나고 난 후에야 겨우 고개를 숙이는 억지의 인사가 아닌, 예전의 다정한 선후배 문화를 재구성할 시초가 될 수 있는 그런 인사를 원한다.

  이번에 2학년이 된 선배로서의 나는 두 가지 다짐을 한다. 첫째로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다. 오늘 지광현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이렇게 세게 공부해야 실력이 느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6단위가 다소 부담스러우나 항상 희망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해 나가면 모든 일은 저절로 잘 풀리게 될 것이다. 한편 방학 때 논술 실력을 다져 놓은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안 하려던 논술을 결국 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째로 선도부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1학년 때 선도부로서 모범적인 행실을 갖추지는 않았다. 나는 두상의 접선의 수직 방향으로 솟구치는 직모가 싫어서 웨이브펌을 두 번이나 한 사람이니까. 이제 2학년이 된 나는 그러한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힌 잘못된 태도를 고치고 후배들과 동기들에게 모범이 되는 학교 생활을 하려 한다. 내 생각에도 나는 선배들을 선배로 대하지 못한 것 같다. 한국과 일본 등에 산재해 있는 딱딱한 선후배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나의 행실을 규정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선배들에게 '나쁘게' 대하지는 않고 좋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학교,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 학교에서 그러한 노력은 후배의 진심이 아니라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태도로 비춰진다. 나는 1년동안 체득한 이러한 경험을 되살려 후배들에게 전해주려 한다. 여기는 엄격한 선후배 관계가 존재하는 학교이고, 너희들은 학교의 엄한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고.

  꼭 1년 전에 예비교육 할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학교에 온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설레이고, 불안하고, 사소한 것에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은 모두 기우(杞憂)이다. 2월은 3월을 준비하는 달이다. 2주간 수학여행으로 인해 3월을 준비할 시간은 남은 반쪽인 2주밖에 없지만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태도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겠다.


2006.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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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면 사랑을 이룰 수 없다.

나같은 전형적인 A형 남자, 게다가 소심하기로 유명한 황소자리까지 겹친 사람이라면 더욱 금언으로 여겨야 할 구절이다. 나는 미신은 안 믿지만 이런 혈액형과 별자리 따위가 인간의 성격을 규정짓는다고 어느 정도 믿는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혈액형과 별자리에 따라 정해진 성격을 갖고 이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내 마음 속에 그녀라는 존재는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을 어렴풋이 장식해 주고 떠나버렸다. 6월부터인가, 서늘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날씨가 온 하늘과 땅을 뒤덮는 그 때 그녀의 존재가 점점 눈에 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끝이 약간 안으로 말리는, 내가 좋아하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활발한 성격에 나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말과 행동, 이 모두가 계속적으로 나의 가슴 속에 주입되면서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점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누나, 오빠 등과 비슷한 모습의 사람에게 호감을 갖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도 끌리는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매우 소심한, 그러나 속으로는 거창한 상상에 취해 빠져 다니는 17세 소년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나를 즐겁게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상상이 그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을까. 경외심..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차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본 이후로..이상하다. 그녀와 그녀 옆의 친구들과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점점 물리적 거리는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내가 얼마나 그녀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메신저라고 하는 놈이 자꾸 나를 유혹했다. 그러나 나는 MSN에 접속하고 그녀를 발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말을 했으나, 사람이 만나지 못하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을까. MSN에서 만난다고 마음이 가까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상 공간이라서 그런가보다.

