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죽인다.


 1889년생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1914년 26세에 독일군의 바이에른 16보병연대에 지원한다. 그보다 2년 전에 스탈린은 볼셰비키가 러시아 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해 나온 뒤에 레닌에 의해 당중앙위원회에 공식 임명된다. 1879년생 스탈린이 1905년 27세에 볼셰비키 대표로 핀란드 회의에 가서 레닌을 처음 만남으로써 그의 정치생활을 시작했으니 두 명의 정치계 입문 시기는 비슷하다. 정치계 입문 시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정의함을 논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1919년 31세의 히틀러는 바이마르공화국(도이치국) 정보선전부로 들어가고, 1920년 32세에 그가 속했던 독일노동자당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으로 개명한다. 당시 러시아에는 트로츠키가 붉은 군대를 조직할 때다. 당 내부에서 두 명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 히틀러는 1923년 35세에 뮌헨 폭동으로 당을 해산 위기에 몰기도 했으나 1925년 다시 자력으로 나치당을 세우고 히틀러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1932년 그가 44세 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30명 나치당이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낸다. 한편 이 시기 1925년 초 47세의 스탈린은 1929년까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부하린을 제거하는 국내 정치투쟁을 벌인다. 제 3자가 누구를 죽일지는 국내 정치투쟁을 위해 그 사람이 누구를 죽이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혔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나치당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베르사유조약을 거부하고 국가의 치욕으로 여기는 나치당의 근본 사상은 빠른 공업화, 일국사회주의, 소비에트 당의 다른 공산주의 당에 대한 절대우위라는 소련공산당의 근본 사상에 비해 정당으로서의 정당성이 부족하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비겁함만이 우선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히틀러는 1929년의 대공황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선동한 기회주의자였으나, 적어도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면서 독재체제를 구축해가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학살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를 따져보아야 하는데 스탈린이 먼저 시작했다. 1930년에52세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토지 소유자들을 약 1만 명 죽였다. 히틀러는 선제공격으로 1939년 51세 때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을 1941년 53세 되던 해에 깨고 난 다음부터 인종차별 개념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을 뿐 1939년 이전에는 국내적 군비확장과 전쟁 준비에만 신경썼다. 나이로 따지면 두 명 모두 비슷한 나이에 학살을 시작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두 명 모두 독재자였으나 학살을 보다 이른 시기에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렇지만 더 악랄하고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판단한 사람은 히틀러다. 스탈린의 변형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국내의 농업정책이 굴락의 학살을 일으켰지만 이는 내치의 문제이다. 제3자는 외치를 먼저 보아야 하기 때문에 홀로코스트가 먼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히틀러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보너스 (느리게 걷는 여행 중 발견한 것들):

바로 이 기사네 ! Hitler vs. Stalin: Who Killed More? (New York Review of Books)

60년만에 공개한 히틀러 자택 (시스템클럽 휴게실)

국제볼셰비키그룹 한국어 홈페이지 (토플 iBT만 있는줄 알았는데 이것도 IBT네요)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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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치외교학과 4학년 이동욱입니다. 89년생이며 나이가 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수업을 들은 이유는 평소 관심있던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내정치체계 등과는 달리 취약한 분야였던 정치철학이나 역사를 졸업 전에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IT와 정치의 접점인 사이버 이슈에 가장 관심이 많지만 국제관계를 논하기 위한 전쟁과 평화의 역사 지식을 쌓는 것이 보다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는 유럽 사상에 대항하여 저는 전쟁이란 형벌의 연장이라고 하는 아시아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한중일 삼국끼리는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장기적으로는 미일동맹을 끊어지게 하고 중화질서의 조공 시스템에도 편입되지 않는 균형 있는 삼국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자주를 외친다는 점에서, 자주를 위해 미국과의 전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저는 우파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제게는 중요합니다. 제가 평화주의자라고 묻는다면 제가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입니다. 20세기의 냉전 시기가 가장 안정된 평화 시대인 것은 전쟁 직후의 세력 균형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관심있게 보고 있는 정부간 기구인 TCS 삼국협력사무국은 바로 세력 균형을 위해 존재할 뿐 EU와 같은 제도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재 위안부 역사 논쟁을 다시 끌어오는 것은 지략가들의 대의와 형벌의 논의로 유교권에서는 전쟁 직전의 단계인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형벌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전쟁을 일으키겠지만, 형벌이 필요 없다면 전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섭     14/03/08 10:32

전쟁이 형벌이라고 하면 먼저 죄가 있어야 하는데, 유죄와 무죄의 판정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강현주     14/03/09 18:02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노어노문학과 3학년 강현주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생각하는 전쟁이 '형벌'의 개념에 가깝다는 점에 동의하는데요, 이동욱선배님의 '형벌의 연장'개념에 조금 더 제 의견을 덧붙이자면 유럽, 특히 서유럽에서의 전쟁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일종의 '과격한' 대화수단이라면,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도(道)나 의(義)라는 기준에 따라 국가가 흥하고 성하는 과정으로서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일찍이 오자병법(吳子兵法) 제1편에서 전쟁을 이기는데 중요한 제 1원리로 도국(圖國), 즉 통치자의 도(道)와 통치가 올바르고 합리적일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적국의 통치가 올바르지 못하고 道에
강현주     14/03/09 18:09

