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공동체활동에 관심이 있는 주민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중에서도 실제로 참여하는 주민과 참여하지 않는 주민으로 나뉘는 것은 왜일까? 실제로 참여할 때는 언제고, 의사가 있어도 참여하지 못할 때는 언제일까? 협력하고 싶은 우리가 실제로 협력하는 건 언제고, 협력하지 않는 때는 언제인가? (1,200자)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주민들이 상호의존적일 때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의 욕구에 에 따라 가능하다. 이는 서울시가 마련한 마을공동체만들기 지원 프로그램에 각각 함께 만들고 소비하는 ‘경제공동체, 공동체 활동지원 사업, 신나고 재미있는 문화공동체’ 의 3가지 분류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주민 개인 혹은 3인 이상 주민단체가 신청하여 이루어지는 현장상담 및 조사, 사업선정 및 주민안내, 사업실행계획 제출, 사업비 교부, 보조금 정산 등의 과정은 마치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와 같이 많은 개인적 노력을 요한다.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완전히 자비로만 충당하는 것은 보통의 소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보며, 회비를 걷는 것은 마을 주민들에게 회비를 낸 만큼의 보상을 동등한 비율로 가져다줄 것이라는 보장과 감시 장치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 자신의 가처분소득을 명예를 위한 기부도 아닌 이러한 분야에 내놓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위해 모두가 동등한 양의 노동력과 금전적 자본을 내놓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협력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무임승차자가 등장해도 그 무임승차자가 야기하는 비용을 감수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만이 참여한다. 또한 소득이 높은 사람이나 마을공동체 이론에 보다 정통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면 마을공동체의 권력구조는 기업의 위계질서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데 동의를 빨리 해서 신뢰가 있는 집단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거두게 하는 보상 체계를 정립하는 것도 실제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요소다.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부업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여있다고 가정할 때 협력의 조건을 논의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으로 보인다. 3인 이상이 모여 추진하는 팀 프로젝트인만큼 3인이 협력했을 때 드는 비용이 혼자서만 뛰어들고 다른 사람은 배신했을 때 드는 비용보다 작아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한 번의 행사 개최를 통해 공동체의 더 많은 이익을 보려는 경우에는 아담 스미스의 논의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개인적인 행동이 개인에게 보상을 주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도 편익을 가져다줄 때 협력으로 이어진다. 나만의 아이템을 가지고 장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간보는 시장’이 이 경우에 속한다. 시장의 판매자로 참여하지 않고 구매자로 참여한 무임승차자에게 많은 편익이 있지만 무임승차자는 결국 금액을 지불한다.


   교육 프로그램, 청책 포럼, 푸드뱅크, 마을축제 기획단은 일회성이 아닌 최소 6개월 이상의 장기적인 사업으로 추진될 개연성이 높다. 이 사업들은 모두 공유지의 비극을 낳을 소지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 경우에는 처음에 협력에 실패하여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관심을 가진 행위자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초기 상태를 개선하고자 그 다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운영하는 사람의 집단이 정해져 있고 서로가 친분을 통해 감시를 같이 수행하며 매주 혹은 매월 단위로 주기적으로 진행되면서 협력의 정도를 중간에 계속 평가하는 특징을 갖는다. 세 가지 특징이 모두 만족되어야만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보장할 수 있고 이 중 하나라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집단에서 제외된다.


   마지막으로 어떤 프로그램에서든지 기획을 위한 회의를 할 때는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자신의 의견이 갖는 파급효과가 커져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필요성이 높아지고 그 결과 회의가 빨리 끝나고 결정된 내용이 분명해지고 많아진다. 회의의 결정은 참가자 및 외부의 무임승차자에 대한 공공재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참여했을 때 체감하는 이득은 줄어들고, 이에 따라 반복 게임을 통해 협력으로 이끌 추동력도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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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를 죽인다.


 1889년생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1914년 26세에 독일군의 바이에른 16보병연대에 지원한다. 그보다 2년 전에 스탈린은 볼셰비키가 러시아 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해 나온 뒤에 레닌에 의해 당중앙위원회에 공식 임명된다. 1879년생 스탈린이 1905년 27세에 볼셰비키 대표로 핀란드 회의에 가서 레닌을 처음 만남으로써 그의 정치생활을 시작했으니 두 명의 정치계 입문 시기는 비슷하다. 정치계 입문 시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부정의함을 논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1919년 31세의 히틀러는 바이마르공화국(도이치국) 정보선전부로 들어가고, 1920년 32세에 그가 속했던 독일노동자당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으로 개명한다. 당시 러시아에는 트로츠키가 붉은 군대를 조직할 때다. 당 내부에서 두 명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 히틀러는 1923년 35세에 뮌헨 폭동으로 당을 해산 위기에 몰기도 했으나 1925년 다시 자력으로 나치당을 세우고 히틀러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1932년 그가 44세 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30명 나치당이라는 경이적인 성과를 낸다. 한편 이 시기 1925년 초 47세의 스탈린은 1929년까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부하린을 제거하는 국내 정치투쟁을 벌인다. 제 3자가 누구를 죽일지는 국내 정치투쟁을 위해 그 사람이 누구를 죽이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혔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나치당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베르사유조약을 거부하고 국가의 치욕으로 여기는 나치당의 근본 사상은 빠른 공업화, 일국사회주의, 소비에트 당의 다른 공산주의 당에 대한 절대우위라는 소련공산당의 근본 사상에 비해 정당으로서의 정당성이 부족하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비겁함만이 우선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히틀러는 1929년의 대공황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선동한 기회주의자였으나, 적어도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면서 독재체제를 구축해가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학살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를 따져보아야 하는데 스탈린이 먼저 시작했다. 1930년에52세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토지 소유자들을 약 1만 명 죽였다. 히틀러는 선제공격으로 1939년 51세 때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을 1941년 53세 되던 해에 깨고 난 다음부터 인종차별 개념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을 뿐 1939년 이전에는 국내적 군비확장과 전쟁 준비에만 신경썼다. 나이로 따지면 두 명 모두 비슷한 나이에 학살을 시작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두 명 모두 독재자였으나 학살을 보다 이른 시기에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렇지만 더 악랄하고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판단한 사람은 히틀러다. 스탈린의 변형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국내의 농업정책이 굴락의 학살을 일으켰지만 이는 내치의 문제이다. 제3자는 외치를 먼저 보아야 하기 때문에 홀로코스트가 먼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히틀러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보너스 (느리게 걷는 여행 중 발견한 것들):