 7월 말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미친 짓이 시작되었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안 왔다. 또 보냈다. 그래도 안 왔다. 내가 자꾸 헛스윙 하는 것 같아 약간 불만 섞인 문자를 보냈다. 실수였다. 일단 그녀는 나의 제안이 많이 부담스러웠나보다. 어떻게 본다면, 아니 당연히 데이트 신청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많이 후회한다. 그녀에게 미안하고,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일방적인 설득은 설득당하는 쪽을 매우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한다는 진리를 왜 못 깨닫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마침내 알았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소심한 행동이 오히려 그녀에게 부담을 준 것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내가 애같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게 사실이라 같은 나이의 이성보다는 누나들에게 더 편할 때가 많다. 사실 나에게는 친누나가 있기 때문에 누나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사실이다. 나는 동갑의 이성 친구들이 누나같이 느껴지지 않으면 되레 접근을 꺼려하는 무의식적 본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본능을 인정해야 나의 이상한 행동이 합리화되니까. 하지만 이 본능은 고쳐야 되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고쳐지지 않으니까 소심하다는 말을 듣는다. 동갑내기들한테만.. 아무튼 공부와 사색을 하며 여름방학을 그럭저럭 잘 보냈다. 씁쓸한 마음은 속에 담아두면서 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나 또한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두 명 다 부담스럽게 했다. 내가 주범이고 내가 잘못했다. 소심하기 때문에 모든 걸 망쳐놓았다. 직접 대면하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사실 부끄러울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서로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는 MSN에 주로 나의 생각을 치중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용기를 내서 말은 못하고 그저 MSN에 로그인 표시 띄워놓고 마냥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을 밥먹듯 한 것이다. 그녀 대신 나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가끔씩, 그 대신 많이 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민을 털어놓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같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친구들이 더 편하게 느껴지더라. 그녀를 제외한 모든 그녀의 친구들이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중요한 그녀는 내가 좋아한 사람이었지만 다가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언젠가 나는 그녀의 친구의 주선으로 그녀와 대화를 할 기회를 가졌다. 너무 어색했다. 만나는 기회가 없으니까 어색할 수밖에 없다. 나는 게다가 소심하기도 하고, 그녀가 어울리는 친구들의 모임과는 관계가 적은 사람이니까 어색할 수밖에. 그녀와의 관계성을 늘리기 위해 어떻게 해보려고 했으나 나의 현실적 문제도 고려하면서 생각해 보니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녀와 대화를 했다. 미안해, 그때 일은 잊어주길 바래.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는 걸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정도의 대화를 했다. 그녀의 대답은 조심스러웠지만 날카로웠다. 내가 부담스럽다는 말이 날카로움의 첫번째 원인이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다. 8월의 문자만은 잊어줘. 아무튼 그녀는 나를 다시는 만나기 싫다는 조심스러운 말을 꺼냈고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뒤섞인 감정 속에서 그래, 그렇게 하자는 답을 하며 대화를 마쳤다.

   그 날 이후로 많은 날이 지나고 6월만 해도 평범했던 둘의 관계가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날 피했고, 나도 그녀를 피했다. 원래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오히려 서로 피하는 일이 쉬웠다. 나는 우리가 원래 만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 평범한 대화라도 자주 했으면 좋겠어. 부담가질 일 전혀 없이 말야. 뭐 그럭저럭 10월이 가고 그녀의 생일이 점점 다가왔다. 선물은 10월 말에 샀다. 꼭 내가 직접 선물을 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1월이 다가오자 그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다시 한번 생각나는 말인데, 이 학교의 환경 자체가 나에게 주위 사람 의식을 많이 하게 하나 보다. 주위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예의주시하는 생활에 익숙한 나는 이제야 그 고통을 알겠다. 내가 소심한 이유는 그런 환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생일날 나는 선물을 건네주지 못하고 서랍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선물은 결국 12월에 줄 수 있었다. 원래의 아름다운 포장이 아닌 나의 투박한 포장으로..

뭐 그렇다. 이제는 점점 잊혀져가는 작년의 기억들이 정말로 잊혀져간다. 그녀를 영원히 잊는 것이 나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은 잊을 수 있어도 그녀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나와의 거리가 아득히 먼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6.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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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이 지금도 잘 지내니?
잘 지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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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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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사관고등학교는 1996년 설립 이래로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고 있다. 나는 10기이다. 1,2,3,4,5,6기 선배들이란... 아득히 멀기만 하다. 그들은 이제 어른이다. 6기가 나보다 4살 많으니까 21살, 이제 사회에 입성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학교의 초기 단계 (내가 정의하는 민사고 역사의 1장) 에는 최명재 설립자님 (우리 10기는 할아버지라고 부른다.)께서 손수 학교의 동태를 파악하셨다. 학생들은 설립자님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인간적이지 못한 학교 시스템 속에서, 그 추운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의 겨울 속에서, 공부하다 졸면 설립자님께 끌려가 학교 분수대 물에 빠지면서 그렇게 자랐다. 그런 비인간적인 학교의 교육 방식이 놀라운 대학 진학이라는 결실을 맺어줬는지도 모른다. 6기,7기... 이제 8기 선배님들의 대학 진학 결과가 나오는 때이다. 이번 8기 국제계열은 행복하다. 많은 선배님들이 원하는 대학에 모두 붙으셨다. 이런 결과의 원동력이 무엇일까. 나는 8기 선배님까지 학교의 군대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악을 쓰고 공부한 것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9기 신입생들이 150명씩이나 들어오면서 학교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설립자님이 안 계심으로 인하여 학교의 경직성이 많이 풀어졌으니까.

나와 내 친구 준이(둘다 10기 인문반)는 이번 토론 캠프를 하면서 많은 선배님들과 마주쳤다. 5기부터 9기까지. 그 중 5,6,7,8기 선배님들은 9기,10기와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여러 가지를 분석하고 생각해본 결과 나와 준이는 우리 학교의 역사를 1장과 2장으로 구분했다.

