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 can playboys be feminists 라고 검색을 한 결과,
예/아니오 라고 딱 잘라 대답해주는 다른 네티즌이 있는 지식iN 류의 사이트는 검색결과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의 시선을 끈 글이 있어서 바로 읽어보았다.
바로 잡지 '플레이보이' 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비판 글이었다.
원래 나의 질문은 '바람둥이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였다. 바람둥이가 여러 명의 여성과 육체적 사랑을 갈구하든 정신적 사랑을 갈구하든 상관없이 예/아니오의 답이 논리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래의 글을 읽고 그 답은 '아니오' 라고 추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원문
플레이보이 페미니즘: 어떻게 신사들의 포르노 쓰레기가 여성운동을 포섭하였는가
페미니스트에 관련된 내용을 온라인 잡지에 통합하려는 플레이보이의 최근 시도는 남성만을 유익하게 하는 '여성 해방' 담론을 팔고자 하는 오랜 기간에 걸친 노력 중 일부다.
휴 헤프너에게 질문을 한다면 그는 '페미니즘 같은 게 존재하기도 전부터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였다' 라고 답할 것이다. 이번 주, 코스모폴리탄 지는 헤프너가 자신에게 쓴 사랑 고백 편지를 재출판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자체의 최악의 적이며, '플레이보이'가 여성 해방의 진짜 원천이라는 내용이다. 그는 "누구나 제대로 인식이 박혀있다면 성적 대상이 되고 싶어한다." 라고 기술한다.
이 잡지 기사는 원래 2007년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헤프너는 1960년대부터 같은 논의를 해오고 있다. 그리고 사실 '플레이보이'는 그 때에도 그만의 '여성 해방' 담론을 선전하였다. 생식에 관한 권리 옹호 그리고 당연한 '성적 해방'이 그 내용이다. 플레이보이 재단은 심지어 낙태 권리에 찬성하는 기관들과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에 기부금을 내서 보건 센터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랜 경력의 편집자인 냇 레흐만은 '플레이보이'가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논의 주제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전에 이 중요한 페미니스트 주제들을 꺼내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플레이보이'의 여성에 대한 지지는 최소한 선택적이었고, 그 당시에는 그 지지에 동의한 페미니스트들이 적었다. '플레이보이'는 아직 주로 누드 사진으로 알려져 있었고 특정 종류의 여성 (그리고 특정 종류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잡지의 비선호는 명백했다. 잡지의 '플레이메이트'들은 젊고 행복하고 단순한 여자였고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고 헤프너는 1967년에 오리아나 팔라치 기자에게 말했다. 문제는 페미니스트 운동은 여성들이 일차원적 장난감이 아닌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싸워왔다는 점이다.
여성 권리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우리들의 대상화를 고수하는 것은 2세대 페미니스트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집필진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와 오늘날의 자유주의자에게 제시되는 페미니즘은 잡지의 기풍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유방 임플란트부터 자신의 누드 촬영과 폴 댄스 교실까지 모두 '권리 신장'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2014년의 가장 뜨거웠던 주제가 비욘세의 페미니즘일 때, 그 생각은 오직 '플레이보이'가 페미니즘 운동을 자본화하려는 노력을 두배로 늘릴 것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플레이보이'는 여성을 성적으로 해방된 자유연애의 지지자로 상정해야만 존재한다. 그처럼 미국의 피임약의 소개는 여성 해방뿐만 아니라 성적 혁명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조건 없이 자유롭게 여성은 이제 '남성처럼' 섹스를 할 수 있다. '플레이보이'는 결국 아직도 남성중심적인 '여성 해방' 담론을 생산하고 있었다. 여성은 '성적'일 수 있도록 허용되었지만 이는 남성을 결국 만족시켜야 하는 성 정체성의 일차원적 시각에 국한되었다.
책 '우파 여성'에서 안드레아 드워킨은 성적 혁명에 대해 "혁명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혁명의 목적은 남성을 부르주아의 제약 없이 여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방시키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 점에서 혁명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적 혁명이 남성의 위대한 옛 이야기일 때 여성에게 그것은 차라리 마약을 한 듯하고 꽃무늬처럼 화려한 강간 문화에 가까웠다. 과거에는 여성은 이론적으로 임신할 수 있다는 위험을 들어 섹스에 '싫다'고 말할 수 있었다. 피임약의 등장부터 남성의 시각으로는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없었다.
'플레이보이'가 60년 전에 한 것은 대중적 페미니즘(그리고 일반적인 자유주의 정치)이 오늘날 취한 방향을 반영한다. '플레이보이'의 철학은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선택'을 다른 것보다 우선시한 개인주의였고, 국가는 미국의 꿈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서양 남성은 진보주의자든 기업 권력이나 제국주의나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든 '플레이보이'의 페미니즘 개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성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 그리고 가부장주의가 여성의 몸과 성 정체성의 표현법을 독재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들은 포르노 문화를 포용하며 남성의 시선을 해방적인 것으로 자리매김시켰다.
