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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나나걸 41화 中
 
  이런 대화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할까?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애들을 졸업시킨다는 사실에 압박을 받는다던지, 회사에서 짤리는 걸 두려워한다던지 하는 일을 심각한 고민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힘들게 털어놓은 것이 아니다. 이 대화는 그냥 서로가 자신의 요즘 모습을 어필할 때 나오는 대화이다. 그리고 고등학생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이 '어필' 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어른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등학생들은 자신을 숨기려 한다. 자신이 요즘 어떤지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말로 친한 친구에게만 이야기할 뿐 주위에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조금 덜 친한 사람,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같은 수업을 듣는데 서로 그리 친하지 않는 사람끼리는 한쪽 편이 이러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듣는 쪽이 말하는 쪽을 불편하게 한다. 즉 다른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적어도 같이 수업을 하는데 안면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서로 일단 안면이 있다면 그 다음 서로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사이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지 않는가? 헌데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발전 가능성의 단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른 방향으로 관계를 발전시킬 뿐이다.
 
  청소년 문화는 웃기는 문화이다. 남을 웃기는 자가 곧 인기를 얻고 많은 친구(진정한 친구는 아니지만)를 곁에 둔다. 남을 웃길 때에는 대부분 이 두 가지 타입이다. 나를 마구 망가뜨리는 자학 개그를 하거나, 나의 잘난 모습만을 어필하면서 시도하는 작업형 멘트다.
 
  하지만 나는 깔깔 웃고 마는 인간관계가 아닌, 개그가 아니라 일상으로 만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원한다. 어른들이 각자 진지함을 갖고 살아가듯 우리들도 진지함을 각자의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서로 모였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지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유대감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고등학생 친구들 사이의 모임에서는 코믹함이 주가 될까. 나는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은 진지한 상태로 돌아갈 우리들이 서로 친구들끼리 만나는 순간에만 낄낄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들 사이의 항구적인 인간관계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단순히 웃고 즐기는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인간관계는 지속적이지 않고, 재미로 만나는 친구들은 결국에는 헤어진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만날 때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유쾌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소극적인 자세로 비칠 수도 있으나 어른들의 삶이 꼭 이와 같다. 일상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즐기는 삶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진정으로 즐겁고 명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덕목은 지속성이다.

2006.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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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

  우리는 항상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다. 경제학자 케인즈가 만든 이론은 대공황 때에만 효력을 발휘했다.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세운 방학 계획은 완벽한가? 그것 또한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운동할 수 있었던 것을, 나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성벽 주위를 순환하는 해자(垓子) 속의 물과 같은 '진리의 물결' 속에서 극히 일부분을 떼어낸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물결 전체를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해질 수 없다. 항상 어떤 학자가 주장한 이론에는 한계점이 있고 수정이 필요하다. 내가 만든 작품의 뒤편에는 더 멋있는 작품이 있다. 항상 내가 쓴 논술 답안에는 반발의 여지가 있다. 내가 유려한 논리를 전개해도 그 논리가 한정된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면, 나의 논리의 앞과 뒤 끝부분을 연장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논리 전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다른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는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다.


완벽하지 않아도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항상 진리, 혹은 완벽에 비해 열등하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까? 그렇지는 않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 때에도 분명 어딘가에는 좀더 좋은 '자료의 수집' 혹은 '자료의 분석과 정리' 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을 만드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완벽한 것은 앞으로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완벽 추구의 삶은 '더 좋은 것'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안겨주기에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즉 우리는 희망을 갖고 '한계적으로' 궁극의 완벽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동등가치와 우열가치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Rock을 좋아하는 활달한 소년이 될 것인가, 아니면 Jazz를 좋아하는 부드러운 소년이 될 것인가. 분명 활달함과 부드러움, Rock을 좋아하는 성격과 Jazz를 좋아하는 성격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갖지만 서로 다르다. 그리고 어느 한 성격 경향을 택해서 그 성격을 바탕으로 인격적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의무는 인생 전반에 걸친 의무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 예를 통해 말한 두 가지 성격 경향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 둘은 동등가치이다. 이럴 때에는 자신의 성향, 즉 style이 원하는 대로 따른다. 그리고 나의 style을 기반으로 하여 더 완벽을 추구할 여지(margin)을 찾아본다.
  하지만 분명히 가치의 상대적 우열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옷 입는 스타일에 있어서 가치의 상대적 우열이 존재한다. 아무 옷을 입으나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가치를 논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 특히 나와 같은 청소년이라면 옷을 어떻게 입는지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디자인이 뛰어나고 옷을 입은 사람과 잘 어울리는 옷과, 평범하고 허름하며 옷을 입은 사람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옷 사이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이럴 때 가치의 상대적 우열이 존재하고 우열가치가 나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있다면 나는-내가 옷 입는 일에서 만족을 느끼고 주위 사람의 인정을 받는다면-나의 개성을 파악하고 개성에 맞추어 style을 정하고 그 style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지금으로서는 완벽'하고, '한계적으로 완벽'한가?