바로 이 기사네 ! Hitler vs. Stalin: Who Killed More? (New York Review of Books)

60년만에 공개한 히틀러 자택 (시스템클럽 휴게실)

국제볼셰비키그룹 한국어 홈페이지 (토플 iBT만 있는줄 알았는데 이것도 IBT네요)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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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치외교학과 4학년 이동욱입니다. 89년생이며 나이가 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수업을 들은 이유는 평소 관심있던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내정치체계 등과는 달리 취약한 분야였던 정치철학이나 역사를 졸업 전에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IT와 정치의 접점인 사이버 이슈에 가장 관심이 많지만 국제관계를 논하기 위한 전쟁과 평화의 역사 지식을 쌓는 것이 보다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는 유럽 사상에 대항하여 저는 전쟁이란 형벌의 연장이라고 하는 아시아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한중일 삼국끼리는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장기적으로는 미일동맹을 끊어지게 하고 중화질서의 조공 시스템에도 편입되지 않는 균형 있는 삼국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자주를 외친다는 점에서, 자주를 위해 미국과의 전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저는 우파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제게는 중요합니다. 제가 평화주의자라고 묻는다면 제가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입니다. 20세기의 냉전 시기가 가장 안정된 평화 시대인 것은 전쟁 직후의 세력 균형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관심있게 보고 있는 정부간 기구인 TCS 삼국협력사무국은 바로 세력 균형을 위해 존재할 뿐 EU와 같은 제도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현재 위안부 역사 논쟁을 다시 끌어오는 것은 지략가들의 대의와 형벌의 논의로 유교권에서는 전쟁 직전의 단계인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형벌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전쟁을 일으키겠지만, 형벌이 필요 없다면 전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명섭     14/03/08 10:32

전쟁이 형벌이라고 하면 먼저 죄가 있어야 하는데, 유죄와 무죄의 판정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강현주     14/03/09 18:02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노어노문학과 3학년 강현주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생각하는 전쟁이 '형벌'의 개념에 가깝다는 점에 동의하는데요, 이동욱선배님의 '형벌의 연장'개념에 조금 더 제 의견을 덧붙이자면 유럽, 특히 서유럽에서의 전쟁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일종의 '과격한' 대화수단이라면,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도(道)나 의(義)라는 기준에 따라 국가가 흥하고 성하는 과정으로서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일찍이 오자병법(吳子兵法) 제1편에서 전쟁을 이기는데 중요한 제 1원리로 도국(圖國), 즉 통치자의 도(道)와 통치가 올바르고 합리적일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적국의 통치가 올바르지 못하고 道에
강현주     14/03/09 18:09

적합하지 못할 때 반드시 승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손자병법에서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라고 하며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양에서는 전쟁이 물리적인 파괴력을 통해 적진을 파괴시키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도(道)와 치(治)를 두고 국가들끼리 경쟁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가 아닐까요. 이동욱 선배님 말씀대로 전쟁이 '형벌의 연장'개념이었다면 그 '죄'를 판명하는 기준은 도(道)였으며, 그것을 판정하는 자들은 전통적인 통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민생,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학자(관리)들이
강현주     14/03/09 18:10

었을 것입니다. 선배님 생각이 제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부족한 의견 덧붙여봅니다.
이동욱     14/03/10 09:56

유죄와 무죄의 판정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장군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그 둘에게 정세와 향후 전략에 대해 조언한 지략가가 하였습니다. 이러한 지략가들은 적국 지략가들과 근대 국제법의 틀 사이에서 만나 논의하지는 않았고 철저히 자국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 의견은 명분을 만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명분을 역사로 기록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외교관들이 실리만을 논의하여 힘의 우위를 따졌지만 동양은 명분에 실리를 끼워맞추는 일에 좀 더 힘을 쏟았습니다.
이동욱     14/03/10 10:04

한편 1592년 임진전쟁(임진왜란)의 배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다이묘들이 통일 일본의 세력을 명까지 확장하며 명과의 감합(명과의 무역을 위한 허가증) 무역을 재개시키고 힘을 외부로 확장시켜 일본 내의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임진전쟁은 자국의 실리에 따라 판단한 정치의 연장입니다. 여기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 섰던 다이묘들은 결국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고 조선은 유죄라는 판정을 국내에서 만장일치로 하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보였습니다.
이동욱     14/03/10 10:06

유죄와 무죄의 판정은 국내의 지략가나 외교관이 시작하고 국내 전체의 동의를 얻어 무력을 집행하는 사람이 전쟁을 개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기서 국내 전체의 동의를 얻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하며,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이끄는 제국주의 세력은 일심단결하여 명분을 세웠습니다. 단 어디까지나 주변국과 함께 유죄/무죄 판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한계입니다.
김명섭     14/03/12 02:45

그렇다면 유죄로 판정되면 바로 사형, 즉 전쟁이어야 할까?


또 댓글 달아야지 ㅎㅎ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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