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전 주베트남 대사관 참사관의 주간조선 인터뷰를 읽고 콩고민주공화국에서도 배워 적용할 점을 발견하여 인용해 적어본다.
"베트남 정부는 처음엔 학교 건립 사업을 반대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였죠. 우리의 입장을 까놓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사업을 시작하기까지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피해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는 마을을 중심으로 학교를 건립한다고 결정했지만 정작 그 대상이 어디인지도 몰랐습니다. 당시 보도된 양민학살 마을도 당장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분명하지도 않았죠."
신변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는 마을을 방문할 일도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가 막막했다. 베트남 정부나 한국 정부 어디에서도 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고 찾아낼 수도 없었다. 절망이 극에 다다를 때쯤 길이 열렸다. 베트남에 거주하던 한국 유학생의 제보와 자료 제공이 결정적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군사 및 양민 피해상황에 대한 보고자료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 자료이니 참고만 하고 바로 폐기하라고 그에게 요구했다.
한국 유학생처럼 나도 콩고민주공화국의 현지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발간된 자료를 수집하고 한국의 정부 관계자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는 정부를 도와줌과 동시에 현지에 발을 딛고 있는 나를 위한 공부이고 아프리카 전문가로 한 단계 올라서게 해주는 기반이 될 것이다.
한달 넘게 밤샘 작업을 해가며 자료를 번역하고 분석했다. 예상대로 베트남 중부지역에 피해 마을이 집중돼 있었다. 해당 지역은 한국 교민도 전혀 없는 미지의 땅이자 금단의 땅이었다. 대체로 차량 출입도 힘든 산골 오지마을이었다.
"사업단을 이끌고 마을에 들어서면 긴장을 안 할 수 없죠. 때로는 멱살을 잡히기도 했고 때로는 방문을 중단하고 도망치듯 나온 경우도 있었죠. 베트남 정부 공무원들과 요원들의 경호를 받긴 했지만 늘 불안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방문단을 에워싸고 따라다니던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었습니다. 경계의 눈빛 정도가 아니라 살기가 도는 정도였죠. 그래도 자꾸 다가가니 조금씩 마음이 열리더군요. 어떤 마을에선 주민들과 오찬을 했는데 얘기를 나누다가 눈물의 잔을 끝없이 주고받았습니다."
킨샤사 시내에만 있을 것이지만 그 안에서도 한국인이 살지 않는 미지의 마을이 존재할 것이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생활을 관찰하고 수요를 파악해야만 기업의 발전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마을에서 보고 들은 것을 사진과 글로 정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철저히 외부인의 자격으로 접근하다가는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흰색 방호복을 뒤집어쓴 의사들에게 경계심을 갖듯 나에게도 경계심을 가질 수 있다. 같은 도시 시민으로서 만나자는 태도로 다가가면 나에게도 현지 주민들이 마음을 열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오늘 2014년 10월 4일 황금연휴 기간에는 전국 곳곳에서 세계적인 축제, 전국 단위 축제, 지역 단위 축제 등 다양한 행사가 야외에서 열렸는데, 이 아프리카 도시에서도 분명 그러한 행사가 있을 것이다. 그럼 같이 오찬도 하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비교군과 통제군의 개념을 적용한다면, 나는 CIS/중동/아세안/남미 중 한 지역에 진출해 생활하는 외교관/무역관/주재원들의 경험담을 듣고 이를 아프리카 지역에 적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기후와 언어와 문화 차이가 있을 뿐 외국인으로서 생활에 임하는 자세나 인간관계와 비즈니스의 원칙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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