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 can playboys be feminists 라고 검색을 한 결과,


 예/아니오 라고 딱 잘라 대답해주는 다른 네티즌이 있는 지식iN 류의 사이트는 검색결과에 나오지 않았지만 나의 시선을 끈 글이 있어서 바로 읽어보았다.

 바로 잡지 '플레이보이' 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비판 글이었다. 

 원래 나의 질문은 '바람둥이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가?' 였다. 바람둥이가 여러 명의 여성과 육체적 사랑을 갈구하든 정신적 사랑을 갈구하든 상관없이 예/아니오의 답이 논리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래의 글을 읽고 그 답은 '아니오' 라고 추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원문

http://www.newstatesman.com/politics/2015/06/playboy-feminism-how-gentleman-s-porn-rag-coopted-women-s-movement


플레이보이 페미니즘: 어떻게 신사들의 포르노 쓰레기가 여성운동을 포섭하였는가


 페미니스트에 관련된 내용을 온라인 잡지에 통합하려는 플레이보이의 최근 시도는 남성만을 유익하게 하는 '여성 해방' 담론을 팔고자 하는 오랜 기간에 걸친 노력 중 일부다.


 휴 헤프너에게 질문을 한다면 그는 '페미니즘 같은 게 존재하기도 전부터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였다' 라고 답할 것이다. 이번 주, 코스모폴리탄 지는 헤프너가 자신에게 쓴 사랑 고백 편지를 재출판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자체의 최악의 적이며, '플레이보이'가 여성 해방의 진짜 원천이라는 내용이다. 그는 "누구나 제대로 인식이 박혀있다면 성적 대상이 되고 싶어한다." 라고 기술한다.


 이 잡지 기사는 원래 2007년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헤프너는 1960년대부터 같은 논의를 해오고 있다. 그리고 사실 '플레이보이'는 그 때에도 그만의 '여성 해방' 담론을 선전하였다. 생식에 관한 권리 옹호 그리고 당연한 '성적 해방'이 그 내용이다. 플레이보이 재단은 심지어 낙태 권리에 찬성하는 기관들과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에 기부금을 내서 보건 센터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랜 경력의 편집자인 냇 레흐만은 '플레이보이'가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의 논의 주제가 무엇인지 찾아내기 전에 이 중요한 페미니스트 주제들을 꺼내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플레이보이'의 여성에 대한 지지는 최소한 선택적이었고, 그 당시에는 그 지지에 동의한 페미니스트들이 적었다. '플레이보이'는 아직 주로 누드 사진으로 알려져 있었고 특정 종류의 여성 (그리고 특정 종류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잡지의 비선호는 명백했다. 잡지의 '플레이메이트'들은 젊고 행복하고 단순한 여자였고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고 헤프너는 1967년에 오리아나 팔라치 기자에게 말했다. 문제는 페미니스트 운동은 여성들이 일차원적 장난감이 아닌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싸워왔다는 점이다.


 여성 권리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우리들의 대상화를 고수하는 것은 2세대 페미니스트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집필진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와 오늘날의 자유주의자에게 제시되는 페미니즘은 잡지의 기풍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유방 임플란트부터 자신의 누드 촬영과 폴 댄스 교실까지 모두 '권리 신장'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2014년의 가장 뜨거웠던 주제가 비욘세의 페미니즘일 때, 그 생각은 오직 '플레이보이'가 페미니즘 운동을 자본화하려는 노력을 두배로 늘릴 것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플레이보이'는 여성을 성적으로 해방된 자유연애의 지지자로 상정해야만 존재한다. 그처럼 미국의 피임약의 소개는 여성 해방뿐만 아니라 성적 혁명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조건 없이 자유롭게 여성은 이제 '남성처럼' 섹스를 할 수 있다. '플레이보이'는 결국 아직도 남성중심적인 '여성 해방' 담론을 생산하고 있었다. 여성은 '성적'일 수 있도록 허용되었지만 이는 남성을 결국 만족시켜야 하는 성 정체성의 일차원적 시각에 국한되었다.


 책 '우파 여성'에서 안드레아 드워킨은 성적 혁명에 대해 "혁명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았다. 혁명의 목적은 남성을 부르주아의 제약 없이 여성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방시키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 점에서 혁명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적 혁명이 남성의 위대한 옛 이야기일 때 여성에게 그것은 차라리 마약을 한 듯하고 꽃무늬처럼 화려한 강간 문화에 가까웠다. 과거에는 여성은 이론적으로 임신할 수 있다는 위험을 들어 섹스에 '싫다'고 말할 수 있었다. 피임약의 등장부터 남성의 시각으로는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없었다.


 '플레이보이'가 60년 전에 한 것은 대중적 페미니즘(그리고 일반적인 자유주의 정치)이 오늘날 취한 방향을 반영한다. '플레이보이'의 철학은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선택'을 다른 것보다 우선시한 개인주의였고, 국가는 미국의 꿈에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서양 남성은 진보주의자든 기업 권력이나 제국주의나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든 '플레이보이'의 페미니즘 개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성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 그리고 가부장주의가 여성의 몸과 성 정체성의 표현법을 독재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들은 포르노 문화를 포용하며 남성의 시선을 해방적인 것으로 자리매김시켰다.


 과거에 상류층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남성이 사용하고 남용할 수 있는 여성 계층을 만들어낸 성녀-창녀 이분법을 타파하려는 상상의 노력에서, 많은 진보적인 남성(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은 모든 여성을 '창녀'로 구성하는 '해답'을 찾았다. 여성은 출산, 섹스, 혹은 무급 가사노동 등을 통해 남성에게 일방향 혹은 양방향으로 봉사하는 육체라는 개념에 도전하기보다는, 그들은 '플레이보이'의 '모든 여성은 성교 가능하다'라는 해방의 제시안을 포용했다. 그리고 모든 여성은 성적 대상화되고 소비 가능한 객체가 될 뿐 아니라 여성 또한 그것을 사랑할 것으로 가정했다. 여성은 우리들이 억압된 내숭쟁이라고 간주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그걸 하고 싶어하는 상태'가 되는 법을 배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방은 남성에 대한 성교 가능성에 좌우되었다.

 2014년 개시한 '플레이보이'의 '안전한 일자리' 웹사이트는 페미니스트의 내용을 포섭해왔다. 많은 이들이 이를 재브랜드화 노력으로 보았을 때, '플레이보이'의 이러한 노력은 잡지의 역사에 깊이 배어들었다. 디지털 매체 고위 부사장 코리 존스는 콜럼비아 저널리즘 리뷰에 플레이보이 브랜드는 항상 '포용적이고' '낙태를 찬성하며' '여성 권리를 옹호하는' 브랜드가 되어 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플레이보이'의 선도적인 '페미니스트' 필자는 노아 베를라츠키로, 그의 저작은 '플레이보이'의 페미니즘에 대한 오랜 접근법을 설명해주고 있다.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뭐라고 말하든 페미니즘에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안다. 라는 그의 정치적 철학은 '모두에 대한 평등한 객체화' 인 것으로 보이고 이는 브랜드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는 더 많은 여성을 우리가 '따먹을 수 있다'고 볼수록 더 많은 여성이 해방된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플레이보이'와 베를라츠키같은 필자들은 여성 정체성에 대한 글에서 '선택'과 '동의'를 강조한다. 객체화된 존재는 객체화에 대해 열심이어야 하고 강요받아서는 안 되고 투덜대서도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헤프너가 1960년대에 팔고 있었던 개념을 정확히 강화시켜주는 데 일조한다. '플레이보이'의 남성은 '신사'다. 즉 그는 길거리의 여자를 아무나 부르지 않고 복수 포르노를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여성의 '광란적인' 동의 (결국 아무도 우울한 경험은 좋아하지 않는다) 를 원하고, 그는 여성이 객체화를 '선택'했기를 원하며 그 안에 여성이 즐기는 뭔가가 있다는 식의 사고의 틀을 정하고 싶어한다.


 최근 저작에서 베를라츠키는 잘못되게도 권리 신장이 남성 독재의 미의 기준을 통해 달성 가능하다는 개념을 비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잔인하고 배타적이라고 썼다. 객체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여성에 대한 개인적 '공격'으로 오해하는 것은 대화를 개인 밖으로 확장하기를 원치 않는 자유주의자들에게 흔한 행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언어를 사용하여 베를라츠키는 ‘플레이보이’를 집필하며 백인 남성으로서의 그에게 요구된, 그를 지지하는 권력구조에 도전하는 여성을 내치고 비방할 책임성의 결여를 강조한다. 헤프너와 같이 그는 자신을 관대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페미니스트인’ 남성-‘좋은 남자들’ 중 한 명-, 너무 친절해서 ‘모든’ 여성의 공정하고 평등한 성적 대상화에 착수하는 사람으로 본다.


 겉보기에는 그의 저작과 ‘플레이보이’의 ‘페미니스트’적 마케팅 노력에 대한 비판(그 중 몇은 내가 했다) 에 잘 알고 있는 베를라츠키는 최근 방어적인 태도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잡지 집필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플레이보이’가 여성에게 대화를 건네지 않고 대신 여성을 ‘자위를 위한 환상’으로 사용한다는 수잔 브라운밀러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사실 그에게 대화를 건네고 있다고 주장한다. 베를라츠키는 특정 여성의 목소리를 그의 페미니즘과의 계속되는 전투에 포함시키는 습관이 있다. 이 특정 여성은 그가 이미 믿고 전달하고 싶은 것을 그에게 앵무새처럼 답변해줄 것이다. 이는 이전 주인들로부터 배운 영리한 움직임이다. 성적 착취 산업은 항상 여성을 무대 전면에 내세우곤 했다. ‘섹시함 = 권리 신장’ 이라는 주문에 희망을 품는 여성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섹시한 섹스에도 불구하고 ‘플레이보이’가 아직 가부장적인 태도를 끝내려면 멀었다.


