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대를 하고 나서 휴가에 민감해진 건 휴가 때 보다 의미있는 일을 평소에 계획해 놓았다가 한꺼번에 하자는 식의 작전을 항상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냥 8주마다 다가오는 휴가 당일이 온 다음에야 아, 쉬는구나 하고 이제부터 뭘 할지 계획하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그 사람이 선약에 매여 있어 못 만나고, 밖에서 하는 공연이나 전시에 가 보자고 마음을 먹었을 때에는 이미 편하게 찾아볼 수 있는 사이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분명 나에게는 휴가때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그 일들은 매 휴가 때마다 세부적인 내용은 달라지겠지만 여러 차례의 휴가에 걸쳐서 커다란 범주는 같았다. 그래서 나의 다이어리(이제 프랭클린플래너 2010년판을 쓴다)에 그 범주를 적어놓았다. 매 휴가 때마다 하지는 않는 일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내용을 적었다.

  • 가족들 만나기 - 특히 자주 못 보았던 친척
  • 월 1회/연 1회 열리는 행사 참여
  • 쇼핑-교보문고, 낙원상가, 백화점
  • 특별한 가치(음식 외의)를 갖는 레스토랑/카페 방문
  • 특성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인터넷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잡지/단행본 열람
  • 밴드공연 관람/주최
  • 은행 업무/자금운용
  • 라리 고구마케익 먹기(진정 여기서만 먹을 가치가 있다)
  • 공씨책방/홍대,신촌 헌책방 가서 책/CD 구입
  • 디브러리 Global Lounge에서 TV5MONDE 위성방송 보기
  • 최신영화 보기

 

 이렇게 순서 없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휴가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날 때마다 적어놓으면 휴가 때 한 번 계획으로 한꺼번에 약속과 모임과 일을 끝낼 수가 있었다. 마치 여행가이드가 상품 고객들을 위해 예약을 해놓은 관광지의 방문 일정을 하루의 시간표 안에 식사시간을 포함하여 끊김 없이 모아놓는 것처럼 나는 스스로의 휴가를 위한 여행가이드가 되었다. 물론 이번 17일부터 20일까지의 휴가 때는 애초부터 열심히 쉬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원래 나의 휴가는 전역 후의 할 일 중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틈틈이 땡겨오는 개념의 휴가이다.

 하지만 내가 영내에 있을 때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집 컴퓨터 앞에 앉아 처리할 때도 있었다. 내가 스스로 계획하고 마감 기한을 잡아놓은 일이 영내에 있을 때 끝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끝나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계획한 일이 미처리 상태로 남아있는 상태에 자극을 받아 마감 기한 이후에 언제라도 여유로워지면 그 일을 끝낸다. 이렇게 나는 지나간 일 중에 미심쩍은 게 있으면 불안하다. 프랭클린 플래너를 계속 써서 생긴 심리적인 증상인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부대를 빠져나와 아무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의 활동적인 시간 속에 놓이게 된 그 순간, 내가 여유롭다는 사실만으로 이전의 부대 안에서 하기로 되어 있던 일을 하면 그 일을 하는 내가 얻게 되는 효용은 낮다. 시간과 공간이 바뀌고 간섭할 사람이 줄어들어 자율성이 커졌을 때에는 자율성이 커졌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효용이 적정 수준으로 유지된다. 이 순간에 자율성이 적어도 할 수 있는 일, 시공간과 업무 우선순위의 제약이 없는 일을 하면 나는 높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기회비용을 따진다면 항상 기회비용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 된다. 특정한 때와 장소에만 할 수 있는 일을 차질없이 여유롭게 수행하기 위하여 언제 어디서나 해도 상관 없는 일은 특정한 때와 장소에 놓이기 전에 미리 다 처리해버려야 추후 기회비용의 낭비가 없다. 이 때문에 일상적인 일은 비일상의 기간을 맞이하였을 때 절대 하지 않는다. 휴가를 나왔는데 굳이 부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공부할 필요가 없고, 굳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회비용이란 자율성이 늘어날수록 커지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실천에 대해 제약이 적어질수록 커진다.

 나의 경우 공부 / 블로그 / 쇼핑 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내가 하는 일의 실천에 대한 제약은 쇼핑이 제일 많고 공부가 제일 적다. (블로그는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따로 있다. 사지방에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대 안의 근무장 및 근무시간 / 생활관 내 독서실,사지방 / 주말과 공휴일의 정보화교육장과 점심시간의 인터넷PC /부대 밖(휴가) 을 예로 들자면 자율성은 근무시간에 근무장에 있을 때 제일 적고 부대 밖(휴가)일 때 제일 많다.

 (표) 시간/장소에 따른 할 일의 최적화 전략. 빨간 색으로 셀을 칠한 영역은 실현 불가능을 나타낸다.

 이렇게 행에는 시간/장소를 자율성의 정도에 따라 낮은 순서대로 쓰고, 열에는 할 일을 실천에 대한 제약이 많은 순서대로 쓴다.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영역에 X표를 치거나 색칠을 한 뒤 각 열의 가장 위의 행에 있는 셀에 O표를 한다. 할 일은 수십 가지로 확장될 수 있으므로 열 또한 수십 개가 될 수 있다. 행도 마찬가지이지만 개인의 행동 범위에 따른 시공간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열보다는 덜하다. 표를 보면 휴가때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높은 기회비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할 수는 있겠지만 하고 나면 분명 그때 그 장소에서 다른 일을 할 걸, 하고 후회할 것이다.

