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Antoine Jacob의 "Les Pays Baltes, Indépendance et Intégrations"(발트해 국가, 독립과 통합. 출판사 ALViK EDITIONS) 의 7장 'Les Réformes à Bras Le Corps'(용감한 개혁)을 번역한 글이다.
이 장은 IT나 전자정부만을 내용으로 삼고 있지 않지만, 에스토니아가 왜 전자정부 시스템을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구축하는데 성공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토니아의 독립과 경제발전부터 차근차근 답습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장 전체를 번역하였다.
탈린 안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의 한가운데, 1944년 3월 9일 붉은 군대에 의해 피격당한 건물의 잔해들은 소련의 잔인함을 기억하기 위해 폐허 상태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에스토니아 수도 한가운데에서 가속화된 개혁을 생각해볼 때 천장이 뻥 뚫린 상처의 존재는 더욱 더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약 12년만에 예전 한자 동맹국가의 계산대 노릇을 했던 이곳은 가장 현대적인 장신구로 도시를 감싸며 상업활동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과거를 되살려보고자 온갖 노력을 했다. 그 장신구는 맨눈으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다. 누가 비극적인 과거의 잔해들로 넘쳐나는 이 탈린이 어느 곳에서도 무선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액세스포인트가 바둑판처럼 감싸고 있는 와이파이 존임을 의심하겠는가?
노란 빛의 실내등이 붙어있는 페가수스 카페에서 쿠션 의자에 눌러앉은 Linnar Viik는 앞에 걸쳐둔 작은 노트북으로 최근 도착한 메시지를 찾아보고 있다. 대머리의 큼직한 검정 스웨터를 입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 에스토니아인은 IT 구루와 같은 모습을 하고 1990년대 후반에 핀란드나 스웨덴에 등장한 혜성같은 존재이다. 제시한 개념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여유,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능력, 최신 유행의 앵글로색슨 계열 저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뻔한 문장을 우회하는 예술.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인터넷, 과학, 연구 및 개발, 대학, 시민사회) 전직 자문관이었던, 아직 40살이 되지 않은 Linnar Viik는 그의 나라의 변신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주변 발트해 국가들보다 더 에스토니아는 이미 독립국으로서 5년간의 계획경제에 박혀있던 시대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뛰어오르기 위한 개혁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젊은 정치인들의 새로운 세대가 선출한 당시 32세의 Mart Laar를 총리로 하여 약 1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나라는 가장 시장경제적인 이론을 가감없이 포용하였다.
1992년 6월 20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보다 1년 먼저 에스토니아는 에스토니아 크론(kroon)을 사용하기 위해 루블 사용을 폐지했다. 국민들은 길에 세워진 수백 개의 환전소에서 오래 된 지폐를 교환하기 위해 이틀을 보냈다. 새 화폐는 그것이 이 작은 경제를 대표하는 경기 불안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화폐 중 하나였던 독일 마르크와 직접적으로 연동되었다. 도박은 시작되었다. (1999년 1월 1일 크론은 고정 환율로 유로와 연동되었다) 국가 재정 운영의 원칙에 어긋날까 걱정하며 의회는 적자 예산 구제방안을 모두 금지하는 법안을 채택하였다. 국가의 보조금은 지하 감옥에 갇혔다. 관세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물가는 1990년부터 완전 자유화되었다.
이 구조적인 혼란 속에서 서양의 투자자들은 특별히 국가가 아끼는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은 경제 안정과 동의어였고, 당시 경제부 장관의 말대로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후임 정부는 따라서 외국의 투자회사들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법과 재정을 바로세우는 데 만전을 기했다. 병영이 본국 송환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러시아 군인들로 꽉 차있던 나라에 투자하도록 외국 회사들을 설득하는 일은 진중한 근거를 필요로 했다. 마지막 본국 송환은 1994년 8월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또한 에스토니아 수뇌부는 방법을 사용함에 있어 인색하지 않았다. 기업의 소득이 바로 재투자되었을 때 세금을 면제하였고, 파산 그리고 에스토니아 투자자 및 외국인 투자자의 동등 대우에 대한 효과적인 법을 채택하였다. 정부는 개인사업자 또한 간과하지 않았다. 소득세는 26%로 항시 고정되었다.
1991년부터 조금씩 시작한 사유화 단계는 해를 갈수록 그 크기를 더해갔다. 에스토니아는 빠르게 헝가리와 체코공화국과 함께 인구수 대비 가장 많은 외국인직접투자를 받는 구소련 블록 국가 집단으로 올라섰다. 특히 은행은 핀란드와 스웨덴과 맞물려 돌아가는 투자를 끌어왔다. 인접한 이 두 이웃 국가는 이들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 후로 남쪽의 영역으로 확장된 사냥터로 생각한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입지를 차지했다. 전화 사업자, 호텔, 전자 부품 공장, 직물 및 농산물 관련 기업은 북유럽의 돈주머니로 들어갔다. 독일 및 러시아의 기업들이 그 뒤를 이었다.
