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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지식은 내가 책의 글을 읽고 이해하기 위하여 도움을 주는 지식을 말한다. 배경지식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우리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그 글을 잘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순간 튀어나온다. 지금 내가 말하는 책은 소설책 뿐만이 아니라 어떤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는 글, 그리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 자료 등도 포괄한다. 즉 모든 종류의 글이다.

  글은 글이 보여주는 상황을 100% 묘사하지 못한다. 영화가 스크린에 투사하는 활동사진과 음향이 어떤 한 상황을 100% 묘사한다 가정했을 때 글은 묘사가 필요한 100개(난 이것을 묘사 단위라고 부르겠다) 중 가장 중요한 50개만 묘사해줄 뿐이다. 혹은 100개를 모두 묘사하긴 하지만 독자가 스스로 상상을 통해 더 묘사해야 할 여지를 남긴다.
우리가 글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이 묘사하지 않은 50개까지도 상상해낼 줄 알아야 하고, 그것(상상)을 위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작가는 100개의 묘사 단위가 모두 존재하는 상황에서 50개만 뽑아 글에 표현해낸다. 우리는 그 50개를 상상의 시발점으로 삼고 나머지 50개도 상상해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100개 중 50개를 뽑는 일에 주의를 다하고, 우리는 50개에서 작가가 느꼈던 100개를 도출해 내는 것에 주목한다. 따라서 서로 역할이 정반대이다.

 
나에게 있어서 상상은 곧 영화의 장면을 내 머리에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인간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쉽게 전달해준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영화 장면 생성은 곧 완벽한 글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상상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주어, 명사, 동사, 부사, 형용사 등이 글 속에서 어떤 장면을 생성하는 재료로 작용하는 지 명확히 알고 그 단어들을 바탕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여러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문장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내가 생성하는 장면이 뒤엉키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상상을 할 대상은
첫째 눈에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
둘째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
셋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것,
넷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이다.

시각적인 묘사 단위 외에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의 묘사 단위는 위의 네 가지 상상의 대상에 상황에 따라 해당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상을 하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첫째 눈에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인물들의 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공간이고, 의견을 피력하는 칼럼에서 말하자면 현 상황 속에 들어있는 모든 물건이다. 글에서 추상명사 외의 명사의 역할은 눈에 보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형용사가 덧붙어서 명사에 의미를 추가한다. 추상명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준다.

  I got dressed. 라고 누가 말했다면 그 사람이 입은 옷의 모습까지도 상상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 옷이 하늘거리는 연두색 드레스여야 그 상황에 어울린다면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에게 연두색 드레스를 입히고 영화 장면에 집어넣어야 한다. 정말 연두색 드레스인지는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지만, 드레스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보조적으로 추가되는 '묘사 단위'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연두색 드레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사진을 통해서도 혹은 실제로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상상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평소에 많은 시각 자료를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은 아무리 묘사가 정확하고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글 자체는 수천 수만 개의 단어들이 '독자'와  '이해의 대상'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종이에 불과하다.

  둘째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인물들의 행동과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 등이다. 특히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에서 누가 따옴표 속의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상상해 내는 것은 중요하다. 글에서 동사의 역할은 우리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을 상상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사가 덧붙어서 동사에 의미를 추가한다.

 내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하나의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을 때 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상상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장면 안에 2개 이상의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이들을 한꺼번에 같이 떠올리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씩 상상해서 장면 안에 채워넣되 2개 이상의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가지 묘사 단위들이 동시에 묘사되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추상명사와 추상형용사를 기반으로 묘사해주는 것들이다. 위치를 나타내는 전치사도 셋째 묘사 단위와 관련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다고, 추상적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이해가 힘들다고는 말할 수 없다. 추상적인 것들이 글에 등장한다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결국 그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가시화하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가장 단순한 예로 surprise라는 명사이다. 혹은 He was surprised with joy. 와 같은 경우다. 그가 희열을 느끼며 놀랐다면 그의 제스처는 어떨까, 그의 표정은 어떨까 등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상상은 글에 있는 50개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는 글에서 대부분의 경우 셋째 묘사 단위는 어떤 큰 범위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는 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격세력이 맥아더의 동상을 쓰러뜨리려 했고, 미군 평택기지를 반대하는 시위대는 국군을 구타했다. 이 사건 뒤에는 북한의 촉수가 있었을 것이다.' 라는 문장에서 촉수가 바로 셋째 묘사 단위이다. 촉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우리가 상상해야 하고, 한 편의 짧은 글은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촉수가 상징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상상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배경지식에 달려있다.

  넷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의 전개, 상황의 선후 관계, 심리 상태의 변화와 같은 것들이다. 소설에서는 심리 묘사에서 넷째 묘사 단위를 건드린다. '난 너를 저주한다.' 라는 문장이 글 속에 들어있을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저주한다니 어떻게 저주하지?' 그리고 그때 저주의 주체가 이전에 경험했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쉽게 '어떻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넷째 묘사 단위에 대한 이해가 쉬운 편인데, 문제는 이 '넷째 묘사 단위'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에 너무나도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의 오피니언, 사설, 칼럼 영역은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많이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추상적인 논리의 전개에 많이 쓰인다. 한 예로 주장이 깨졌다. 와 같은 말에서 '깨졌다'는 단순히 접시가 깨지는 것과는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에서 쓰이는 동사는 단순히 사물이 주어가 되었을 때의 의미와는 다르게 추상적인 개념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다. '남한이 체제와 동맹의 끈을 풀다.' '북한이 민노당이란 진보정당을 겨냥한다.' '당이 당 속의 적색 기운을 씻어낸다.' 와 같은 예문에서 '풀다', '겨냥한다', '씻어낸다' 등은 운동을 하다가 신발끈이 풀려졌을 때의 '풀다'와 오늘 잡아먹을 꿩을 '겨냥한다' 와 손에 묻은 케찹을 '씻어낸다' 등과 같은 쉽게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묘사 단위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상상력이 글의 이해력을 좌우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Power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경험론을 믿는 사람이다. 경험론이라는 말이 나의 생각을 100% 포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나는 미리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경험이 있어야 책과 글을 읽을 때에도 이해가 잘 된다고 믿는다. '생생'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풍부한 '상상'의 날개를 펴간다면 글을 읽을 때마다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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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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