 연극배우이자 ‘플레이보이’ 집필진이자 저작 중 ‘왜 모든 여성은 핀업 사진 촬영을 해봐야 하는가’가 있는 사라 베닝카사는 그 자신을 ‘섹스에 긍정적이고 육체에 긍정적이고 재미를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라고 기술한다. 이것만으로는 섹스, 육체, 재미를 사랑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자질들이 ‘위협적이지 않은 페미니스트’의 규범이며 따라서 이상적인 ‘플레이보이 페미니스트’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의 성적 환상과 간섭하지 않는 종류의 페미니즘을 대표한다. 당신은 플레이메이트의 오른쪽을 따라 놓여진 ‘나는 재미있고 쉽고 뭐든지 하고 싶어해!’라는 단어들을 상상할 수 있다.


 사이트에 최근 게시된 다른 ‘페미니스트’ 기사들은 성매매를 탈범죄화해달라는 간청, 남성에게 구강 성교를 해주는 것이 얼마나 권리를 신장시키는 일인지에 대한 짧은 글, 페미니즘과 포르노의 양립성에 대한 두 건의 글을 포함하고 있다. 이 메시지는 어떤 걸 특정한 섬세한 메시지가 아니다.


 ‘플레이보이’ 는 남성의 여성을 탐닉해야 하는 아름다운 창조물 혹은 언제나 좋은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는 세상 편한 여자들로 보는 시각에 도전하는 페미니스트 집필진을 절대 등단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등단시키는 것은 ‘플레이보이’가 대변하는 모든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다. 쭈그렁 할망구나 증오의 대상인 내숭쟁이 반대자들을 묘사하는 필자들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좋은 마케팅 전략이다.


 베를라츠키와 같은 집필진 (그리고 전체적으로 ‘플레이보이’)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 해방이 남성이 그들을 ‘아름답다’고 알아내는 능력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다. 페미니스트가 나체의 여성의 몸을 ‘역겹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거짓말은 특별히 의도적으로 호도되었다. 우리는 육체 혐오가 그와 같은 남성과 다른 ‘플레이보이’ 독자들로부터 기인함을 잘 안다. 우리의 행복, 가치, 우리 자신을 사랑할 능력, 우리의 인간성, 우리의 자유가 그들의 성적 흥분과 만족에 달렸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와 그 동류의 남성이다. 베를라츠키의 여성혐오는 (‘플레이보이’와 같이) 미묘하고 ‘섹스를 긍정하는 페미니즘’과 자유주의의 언어로 위장한다. 그것은 ‘여성을 옹호하는’ 반 페미니즘의 한 종류다. 그의 타이밍이 이보다 적절할 수 없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진보적인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철저히 쓰레기 취급을 당한 이상 ‘플레이보이’ 페미니즘이 재등장할 때가 무르익었다. 오늘날의 젊은 페미니스트는 자신의 포르노를 만들고 싶어하고, 스트립쇼 공연을 하고, (다만 무료로, 왜냐하면 일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이므로) 그에 대한 객체화를 킴 카다시안 류의 인스타그램 가슴 셀카를 통해 습득하고, 그리고 매춘을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이 자신들을 위해 하는 권리 신장용 선택이라고 재브랜드화한다.


 ‘플레이보이’는 절대 그들이 생각하는 해방을 여성에게 강제로 부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동의를 통해 기꺼이 해방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우리가 해방을 우리 것으로 부르기를 원했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플레이보이’ 페미니즘은 주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친자본주의이고, 성 산업을 옹호하고, 아름다움에 관련된 산업을 옹호하고, 객체화를 긍정한다. 그것은 남성 권력에 대해 도전을 덜 하고, 그보다는 ‘자유’를 더 커다란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놓는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대화를 피하기 위해 ‘섹스’를 옹호하고 ‘선택’, ‘대리인’, 그리고 ‘동의’ 와 같은 유행어들을 사용한다. 그것은 남성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지만 우리가 토끼 옷을 벗어제끼고 동굴 속으로 들어갈 ‘선택’을 지지한다.



 바람둥이의 도덕성 평가는 그가 상대 여성들에 대해 예상하는 '해방의 정도'에 달렸다. 바람둥이는 언제나 주위에서 책임을 물으면 '어쨌든 상대 여성들도 좋아했고, 그들도 '동의'하고 '선택'했으니까 나는 죄 없어요' 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특정한 1명의 여성하고만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여러 명을 동시에 만나면서 여러 명에 대한 제각기 다른 성적 만족을 추구해 나간다. 어느 정도로 육체가 맞닿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성적 만족은 상상도 포함한다. 

 

 이 바람둥이가 누가 봐도 여성혐오에 빠져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그가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는 경우다. 하지만 만약 바람둥이가 상대방의 일상을 정중하게 물어보고 가능한 시간에만 만나고 가능한 시간에만 전화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눈다면? 그리고 그가 동시에 다른 여성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 공개하고 있다면? 여기까지만 보면 바람둥이의 입장에서는 거의 페미니스트라는 목적지까지 온 것 같다. 그러나, 상대 여성 각각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최소 한 명은 최소 한 번은 자신이 객체화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람둥이가 상대에게 친절하고 외모 외의 요소도 칭찬해준다고 해서 상대가 객체의 여성이 아닌 주체의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대상 중에 자유연애자가 아닌 여성이 최소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여성은 자유연애의 반대, 즉 나와 만나고 있다면 다른 여성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남성에게 요청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 논의한 바람둥이를 논리적으로 여성혐오의 주체로 격하시킨다. 여성의 규범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남성은 그 여성에게는 여성혐오자로 보인다. 페미니스트로 인정받는 절차는 만장일치제다.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이 바람둥이가 여러 여성들을 만나는 이유가 '좋아하는 여성이기 때문' 이 아니라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서' 혹은 '같이 어떤 프로젝트를 하는 동료이므로' 라면 그 사람은 바람둥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즉 바람둥이의 가장 넓은 정의는 좋아하는 여성을 2명 이상 동시에 만나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만남도 끊긴다. 여성의 존재 가치는 바람둥이의 '좋아하는 마음'에 달렸다. 그리고 이 좋아하는 마음이 진전된 극단에는 언제나 실재하든 상상 속이든 '섹스'가 있다. 결국 바람둥이는 자기가 원할 때 자기 의지에 따라, 비록 상대의 의견을 묻는다 할지라도 상대를 '나의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대로 쏟아부을 수 있는 바구니' 로 취급한다. 그러한 취급이 곧 객체화다.

 바람둥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게 여러가지 제안을 하려고 해도 논리적으로 반박당할 여지가 너무나도 많다. 결국 안타깝게도 바람둥이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싶어졌고, 특히 남성이 페미니스트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을 요구받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어졌다. 페미니즘 안에도 워낙 방대하게 계파가 나뉘다보니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는 누구일까 궁금하다.


Posted by 마키아또
,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At Day's Close: Night in Times Past) / 로저 에커치 지음 /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고대 그리스의 의식에는 밤을 새워 벌어지던 판키데스라는 축제가 있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치금지법으로 귀족 계급에게만 비단이나 공단 옷을 허용했다.


정신이 돌다 라는 단어로 moonstruck 이라는 단어가 있다.


영국 서부에서는 밤에 도깨비불 때문에 생기는 사고를 가리켜 '픽시 레드' (Pixy led, '픽시가 이끈' 사고라는 의미)라 했다.


술을 진탕 마시고 구덩이나 물이나 낭떠러지에 빠지거나 기절하거나 코를 너무 골아 미친개로 오인되어 총에 맞아 죽거나 하는 사고사를 컨셉으로 한 바, 즉 바 인테리어를 낭떠러지나 계곡이나 사냥총 등을 이용해서 하면 어떨까.


1720년 프랑스 오를레앙도 형편없는 하수 시설 때문에 어떤 길은 늪지로 바뀌었다.


프랑스에는 '파리의 흙처럼 더럽다' 는 말이 있다.


도시의 길거리에 등을 밝히고 다니는 사람들은 linkboys 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랜턴 운반자라는 의미로 porte-flambeaux 또는 falot 라고 불렀다.


런던에서 횃불꾼은 길거리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닌다는 나쁜 평판을 얻었다. 영국과 달리 구체제 말의 파리에서는 횃불꾼들이 정치적 첩자로 악명 높았다.


덴마크에서는 집에 침입한 도둑이 동전 몇 개를 범행 현장에 놔두면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관리들은 시체를 건지기 위해 강을 가로질러 그물을 걸어두기도 했다.


개인적 명예에 대한 남성들의 숭배가 덜 확고한 영국이나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 개인적 복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층 계급 내의 사회적 경쟁은 도박, 경마, 사냥과 같은 다른 분출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1666년 9월 2일 이른 아침 빵집에서 발생한 런던 대화재는 아직도 인류 역사상 최악으로 꼽히고 있다. 동풍의 부채질을 받은 불은 나흘에 걸쳐 런던의 5분의 4를 태웠다.


미국에서는 1720년대 초 보스턴과 20년 뒤 뉴욕의 예에서 보듯 불만을 가진 노예들이 방화를 저질렀다.