정부가 기대했던 것처럼 이 충격요법은 국가 경제를 요동치게 했다. 관세로 더이상 보호를 받지 못한 지역 산업 전반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실업률의 증가는 사회보장의 실질적 강화를 전혀 동반하지 못했다. 외국 상품의 대규모 수입은 GDP를 적어도 10% 하락시켰고 국가의 경상수지에 구멍을 내었다. 인플레이션은 거의 1000%까지 상승했다.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근면한 에스토니아인들은 1995년을 기점으로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2년 뒤 연간 경제성장률은 10%를 넘어섰다. 소비자물가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충분한 성과는 예전 소비에트 공화국을 1997년에 헝가리, 폴란드, 체코공화국 그리고 슬로베니아 옆에서 유럽 연합으로의 가입 논의를 위해 초청받은 첫 번째 집단으로 올려놓았다. 작은 에스토니아는 그 질주를 계속하여 2003년에는 22번째로 세계에서 경쟁력이 있는 국가로 분류되었다. (제네바 세계경제포럼 2003년 국가경쟁력보고서 기준)
"토론은 우리가 국가 발전의 특정 단계를 뛰어넘을 줄 아는가 여부에 달려있다고 Linnar Viik는 커피를 마시며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다른 인구 집단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를 기다리며 주어진 수준에 머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우리는 근대화 기간이 20년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근대화 이후 시대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인가?" 푸른 눈을 가볍게 굴리고 윗입술을 내밀면서 스웨덴 회사로부터 되사들인 인터넷 서비스 기업의 전 공동 설립자는 기쁨으로 그의 국가가 진화하는 모습을 이론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에게 에스토니아 인구는 칸막이로 구획되어 있다. "우선 최초 독립국을 알고 오늘의 삶을 과거의 삶과 비교하며 젊은 시절의 초원은 더욱 푸르렀다고 생각하는 노인층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으로 온전히 소련 시대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서 루블과 코펙으로 셈을 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현재 발생하는 빠른 변화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시장경제 개념으로 진화할 줄 아는 사람들, 승리자들, 스웨덴이나 핀란드의 젊은이들과 같이 '글로컬' 한 사회에 속한 젊은 층이 있습니다. 이 세대들은 상호작용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돌하지는 않습니다."
의심없는 충돌의 부재 - 에스토니아의 성격은 물의를 빚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 가 있지만 아예 망설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1995년 의회에서 개혁을 주도한 Mart Laar에게 의원들에 의해 가해진 모욕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2001년에 이전 10년 간 소비에트 최고위원회의 의장을 지냈던 Arnold Rüütel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투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이러한 사건은 내정에 대한 권력의 부족 탓이다. 하지만 공산당의 과거 당수의 선출 (간접 선거) -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지지하는 편에 속해 있었다 - 은 성장을 향한 광적인 국가 경제에서 한 박자 쉬어가고자 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의 필요를 반영했다.
그의 전 대통령 Lennart Meri는 반대로 절제할 수 없는 변화의 의지를 상징했다. "그는 언제나 기존 제도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규약을 어기고, 의도적으로 우리 인구의 크기에 따라 사용해야 마땅한 공간보다 더 큰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가 그 시대에 가장 필요로 했던 안목을 가지고 사람들과, 적어도 국가 수뇌부와는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생관에 가까웠습니다." 라고 Linnar Viik은 강조한다.
12세에 가족들과 시베리아로 추방당한 역사학자 Lennart Meri는 러시아를 너무도 잘 알아서 러시아에게 조금의 호의도 가지지 못했다. 정교하고 예의 바르며 여러 언어에 능통하다고 인정받은 이 지식인은 퇴임 전 그가 국가원수 직책에 있던 9년 동안 (1992-2001) 러시아에게 결의에 찬 모습을 보여주고 국제 무대에 대한 근엄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마지막으로 시작하는 것의 장점은 늦게 시작한 사람이 단계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에 득을 보며 자신의 결여된 것을 메울 수 있다는 점이다. 단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에게 줄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하고자 하는 열의가 별로 없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핀란드의 비호를 받으며 에스토니아인은 - 적어도 그들 중 가장 열려있고 호의적인 - 새로운 기술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기뻐하며 발견하였다. 북유럽 은행들이 현지 기업들을 되사들일 때 가상 세계의 혁명은 북유럽 지역에 이미 잘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소련 시대를 빠져나오자마자 잘 정립된 발트 국가의 기업들은 역설적으로 이미 큰 도약을 위해 성숙해 있었다. 고객들 역시 대다수가 손에 서양식 수표를 전혀 들고 있지 않았다..
