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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

  우리는 항상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다. 경제학자 케인즈가 만든 이론은 대공황 때에만 효력을 발휘했다.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세운 방학 계획은 완벽한가? 그것 또한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운동할 수 있었던 것을, 나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성벽 주위를 순환하는 해자(垓子) 속의 물과 같은 '진리의 물결' 속에서 극히 일부분을 떼어낸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물결 전체를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해질 수 없다. 항상 어떤 학자가 주장한 이론에는 한계점이 있고 수정이 필요하다. 내가 만든 작품의 뒤편에는 더 멋있는 작품이 있다. 항상 내가 쓴 논술 답안에는 반발의 여지가 있다. 내가 유려한 논리를 전개해도 그 논리가 한정된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면, 나의 논리의 앞과 뒤 끝부분을 연장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논리 전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는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다.


완벽하지 않아도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항상 진리, 혹은 완벽에 비해 열등하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까? 그렇지는 않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 때에도 분명 어딘가에는 좀더 좋은 '자료의 수집' 혹은 '자료의 분석과 정리' 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을 만드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완벽한 것은 앞으로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완벽 추구의 삶은 '더 좋은 것'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기에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즉 우리는 희망을 갖고 '한계적으로' 궁극의 완벽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동등가치와 우열가치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Rock을 좋아하는 활달한 소년이 될 것인가, 아니면 Jazz를 좋아하는 부드러운 소년이 될 것인가. 분명 활달함과 부드러움, Rock을 좋아하는 성격과 Jazz를 좋아하는 성격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지만 서로 다르다. 그리고 어느 한 성격 경향을 택해서 그 성격을 바탕으로 인격적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의무는 인생 전반에 걸친 의무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예를 통해 말한 두 가지 성격 경향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 둘은 동등가치이다. 이럴 때에는 자신의 성향, 즉 style이 원하는 대로 따른다. 그리고 나의 style을 기반으로 하여 더 완벽을 추구할 여지(margin)을 찾아본다.
  하지만 분명히 가치의 상대적 우열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옷 입는 스타일에 있어서 가치의 상대적 우열이 존재한다. 아무 옷을 입으나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가치를 논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 특히 나와 같은 청소년이라면 옷을 어떻게 입는지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디자인이 뛰어나고 옷을 입은 사람과 잘 어울리는 옷과, 평범하고 허름하며 옷을 입은 사람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옷 사이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이럴 때 가치의 상대적 우열이 존재하고 우열가치가 나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있다면 나는-내가 옷 입는 일에서 만족을 느끼고 주위 사람의 인정을 받는다면-나의 개성을 파악하고 개성에 맞추어 style을 정하고 그 style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고, '한계적으로 완벽'한가?

  내가 그 이론을 만들면서, 그 계획을 세우면서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욕구를 충족하여 최고의 만족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론과 계획에 대한 최고의 평가를 내린다면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완벽하다(marginal perfection). 지금으로서는 완벽한 것을 내가 만들어 냈을 때 나는 자기 존중을 느끼는데, 이것이 나에게 한계적으로 궁극의 완벽에 접근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과 같다.


Self-esteem - 완벽 추구를 위해 달리는 스포츠카의 윤활유와도 같은 존재

  Self-esteem이라는 집이 여기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쳐주는 주춧돌은 세 가지가 있다.

나의 만족,

친구,가족,'평가원'들의 인정,

사회 발전과 자기 발전으로의 지향. (여기서 평가원이란 선생님,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대학교의 입학관리, 혹은 각종 시험의 주최 기관을 지칭한다.)

즉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만족시키고, 그 일로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나아가 그 일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일정 부분 공헌하고 나 또한 발전하는 데 기여할 때 나는 자기 존중(Self-esteem)을 하게 된다. 자기 존중은 나의 끊임없는 완벽 추구의 원동력이 된다.


완벽 추구의 좌절 그리고 자기 존중의 한계(limit)

  분명 완벽을 추구하더라도 지금의 '한계적(marginal) 완벽'을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머물거나, 혹은 지금 나의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의 '한계적 완벽' 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야 한다. 나의 노력으로 분명 극복의 단초를 찾아낼 수 있다. 자기 존중과 뒤이은 발전은 내가 지금 하는 많은 일들 중에 한계적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일을 찾아냄으로써 더욱 풍성해진다. 보통 완벽 추구의 좌절을 겪는 일은 지금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로서의 일일 때가 많다.
  또 내가 말한 Self-esteem에도 함정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와, 내가 이 일을 해냈어. 대단해.' 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을 때가 있다. 이는 방학 동안 학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부하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분명 나는 나의 모든 노력을 다해서 공부를 했는데, 그 공부는 내가 보기에는 한계적으로 완벽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회 전체가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한계적 완벽에 추호도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설정한 한계적 완벽이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한계적 완벽에 비해 너무나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따라서 주위 사람들과의 교감이 필수적이다. 항상 사회를 의식하고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과 내 자신을 비교해야 한다. 이 일은 위에서 말한 Self-esteem의 두 번째 주춧돌, 즉 다른 사람의 인정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의무의 이행이 중요하다

  일정한 생애의 한 부분에서 인간은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차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청소년기부터 직업에서 은퇴하고 노년의 삶으로 전환하기 전 시점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의무와 싸우는 사자(lion)와도 같다. 아무리 우리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정해놓고 그 일에서 끊임없이 한계적 완벽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 일이 '현실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자질을 내가 성취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무가 현재로서는 나와 같은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완벽 추구의 과정을 밟는 객체가 '현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의무' 가 되도록 노력해 보아라. 그렇게 한다면 분명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소위 출세의 길도 열릴 것이다. 꼭 내가 출세를 바라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일단 나에게 주어진 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의 한계

  원래 소제목을 '나의 이론의 한계' 로 정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지금 내가 쓴 글이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의 한계'로 고쳤다. 나는 내가 완벽 추구의 객체를 논함에 있어 그 객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찾을 수 있다. 분명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더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餘滴

  지금 내가 하는 말 자체도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상실감이 들거나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더 노력해서 더욱 더 만족을 느끼고,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나아가 나의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06. 7. 23.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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