1696년 스위스의 한 목사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해가 지는 저녁에 가축은 외양간으로 돌아오고, 숲의 새들도 조용해진다. 인간들만이 어리석게 자연과 일반적 질서를 거슬러 행동한다."


근대 초 전반에 걸쳐 밤이라는 위험한 영역은 교회와 국가의 감시를 벗어나 있었다. 유럽의 공동체들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행정 제도와 종교 제도의 사형대는 밤에는 잠이 들었다.


중세 이후에야 도시의 통행금지가 약간 느슨해져 오후 8시가 아닌 9시나 10시로 바뀌었고, 그것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기준 시간이 되었다.


베네치아에서 이방인은 치안판사의 허락 없이 하룻밤 이상 머물 수 없었다.


평판이 좋은 남자들도 어두워진 뒤에는 제약을 받았다. 예컨대 카탈루냐에서는 네 명 이상의 남자가 함께 걸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는 1702년의 법령에 의해 귀족들이 총기를 갖고 다니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하인들도 지팡이나 몽둥이를 빼앗겼다.


도시에서는 무기를 소지하는 것 외에도 복면과 가면을 포함하여 밤에 변장하는 것도 금지했다.


1415년 런던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법 조항은 만성절(All Hallow, 11월 1일) 전야부터 성촉절(Candlemas, 2월 2일) 까지 매일 밤마다 불을 밝히도록 한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1461년 루이 11세(1423-1483)의 명령에 따라 대로에 접하고 있는 집의 창문에 랜턴을 걸도록 했다.


1650년 이전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어떤 도시도 공금을 들여 조명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파리(1667), 암스테르담(1669), 베를린(1682), 런던(1683), 비인(1688) 등을 필두로 1700년에 이르면 훨씬 더 많은 도시들이 길거리를 밝혔다.

 -> 한국, 중국, 일본은 거리 조명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했는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동양의 문화는 과거로부터 왔는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야경대원들은 '새벽 별'(morgenstern)이라는 이름의 못 박은 철퇴로 무장했다.


야경대원이 순찰중에 해야 할 또다른 일은 집주인이 문을 잠갔는지 점검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주의 절대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훈련받은 경찰의 창설이 어려웠다. 경찰도 상비군처럼 독재적인 통제권하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야경대원들은 '야경'이라는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화려한 옷깃이 달린 비단옷을 입고 허세를 부리는 수비대가 아니었다.


파리에서는 야경대원을 조롱하여 어설픈 작자(savetiers)나 '평발'(tristes-à-pattes)이라 불렀다.


사실상 산업혁명이 있기 전까지 저녁 시간은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모두 법의 감시를 벗어나 있었다. 카르보니에의 우아한 말로 표현하자면, '법의 공백'(vide de droit)이었다.


밤에 작성한 계약, 서약, 유언은 모두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시인 에드워드 영은 "밤에는 무신론자도 신을 반쯤은 믿는다"고 단언했다.


한 독일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불이 친구를 만들어준다고 한다. 불을 지피느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기 때문이다."


영국 전역에서 즐겨 행해진 놀이는 '내가 촛불을 들고 거기 갈 수 있을까?' 였다.


재무장관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러 마차를 타고 가던 조너선 스위프트는 "달이 빛나 우리 마차는 전복될 위험이 없었다"고 말했다. 달이 없으면 밤의 향락은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 1792년 노퍽의 낸시 우드퍼드는 이웃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달이 뜨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집으로 저녁 먹으러 오지 않겠다고 했다."


영국 일부 지역에서는 해가 진 뒤 처음 뜨는 별인 '저녁 별'(Vesper, 실지로는 금성)을 '목동의 램프'라고 불렀다.


고요한 밤에는 모든 소음이 더 크게 울려퍼졌다.


데카르트는 "밤에 등불 없이 험한 길을 가본 경험이 있다면, 지팡이를 쓰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것" 이라고 썼다. "이 지팡이를 사용함으로써 주위에 있는 여러 물체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나무인지 돌인지 모래인지 물인지 풀인지 진흙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근대 초 영국 가정에서도 밤에 갖가지 시간대가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시간대는 일몰, 문 닫을 때, 촛불 켤 때, 잠잘 때, 자정, 한밤중, 닭 우는 때, 동이 틀 때로 이루어졌다.


자정부터 오전 3시 사이를 고대 로마인들은 인템페스타(intempesta), 즉 시간이 없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근대 초의 자료를 보면 영국 북부에서 밤에 휘파람을 부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속죄를 위하여" 자기 집 둘레를 세 바퀴 돌아야 했다.


1602년에 영국을 방문한 한 독일인은 "영국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이웃집을 철저하게 감시하겠다는 서약에 묶여 있다"고 평했다. 도시에서 낮에 커튼을 치면 확실히 의심을 샀다. 뉴잉글랜드 한 이주민은 이웃집에 커튼이 쳐지면 "창녀 커튼"이라고 불렀다.


영국의 직조공들은 의류 산업의 번창에 부응하여 겨울철에도 때로는 밤 10시까지 직기 앞에 앉아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리옹의 남자 직조공은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했고, 비단 공장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단사, 제화공, 모자 제조업자, 염색공 등이 오랜 시간을 일했다. 스코틀랜드에는 "시민이 잠드는 시간이 제화공의 저녁식사 시간" 이라는 속담이 있었다.


궁핍한 여인들은 집에서, 혹은 더 흔하게는 남의 집에 세탁부로 가서 빨래를 해주며 살림을 꾸렸다. 과부 메리 스토워는 "달빛이 아주 환한 밤" 새벽 2시에 리즈에 있는 어느 집에 가서 빨래를 했다. 런던의 앤 팀스는 "생계를 위해 11시부터 12시까지 밤늦은 시간에 빨래한다"고 말했다.


1퍼킨=40리터, 1배럴=4퍼킨=160리터


많은 사람이 지루한 일을 이웃이나 가족과 함께하며 만족스러워했던 것은 당연하다. 때로 그들의 동지애는 술로 굳건해졌다. 더 중요하게는, 밤은 즐거움과 유희를 억압하는 수많은 규칙과 의무, 낮의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 무엇보다 밤은 정신의 한 상태였다. 친숙한 얼굴과 주고받는 도움 속에서 형식적인 겉치레는 물론 두려움과 모멸의 감정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웃고 일하다보면 어색함이나 거리낌 같은 감정도 물러났다. 웨일스 속담에 아침의 '존'이 밤에는 친근한 '잭'이 된다고 했다. 같이 일하며 횃불이나 램프를 같이 써서 소중한 연료를 아낄 수 있다는 것도 한 가지 이점이었다. 남녀가 살을 에는 추위를 피해 훈훈한 화롯가에 둘러앉았다. 일을 완수하는 것 이상으로,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기를 나누는 일이 꼭 필요했다. 그렇게 침침하고 비좁은 상황에서 밤에는 친밀감과 동료 의식이 깊어졌다. 영국에는 "밤에 나눈 말은 아침의 말과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여러 아낙네들이 물레와 실 감는 막대기를 들고 이웃집에 모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그런 목적을 위해 겨울철마다 '작은 쉼터'(écreignes)라는 임시 오두막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몇십 년 동안 스포츠 경기나 종교 축제 같은 전통적인 대중 여흥이 줄어들면서 술집의 인기가 높아졌다.


'물의 시인' 존 테일러는 술을 "벌거벗은 사람의 가장 따뜻한 옷"이라고 했다.


술집에서는 성적 만남도 이루어졌다. 얀 스테인(Jan Steen),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Adriaen van Ostade) 등 북유럽의 화가들이 묘사했듯, 이 붐비고 침침한 곳에서 남자와 여자는 술을 마시고 구애하고 수작을 떨었다. 1628년 한 영국의 비판자는 성적 희롱질을 막기 위해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녀가 근처의 헛간이나 변소에서 섹스를 했음을 폭로하는 재판 기록도 있다. 날씨가 좋으면 근방의 어두운 들판도 이들에게 좋은 장소였고, 인근 교회 묘지도 섹스 장소로 이용되었다. 결국 술집은 가정생활의 대체물이었다.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더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던 반면, 북유럽과 중앙 유럽에서는 성관계에 대해 더 관용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애정에 탐닉할 수 없었다.


로마에서 모든 계급의 연인들은 랜턴을 든 행인이 다가오면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불을 돌려요"(Volti la luce)라고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실잣기 모임은 긴 겨울에 함께 즐기고 구애를 하기 위한 더 일반적인 자리였다. .. 이런 밤샘 모임에서 그녀들에게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는 멋진 남자들을 만나거나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이런 모임에서 결혼이 많이 성사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여성들만 모이는 모임도 때로 젊은 남자들의 참석을 허용했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생겨난 '번들링'(bundling)이라는 관습은, 이러한 열정과 그 열정을 통제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번들링은 연인들이 여자 부모의 집에서 섹스는 하지 않고 밤을 새우는 관습이었다. 번들링은 구혼의 중간 단계로, 그에 앞서 함께 산책하고 공개된 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구애 단계(wooing)가 있었다. 구애 단계에서 서로 애정을 확인해야 젊은 남녀는 번들링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 번들링은 네덜란드 일부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에 퍼져 있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그것을 '담소하기'(queesting)라고 불렀다. 이러한 밤의 구애는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성행했다. 사실 독일 농촌의 한 목사는 심방 보고서에서 소녀의 침실의 '불빛을 찾아가는 것'(zu licht gehen)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밤에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자유라고 간주되었다"고 기록했다. 17세기 사부아의 한 주민은 '알베르주망'(albergement)이라는 관습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젊은 농부들이 결혼 적령기에 있는 여자들과 함께 밤늦도록 시간을 보내다가, 집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침대를 같이 쓰자고 요청한다." 그러면 보통 "여자들은 거절하지 않는다."