  내가 그 이론을 만들면서, 그 계획을 세우면서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욕구를 충족하여 최고의 만족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론과 계획에 대한 최고의 평가를 내린다면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완벽하다(marginal perfection). 지금으로서는 완벽한 것을 내가 만들어 냈을 때 나는 자기 존중을 느끼는데, 이것이 나에게 한계적으로 궁극의 완벽에 접근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과 같다.


Self-esteem - 완벽 추구를 위해 달리는 스포츠카의 윤활유와도 같은 존재

  Self-esteem이라는 집이 여기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쳐주는 주춧돌은 세 가지가 있다.

나의 만족,

친구,가족,'평가원'들의 인정,

사회 발전과 자기 발전으로의 지향. (여기서 평가원이란 선생님,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대학교의 입학관리, 혹은 각종 시험의 주최 기관을 지칭한다.)

즉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만족시키고, 그 일로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나아가 그 일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일정 부분 공헌하고 나 또한 발전하는 데 기여할 때 나는 자기 존중(Self-esteem)을 하게 된다. 자기 존중은 나의 끊임없는 완벽 추구의 원동력이 된다.


완벽 추구의 좌절 그리고 자기 존중의 한계(limit)

  분명 완벽을 추구하더라도 지금의 '한계적(marginal) 완벽'을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 머물거나, 혹은 지금 나의 기준으로 평가했을 때의 '한계적 완벽' 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야 한다. 나의 노력으로 분명 극복의 단초를 찾아낼 수 있다. 자기 존중과 뒤이은 발전은 내가 지금 하는 많은 일들 중에 한계적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일을 찾아냄으로써 더욱 풍성해진다. 보통 완벽 추구의 좌절을 겪는 일은 지금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로서의 일일 때가 많다.
  또 내가 말한 Self-esteem에도 함정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와, 내가 이 일을 해냈어. 대단해.' 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을 때가 있다. 이는 방학 동안 학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부하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분명 나는 나의 모든 노력을 다해서 공부를 했는데, 그 공부는 내가 보기에는 한계적으로 완벽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회 전체가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한계적 완벽에 추호도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설정한 한계적 완벽이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한계적 완벽에 비해 너무나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따라서 주위 사람들과의 교감이 필수적이다. 항상 사회를 의식하고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과 내 자신을 비교해야 한다. 이 일은 위에서 말한 Self-esteem의 두 번째 주춧돌, 즉 다른 사람의 인정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의무의 이행이 중요하다

  일정한 생애의 한 부분에서 인간은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차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청소년기부터 직업에서 은퇴하고 노년의 삶으로 전환하기 전 시점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의무와 싸우는 사자(lion)와도 같다. 아무리 우리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정해놓고 그 일에서 끊임없이 한계적 완벽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 일이 '현실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자질을 내가 성취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무가 현재로서는 나와 같은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완벽 추구의 과정을 밟는 객체가 '현실에서 나에게 주어진 의무' 가 되도록 노력해 보아라. 그렇게 한다면 분명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소위 출세의 길도 열릴 것이다. 꼭 내가 출세를 바라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일단 나에게 주어진 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의 한계

  원래 소제목을 '나의 이론의 한계' 로 정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지금 내가 쓴 글이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의 한계'로 고쳤다. 나는 내가 완벽 추구의 객체를 논함에 있어 그 객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찾을 수 있다. 분명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더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餘滴

  지금 내가 하는 말 자체도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상실감이 들거나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더 노력해서 더욱 더 만족을 느끼고,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나아가 나의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200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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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먹으면 우울한 느낌을 가라앉힐 수 있다. 나도 오늘 조금 우울했기 때문에 초콜릿을 먹었다. 날씨는 단조로운 잿빛만으로 뒤덮여 있었고, 오히려 소리없는 바람만 옷속을 파고들어 추위가 가증스러울 뿐이다. 방안에서 창틀을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류의 재즈곡을 듣고 있노라면 우울한 기분이 아늑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여기에 초콜릿까지 있다면 우울한 기분은 이미 저만치 물러서 있다.