과거에 상류층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남성이 사용하고 남용할 수 있는 여성 계층을 만들어낸 성녀-창녀 이분법을 타파하려는 상상의 노력에서, 많은 진보적인 남성(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은 모든 여성을 '창녀'로 구성하는 '해답'을 찾았다. 여성은 출산, 섹스, 혹은 무급 가사노동 등을 통해 남성에게 일방향 혹은 양방향으로 봉사하는 육체라는 개념에 도전하기보다는, 그들은 '플레이보이'의 '모든 여성은 성교 가능하다'라는 해방의 제시안을 포용했다. 그리고 모든 여성은 성적 대상화되고 소비 가능한 객체가 될 뿐 아니라 여성 또한 그것을 사랑할 것으로 가정했다. 여성은 우리들이 억압된 내숭쟁이라고 간주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그걸 하고 싶어하는 상태'가 되는 법을 배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방은 남성에 대한 성교 가능성에 좌우되었다.
2014년 개시한 '플레이보이'의 '안전한 일자리' 웹사이트는 페미니스트의 내용을 포섭해왔다. 많은 이들이 이를 재브랜드화 노력으로 보았을 때, '플레이보이'의 이러한 노력은 잡지의 역사에 깊이 배어들었다. 디지털 매체 고위 부사장 코리 존스는 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에 플레이보이 브랜드는 항상 '포용적이고' '낙태를 찬성하며'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브랜드가 되어 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플레이보이'의 선도적인 '페미니스트' 필자는 노아 베를라츠키로, 그의 저작은 '플레이보이'의 페미니즘에 대한 오랜 접근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뭐라고 말하든 페미니즘에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안다. 라는 그의 정치적 철학은 '모두에 대한 평등한 객체화' 인 것으로 보이고 이는 브랜드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는 더 많은 여성을 우리가 '따먹을 수 있다'고 볼수록 더 많은 여성이 해방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플레이보이'와 베를라츠키같은 필자들은 여성 정체성에 대한 글에서 '선택'과 '동의'를 강조한다. 객체화된 존재는 객체화에 대해 열심이어야 하고 강요받아서는 안 되고 투덜대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헤프너가 1960년대에 팔고 있었던 개념을 정확히 강화시켜주는 데 일조한다. '플레이보이'의 남성은 '신사'다. 즉 그는 길거리의 여자를 아무나 부르지 않고 복수 포르노를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여성의 '광란적인' 동의 (결국 아무도 우울한 경험은 좋아하지 않는다) 를 원하고, 그는 여성이 객체화를 '선택'했기를 원하며 그 안에 여성이 즐기는 뭔가가 있다는 식의 사고의 틀을 정하고 싶어한다.
최근 저작에서 베를라츠키는 잘못되게도 권리 신장이 남성 독재의 미의 기준을 통해 달성 가능하다는 개념을 비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잔인하고 배타적이라고 썼다. 객체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여성에 대한 개인적 '공격'으로 오해하는 것은 대화를 개인 밖으로 확장하기를 원치 않는 자유주의자들에게 흔한 행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언어를 사용하여 베를라츠키는 ‘플레이보이’를 집필하며 백인 남성으로서의 그에게 요구된, 그를 지지하는 권력구조에 도전하는 여성을 내치고 비방할 책임성의 결여를 강조한다. 헤프너와 같이 그는 자신을 관대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페미니스트인’ 남성-‘좋은 남자들’ 중 한 명-, 너무 친절해서 ‘모든’ 여성의 공정하고 평등한 성적 대상화에 착수하는 사람으로 본다.
겉보기에는 그의 저작과 ‘플레이보이’의 ‘페미니스트’적 마케팅 노력에 대한 비판(그 중 몇은 내가 했다) 에 잘 알고 있는 베를라츠키는 최근 방어적인 태도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잡지 집필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플레이보이’가 여성에게 대화를 건네지 않고 대신 여성을 ‘자위를 위한 환상’으로 사용한다는 수잔 브라운밀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사실 그에게 대화를 건네고 있다고 주장한다. 베를라츠키는 특정 여성의 목소리를 그의 페미니즘과의 계속되는 전투에 포함시키는 습관이 있다. 이 특정 여성은 그가 이미 믿고 전달하고 싶은 것을 그에게 앵무새처럼 답변해줄 것이다. 이는 이전 주인들로부터 배운 영리한 움직임이다. 성적 착취 산업은 항상 여성을 무대 전면에 내세우곤 했다. ‘섹시함 = 권리 신장’ 이라는 주문에 희망을 품는 여성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섹시한 섹스에도 불구하고 ‘플레이보이’가 아직 가부장적인 태도를 끝내려면 멀었다.
연극배우이자 ‘플레이보이’ 집필진이자 저작 중 ‘왜 모든 여성은 핀업 사진 촬영을 해봐야 하는가’가 있는 사라 베닝카사는 그 자신을 ‘섹스에 긍정적이고 육체에 긍정적이고 재미를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라고 기술한다. 이것만으로는 섹스, 육체, 재미를 사랑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자질들이 ‘위협적이지 않은 페미니스트’의 규범이며 따라서 이상적인 ‘플레이보이 페미니스트’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의 성적 환상과 간섭하지 않는 종류의 페미니즘을 대표한다. 당신은 플레이메이트의 오른쪽을 따라 놓여진 ‘나는 재미있고 쉽고 뭐든지 하고 싶어해!’라는 단어들을 상상할 수 있다.
