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공부만 하거나 어떤 단조로운 일의 반복에 갇혀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응, 나 요즘 그냥 쉬면서 학교공부나 열심히 하고 있지.' '외국어 자격증은 조만간 딸 계획이야.' 주변에도 재미없게 수동적인 입장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말이 별로 없고 화제가 나와도 재미가 없다. 나 또한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입에서 나오는 말도 허접해진다. 대학교의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면 화제를 만드는 사람과 화제를 전해듣고 반응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앞서 말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화제를 꺼내놓았을 경우에만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자기가 속한 써킷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침묵과 심심함만이 남아 자신을 감싸돌아도 그것은 자기의 안위에는 그리 큰 문제가 안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기 일쑤다. 재미없는 사람, 기계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채로 말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할말이 많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다채롭고 변화가 많다는 증거다. 수다스러운 성격은 단순히 그 사람이 지능이 뛰어나 백과사전이나 뉴스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연세춘추나 패밀리가 떴다에 나오는 모든 정보와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해박하게 알아놓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상 속을 건드리는 주변 사람과 사물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험 하나를 봐도 무표정한 상태로 단시간에 다 풀고 나온 사람과 이 과목을 위해 자기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기억의 단편으로 차곡차곡 쌓아놓고 힘들게 풀고 나서 그동안의 경험을 마구마구 쏟아낼 수 있는 사람 중 누가 더 재미있는 사람인지는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다. 성적은 앞의 사람이 더 뛰어나겠지만, 할말이 많고 화제로 전환 가능한 경험이 많은 사람은 대개 뒤의 사람이다.
 
  여기서 말한 뒤의 사람은 앞의 사람이 갖지 못한 경험을 훨씬 더 풍부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듣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웃고 즐거워하고 조롱하고 감탄할 만한 경험들을 이들은 가지고 있다. 친구와 여행을 가서 이상한 외국인을 만나 한바탕 곤혹을 치른 일, 여자친구에게 이벤트를 해주다가 실수를 했는데 결국 예쁘게 봐주었다는 하루의 사건, 소개팅 자리에서 선보인 비장의 특기, 전공과목 교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 중 학생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웃긴 대목 등등, 화제로 전환 가능한 경험을 그들은 생활 속에서 꾸준히 섭취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풀어 내놓아 주었을 때 즐거움을 주는 이러한 경험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에 관련된 사소한 일의 집합일 경우가 많다.

  화제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살면서 사람 몇 명이 같이 모인 자리에 놓였을 때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장기적인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 인생에서 적군에 대비해 실탄 몇십 발과 수류탄 몇 개 정도를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이스카우트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언제나 '준비'된 자세로 삶에 임하라는 뜻이었는데, 준비할 것들 중에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화제로 전환 가능한 경험이다. 나는 꾸준히 단순한 써킷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이러한 경험을 찾으러 산으로 강으로 뛰어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혼자만이 누리는 수동적인 일상에 만족하며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만 한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인가? 이 고민은 내가 살면서도 진정 살아있는가 아닌가에 관한 고민으로 확장하여 생각해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중대한 문제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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