종교 당국의 주기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번들링은 유럽 일부 지역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18세기에는 성서를 개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신교 운동인 경건주의(Pietism)가 전파되면서, 많은 지역에서 문맹률이 급격히 낮아졌다.


폴란드에서는 "절제란 낮을 위한 것, 저녁과 밤에는 즐거워야지"라는 노래가 불렸다.


이사크 드 뱅스라드의 <밤의 발레>(Le Ballet de la Nuit, 1653)만큼 귀족들의 밤에 대한 친밀감을 열정적으로 표현한 찬가는 없다. 루이 14세를 기리기 위해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뱅스라드의 초기 발레 중에서도 가장 호사스럽다. 화려한 의상과 스펙터클한 무대가 어우러진 바로크의 장관 속에서 젊은 왕이 직접 몇몇 배역을 맡았다. 아주 적절하게도, 최후의 막에서 왕은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나와 떠오르는 태양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거지와 도둑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밤의 발레>는 천국이라는 정교한 배경에 신성이 가득한, 밤 생활의 초월적 모습을 제시했다. 여러 차례 공연된 이 발레는 궁정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18세기 초에는 런던의 래닐러(Ranelagh)와 복스홀(Vauxhall)같이 조명 장식이 있는 유원지를 비롯하여, 우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 크게 늘었다.


격식을 차리는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가면무도회는 근대 초 궁정의 억압적인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였다. ->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가면무도회를 하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100명 이상 모인 곳에서.


가면무도회장은 부도덕, 불경, 음란 및 모든 종류의 죄악을 저지를 기회를 파는 상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가장 타락한 창녀와 가장 방탕한 난봉꾼이나 사기꾼이 단돈 27실링에 최고의 귀족이나 귀부인들과 어울릴 특권을 산다.


비행을 저지르는 귀족들의 행동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사회에 순응하고 위선을 행하는 것을 경멸하는 강렬한 개인주의를 대변했다.


1599년 런던의 극작가 조지 채프먼은 "이 도시에 사는 수백의 귀부인들은 밤에는 한량들 사이에서 춤추고 환락에 빠져 있다가, 아침에는 마치 새로 세례받은 듯 정숙한 여성이 되어 남편의 침대로 들어간다"고 썼다.


몽테스키외는 아침에 대해 "때로는 남편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 아내의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라고 했다.


"희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Nec spe, nec metu


밤은 사회적 풍경에 혁명을 일으켰다. 어둠이 권력자들을 더 평민적으로 만들었다면, 수많은 약자들은 더 강하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제임스 2세 지지파'(Jacobites)와 같은 정치적 국외자들이 밤에 작당했을 뿐 아니라 불안이 고조된 시절에서는 경쟁 파벌들이 어둠을 틈타 선동적인 전단을 돌렸다. 1688~1689년의 격렬한 명예혁명 시기에 런던 길거리는 아침마다 전단지로 뒤덮여 있었다. 몇 년 뒤 하노버 왕조 계승 위기 시에 쿠퍼 백작부인 메리는 이렇게 말했다. "비방을 늘어놓는 팸플릿이 뿌려지지 않고 지나가는 밤이 없다."


유럽 전역에서 견습공 제도는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자 청소년을 사회에 적응시키는 대중적 수단이었다. 낮에 그들은 주인의 지배 아래 있다가 밤이면 벗어났다. '밖에 눕기'(lying-out)라는 말은 종종 집안의 통행금지 시간을 무시하고 밤시간 대부분을 집밖에서 보내는 견습공들에게 쓰는 말이었다.


버지니아를 여행했던 한 사람은 보통 노예들이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쉬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집을 나와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6~7마일을 걸어 흑인들이 춤추는 장소로 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놀랄 정도로 경쾌하게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는 기록을 남겼다. -> 그러한 장소에서 마케팅을 한다면 효과가 크지 않을까.


시체 도굴꾼을 영어로 resurrection man이라고 한다.


런던에서는 증권 거래소에 아이들이 많이 버려녔다. 파리의 어머니들은 버리는 아이들에게 성별과 생일과 이름을 적은 꼬리표를 붙였다.


영국 서부와 웨일즈의 불법 거주자들은 더 영구적인 거주권을 주장했다. 기원이 불분명한 어느 지역 관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카반 우노스'(caban unnos)라는 진흙 오두막을 하룻밤 사이에 황무지나 공유지에 지으면 주거를 허용했다. 그 작업은 해가 지고 나서부터 뜨기 전까지 완성되어야 했고, 친구나 가족이 도와주는 것도 허용되었다.


경제적 빈곤이 밤의 무법을 낳았다. 토비아스 스몰렛은 "모든 평민은 도둑이고 거지이며, 나는 극도로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다고 믿는다"고 쓴 바 있다. 범죄는 긍지와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즉, 집을 늑대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가족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범죄를 낳았던 것이다. 가난한 선생 존 캐넌은 "어떤 가난한 악마에게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낮에 위축되었던 것을 밤에 만회하는 도둑질은 견습공, 하인, 노예로 산다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 손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 그럼 도둑질을 막으러면 밤에 심리적으로 풍족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즉 회식과 클럽.


밤의 조직 대부분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으로서, 내부에 계급이 있는 것도, 자체의 행사를 거행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면, 길드와 달리 확립된 위계질서도 통일된 회원 자격도 확고한 행동 지침도 없었다. 그들이 개인적 자율과 자기 확신이라는 가치를 강조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회원들은 우정을 나눴다. 소집단으로 떠돌아다니던 부랑아들은 서로를 '형제' 또는 '친구'라고 불렀으며, 어떤 자들은 동료를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고 "영혼에 걸고" 맹세했다.


일부 젊은이들 집단이 공동의 도덕을 침해한 바람피우는 남녀, 폭력적인 남편 등을 벌함으로써 사회 통제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밤은 누비던 프랑스의 '샤리바리'(charivari), 이탈리아의 '마티나타'(mattinata), 영국의 '스키밍턴 라이드'(skimmington ride)는 도덕을 어긴 자들에게 야유와 비난을 쏟았고 때로는 육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은 젊은이들 스스로 언젠가 해야 할 결혼의 성스러움을 재확인시켜주었다. 같은 이유로 미혼남들은 자기 지역 처녀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경쟁 지역 젊은이들과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또한 견습공들은 무리를 지어 매춘굴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찰스 2세는 그 소식을 듣고 못 믿겠다는 듯이 "그럼 그들은 왜 거기를 가나?"라고 물었다.


영국 농촌에서는 한 해 추수가 끝난 뒤 농장주들이 일꾼들을 불러 저녁에 잔치를 베푸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러한 '추수 만찬'은 음식과 술과 동료애를 관대하게 베푸는 것으로 유명했다. 헨리 번에 따르면 "이 만찬에서는 하인과 주인이 똑같으며, 모든 것이 평등한 자유에 따라 행해진다." 그러나 물론 이런 행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시적인 휴식일 뿐,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해야 함을 예고했다.


사육제 후에는 엄격한 사순절 기간이 뒤따랐다.



(계속)

Posted by 마키아또
,

도쿄 여행 단상

연구/일본 2016. 11. 23. 22:47
대학교 3, 4학년 때의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아 도쿄를 다시 찾았다. 친구들과 만나서 한 이야기들 외의 혼자 다니면서 얻은 여러 가지 작은 단상들을 잊지 않기 위해 써둔다.

피치항공, 하네다 공항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온 프랑스와 독일 대학생들이 3박 4일로 인천을 출발해 도쿄로 가는 여행 일정을 짜고 같은 대학교끼리, 혹은 다른 대학교와 같이 모여서 많이 가는 모습이었다. 완전 파리식의 빠른 속도의 프랑스어를 너무나도 오랜만에 접해서 거의 들리지 않아 절망했다는..
 그리고 스튜어디스는 갈 때도 올 때도 전원 일본인이었는데, 키가 작아서 기내수하물 수납 칸의 덮개를 닫기 위해 통로측 좌석의 옆에 붙은 발판을 딛고 올라가서 닫는 모습이 뭔가 귀여웠다. 한국 항공사는 예전만 해도 채용 규정에 키 몇cm 이상이라는 제한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없어진 걸로 안다.
 비행기를 타면 안에 배경음악을 무슨 경쾌한 비트의 남자 가수 노래로 한곡반복으로 틀어주는데 그것도 귀여웠다. 찾아보니 ケツメイシ 케츠메이시 라는 가수다. (http://utaten.com/news/index/8097)
 하네다 공항에서는 한중일 삼국 국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처음 건네는 말이 항상 일본어였다. 우선 ‘안녕하세요.’ ‘다음 손님 오세요.’ 는 일본어로 한다. 그 다음에 승객이 일본어를 하면 쭉 일본어로 말하고, 영어를 하면 쭉 영어로 말한다. 일본어를 하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승객에게는 긍정적인 내용과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인 내용은 일본어로 이야기해주고, 부정적인 내용(무엇은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무엇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어떻게 하셔야 됩니다 등)이나 필수적인 고지는 영어로 이야기해준다. 
 