적합하지 못할 때 반드시 승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손자병법에서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라고 하며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양에서는 전쟁이 물리적인 파괴력을 통해 적진을 파괴시키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도(道)와 치(治)를 두고 국가들끼리 경쟁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가 아닐까요. 이동욱 선배님 말씀대로 전쟁이 '형벌의 연장'개념이었다면 그 '죄'를 판명하는 기준은 도(道)였으며, 그것을 판정하는 자들은 전통적인 통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민생,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학자(관리)들이
강현주     14/03/09 18:10

었을 것입니다. 선배님 생각이 제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부족한 의견 덧붙여봅니다.
이동욱     14/03/10 09:56

유죄와 무죄의 판정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장군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그 둘에게 정세와 향후 전략에 대해 조언한 지략가가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략가들은 적국 지략가들과 근대 국제법의 틀 사이에서 만나 논의하지는 않았고 철저히 자국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 의견은 명분을 만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명분을 역사로 기록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외교관들이 실리만을 논의하여 힘의 우위를 따졌지만 동양은 명분에 실리를 끼워맞추는 일에 좀 더 힘을 쏟았습니다.
이동욱     14/03/10 10:04

한편 1592년 임진전쟁(임진왜란)의 배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다이묘들이 통일 일본의 세력을 명까지 확장하며 명과의 감합(명과의 무역을 위한 허가증) 무역을 재개시키고 힘을 외부로 확장시켜 일본 내의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임진전쟁은 자국의 실리에 따라 판단한 정치의 연장입니다. 여기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 섰던 다이묘들은 결국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고 조선은 유죄라는 판정을 국내에서 만장일치로 하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보였습니다.
이동욱     14/03/10 10:06

유죄와 무죄의 판정은 국내의 지략가나 외교관이 시작하고 국내 전체의 동의를 얻어 무력을 집행하는 사람이 전쟁을 개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기서 국내 전체의 동의를 얻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하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이끄는 제국주의 세력은 일심단결하여 명분을 세웠습니다. 단 어디까지나 주변국과 함께 유죄/무죄 판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한계입니다.
김명섭     14/03/12 02:45

그렇다면 유죄로 판정되면 바로 사형, 즉 전쟁이어야 할까?


또 댓글 달아야지 ㅎㅎ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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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사회에서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있으면 무엇이 좋아집니까? (600)

 

     도시는 다른 어느 공간보다도 주민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공간이자 행정부의 제도가 깊게 관여한 공간이며, 마을공동체는 파편화된 개인만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해결해주고 공동체 내에 책임이 없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제거한다. 도시 내 마을공동체는 작게는 명절 기간의 쓰레기 처리 문제부터 크게는 버스노선 변경과 육교 신설까지 마을공동체 내의 공동의 이익을 형성하고 집행할 때 도시의 특성상 행정기관의 허가가 필요한 다양한 경우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합리적 이익 최대화 작업은 행정부가 먼저 주도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발의하여 행정부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고도화된 도시일수록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는 제도의 양도 많아지므로 행정부를 끌어왔을 때 효과성도 더욱 커진다.

 

     또한 도시의 인구 밀도가 높은 경우는 한 마을공동체가 보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자기조직적으로 활동할 때 네트워크 효과를 극대화한다. 성미산마을은 어쩌면 주민 주도로 마을을 형성한 대표적인 bottom-up 방식의 사례이다.(유창복, 마을이 혁신이다-협력적 거버넌스를 위하여,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 이 성미산마을은 아이들의 육아를 협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시작됐고, 그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마을살이의 다양한 인프라들이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가족'이 마을의 중심적인 구성단위다. (유창복, “성미산마을, 이제 폼 잡지 말아요”, 오마이뉴스, 검색일 2014 3 10.) 아이들이 밀도 있게 모여있지 않았다면 육아를 위한 환경 조성 노력도 미미했을 것이다.

 

2.     협동조합, 사회적기업식의 원리에 입각한 마을공동체기업(서울시가 쓰는 개념)들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사회적 기업/협동조합/마을공동체기업들이 활성화되면 무엇이 좋아집니까? (600)

 

     마을공동체기업을 운영하는 방법이 노하우로 정착되면 그 운영이 예측 가능하게 되어  실행단계에서 민간의 전문역량이 자문, 심사, 모니터링 등의 업무를 수행했을 때 성과가 극대화된다. 여기서 마을사업에 참가하는 주체는 진입장벽이 높은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동네의 일반 주민이다. 아울러 정부 부처, 즉 서울시와 각 구청 자치행정과는 각 마을공동체기업이 업무를 편성하기 위한 예산을 뒤에서 지원해주면서 인건비와 같이 일관되게 지원할 수 있는 항목에 집중함으로써 실행단계가 지속적이게끔 만든다.

 

     지금은 서울시의 각 구마다 마을지원센터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예를 들어 노원마을넷은 노원구에 특화된 사업을 정하여 노원구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추진하는 식으로 작은 범위의 마을공동체기업이 최대한 미시적인 내용을 다룬다. 그리고 한 마을지원센터는 문화, 경제, 복지, 주거 등의 문제를 가리지 않고 다루기 때문에 부문별로 조직이 나뉘어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알력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주민들은 자신들의 동네를 세세하게 관찰하고 그에 맞는 지원을 해주는 센터와 더불어 공동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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