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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같은 날은 너무나도 심심한 날이다. 학교에 친구들이 조금밖에 귀가를 하지 않았는데 왜 이리도 기숙사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을까? 날씨는 저렇게 맑고 따뜻한데, 그래서 다들 나가 노는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침대맡에 둔 시계 겸 타이머를 보니 벌써 9시 50분. 어제 분명히 밤 12시 반에 일찍 잤는데 오늘 이렇게 늦게 일어난 이유는 아무래도 지난 1주일 동안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를 되돌아보면 정말 플래너에 맞춰진 삶을 살았고 모든 계획에 '장렬히' 체크를 남기고 자는 일이 나에게 자기 기만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였다. 마치 '아Q정전'에서 건달들에게 몰매를 맞고도 자신을 향한 위안의 웃음을 짓는 주인공과 같이,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끊임없는 독서와 공부로 나를 혹사시키면서도 자신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9시 5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약간의 고민에 휩싸였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 무엇을 할까? 나는 처음에 드럼을 치려고 했는데 2시간 반 동안 드럼을 치자니 질릴 만도 하고, 친구들은 다 나가고 없어서 나는 그냥 책을 읽기로 했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라는 책인데, 토드 부크홀츠라는 하버드대 교수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단순히 맨큐 아저씨가 알려준 것들만 알고 있었는데, 경제학자들이 어떤 생을 살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토론을 하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듭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책을 한 100쪽까지 읽다 더이상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아 드럼을 치러 갔다. 베이스 막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치기 시작한지 10분 후에 알고는 다시 기숙사로 왔다. 드럼을 내 돈으로 사서 학교에 갖다놓고 싶기도 하지만, 내가 밴드도 아니고-충분히 할 수 있지만 나 말고도 드럼을 칠 줄 아는 친구들이 있기에 나는 밴드가 아니다-또 학교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니어서 직접 몇십만원짜리 드럼을 사다 놓기에는 망설임이 앞선다. 그리고 이건 오늘 갑자기 생각난 건데, 드럼도 일종의 공유자원이다. 드럼을 치기 위해 돈을 낼 필요는 없어서 비배제적이지만, 드럼은 한 사람이 치면 다른 사람이 치지 못하기 때문에 경합성을 띤다. 그리고 옆에 학생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면 드럼 소리 때문에 드럼을 칠 수 없다. 따라서 드럼은 부정적 외부효과를 낳는다. 사람이 심심하면 안 하던 생각도 하게 되나보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절에 가는 것일까? 절에 가면 심심하니까 사법고시를 위한 법전이 늘어놓는 얘깃거리만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오늘은 2시에 생글생글 논술대회가 있는 날이다. 원래 서울에서 보는 줄 알고 나는 지난 주부터 귀가를 준비했지만 단체신청에 한해서 그 단체가 소속된 학교에서 시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점심을 먹고 '죽은 경제학자..' 책을 다시 조금 보다가 침대에 올라가 무료함을 달랬다. 그리고 2시에 11층으로 올라가 시험을 봤다. 스크린 쿼터를 축소할 것인가 그대로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가 오늘의 논제였고, 생글 신문에 나왔던 거라 막힘없이 답안을 써 내려갔다. 나는 오늘 나름대로 이론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얻었다. 바로 스크린쿼터 축소의 선순환이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되고, 영화 제작자들이 '문화의 잡종성(hybridity)'을 띤 영화를 계속 만들어낼 때 영화관은 관객의 욕구에 부합하여 한국영화 상영을 크게 줄이지 않을 것이고, 질 높은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를 모두 접할 기회를 갖는 관객들은 더 발전된 '잡종 문화' 를 요구하려 들 것이다. 관객 수는 늘어나고, 따라서 영화 산업 전체의 부의 증진 또한 이루어진다. 그리고 관객들의 요구는 영화 제작자들에게 인센티브로 작용해 더 많은 영화를 만들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 제작자들은 아무래도 스크린 쿼터의 영향으로 경제적 압박을 받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에 의한 정부의 보조금이 필요하다. 뭐 이런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했다. 면학실에서 시험을 보면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다. 따스한 햇살이 11층 전체를 비추기 때문에 나른함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시험 볼때 긴장이 안 되는 것이 오히려 좋다.

  4시에 시험을 끝내고 다시 기숙사 방으로 내려왔다. 오늘은 정말 무료함을 달래고 싶은 소망에 가득찬 날이었다. 한편 다음주 집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뜨기도 하다.


2006. 5. 21.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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