남자 때를 밀어주는 아줌마

 새벽 3시에 리무진버스가 아사쿠사의 공중목욕탕에 도착했다. 내가 간 곳은 8층짜리 쇼핑몰 건물의 맨 위 2층을 이용하는 한국의 찜질방과 같은 시스템의 장소였다. 마침 때를 밀어주는 코스의 입장권이 있어서 그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다. 3시 반부터 1시간 때밀이로 카운터에서 예약을 했고 직원은 가지고 있는 시간표에 자와 연필을 사용하여 내 이름을 빈칸에 적어넣었다. 때밀이를 하는 곳은 남탕으로 들어간 다음 그 안에 있는 방이었다.
 한국과 같이 샤워를 하고 탕에서 몸을 불린 뒤 때밀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는데 뭔가 한국과 달리 불투명 처리를 한 유리창이 있는 방이다 보니 자연스레 제공된 옷을 입고 들어갔다. 이때까지는 안에 아줌마가 계시다고 알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자 아줌마께서 계셔서 나는 흠칫 놀랐으나 ‘저, 3시 반에 예약한 사람입니다만’ 이라고 일본어로 말했다. 그러자 그 아줌마는 ‘혹시 한국분이세요?’ 라고 한국어로 답해주셨다. 카운터에서는 아무런 설명을 못 받았는데 알고 보니 때를 밀어주시는 분은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였다. 그래서 불투명 처리가 된 유리창이 있었구나, 생각하고 옆의 문 앞의 표지판을 보니 개방 금지 (열지 마시오) 라고 써있었다.
 부산 억양을 쓰시는 아줌마께서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파트타임으로 이곳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중요한 부분만 수건으로 가리고 나머지는 알몸인, 게다가 테이블 3개 중 방 안에 나와 아줌마만 있는 경험이 처음 1분 정도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웠지만 이내 내가 필요한 서비스만 받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줌마도 사실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20대 남자가 여기 오는 건 드물지만 40-50대 아저씨들은 전 과정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방문한다고 설명해주셨다.

아카사카의 호텔

 처음에 호텔을 예약할 때는 단순히 서울의 종로 느낌의 장소를 찾고 싶어서 2년 전 호텔인 한조몬에서 가까운 아카사카를 선택했다. 이곳이 한조몬보다는 조금 더 번화가인 것 같아서 예약했다. 그 이유뿐이었는데, 실제로 도착해 보니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 눈에 보였다. 신오오쿠보만 도쿄 내의 한인 타운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이전에 고급 한식당이 종류별로 들어서 있던 곳이 아카사카라고 한다. 오래 거주한 개인사업자처럼 보이는 부동산 사무소, 법무 사무소, 네일아트 전문점, 마사지 전문점 등도 함께 위치해 있었다. 대학생과는 다른 성숙한 어른의 정서가 물씬 풍겨서 좋았다.

 내가 머물던 Centurion Hotel Residential 정문을 지나는 길의 이름은 Esplanade Akasaka. 프랑스를 그리워하는 동양인들의 정서는 내게 참 가깝고 친근하다. 아르누보 양식을 약간 따온 듯한 가로등의 디자인과 같이 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서래마을의 주된 도로도 이곳처럼 폭이 좁고 아스팔트 대신 돌길이었다면 훨씬 운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TechCrunch Tokyo 2016

 한국에서도 하는 행사라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지만, 하나 한국과의 차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부동산 건설업체의 부스’ 다. 도큐부동산 이라는 회사인데, 이 회사는 도쿄 내의 사설 철도를 운영하면서 철도와 역사, 그리고 역사 주변의 빌딩 건축을 담당한다. 한국도 코레일의 자산개발사업 부문이 있으니 비슷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도큐부동산이 부스에서 보여준 조감도 영상은 젊은 감성의 원대한 포부를 담고 있었다. 시부야 히카리에를 필두로 시부야 근처의 비슷한 느낌의 고층빌딩을 4개 더 짓고, 그 모두를 주상복합 건물로 활용하고, 시부야 역과 지하로 연결하고, 그리고 스타트업을 위해 작은 사무실 형태로 분양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시부야 109 (동대문 밀리오레 같은 빌딩) 쇼핑몰 건물도 도큐부동산이 지은 건물이라 하였고, 소개 영상에 대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일제시대부터 이 회사는 시부야를 거점으로 하여 건설 사업을 진행해 왔다. 자사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한다.

호우세키바코 宝石箱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를 거쳐서 오카다 유키코, 키쿠치 모모코, 모리타카 치사토 등의 음악을 들어오며 아, 자드 이전에 이런 음악 세계가 있었구나 하고 기뻐하던 나는 2013년 드라마 아마짱 의 하루코 (주인공인 아키 의 어머니) 의 고향 집 2층 다락방, 혹은 하루코가 20대 초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도쿄 안의 아이돌 카페와 같은 곳이 있나 찾아보았다. 아마짱 드라마 안의 아이돌 카페와 같은 모양의 간판을 쓰는 동명의 카페가 있었으나 내부가 별로여서 더 찾아본 결과 시내에서 조금 멀지만 가장 풍부한 물건 진열로 분위기를 낸 곳을 찾았다. 세타가야구 치토세카라스야마 千歳烏山 라고 하는 생소한 주거지역에 덜렁 하나 있는 카페다. 
 이 카페의 이름은 ‘보석상자’ 이다. 하루코의 다락방과 같은 컨셉이다. (드라마 이후에 카페를 열었는지 못 물어봐서 트위터로 멘션을 해봐야겠다.) 시부야에서 1시간 걸려 도착한 뒤 안에 들어가니 아르바이트생인 점원 1명과 여자 손님 2명이 있었다. 내가 들어와 자리에 앉고 20분 뒤에 대학교 2학년으로 보이는 연애 초기처럼 보이는 학생 2명이 들어왔다. 안에는 80년대에 출판된 소설책과 만화책들이 약간 있고 지금도 월간 잡지 형태로 나오는 레트로 문화 잡지가 쌓여있었다. 

 나는 자주색 크림소다를 시켜서 마시면서 (크림소다가 얼음 위에 소다를 쏟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건지 이때 알았다) 책들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을 나중에 읽어보기 위해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배경음악은 한번은 여자 곡, 한번은 남자 곡으로 성별이 번갈아가면서 나왔는데 가끔씩 내가 아는 곡도 나와서 좋았다. 나중에 찾아볼 곡은 음성녹음으로 갈무리해두었다.
 계산하고 나오기 전에 점원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로 이곳에 나같은 뜨내기 관광객도 오냐고 물어보니까 근처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온다고 했다. 점원은 내가 유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둘째로 트위터에 가끔씩 일찍 가게를 닫는다는 트윗이 있어서 이번에도 조마조마하며 확인하고 왔다고 왜 가끔씩 일찍 가게를 닫냐고 물어보니까 아르바이트생이 자기 한명밖에 없어서 자기가 다른 일이 생기거나 아프면 가게를 닫는다고 한다. 오모테나시와는 다른 뭔가 쿨한 느낌의, 단골 해달라고 무언의 강렬한 추파를 던지는 듯한 카페의 아우라에 끌렸다.

게이오 대학 축제 三田際

 게이오 대학 친구들과 알고 지낸 지가 4년이 넘었으나 그들이 대동제를 모르듯 나도 그들의 대학 축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때가 겹친 만큼 직접 찾아가서 경험해보고 친구들을 축제 장소로 불러서 상징적인 장소에서의 재회를 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세 가지, 외부 주류 반입이 허용되지 않은 점과, 기업의 상업활동을 위한 판촉 부스가 없다는 점, 그리고 졸업생으로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축제를 보러 왔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가 한국 대동제와의 차이점으로 보인다. 집에 와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해보니 80년대에는 한국도 기업의 판촉 부스 없이 순수한 대학생들의 기획으로 축제 전체를 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80년대의 대학축제를 되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맛만 다셔본다.



 내가 갔던 날은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이었다. 행사 시간이 10시부터 18시라고 해서 나는 에이 설마, 18시 이후에도 뭔가 계속 뒷풀이 같은 게 있겠지 했는데 정말 18시 정각에 끝났다. 17시부터 시작한 ‘후야제’ (전야제가 있다면 후야제도 있다) 가 정확히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축제 집행위원장인 남자 대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희열의 절규를 하며 축제에 와준 재학생들, 졸업생들, 집행위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내가 있던 한국 대학교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여행 후

 잘 놀고 의미있는 만남을 갖고 집에 왔는데 후쿠시마 지진과 한일정보보호협정 두 가지에 가슴이 아프고 씁쓸하다. 


Posted by 마키아또
,
 동아시아 3국의 노래방, 별실, 요정을 보면 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폐쇄적으로 만나는 숨기는 문화가 보인다. 영미권은 반대로 넓은 풀밭의 야외 좌석, 바닷가에서 즐기는 파티, 선상 회합, 동네 앞 펍과 같이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서로를 볼 수 있는 개방적인 공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콩고는 어떤가? 콩고는 동아시아 3국과 같이 겉으로는 좋은 것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레스토랑과 바를 숨기고 있다.

 겉보기에는 매우 허름하고 투박해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금으로 장식한 벽면, 외국의 멋진 장소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장식, 30년이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켜온 큼지막한 가구, 주인의 생활과 세월이 녹아있는 옷과 식기구가 가득하다. 간판도 어두운 밤에는 잘 안 보여서 찾기가 힘들다.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프랑스어권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곳의 간판은 형광등이 안에 들어간 한국식 네모 간판도 네온싸인도 아닌 나무 위에 페인트로 글씨를 쓴 간판이 대부분이다. 조명이 있어도 백열등이나 할로겐등 몇 개를 옆에 달아놓을 뿐이다.

