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3분 정도의 시간 동안 특정 주제에 대해 말하거나 어떤 질문에 대해 답하거나, 혹은 2쪽 정도의 답안지에 논리적으로 생각을 배열하여 쭉 써내려 가는 능력이다. 흔히 말하는 '썰 푸는 능력'이다. 대학 시험을 볼 때에는 이 능력이 4년 내내 필요하고, 한시라도 이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예의주시해야 한다. 하지만 나도 가끔씩 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반성하면서 보다 나은 능력을 위해 어떤 학습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고민한다. 여기서 보다 나은 능력이란 내가 그 내용을 말하거나 쓰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속 준비한 후에 바로 유창하게 말하고 쓰게 되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시간적·정신적 조건에서든 그 내용을 차근차근 생각해낼 줄 아는 능력이다. 차근차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로 풀어쓰는 것은 그냥 하면 된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 질문을 할 때,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등 대부분의 수업 시간에 키워드 몇 개에 의존한다. 이것이 바로 speech와 writing이라는 '야간 하이킹'을 도와주는 '야광 막대기'로서의 이정표다. 이는 마치 예전의 우리가 담력훈련을 할 때 깜깜한 산길에 드문드문 놓여있는 야광 막대기를 보고 길을 찾고 걸어가는 원리와 같다. 강의노트에 있는 하나의 키워드, 하나의 이정표, 하나의 야광 막대기는 내가 이만큼의 거리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파워포인트의 슬라이드에 키워드만 간략하게 써 있어도 그 자리에서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말하는 내가 키워드를 바로 참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 실제 시험이나 면접이나 교수님과의 질의응답에서 그렇게 쉽게 키워드를 참고해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키워드가 쓰여 있는 그 어떠한 종이도 들고 갈 수 없다. 다만 머리 속에서 내용을 끄집어내야 할 뿐.. 몇 시간에 걸쳐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그 내용이 해독할 수 없는 흐름으로 뇌에 기억되어 있다면 다시 끄집어낼 수 없다. 한 권 독서의 결과로 지리산, 설악산만한 등산로를 머리 속에 그려냈지만 야광 막대기가 없으면 그 길의 입구 조차 들어갈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많이 말하는 것보다 조리있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야광 막대기 3개만 가지고 여기서 저기까지 가서 찍고 다시 오는 정도의 산책만 해도 충분히 가치 있고 능력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궁극적인 목적인 '이정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멋진 말과 글을 생산하기'를 위해서는 정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리는 우리가 평소에 썼던 그 키워드 종이와 꼭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겉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머리 속의 눈으로는 보이는 종이 쪽지를 100장이고 200장이고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종이를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길고 조리있는 말과 글에 어려움이 없게 된다.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0.3초 후에 '아,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느낌이 들어. 자신감이 생기는군! 벌써 머리 속에 3분 분량의 필름 롤이 뽑아져 나왔어. 이제 천천히 영사기를 돌리면서 차근차근 말하기만 하면 되겠구나.' 라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질문에 대해 이러한 경지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노력을 하면 반드시 이러한 경지를 달성할 수 있다.
노력이 말이 쉽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되냐고?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 모든 서술형 시험문제는 정말 문제 내기 귀찮은 교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에 대해 쓰시오. 논하시오. 이런 것들) 최소한 포괄적인 clue는 제시해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따른 서술형 답을 써내려가면 된다. clue의 도움으로 답을 쓰기 위한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기 쉽기 때문에 나는 그 가이드라인을 좀 더 쉽게 만들 방법을 생각해보면 된다. 가이드라인 만들기가 쉽다는 말은 연상이 쉽다는 말이다.
연상 작용이 쉬워지기 위해서는 머리에 떠올리는 내용이 쉽게 조작될 수 있어야 한다. 내용 자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하고 그 내용을 머리 속에서 새롭게 조직하거나 구성 따위를 할 능력과 시간 같은 건 없다. 바로바로 그 내용을 조작할 수 있어야 하고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또 다시 '흐름'이 중요하다는 얘긴데, 참 다행스럽게도 이 '흐름'이라는 것이 그리 길 수가 없다. 그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뇌의 능력이 가진 한계에 근거한다. 즉 누구나 하나의 speech와 writing을 풀어나갈 때 길이는 그리 길지 않으며, 생각할 내용도 그리 많지 않으며, 많은 내용을 풀어내는 것이 요구된다면 이미 누구에게나 여러 개의 speech와 writing을 풀어나갈 기회를 준다. 하나의 아주 긴 흐름은 필요하지 않고 대신 매우 다양한 짧은 흐름이 필요하다.
따라서 키워드 종이를 만들 때에는 매우 구체적인 주제에 관하여 만들어야 한다. < > 안에 주제나 질문을 써 넣고 < > 아래의 내용을 조금 더 짧게 쓰려 해보라. 흐름을 쪼개는 것이다. 학습이나 암기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는 것 같다. "쪼개면 쪼갤수록 더 좋다."
나는 재즈 동아리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데, 관객들 앞에서 드럼을 치면서 리듬 패턴과 솔로를 뽑아내는 느낌은 꼭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음악에도 흐름이라는 것이 있고, 나는 그 흐름을 제대로 탔을 때 멋지고 박수 받을 만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렇지 못하다면 나의 음악도 형편없이 추락하게 된다. 또한 자연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흐름을 한꺼번에 만들어내려는 욕심을 버리면 훨씬 정교한 리듬을 구사해낼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음악 연주의 매력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연주와 말하기와 글쓰기가 결국 하나에서 출발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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