우리 학교는 시간적으로는 9기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역사, 다른 말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근거 1 : 인원이 갑자기 늘었다.

  원래 엄격하지만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 워낙 적고, 설립자님 혼자서 엄청난 공을 들여 세우신 학교이기 때문에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설립자님은 모두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설립자님은 불운의 사고를 당해 학교에 계시지 못하게 되었고, 재정의 압박으로 인해 9기부터는 정원을 150명으로 확 늘렸다. 설립자님이라는 집안의 가장 같은 존재가 없어지니까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여타 학교와 비슷한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교장 이돈희 선생님은 설립자님과는 스타일이 정반대이신 분이라 학생들을 비인간적으로, 비이성적으로 몰아세우시지는 않으시다. 부드럽게 대해주신다. 교장선생님은 설립자님과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우리 학교는 교장선생님을 선두로 하여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정류장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과 선생님과의 유대감이 부족해지고, 학생들끼리의 유대감도 약화되었다. 동고동락하며 우정을 깊게 쌓았던 8기까지의 선배님들과는 달리 9기와 10기 학생들은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맥을 유지하되 깊은 우정까지는 고려해 보지 않는 것 같다. 나도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인원이 많으면서 우리 학교의 가족적인 분위기는 없어지고, 학생들이 모인 집단의 분위기가 팽배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 학교 역사책의 페이지는 2장으로 넘겨진다.


근거 2 : 학생들이 엄격한 규칙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근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제일 많다.

  정말 8기 선배님들이 들어오고 1학년 생활을 할때까지는 규칙이 매우 엄격했다. 정말 사소한 행동에도 규칙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고, 별 볼일 없는 행동과 사물들에 온갖 규칙을 적용함에 따라 학생들의 행동 각각이 모두 뭔가 조직화되어 있고 경직되어 보였다. 가장 쉬운 예는 바로 학생법정. 체육 선생님 혹은 생활지도 선생님이 손수 학생법을 어긴 학생에게 회초리의 형벌을 가하는 풍경은 8기때까지만 있었고, 9기가 들어오면서 없어졌다. 교장선생님은 그런 회초리 같은 것을 꽤 싫어하시는 것 같다. 뭐.. 나도 싫어한다. 또, 9기부터는 학생들이 교모를 안 쓰고 선생님들이 사모를 안 쓴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란다.(사실 좀 비효율적이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8기까지는 후배가 선배한테 잘못 보일 경우 가차없이 선배들의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혼정실(지하 1층) 은 무시무시한 형벌의 장소가 되고, 선배들 중 힘깨나 쓰는 분들이 후배들을 팼다고 한다. 그러한 전통은 민사고 설립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전통 때문에 8기까지의 선배님들은 엄격한 선후배 관계의 유지와 규칙의 준수 이 두 가지를 숙지하고 있다. 토론 캠프 중에 9기와 10기가 조금 캠프생들에게 부드럽게 대해서 한 5기 선배님에게 엄한 훈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9기와 10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우리 학교가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지금 9기와 10기가 학교에 있고 올해에 11기가 들어오는 이 시점에서 그렇게 예전의 낡고 엄격한 규칙을 그대로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9기가 들어오면서 설립자님의 부재, 회초리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엄격한 규칙이 없어지니 9기와 10기는 대체로 풀어질 수밖에 없고, 선생님들도 우리들과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허물이 없어지는 것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표출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여러 가지 변화로 인하여 규칙이 부드러워지고, 선후배 관계가 부드러워졌다. 1장에서 2장으로 전환했다.


  학교는 이제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고 있다. 9기 150명, 10기 150명, 11기 150명 .. 인원을 보아도 그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눈으로 알 수 있다. 우리 학교는 변화를 거듭하며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대선배님들 중 일부는 지금의 우리 학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기도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학교의 풍경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학교 풍경이 정말 궁금하다.

  우리 학교는 많은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강원도 산골의 자립형 사립고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 역사의 1장은 8기에서 끝나게 되었다. 9기부터 우리 학교 역사의 2장이 시작된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우리 학교가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하리라 나는 믿는다.


200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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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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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학교에 있다.

1월 2일부터 7일까지 우리 학교에 와서 토론과 논술의 대략적인 교육을 받고 돌아갈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다.

물론 급여를 노린 점도 없지는 않지만 ㅎㅎ

20분 후면 기숙사 방을 나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한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를 9시 반부터 지금까지 방에서 하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만큼 아이들에게 많이 가르치고 아이들도 나를 잘 따르고 많이 배워갔으면 한다.

여기서 나 또한 애들 가르치면서 토론과 논술에 대해 많이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 수업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은, 나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첫째이고,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이번 토론 캠프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발산된다는 것이 둘째이다. 정말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 벌써 11시가 가까워오네. 이제 나가봐야겠다.


200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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