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생활을 하면서 언제나 안타까웠던 점은 밴드의 음악적 성향이 프로 아티스트처럼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아 다양한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성향을 가지고 싸운다는 점이었다. 누가 주로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분위기나 문화와 연계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는 하나의 밴드나 동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 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꼭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다. 그래야 공연을 위한 선곡을 할 때나 같이 공연을 보러 갈 때 싸우지 않을 수가 있다.
정치적인 모델에서는 이해관계자들이 언제나 타협을 하지만, 각자의 개성에 따라 연주해야 그 맛이 살아나는 음악에서는 타협을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부드러운 스탠다드 재즈 그중에서도 브러시 스틱을 사용하는 스윙, 북유럽이나 프랑스에서 나온 재즈 그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여자 보컬들이 부르는 모던락과 4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아티스트들의 락과 일렉트로니카를 혼합한 사운드 등을 특히나 좋아하는 나는 이러한 음악을 할 때 진정으로 감성이 살아난다. 지성이 아닌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나와 음악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서 소규모로 곡을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동아리라는 특성에 너무나도 판단의 기준을 확실히 잡아 놓은 나머지
각자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한 민주적인 타협을 한다면 아무도 진정 원하지 않는 곡을 모두가 맥아리 없이 연주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부터 동아리의 음악적 성향을 고정하는 것이지만, 사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배타적이고 동아리라는 취지를 완전히 뒤집는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로서(그래도 부정적 아마추어리즘은 갖지 않고) 활동하는 밴드나 동아리는 그래서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한 '교통정리' 혹은 '끼리끼리 모이기'가 필요하다. 즐겁고 활기차게 운영되는 밴드와 동아리는 모두 이와 같이 특정한 취향을 따르는 여러 개의 소규모 모임들의 집합체 형태를 띠고 있다. 모든 밴드나 동아리의 절반 이상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이와 같이 발전해 나갈 것이지만, 처음부터 이 일을 기반으로 닦아 놓으면 처음부터 즐겁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동아리의 사람들이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았다.
동아리의 구성원 혹은 세미나에 참가하는 사람이 20명이라고 가정하면 이와 같이 진행을 한다. 먼저 세미나를 진행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준비를 해 오라는 공지를 한다. 이에 따라 모든 신입생들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즐겨 듣는, 그리고 가장 즐겨 연주하는 음악 10곡을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 MP3 플레이어에 담아오는 숙제를 부여받는다. MP3 안의 음악은 다음의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 자신의 여러 가지 취향을 각각의 음악이 모두 대표해 주며 이 10곡의 음악이 반영하지 못한 취향은 없다.
- 누구나 그럭저럭 넘길 만한 음악 4곡과 자신만이 좋아할 것만 같은 음악 6곡을 넣는다.
- 하나의 플레이리스트로 정리하여 재생이 편리하게 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준비한 음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들을 40개 정도 추려 한 A4 용지에 매직으로 태그클라우드처럼 정리해 놓도록 한다. 이 두 가지는 세미나를 하는 날에 사용할 것이다.
세미나 날에는 우선 대학교의 큰 강의실 하나를 빌려 놓는다. 안에는 20개의 부스를 설치해 놓는데 한 부스 당 책상을 1개만 놓는다. 각 부스에는 MP3 플레이어 하나와 헤드폰 하나, 그리고 그 MP3 안의 곡 분위기 키워드를 써놓은 종이를 놓는다. 이 MP3 플레이어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일단 공개하지 않는다. 부스에는 큼지막한 번호가 붙어 있으며 이 번호는 각 신입생들이 부스에 대한 의견을 메모하는 데 참고사항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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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musicovery.com 이 사이트는 사용자가 플레이어에 설정한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찾아서 틀어준다. 청취자들의 음악 듣기 정보를 이용하여 자체적으로 만든 DB를 이용한다. 비록 영국 애들 꺼라 되게 낯설긴 하지만 ㅎㅎ)
그 다음 모든 신입생들이 각각의 부스에 한 명씩 들어가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한다. 부스를 바꿀 때까지 한 부스에 머물러 있는 시간은 10분으로 한다. 음악을 들을 때에는 전곡을 듣기보다는 전체적인 곡 분위기를 앞의 1분 정도만 들으면서 파악하도록 미리 주문한다. 신입생들은 각 부스에 대한 의견을 자기가 가져온 노트에 메모를 하는데, 꼭 메모장을 들고 올 필요는 없다. 단 부스 번호는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한 부스에서 다른 부스로 옮겨가는 것은 마치 '여우와 집' 게임의 '여우가 나간다' 처럼 무작위의 방향으로 할 수도 있고, 기계적으로 옆의 부스로 한 칸씩 옮겨 갈 수도 있다. 이는 동아리가 가지는 분위기나 성향에 따라 선택한다. 10분이 지날 때마다 앞에서 선배 회원이 공지를 하여 알려주면 부스를 옮긴다.
여섯 번 정도 부스를 거쳐가면 1시간이 지나 있을 것이다. 총 진행 시간이 2시간을 넘기지 않고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거쳐가는 부스의 수는 10개 이하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음악 들어보기가 끝나면 앞에서 진행자가 각 부스에 있는 MP3 플레이어의 주인이 누구인지 한명씩 말해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신입생들은 자신이 누구와 음악 성향이 호의적이고 누구와 적대적인지를 속으로 알아챌 수 있게 된다. 호의와 적대는 당연히 공적으로 내비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부스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같이 뒷풀이를 간다.
대화가 주가 되는 술자리에서 '넌 무슨 음악 좋아해?' 라고 물어보았을 때 그 질문이 생산적일 경우는 드물다. 직접 음악으로 들려주어야 그 사람의 성향이 온전히 전달되는데 술자리에서는 음악을 들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은 음악을 전달할 수 없고, 말의 내용이 듣는 사람의 성향과 반대라면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가 쉽다.
미리 성향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놓되 그 과정이 대화가 아닌 계획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을 경우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충돌이 없기 때문에 모두의 기분이 좋아진다. 프로그램의 규칙에 모두가 따라주고 서로를 알아가려는 열정이 다들 충분하다면 나는 이렇게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여 동아리 내의 결속을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