2003년에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인의 26%가 전 12개월 동안 인터넷뱅킹 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사 대상인 32개 국가 중 덴마크와 핀란드만이 더 높은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16세에서 74세의 연령대에 속한 에스토니아인의 약 36%는 인터넷을 통한 행정 서비스에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접근해본 경험이 있고, 이 비율은 체코공화국 다음으로 동유럽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결과는 각각 14%와 12%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에스토니아인들은 매우 빠르게 휴대전화를 받아들였다. 당시 인구의 70%가 이미 휴대전화 서비스를 갖추고 있었다. 십여 개의 통신 회사들은 2001년의 경제 자유화 이래로 이 작은 시장에서 서로 싸워오고 있다.
에스토니아 인구의 절반이 컴퓨터를 점점 더 자주 사용하는 반면 다른 절반은 전혀 컴퓨터를 만지지 않는다. 이것은 지방뿐만 아니라 95%까지 러시아어권 소수 민족이 거주하며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실업의 악영향을 받고 있는 북동부 지역에도 해당되는 현실이다. 이 '정보 격차'에 대하여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는 개입주의 기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 분야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대한 교육 사업을 장려하고 사람들의 생산성을 늘려줄 수 있는 목표를 그것이 현실주의적이지 않더라도 설정함으로써 정보 격차를 줄이고자 노력한다.
현재까지의 최근 사업으로는 농장 전체를 인터넷 연결이 가능하도록 구비하는 사업, 국가의 중재 하에 관심있는 거주민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프트웨어를 빌려주는 사업이 있다. 이 사업의 공고는 운좋게도 2004년 슬로바키아에서 동유럽 국가 대표들과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다음날 탈린의 몇몇 언론사는 승리에 찬 목소리로 미국의 억만장자가 에스토니아를 도와주기로 한 '약속'을 지면에 기술했다. 조금 더 겸손하게 경제부 장관 Meelis Atonen은 고문을 통해 빌 게이츠가 장관과 '2미터 떨어져 앉은 채' 그러한 구상을 빌려준 것에 대해 만족해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하지만 빌 게이츠와 장관이 일대일로 만나는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아 빌 게이츠는 만족하지 못했다.
수만 명으로 공무원 수가 줄어든 에스토니아의 행정은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소련 치하의 기간 동안 정보화를 거치지 않은 에스토니아는 1991년부터 인터넷 프로토콜과 개인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만을 알고 있었다. 독립에 뒤이은 첫 몇달 동안 대학생과 작가 중에서 채용된 외교부의 200명의 직원들은 3대의 개인 컴퓨터만을 공유해서 사용해야 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건설해야 했습니다."라고 Linnar Viik는 이야기한다. 또한 Mart Laar가 2000년에 권력 회복에 성공한 다음 Linnar를 불러 신기술 분야에 대해 그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을 때 Linnar는 당시에도 역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던 인터넷 서핑 수단을 조사하였다.
10년 전에 발급된 신분증의 대다수를 바꾸는 기간에 정부는 다수의 속성값을 가진 공식 문서 칩을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 칩을 소지한 사람은 전자 서명 자료를 통해 개인 컴퓨터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으며, 온라인으로 세금이나 서비스 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 이 플라스틱 직사각형은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보험 서류로도 활용된다. 약 30만 명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이미 이 칩을 소지하고 있다.
정부는 또한 기존의 법을 개선하거나 변경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 '오늘은 내가 결정한다'를 런칭했다. 이 공식 포럼에는 약 9000명이 등록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제안에 댓글을 쓸 수 있으며 마음에 드는 제안에 투표할 수도 있다. 어떤 제안이 부정적인 표보다 긍정적인 표를 더 많이 받으면, 그 주제에 관련된 정부 부서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답변을 하기까지 한달의 시간을 가진다. 정부 부서가 제안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부서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어김없이 우스꽝스럽거나 대충 제시된 제안들도 때때로 나타나지만, 곧 웹마스터에 의해 삭제된다. 하지만 몇몇 법은 이러한 방법으로 제안된 이후 제정되었다. 시간 변경에 관한 법, 학생 조합이 외부에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 법 등..
그리고 에스토니아에는 '전자 장관회의'가 있다. 2000년 8월 8일부터 에스토니아 정부는 가용 기술을 차용함으로써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매주 수요일 아침 장관들은 Toompea 언덕 위에 걸친 총리 공관인 Stenbock House에 모인다. 손에 서류 가방 하나 들지 않고 팔에 서류 하나 들지 않은 채 모든 것은 컴퓨터를 통해 진행된다! 총리실의 정보화기획관 중 한명인 Tex Vertmann은 스웨덴 출신 Jakob Pontus Stenbock 백작에 의해 18세기 후반 세워진 건물의 2층에 있는 회의실을 관리한다.
