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여권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디자인은 무엇이 있을까. 겉표지의 가운데 동그랗게 그려져 있는 무궁화 무늬가 전부이다. 색깔도 청록색이다. 청록색은 분명 우리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색이고, 관료적인 느낌을 준다. 무궁화 무늬는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공공디자인의 개념이 들어오기 전인 1970년대에 제정하였는데, 지금도 쓰고 있다. 아직도 한국은 경제 성장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공공디자인에 신경을 꺼버린 것인가.
위에 있는 스위스 여권은 2003년 새로 디자인되었다. 많은 유럽 디자이너들의 호평을 받으며 '나라의 이미지를 잘 살렸다' 는 평가를 한 몸에 받았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여권 치고는 아주 아주 이쁘다. 스위스의 십자기가 지닌 흰색과 붉은색의 대비를 잘 살렸고, 무엇보다 깔끔한 이미지가 스위스와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이쁜 디자인이 공적인 문서인 여권에까지도 쓰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반발도 있다. 공적인 절차를 밟기 위해 제시하는 여권일 뿐인데 궂이 새 디자인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쓰는 물건이 여권이다. 외국인들은 공항에 줄 서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여권을 보고 한국에 대한 인상을 각인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한국도 이제는 과거의 실질적 부를 위한 성장 위주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이러한 작은 여권에도 한국의 문화를 깊게 뿌리박았으면 한다. 예컨대 나는 디자이너는 아니다만 이런 제안을 한다. 새 여권의 디자인은 옅은 황색 한지의 느낌을 주는 텍스쳐를 여권 표지에 입히고, 표지의 배경을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같은 수묵화로 엷게 채색할 수 있다. 그리고 경복궁의 처마를 부분적으로 여권 오른쪽 위에 선명하게 남겨두어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극찬하는 기와집 지붕의 미를 여권에 투사할 수도 있다. 뛰어난 미술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정부를 위해 일해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상업적인 목적을 위한 상품에만 이쁘게 디자인을 입히지 말고 이러한 국가적인 상징물에도 점차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의 질적 가치를 따질 수만 있다면 나는 스위스에 대한 우리나라의 판정승을 인정하겠다. 한국의 美는 어디 한번 디자인의 재료로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고목처럼 썩어들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칙칙한 여권의 모습을 바꿔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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