 벽은 또 어찌나 높은지 기본으로 3m를 넘는다. 그 위에는 넘어오지 못하도록 철망, 전기선, 깨진 유리병 조각 등을 잔뜩 심어놓았다. 한 공간과 그와 이웃한 공간 사이에는 신용을 찾아볼 수 없다. 신용은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뿐 그 신용이 물질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도둑질에 관대한 문화는 그 반작용으로 도둑질이 쉽지 않은 물질적 환경을 만들었다. 대신 벽의 바깥쪽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폐허의 공간이지만, 그만큼 벽의 안쪽은 모든 것이 축적되는 공간이다.

 군부대같은 벽과 허름한 간판만 보면 가지는 선입견을 깨야만 킨샤사 구석구석의 좋은 곳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양철로 만든 커다란 문을 열고 보석상자를 열고 들어가면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세간에 떠벌리지 않았던 레스토랑과 바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안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안에 화려한 보석이 충분히 있으니 보석상자는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혹은 화려한 보석을 누구에게나 쉽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혹은 화를 면하기 위해 일부러 겉을 후줄근하게 방치해둔다.

 일본어에 ギャップ萌え(갭 모에)라는 말이 있다. 저 사람은 남성적일 것 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여성적인 면이 있다거나, 저 사람은 평소에는 투박해 보이는데 데이트를 할 때는 의외로 앞서가는 패션을 보여준다거나 할 때 겉모습의 선입견을 가끔씩 깨주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 갭 모에가 있다고 말한다. 킨샤사라는 도시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

 벨기에에 대한 콩고인들의 인식은 아직도 좋다. 보두앙 1세와 레오폴드 2세의 식민지배는 가혹했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서양식 식사예절, 주거 형태, 의복, 파티 문화 등은 아직도 건재하고 콩고 상류사회의 코드로 남아있다. 독립 이후 잔류한 벨기에인들의 조차지였던 UTEXAFRICA는 지금까지 주로 백인인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단지로 남아있다.


 EUSEC은 MONUSCO의 보조기관으로서 북동부 KIVU 지역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데, EU 수도가 브뤼셀인 만큼 벨기에의 영향이 큰 정부기관이다.


 우리 회사 직원들의 가족 중에는 벨기에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 벨기에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사람들을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이를 20세기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 차원으로 정부가 제도로 정착시켰다. 브뤼셀 안에는 마통게(Matonge)라는 콩고인 밀집지역이 있으며 도심에 위치해 있어 도쿄의 신오쿠보를 연상케 한다. 킨샤사 안에도 마통게 라는 quartier(한국의 洞) 가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이 자이르가 되기 전까지, 즉 벨기에령 콩고로 남아있을 때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최대 2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원래 쓰던 링갈라어와 스와힐리어를 쓰면서도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공식 언어인 프랑스어를 건너뛰고 네덜란드어를 배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안트베르펜(앙베르, Antwerp)은 전통적인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이다. 여기서 유통되는 다이아몬드가 콩고민주공화국 북동부와 남동부 그리고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들(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시에라리온을 포함) 에서 채굴되는 것들이다.


 땡땡(틴틴, Tintin) 만화 중에 Tintin au Congo 편이 있는데 그 책을 보면 벨기에가 콩고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Monsieur를 Messie라고 말하고, 프랑스어 맞춤법이 틀린 미개한 흑인이 사는 곳에 백인이 자연다큐멘터리 취재를 위해 도착하고, 그 백인은 고장난 증기기관차를 고쳐주고 엽총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그에 따라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된다. 흑인이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되어 독립을 이룩하기 전에 나온 만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스토리다. 그런데 독립 후에도 콩고민주공화국은 독립 이전의 캐릭터를 수용하고 복제하고 나와 같은 외국인에게 나무 조각품을 판매함으로써 벨기에에 대한 호의를 전파한다. 분명 일제강점기에도 만화가 있었을 것이고 경성에 여행을 하며 황국신민들의 존경을 받는 일본인 캐릭터가 있을 것인데, 독립한 대한민국은 그러한 캐릭터를 철저히 무시하고 은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대한민국과 콩고민주공화국의 태도는 여기서 갈린다.


 하지만 콩고 사람들이 비판을 제기하는 벨기에의 유산이 있다. 벨기에 식민 지배자들은 광신적인 기독교 교회가 번창하는 것을 방치하였다. 기독교를 들여온 사람은 벨기에인이고, 흑인 유대교(Lasalien 이라고 하는 흑인들이 유지해 온 종교)와 차별화되는 기독교는 벨기에의 식민지배 수단이었다. 전통 신앙인 주술을 미개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비판하는 종교로서 기독교를 정착시켰는데 기독교 교회의 콩고인 목사가 과도한 헌금을 걷고 국민들의 일요일 생활을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바치게 하여도 벨기에는 이를 비판하고 교정하지 않았다.


 결국 벨기에는 병 주고 약 준, 콩고민주공화국을 유럽과 연결시키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킨샤사에는 땡땡 나무 조각품으로 장식한 많은 레스토랑이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VILLA TRICANA로, 포르투갈과 콩고 요리를 파는 곳인데 레스토랑 제일 안쪽에 야외 바와 연못이 있다. 직선으로 쭉쭉 뻗는 조명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탁 트인 수영장이 아니라 은은한 백열등을 간접조명으로 비춰주는 사방의 벽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연못. 이곳의 종업원들은 대사관 직원들을 주된 고객으로 받아서 그런지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고 유럽과 동아시아 선진국의 소식도 잘 알고 있었다. 




Posted by 마키아또
,
회사에서 차를 지급해주지만 그 차가 나만 쓰는 게 아니라 두 명이서 쓴다면 싸우지 않고 차를 같이 쓸 수 있게 하는 규칙이 필요하다. 곧 나도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놓으면 형평성을 유지하고 가동률을 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시간대를 정한다. 야구로 치면 이닝(회). 토요일 저녁 7시에서 11시까지, 저녁 7시에서 일요일 오후 2시까지, 일요일 오후 2시에서 저녁 11시까지, 월요일 저녁 7시에서 11시까지, 등으로 각자의 자유시간을 모아 시간대를 나눈다.

규칙은 다음과 같다.
점수가 높은 사람이 탈지 말지(양보할지)를 정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못 타고 말지, 양보를 받고 탈지, 양보를 거부할지를 정한다.
타면 -2점 (상대가 탈 수 없는 상태라면 0점)
상대방이 타서 내가 못 타면 +1점
양보하면 +1점 (단 상대가 탈 수 없는 상태라면 양보해도 0점) 내가 탈 수 없는 상태라면 항상 양보. 양보는 미래의 여러 회에 대해서도 미리 할 수 있다.
양보 받고 타면 -2점
양보 거부하면 0점
탄다고 했다가 갑자기 취소해도 -2점
탄 다음에 차가 고장나는 등으로 다음 회에 상대가 못 타게 한다면 탄 사람 -5점
사정이 있어 둘 다 못타면 둘 다 +1점
둘 다 타면 둘 다 +1점

그 다음 게임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한 사람에게 1점을 더 주고 시작한다.
동점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1점을 더 준다.
이렇게 무한하게 게임을 반복하다 보면 각자가 가능한 시간대에 최대한 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게임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두 사람과 차 사이의 거리가 같다.
- 주유비, 차량정비 비용은 각자가 탄 만큼 정확히 내거나 제3자가 모두 낸다.
- 차를 탈 수 있다면 항상 타는 것이 각자에게 편익을 준다. 차를 타는 일은 귀찮은 일이 아니다.

나중에 방해받지 않고 연속된 날에 차를 쓰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선이 되었을 때 계속 양보하면서 점수를 쌓으면서 점수 격차를 벌인 뒤 연속된 날의 시작에 차를 연속해서 쓸 수 있고, 차를 다 타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양보하여 상대방이 타도록 하는 행동은 점수차가 아닌 상호간 합의에 의하여서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완전한 경쟁 게임이 아니다.
이 게임은 두 행위자가 취하는 비배제성, 비경합성의 공공재가 무한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위와 같이 했을 때 문제점이 생긴다면 같이 해결책을 찾아보자구요.
Posted by 마키아또
,



1달 전에 이곳 킨샤사의 은질리 국제공항에 신청사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한번 가 보았습니다.



자동차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널찍한 주차장은 심지어 무료입니다. 신생 공항이라 한국처럼 복잡한 입장 절차가 없습니다. 주차장 입구에 설치된 기기는 터키산이었습니다.



다양한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인근 아프리카 국가가 아무래도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는 중국인과 유럽인이 많습니다. 건설 사업을 하러 중국 정부가 군인들을 이곳으로 보낸다는 말도 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입국하는 중국 군인을 보니 응? 시외버스터미널인가? 하는 착각을 잠깐 했네요)



말끔히 단장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입니다. $20~30 이면 시내까지 데려다줍니다.



은질리 국제공항 신청사는 왼쪽이 도착 칸, 오른쪽이 출발 칸입니다. (정말 2000년대 후반에 리모델링한 한국 시외버스터미널처럼 생겼습니다.) 두 칸 사이에는 위와 같이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카페에는 가격을 써놓은 간판이 없습니다. 대합실에 아직 벤치가 없어서 카페에 앉기 위해 주문을 했습니다. 가격을 처음에 물어보지 않은 저도 어리석었지만 우선 주문하고 나서 자리에 앉은 다음 커피와 와플을 받고 다 먹은 다음 종업원이 돈을 받으러 왔는데 생각보다 비쌌습니다. 네스카페 1잔이 한국 돈으로 3000원, 와플 1개가 4500원이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먹는 셈 치고 돈을 낸 다음 자리값은 보전하자 생각하여 몇시간 더 앉아있었습니다.