사이트에 최근 게시된 다른 ‘페미니스트’ 기사들은 성매매를 탈범죄화해달라는 간청, 남성에게 구강 성교를 해주는 것이 얼마나 권리를 신장시키는 일인지에 대한 짧은 글, 페미니즘과 포르노의 양립성에 대한 두 건의 글을 포함하고 있다. 이 메시지는 어떤 걸 특정한 섬세한 메시지가 아니다.
‘플레이보이’ 는 남성의 여성을 탐닉해야 하는 아름다운 창조물 혹은 언제나 좋은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는 세상 편한 여자들로 보는 시각에 도전하는 페미니스트 집필진을 절대 등단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등단시키는 것은 ‘플레이보이’가 대변하는 모든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다. 쭈그렁 할망구나 증오의 대상인 내숭쟁이 반대자들을 묘사하는 필자들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좋은 마케팅 전략이다.
베를라츠키와 같은 집필진 (그리고 전체적으로 ‘플레이보이’)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 해방이 남성이 그들을 ‘아름답다’고 알아내는 능력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다. 페미니스트가 나체의 여성의 몸을 ‘역겹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거짓말은 특별히 의도적으로 호도되었다. 우리는 육체 혐오가 그와 같은 남성과 다른 ‘플레이보이’ 독자들로부터 기인함을 잘 안다. 우리의 행복, 가치, 우리 자신을 사랑할 능력, 우리의 인간성, 우리의 자유가 그들의 성적 흥분과 만족에 달렸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와 그 동류의 남성이다. 베를라츠키의 여성혐오는 (‘플레이보이’와 같이) 미묘하고 ‘섹스를 긍정하는 페미니즘’과 자유주의의 언어로 위장한다. 그것은 ‘여성을 옹호하는’ 반 페미니즘의 한 종류다. 그의 타이밍이 이보다 적절할 수 없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진보적인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철저히 쓰레기 취급을 당한 이상 ‘플레이보이’ 페미니즘이 재등장할 때가 무르익었다. 오늘날의 젊은 페미니스트는 자신의 포르노를 만들고 싶어하고, 스트립쇼 공연을 하고, (다만 무료로, 왜냐하면 일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이므로) 그에 대한 객체화를 킴 카다시안 류의 인스타그램 가슴 셀카를 통해 습득하고, 그리고 매춘을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이 자신들을 위해 하는 권리 신장용 선택이라고 재브랜드화한다.
‘플레이보이’는 절대 그들이 생각하는 해방을 여성에게 강제로 부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동의를 통해 기꺼이 해방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우리가 해방을 우리 것으로 부르기를 원했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플레이보이’ 페미니즘은 주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친자본주의이고, 성 산업을 옹호하고, 아름다움에 관련된 산업을 옹호하고, 객체화를 긍정한다. 그것은 남성 권력에 대해 도전을 덜 하고, 그보다는 ‘자유’를 더 커다란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놓는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대화를 피하기 위해 ‘섹스’를 옹호하고 ‘선택’, ‘대리인’, 그리고 ‘동의’ 와 같은 유행어들을 사용한다. 그것은 남성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지만 우리가 토끼 옷을 벗어제끼고 동굴 속으로 들어갈 ‘선택’을 지지한다.
바람둥이의 도덕성 평가는 그가 상대 여성들에 대해 예상하는 '해방의 정도'에 달렸다. 바람둥이는 언제나 주위에서 책임을 물으면 '어쨌든 상대 여성들도 좋아했고, 그들도 '동의'하고 '선택'했으니까 나는 죄 없어요' 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특정한 1명의 여성하고만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여러 명을 동시에 만나면서 여러 명에 대한 제각기 다른 성적 만족을 추구해 나간다. 어느 정도로 육체가 맞닿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성적 만족은 상상도 포함한다.
이 바람둥이가 누가 봐도 여성혐오에 빠져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그가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는 경우다. 하지만 만약 바람둥이가 상대방의 일상을 정중하게 물어보고 가능한 시간에만 만나고 가능한 시간에만 전화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눈다면? 그리고 그가 동시에 다른 여성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 공개하고 있다면? 여기까지만 보면 바람둥이의 입장에서는 거의 페미니스트라는 목적지까지 온 것 같다. 그러나, 상대 여성 각각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최소 한 명은 최소 한 번은 자신이 객체화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람둥이가 상대에게 친절하고 외모 외의 요소도 칭찬해준다고 해서 상대가 객체의 여성이 아닌 주체의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대상 중에 자유연애자가 아닌 여성이 최소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여성은 자유연애의 반대, 즉 나와 만나고 있다면 다른 여성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남성에게 요청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 논의한 바람둥이를 논리적으로 여성혐오의 주체로 격하시킨다. 여성의 규범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남성은 그 여성에게는 여성혐오자로 보인다. 페미니스트로 인정받는 절차는 만장일치제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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