 아울러 같은 행에 O표시를 해 놓은 일을 여유롭게 추진해 나가기 위해, 앞서 미처 끝내지 못한 '실천에 대한 제약이 적은 일'들이 방해를 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 실천에 대한 제약이 적은 일들은 특히 실천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과 장소에 바로바로 해치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단물은 다 빨아먹자' 원칙이 있다. 늘어난 자율성은 시간이 경과하면 다시 줄어든다. 휴가를 갔다가 다시 오면, 멋진 사람들이 모인 화려한 파티가 끝나면, 나를 만나러 온 그녀가 떠나면 자율성은 줄어든다. 자율성이 줄어들면 표에서 나의 위치는 보다 위에 있는 행으로 올라가게 되고, 그에 따라 실현 불가능한 영역(빨간 색으로 셀을 칠한 영역)은 점점 많아진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 밀도 있게 계획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내가 만든 표가 급작스럽게 생각해낸 거라 아직 표현할 수 없는 것도 몇 개 있다. 앞에서 말한 자율성은 주위에 상관, 선임이 몇명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여행을 갔을 때에는 자율성이 분명 높아지지만 그 자율성은 어디까지나 특정 분야에 대한 자율성이다. 즉 각각의 표가 개인의 복수 개의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조금 더 연구해 보면 도식으로 표현하여 계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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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박4일의 휴가를 받고(연가라고 아시나요) 10월 6일부터 9일까지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군부대라는 공간적 한계 때문에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요, 상점들이 영업을 시작하는 9시가 되기 전에는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각종 결제를 하고 그 다음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에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계획을 짜 보았어요. 남들이 일하지 않는 아침에 인터넷은 일하고 있다는 게 저한테는 참 고마워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 결제를 위해서는 수첩과 체크카드와 보안카드와 USB를 이렇게 펼쳐놓고 결제할 것들을 체크해 가면서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요. 돈 내기도 꽤나 복잡한 일인 것 같아요. 이번에는 공인인증서 재발급까지 해야 돼서 더욱 더 복잡하네요.
 
 위에 제가 쓰는 수첩 3개가 보이네요. 제일 작은 건 군부대에서 제가 건빵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면서 선임들이나 영외자들의 말을 받아적거나 그날 할 일을 프랭클린 플래너 형식으로 정리해놓는 New PD 수첩이구요, 왼쪽 위에 있는 색깔 종이의 6공 다이어리는 일주일 단위로 1주부터 96주까지 한 장(두 페이지)씩 마련해 놓은 공군 생활 중의 장기계획 수첩이에요.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프랭클린 플래너는 입대 전 사회에 있을 때까지 한창 썼던 놈이구요. 이 세 가지 수첩을 번갈아 보면서 다음 휴가가 올 때까지의 한두 달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게 휴가 중에 제가 치르는 중대한 의식이에요. 

  그리고 네이버 N드라이브에 제 증명사진을 올려놓았어요. 사지방(군 PC방)에서 시험을 접수할 일이 생기더라구요, 그 때 사진이 필요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생각난게 네이버 N드라이브였어요. 아울러 집에서 쓰던 유틸리티 몇개도 슬쩍..

  시계와 외장하드가 고장이 나서 한 9시 정도가 되면 전화해 보고 오늘 고칠 수 있는지 알아볼 거에요. 그리고 1달 동안 잠자던 제 검은색 핸드폰을 114에 전화를 걸어 상담원에게 깨워달라고 해야 돼요. 9시쯤 되면 출발해서 제가 들러야 하기로 예정된 곳을 하나하나 최소 동선으로 찍어가면서 구입을 하고 상담을 하고 그런 일들을 할 거에요. 

  마지막으로 외출을 위해서 군에서 쓰던 지갑을 사회에서 쓰던 지갑으로 바꾸고, MP3와 각종 멤버십카드/할인카드를 꺼내고 자주 가는 장소나 자주 보는 사람들을 따로 적어놓은 수첩을 꺼내고 집에 놓아둔 좋은 화장품을 쓸 거에요.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다 보면 휴가가 참 길다 느껴지고, 한편으로는 군바리 기질을 잠시 전환해 놓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저 자신이 그동안의 세월에 따라 얼마나 다른 사회적 자아에 길들여져 있었는지를 느끼곤 해요.

  지금 저에게는 군 생활이 일상이고 휴가가 비일상이에요. 일상에서 비일상, 비일상에서 일상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신중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복잡하지만 언제나 저는 이 사실로 위안을 삼곤 하지요. 제게는 이곳 서울에서의 제가 현실의 자아이고, 저곳의 삶은 꿈결 속에 빠르게 흘러갈 뿐. 마치 4일 동안 깨어 있다 다시 한두 달의 긴 수면에 빠지는 겨울잠 동물처럼 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정말 시간은 금방 갑니다. 진짜 훅~ 갑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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