문제의 커피.. ㅋㅋ



중국이 인테리어를 해주었는지 대나무 장식이 있습니다.



도착 안내판을 보시면 알겠지만 모든 항공편의 도착 시각은 특정 요일에 대해 정해져 있고, 하루에 도착하는 비행기 대수가 20대를 넘지 않습니다. 정말 작은 공항이죠?



하지만 저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고 인테리어는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처럼 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벤치는 계속 증설해야겠네요.



국적기 항공사인 Congo Airways의 사무실을 출발 칸에 많이 만들어놓았습니다. 아직 사무실이 텅 비어 있습니다.




여기가 신청사에서 구청사로 이동하는 통로입니다. 신청사에서 구청사로 가는 인도는 통행이 가능하나, 구청사에서 신청사로는 통행할 수 없습니다. 중간에 이민국 직원이 통제를 합니다.



여기가 구청사 출발 터미널입니다.




구청사에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3개 더 있습니다.





구청사에는 대신 출발 라운지가 공무원을 대상으로 1실, 일반인을 대상으로 1실 있습니다. 일반인 출발 라운지는 1인당 $35를 내면 쓸 수 있습니다.




코이카에서 수돗물 필터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구청사에는 기업들이 들어와서 매장을 열었는데 아직 신청사에는 없는 상황입니다.



비행기가 멈추고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하면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그리고 40분 정도 지나면 도착 게이트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도착한 뒤의 짐 검색대가 신청사에는 4대밖에 없어서 만약 같은 시간대(2시간 간격)에 3-4대 비행기가 함께 도착하면 짐을 찾는 데 1시간 반까지 걸릴 수 있다 합니다. 구청사에 9대가 있는 것에 비해 불편해진 것입니다. 시설은 현대화되었지만 시간은 오래 걸리니 마냥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깔끔한 시설로 새단장했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찾아서 승객을 대상으로 하는 편의시설과 서비스 정신이 점점 더 개선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세수가 없는 이 나라의 특성상 지금은 일종의 업적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기간이라 주차장 입장료가 무료지만 나중에는 다시 입장료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내로 오는 길은 이렇게 잘 뚫려 있습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

오늘은 날씨가 굉장히 좋아서 밖에 안 나갈 수가 없네요!

조금 덥기는 하지만..


구글에는 햇살이 쨍쨍한 날씨의 킨샤사 사진이 정말 적어서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그래서 제가 직접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자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보노보 공원(LOLA YA BONOBO)도 가고 YACHT DE KINSHASA라는 모터보트를 타고 가는 강변 백사장 섬도 갔습니다.

그 사진들은 나중에 천천히 올리도록 할게요.


오늘은 직장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태원 해밀턴호텔같은 분위기의 레스토랑,

이름은 라 삐씬 (La Piscine)입니다.



소고기 수블라끼(Souvlaki, 그리스식 꼬치구이)와 까삐땐(Capitaine, 대구 비슷한 맛이 납니다) 후추 튀김과 응꼬이(Nkoyi, 링갈라어로 표범) 맥주입니다.



여기는 수영장과 바가 함께 있어서 분위기가 끝내줍니다. 언제 한번 단체로 토요일 저녁을 전세 내서 파티를 하고 싶은 곳이에요.


외국인들이 많이 와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은 현지인도 가족이나 연인끼리 자주 옵니다.


킨샤사에 오기 전에 이태원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분명 아프리카에도 이태원 같은 곳이 있을거라 했는데 비슷한 분위기의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제 밥을 먹고 본방송에 들어갑니다.


6월 30일 대로를 아래로 타고 내려오다가 좌회전을 하면 Av. Kalume Mwana라는 작은 길이 있고, 그곳에는 유화와 나무, 구리, 상아, 말라키트 장식품을 파는 시장이 있습니다.


시장의 이름은 아직 몰라요. 나중에 물어봐야지



이렇게 풍경화, 인물화, 추상화, 사회 풍자 캐리커쳐 등 다양한 주제의 유화를 팝니다. 가격은 싼 건 40달러, 비싼 건 200달러까지도 합니다.


저는 풍경화보다는 한 명만 분명하게 그려진 인물화가 좋으네요. 다음달 정도에 하나 구입할 예정입니다.



시장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자, 이제 무얼 파는지 알아볼까요?


나무로 만든 동물 장식입니다. 기린, 코뿔소, 코끼리, 보노보, 오카피(사슴 비슷한 아프리카 동물), 얼룩말, 학 등이 있습니다. 새까만 것들은 목단이라고 해서 까맣게 압축되어 빈틈 없이 단단하고 무거운 나무입니다. 목단은 작은 것이 10달러, 볼링공만한 건 30~50달러, 바닥에 놓는 큰 것은 100~200달러까지 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손님들이 꽤 보였습니다. 이곳의 흥정은 엄청나지요. 마마! 아미! 심지어 빠트롱!(사장님) 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격은 손님이 먼저 얼마냐고 물어보면 터무니없이 높게 부릅니다. 그러면 저희는 그 가격의 1/4로 부르죠. 그러면 다들 어이없다는 듯이 '아~ 너무하네' 하고 말합니다. 그 모습에 속지 말고 꿋꿋하게 가격을 고수하면 점점 가격을 낮추어 부릅니다. 그리고 '도네 모아 피니 피니 피니' (마지막 가격을 불러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 억양으로 상인 누구나 똑같이 말하니까 재미있어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광물입니다.



이게 말라키트(공작석) 장식품입니다. 목걸이, 팔찌, 보석상자, 재떨이, 펜꽂이 등등이 있어요.




구리로 만든 동물 장식입니다.



가면 장식, 나무 상자도 있고요.



저 횃불은 콩고민주공화국 이전의 국가인 자이르의 국기 안에 있는 횃불입니다. 






다른 외국인 일행도 쇼핑하러 왔네요.





제가 개인적으로 탐내는 구리 지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또 좋아하는 (자아를 이입하기도 하는) 땡땡 나무 장식이 많이 보입니다.





결국 하나 사서 집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자동차를 타는 땡땡.. 저도 매주 일요일은 항상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닙니다.


장식품 시장은 이곳 말고도 야외 레스토랑의 주차장 입구 몇 군데, 킨샤사 대학교 옆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응갈리에마 꼬뮌의 언덕길 옆에도 많이 있지요.


킨샤사의 도시 속 건물과 도로 풍경은 솔직히 예쁘지 않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이렇게 예술품들을 펼쳐놓은 곳에 가면 생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

  어제 저녁 일본인 친구 2명을 만났다. 한명은 내가 대학교에서 한중일 교류 포럼을 할 때 알게 된 게이오대 친구와 같이 학원 과외를 하면서 친해진 아이고, 다른 한명은 그 아이의 대학교 후배였다. 아프리카 땅에서 외국인을 인연을 가지고 만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어려운 것 같다. 친구의 친구로서 만나는 것과 예전에 알던 친구로서 만나는 것은 쉽지만 이곳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대뜸 만나서 놀거나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렵다.


  어제 만난 친구와는 라인으로 조금씩 이야기를 하다가 한번 전화를 하고 만났다.


  저녁 7시에 오 뽀에따라는 피자 레스토랑에서 보기로 했다. 오 뽀에따는 화덕 피자와 포르투갈식 고기 요리를 주 메뉴로 하고, 안에 홀 형태의 건물과 수영장 옆의 야외 테이블 형태의 공간이 나뉘어 있다. 곰베(한국으로 치면 광화문+강남역 주변) 지역에 피자 배달도 하는데 이를 위해서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오 뽀에따 2호점을 만들어놓았다. 


 처음에는 빠리바게뜨 까페같은 빵집인 빠따슈(레바논 사람이 운영하는)에 가자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녁을 위한 곳은 아니라서 주위의 추천을 받고 장소를 바꾸었다. 나는 이곳에 온 뒤로 레스토랑에 잘 가지 않아서 위치를 잘 몰라 구글 지도를 보고 찾아갔다. 6시에 리메떼 공단 15번가를 나와 루뭄바 대로를 시원하게 달리면 좋을텐데 퇴근 시간이라 차가 엄청 막혔다. 경찰은 교차로에서 교통정리를 잘 하고 있다가 갑자기 한 컨테이너 트럭이 무지막지하게 좌회전을 해대는 바람에 교차로가 꼬여 옆길의 차들을 정리하러 갔다. 그래서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는 좌회전 차량과 직진 차량이 얽혀 그 교차로에서만 10분이 지체되었다. 


 처음 보는 건데 늦으면 안 되겠다 생각하여 교차로를 빠져나간 뒤 차가 하나도 없는 대로를 시속 110km로 달렸다. 내 차가 제일 앞에 있어서 시원하게 달렸다. 87.9MHz의 콩고 음악방송을 들으며, 서쪽의 커다란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곰베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마트가 있어서 계속 찾아다니던 탁상용 램프가 있는지 보았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골동품 느낌의 램프를 찾아서 바로 샀다.