천장 위로는 이날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탈린의 근교 지역으로 빠져드는 창문이 있고, 회의실은 특히 그 간결한 특성으로 충격을 준다. U자 모양으로 생긴 큰 테이블 위에는 14개의 평면 LCD모니터가 자리하고 있고 바로 옆에 호리호리한 검은 색 마이크가 붙어있다. 각 장관마다 사용하는 모니터인 것이다. 중앙에는 에스토니아의 미니 국기(파랑, 검정, 흰색) 그리고 근대성이 단 하나 양보한 떡갈나무 망치가 국가원수의 자리임을 알게 한다. 망치 받침대가 내는 둔한 소리는 자연스럽게 회의에서 나온 '전자 결정'을 채택함을 의미한다.
2000년 여름의 정부 기조 변화 이래로 이 소리는 회의실 내에서 확실히 덜 자주 난다. 사실 회의가 시작할 때 수요일 논의할 안건의 3분의 2는 이미 그 결과가 정해져 있다. 설치된 시스템 덕택에 장관과 측근의 고문들은 미리 온라인으로 의사 일정을 참고한다. - 대중에게도 똑같이 공개되어 있다 - 그들은 토론할 사업에 대해 공부하고 결국 찬성표를 던진다. 한 장관이 특정 사항을 반대하거나 문서를 작성할 책임을 가진 동료의 설명을 희망한다면, 그는 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시스템 안에 서면으로 반대하는 내용과 소견을 적어 알게 한다. 그리하면 사항에 관련된 장관은 반박이나 정확한 설명을 장관회의 이전에 준비할 시간을 가진다. "이러한 운영 방법은 각료들로 하여금 '집에서 숙제'를 하게 하지요."라며 Tex Vertmann은 농담을 던진다. 전세계 어디서든 이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에 출장을 나간 각료들에게도 이 운영 방법은 예외가 아니다. 수요일 아침 전까지 아무런 반박도 있지 않다면 논의된 사항은 자동으로 채택된다.
매주 다루는 40여개의 주제 중 회의는 문제를 제기하는 몇 개의 주제만을 논의한다. 화면 위에서 장관들은 법제 관련 서류를 상세히 열람하고 원한다면 마우스를 클릭하여 하이퍼링크와 참고문헌이 곁들여진 통합 버전을 볼 수 있다. 회의가 기록을 위해 녹화될 때 방 구석에서 각자의 화면 앞에 앉아있는 언론 관계자들은 결정이 끝날 때마다 질의를 하고 이는 20초 이내의 형태로 공식 언론매체와 정부 공식 사이트에 전달된다.
장관회의는 예전에는 매주 2시간에서 10시간이었지만 이제는 평균 1시간으로 줄어들었다고 거의 모든 회의를 보조했던 Tex Vertmann은 말한다. 시간이 줄어드는 이점을 차치하고 국가는 종이 사용을 절약함으로써 기술 투자의 수익을 빨리 창출해내야 한다. (매년 약 80만 크론, 유로 환산시 51,000 유로) 외국에 있는 공식 대표들 또한 탈린에 와서 자국 기업인 MicroLink가 개발한 기술 아키텍쳐가 반영된 이 전자정부의 구체적인 사례에 영감을 받고 간다.
자체만으로 놀라운 전자정부 시연은 몇몇 평가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가장 민감한 결정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다른 정당의 여러 임원들에 의해 미리 토의되고 채택된다는 점에서 공적인 악명을 얻는다. 장관회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사전에 발제자 간에 결정된 큰 노선에 따라 실행에 옮겨질 사안만을 찬성한다. 그 외에는 매주 수요일 밤 장관들은 Stenbock House의 작은 방에서 화면도 마우스도 녹화 장치도 없이 모여 앞으로 가질 정치적 방향성과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방법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논의한다. 이 경우 알력이 작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발트해 연안 국가의 집권 연합은 대부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Juha Parts의 고양이 Mismu가 슬쩍 들어온 회의실을 나가 옆의 집무실로 가는 길에 많은 동료들과 같이 37세의 나이인 젊은 총리는 다른 질문을 받는다. 어느 지점까지 인간적인 소통은 기술 뒤에서 지워져야 하는가? 공화국의 대표, Juha Parts의 정당은 2003년 갑자기 찾아온 정부 내의 작은 위기 이후에 질문을 제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터넷 만능주의는 장관들 간의 직접적 대화를 두 번째 순위로 밀리게 하고, 이것은 부분적으로 연합이 거의 실패했다는 사람들 사이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무능함 때문이다. Tex Vertmann은 이 논의를 과장되었다고 잘 판단했고 소극적인 성향의 에스토니아인의 신기술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끌림을 잘 지적했다. 그의 깊은 고민은 중세의 벽을 따라 탈린의 시내로 내려가면서도 계속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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