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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0 전화를 거는 사람을 위한 변론

  연애에 초보인 모든 젊은 남자들을 위해 이 논문같지 않은 작은 논문을 써 보냅니다. 전화를 했는데 그녀가 전화를 안 받는다면? 남자의 마음에는 각종 추측과 상상이 나래를 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때일수록 이성적인 판단을 차근차근 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의 작은 글은 제가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직후 휘갈겨 쓴 글을 약간 손본 것입니다. 전화 건 사람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경고하는 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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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를 항상 손에 들고 다니며 하루 중 무슨 일이 있어도 걸려오는 전화는 모두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화가 울리든 말든 일단 자기 할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전화를 책상 위에 내팽개쳐 놓는 사람도 있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반드시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전화를 받는 것이 의무라면 그 전화의 목적은 공적이어야만 하면 업무에 관련되어야만 한다.

  부재중 전화가 상대방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답신 전화를 할 것이다. 이 때 그 사람이 부재중 전화 기록을 그냥 보고 만다면 그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선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라 답신 전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또한 답신 전화를 해도 받는 사람이 전화를 못 받을 상황일 것임을 미리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경우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따지려 드는 것은 그 사람의 삶과 시간을 나의 명령에 구속시키고자 하는 매우 권위적인 행동이다. 그 사람을 진정 좋아한다면 최선의 방법은 침묵한 채 계속해서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간대, 일과에 매여 있지 않은 시간대를 먼저 헤아리고 그 시간대에 전화를 걸면 나를 극도로 혐오하지 않는 이상 일단 전화를 받게 된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가 나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라는 멘트를 듣는 것은 용기내어 전화를 건 자에게는 분명 좌절이다. 한 가지 의문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수신자가 수신거부를 했을 경우에는 송신자의 전화에 과연 어떤 메시지를 알려주는가다. 만약 그 메시지가 정말 상대방이 부재중이 아닌데도 부재시의 멘트와 같다면 그 메시지는 본래 의도했던 목적인 송신자의 안심과는 달리 수신자의 진심을 송신자에게 왜곡해서 전달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핸드폰에 벨소리가 울리는데 전화 건 사람이 꼴도 보기 싫어서 수신거부 버튼을 눌렀는데 전화를 건 사람의 수화기에는 마치 상대방이 부재중인 것처럼 자동응답 메시지가 나온다고 상상을 해보자. 그건 작은 기계적 장치가 인간관계를 틀어버리는 크나큰 문제이다. 핸드폰 기종 그리고 이동통신사마다 수신거부시 전달하는 메시지의 형태가 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가식적인 예의가 지극히 필수적이지 않은 이상 수신거부시에는 솔직하게 자동응답 메시지로 "상대방이 당신의 전화 수신을 거부하였습니다." 라고 말해주어야 훨씬 깔끔할 것이고 전화를 하는 사람의 각종 상상을 애초에 단절시킬 것이다.

  전화는 사람의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싫어지는 경우, 혹은 싫어하는 사람이 갑자기 좋아지는 그 전환점은 대면 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전화를 통해서 진심의 핵이 전달되는 경우는 없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포옹이나 키스가 이루어지거나 혹은 상대방을 홱 돌아서거나 상대방의 뺨을 후려치기 전의 한마디는 전화나 문자와 같은 정보통신 매체를 통해 도저히 실어나를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언제나 통신 매체는 무거운 진심이 전달되기 전의 상황 구성을 위한 도움만을 줄 뿐이고, 혹은 이미 노출되고 서로 나눈 진심을 다시 재현하거나 그 효력을 유지할 뿐이다. 전화 통화만으로 관계의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힘들고 그 시도는 유치하다. 전화 한 통화를 통해 관계의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쉽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진실한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고려와 예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난 말하고 싶다. 사귀자는 전화를 받았을 때, 혹은 헤어지자는 문자를 받았을 때 받은 사람의 기분은 어떠한가? 처음 전화나 문자를 받은 그 순간 그 전화나 문자는 절대로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중에 그 내용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기분은 '찝찝하거나 더럽다'. 전화나 문자를 통해 오고가는 말들은 그래서 가벼워야만 한다. 무겁지 않은 일상 속의 질문, 대답, 이야기, 묘사, 감탄 등의 대화가 전화라는 통로에 걸맞는 전달 물질이다. 그러므로 우리 남자들은 여자에게 전화를 할 때 괜히 무게를 잡지 마는 것이 현명하겠다. 무게를 잡는 순간 대부분의 여자는 부담을 갖고 불쾌하게 느낄 것이 자명하다.

  전화를 대면 대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때라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먹고 당장 전화로 무언가를 바꾸고자 생각하지 않는 게 제일 현명하다. 인공적인 요소가 모두 사라지고 감추어지기 전에는 서로의 마음 속에 있는 진심이 쉽게 고개를 들지 않는다. 인공적인 요소로 치장된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미적 감상, 혹은 팬덤(fandom), 혹은 자기도취이다. 무조건 여자의 얼굴 사진만 보고 인간적으로 끌리는 남자, 스포트라이트와 환호성을 받는 화려한 스타에게 마음이 쏠리는 여중생, 멋지게 차려입고 돈을 많이 들여 이벤트를 해주고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 인터넷 채팅을 통해 소개받은 남자의 글을 보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각한 사랑은 사랑의 감정이 아니다. 깊게 들어가 봤자 사랑의 전 단계일 뿐이다. 진정 사랑하고 싶다면 직접 마주보고 만질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결국 에로스의 판정승을 이야기하고 싶다.

  앞서 열심히 논했듯 관계의 변화를 위한 무거운 말은 대면 중에만 적절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 공간에서 만나지 못하면 '연애의 시작과 전개'는 불가능하다. 장거리 연애는 그래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하고 여기서 군인과 대학생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전화의 가장 값진 용도는 따라서 대면을 위해 약속을 잡고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확인하는 사전 탐색 작업이다. 유쾌하게 농담도 던져가면서 이 사전 탐색 작업에 열중해 보자.

  전 군대에 있으므로 연애는 나중에나 해야겠습니다. 그렇지만 전화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진짜 사랑의 전 단계까지는 도달할 수 있겠지요. 잡념이 저를 감쌀 때엔 그 생각만 하며 남은 나날들을 보내야겠습니다. 저와 같이 맘 졸여하시는 모든 남자분들 힘내세요! 사랑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용기 내어 다가서서 보여줄 때 얻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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