 7시가 되기 전에 오 뽀에따에 가기 위해 구글 지도의 GPS를 켜보았다. 와이파이나 3G가 없어도 킨샤사에서 GPS가 잘 되었다. 킨샤사 지도는 내가 지리를 익히기 위해 틈날 때마다 지도 앱을 켜서 보았기 때문에 모두 오프라인으로 저장되어 있었고, 그래서 문제없이 잘 쓸 수 있었다. 내가 오 뽀에따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혹시 아시아 사람 2명 안 왔냐고 물어보니까 안 왔다고 했다. 낌새가 이상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니까 내가 온 데는 곰베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배달 위주의 2호점이고 1호점은 다른 데라 했다. 그래서 급히 차를 돌려 1호점 근처의 마트에 가서 만났다. 그 마트가 있는 교차로를 지나면 집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만난 뒤 길을 안내받기로 했다.


 시간을 잘 맞추어 잘 만났다. 내가 2명을 태워주고 오 뽀에따 1호점으로 갔다. 금요일이라 차가 많아서 주변 건물의 빈 주차장 근처에 차를 대야 했다. 그때 이 친구 H군이 링갈라어로 경찰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프랑스어만 하고 링갈라어는 못 하는데 이 친구는 반대였다. 링갈라어를 하는 일본인,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선진국 그룹에서 웅크리고 벗어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현지를 적극 포용하려는 모습, 나도 추구하는 그 모습이었다.


 수영장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H군은 게이오대 환경과학과 4학년을 마치고 미쓰비시상사 본사에 4월부터 일할 예정이다. 킨샤사 거주 경험은 다 합쳐서 2년. 대학교 생활 중 2012년에 킨샤사로 가서 스스로 프리즈비 스포츠 육성을 위해 NGO를 만들어서 현지인과 연락하고 킨샤사, 바콩고, 반둔두 3개 도시에 거점을 두어 프리즈비 국가대표 만들기에 힘썼다.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도 이러한 스포츠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어서 지원을 해주었고, 국제대회의 실적에 따라 지원 자금의 수준을 차등 지급한다고 한다. 3개 도시를 오가며 정부 공무원을 만나며 스폰서를 얻기 위해 미팅을 하며 주된 활동을 하고, 부수적으로는 ISC GOMBE 대학교의 일본어 섹션(과보다 작은 단위)에서 과외를 했다. 링갈라어는 이때 배웠고, 일본에 돌아와서 2014년 봄에 취업 활동을 할 때 미쓰비시상사 면접에서 링갈라어로 자기소개를 했다고 한다. 


 다른 친구이자 H군의 과 후배인 Y군은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도쿄 내 소바 체인점의 경영직을 물려받아 졸업 후 외식경영을 할 예정이다. 그와 관련하여 2달 간 소바를 만들기 위한 메밀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재배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Y군은 게이오대 여자 교수님의 세미나 차 왔는데, 이곳 ISC GOMBE의 교수가 게이오대에서도 교수직을 수행한 경험이 인연이 되어 교수님이 학생들을 이끌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함께 왔다. 게이오와 JAICA 간의 협력 프로그램도 있어서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도 만나면서 지내고 있다. 병원에서 명함을 주고 자기소개를 한 Y군은 그 의사의 남편이 일하는 회사로부터 스폰서를 받고 있다. 

 

 이러한 20대 젊은이들, 내 또래의 해외 체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유대감을 느꼈다. 하는 일의 종류는 다르지만 어쨌든 각자의 고국에서 바라보았을 때에는 신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토요일인 오늘부터 이 친구들은 JAICA의 차를 타고 다른 일본인 친구들과 8명이서 바콩고 지역의 종고 (ZONGO) 로 1박2일 여행을 간다. 나도 처음 듣는 곳이라 구글로 찾아봤는데 멋진 폭포와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멋진 숲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검색결과) 파리에 있을 때 내가 파리의 골목 구석구석과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니는 데 주력하여 프랑스의 전원적인 마을이나 중세 성 같은 곳에는 안 가본 것처럼, 이곳 킨샤사에서도 킨샤사 도시 안의 보물들을 찾는 데 매진하자 다짐했는데 그 다짐에 고집을 부릴 필요도 없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가루이자와 (軽井沢) 같은 곳이냐고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4시간이나 걸리지만 이들에게는 가평 청평 같은 곳이다. 나도 나중에 꼭 가야지, 한국 사람들 모아서. 아니면 양국 혼합으로 가도 좋을까?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2차는 곰베 6월 30일 대로변에 있는 5층 건물 옥상의 바에 가서 야외 좌석에 앉았다. 이름은 스카이라운지 킨샤사. 내가 레스토랑, 바, 클럽 정보 사이트인 voila.cd 에서 처음으로 발견해서 나중에 가보자 생각했던 곳인데 드디어 왔다. 가니까 크기는 아담한데 옥상에 소파가 있고 옆에 바가 있고 그 위에 2층으로 올려놓은 곳에 실내 좌석이 있어서 내 취향에 잘 맞았다. 이 바를 운영하는 남자는 벨기에 사람인 것 같았고, 웨이터인 벨기에 여자분이 우리들에게 아시아 사람들은 노래방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매주 토요일에 여기서 노래방을 하니까 놀러오라고 했다.


 잘 되던 트위터가 다시 안 돼서 어제의 즐거운 기억을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글로 남기기 위해 블로그를 다시 썼다. 앞으로는 블로그에 글을 써서 트위터로 자동 발행되도록 해서 트위터 팔로워들이 내 글을 볼 수 있게 해야겠다. 

Posted by 마키아또
,

La Prospérité 2015년 1월 14일

 

  우편, 전신 및 정보통신 신기술부 차관이 어제 2015년 1월 13일 화요일 열린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들과의 연례 회담의 끝을 맺었다. 회장은 킨샤사 곰베의 플뢰브 콩고 호텔이었다. 어제부터의 날선 의견 교환 동안 또마 루하까는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들의 다른 의견에 대해, 그중에서 유심 박스와 광섬유의 문제에 귀를 기울였다. 확신에 가득 찬 자세로 차관은 관계자들에게 수익 향상을 위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솔직한 협력을 약속했다.


  우편, 전신 및 정보통신 신기술부 차관 또마 뤼하까(Thomas Luhaka)에게는 주초부터 힘든 일정이었다. 2015년 1월 12일의 정보통신 및 인터넷 기업 사장들과의 만남 이후, 어제 차관은 회담을 종료시켰다. 회담의 결과로 차관은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하여금 정보통신 신기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법과 인프라를 20세기 기술에서 21세기 기술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유도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이 업계의 역동성에 기인한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일자리와 헬스케어 및 교육에 특화한 운영 업체와 이용자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장기적인 성장을 지탱할 대중 이용자의 보고(寶庫)를 위한 정보통신업계의 직접적 효과를 고려한 재정 운영의 성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전화 업체

 이 외에도, 전화 업계의 운영자들(보다꼼, 띠고, 오랑쥬, 에어뗄 및 아프리쎌)과 함께 의제에서는 최저가격 설정의 자유, 국제 유입 트래픽에 대한 세금, 유심 박스와 광섬유에 대한 사기 행위, 정부 서비스의 사적 네트워크 연결 문제, 4세대 이동통신에 관련된 규제 형태 및 관련 서류 등의 6개 항목이 논의되었다. 최저가격 설정에 대해서 사업자들은 만장일치로 결정된 가격을 준수하지 않는 사업자들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규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아질리스 텔레콤 국제 컨소시움'에 유입 트래픽의 관리를 위임했는데도 불구하고 사기가 계속되었다. 트래픽 사기를 처벌하기 위해 사업자들이 시너지를 꾀하는 이유다. 또한 사업자들은 해결책으로 일원화된 요금 징수체계와 요금 상한제의 도압을 제안했다. 아직 논의중이지만 정보통신업계를 대상으로 개정되어 적용된 법이 있는 만큼, 우편, 전신 및 정보통신 신기술 업계 사장들은 새로운 법이 기술적 진화에 적응하게 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요소의 기여를 제안했다.

 한편 사업자들은 3세대 이동통신의 실적이 양호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훨씬 더 많은 기술적 요구사항이 있는 4세대 이동통신으로 이행할 필요가 없다. 바-콩고의 무안다에서 2012년 운영을 시작한 광섬유 접속점에 대해서는 정기적인 점검을 위한 네트워크 감사를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서비스의 낮은 품질로 인해 비상 연결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자세로 사업자들은 프라이버시와 국가안전이 확정된 법 및 규제를 따라 존중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적합한 해결책의 필요성

  광섬유와 유심 박스 외에도, 인터넷 접속 위원회와의 회담은 비밀 사업자, 컨버전스, 승인, 단말기 및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에 대해 이루어졌다. 평온한 분위기로, 차관은 적합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솔직한 협력을 약속하였다.

  그 외에도, 삼성, 화웨이, ZTE, CITCC, 에릭슨 등의 장비 운영자들과 함께 그들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규칙에 따라 이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인터넷 품질과 대중 시장 형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그들은 삼성이 겪고 있는 비열한 경쟁을 검토하여 이 문제에 대해 통제하기로 하였다. 회의의 마지막 스퍼트로 사업자들은 인터넷 품질의 위조와 인구조사 및 장비 승인을 요구하는 인터넷 품질 개선의 문제에 대해 상세히 검토하였다.



'킨샤사 주재원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기에.  (0) 2016.04.24
새로 만든 은질리 공항 청사  (3) 2015.08.30
Av. Kalume Mwana 장식품 시장  (5) 2015.03.17
첫 일본인 친구  (0) 2015.03.14
현지인과 소통할 준비  (0) 2014.10.04
Posted by 마키아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