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를 자연스럽게 디자인하기 위한 갖가지 고민이 나를 감싸돌고 있다. 사람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은 가식이 없이 진실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어내는 것을 말한다. 말하고 싶을 때에 말하고, 일하고 싶을 때에 일하며 놀고 싶을 때에 놀고, 관계를 증진시키고 싶을 때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가짐을 사람들은 반드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아직 내가 하는 말에 대해 완벽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키면 되는 것 같다.
"시작은 급작스러우나, 그 이후는 모두 점진적이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우연히 갑자기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에서는 미미한 상태로 일어나는데 비해, 그 이후의 모든 과정은 절대 급작스럽지 않고 천천히 진행된다. 시작은 급작스러우며 또한 급작스러워야만 한다. 용기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 그 일은 시작하지 않는다. 시작 이후의 모든 과정이 급작스러우면 일을 망치는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앞서나가는 욕망이다. 사람들은 프로젝트, 대학의 첫 수업 등과 같이 거시적인 일을 시작할 때에는 매우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러한 일들과 지금 여기서 말하는 '사건'은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은 직업, 성공, 부, 명예, 지식, 물질 등의 항목과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서 오직 감정과 사람 그 자체와만 관련되어 있는 사건을 말한다. 사실 이러한 사건들이 인생에서 더욱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위에서 말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두 가지의 분야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이성과의 만남이었다. 우선 나는 사람들과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모여 들어가 앉은 다음 말을 먼저 시작하는 것을 매우 두렵게 생각했고 또 매우 못 했다. 원래 화제는 급작스럽게 꺼내는 것이고 따라서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꺼낸 화제에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면, 사람들의 관심 없음을 눈치채고 난 후에 재빨리 다른 화제로 '급작스럽게'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사람들의 무관심을 경계하고 말을 급작스럽게 시작하게 해주는 용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한 번 말을 꺼내기 시작한 후에는 그 이후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점진적으로, 마치 영상이 Crossfade 되듯 옮겨간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급작스럽게 깨려는 습관도 대화의 단절을 부른다. 난 대화의 시작과 진행 이 두 가지 면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부했다. 물론 지금은 무엇이 자연스러운지 잘 안다. 이성과의 만남은 만남의 대부분이 대화라는 점에서 내가 대화에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과 같은 실패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시작에서도 물론 자연스러움이 필요하지만, 정말로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부분은 시작 이후부터다. 한번 흐름을 타면 흐름을 끊지 말고 흐름이 자연스럽게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모인 술자리에서의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면 안 된다. 흐름이 끊어지면 급작스럽고 미미한 흐름의 초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미미한 상태로 되돌아가면 거대한 상태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분위기를 한껏 잡아놓고 그녀에게 고백을 하려 하는데 옛 여자친구가 갑자기 등장하여 훼방을 놓는다면 그 다음의 고백이 성공하기까지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술자리의 대화에서도 각자 조금 풀어지고 감정을 이성보다 앞세운 상태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과거사나 서로에게 갖는 불만사항 등의 이야기는 자리가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지나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급작스런 충격으로 술자리가 파하면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의 모습은 평소의 냉철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200년 묵은 나무가 갑자기 싹둑 잘라지면 1년만에 다시 그 나무가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자연의 모습이 사람 사는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은 신기하며, 그 사실은 나로 하여금 자연을 돌아보면서 잘 사는 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나는 이 말을 매우 좋아한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내가 대학에 와서 손에 집었던 일들 중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준 일들은 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이 창대했다. 재즈동아리의 정기공연도 그렇다. 우연히 백양로의 공연을 보고 마음이 끌려 들어간 동아리에서 나는 처음에는 무대에 설 수 없는 준회원이었다. 빨리 공연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동아리에 와서 공연을 하기 전에 사람들과 친해지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고, 그 후 내가 정회원으로 동아리에 자리잡은 후부터는 점점 서로가 아이디어를 내놓고 서로 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나중에는 900명이 들어가는 대형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 동아리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은 작년 3월 초 나의 급작스러운 동아리 가입 신청서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친구들이다. 꽃밭이 미미한 꽃씨 여러 개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사람 사는 모습도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과 최대한 닮아 있을 때 가장 좋은 결과를 낳고, 물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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