  초콜릿을 잘 만든다는 나라는 하나같이 날씨가 좋지 않고 종일 우중충하다. 스위스, 독일,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모두 비나 눈이 많이 내리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다. 생각해 보아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따뜻하고 햇살이 웃음짓는 나라에서 초콜릿을 북유럽만큼 많이 만드는지 말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창밖을 보며 음침하게 퍼져나가는 백열등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그들이 덥고 화창한 여름날에 나무 신을 신고 저 푸른 지중해를 바라보며 칵테일을 마실까? 아니다. 내 생각에는 유럽 저 북쪽에 있는 나라 사람들이 궂은 날씨 때문에 우울증에 자주 걸리고 또 그래서 쿠키나 초콜릿 등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한가지 웃긴 점은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는 내내 여름인 열대 지방 국가에서 주로 생산된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의 역동적이고 빠른 비트와 몸놀림, 원시적이고 다양한 생물이 인간과 공존하여 잠시도 인간이 개인적인 센티멘탈리즘에 빠질 수 없는 그 더운 지방에서 카카오가 열린다. 나의 지식이 짧아 언제 카카오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그들의 우울함을 달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햇볕 쨍쨍한 열대 지방 사람들이 초콜릿을 유럽 사람에게 선물했다는 점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유럽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울증의 특효약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료를 선물받았기에.

  요즘 나도 구름이 푸른 하늘을 숨막히게 할 때면 으레 초콜릿을 찾는다. 단 걸 먹고 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얼굴색을 바꾼다. 우울할 때에는 이렇게 혼자 방안에서 조용히 해결하는 게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초콜릿은 우울함을 넘어선 아늑함과 나른함을 선사해 준다. 꼭 내가 고뇌하는 니체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2006.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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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소년들에게 갑자기 철학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질문했을 때 쉽게 그 질문에 답할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만큼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끊임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철학의 정의가 없었다. 하지만 철학은 단어의 뜻을 규정하고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인간의 내면 세계와 외부의 자연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가장 먼저 논의를 하는 사람도 철학자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시간이 무엇인가, 젊음은 영원한가와 같은 고정된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문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철학의 흐름이 설명해 준다.

  철학은 고대 그리스 어의 philosophia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 즉 지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는 인간의 활동을 지칭한다. 이오니아 학파, 엘레아 학파 등 그리스와 지중해 쪽에서 많은 초기 서양철학자들과 함께 동양에도 공자, 맹자, 주자 등의 사람들이 동양에 맞는 철학을 만들어 온 것으로 보아 인간의 사유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존속되어 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해답에 새로운 비판을 가하고 토론이 중단되지 않는 것도 철학의 특성이다.

  철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가족 유사성이 있다. 초기의 철학, 즉 기원전 4세기의 철학에 의하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가장 먼저 있었다. 그리고 중세 시대를 거쳐 과학이 대두되면서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철학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고, 과학의 무절제한 발전이 전쟁의 폐해를 심화하고 평화를 해친다는 위기의 의견이 조성됨에 따라 인간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 즉 실존철학이 20세기 초에 대두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철학의 주된 주제는 변화해 왔다.

  철학을 발전시켜 온 사람들은 정당한 논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열중했다. 고대 그리스에 소피스트들이 모여 연구한 수사학을 그 시초로 하여 철학적 논증의 수련이 점점 그 중요성을 더해갔다. 한 소피스트와 그의 제자 사이에 벌어진 공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이유를 취하여 법정의 승소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그들의 변론을 통해 dilemma의 개념이 등장했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 대한 논의를 통해 순환 논리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말에 모순 혹은 패러독스가 없게 하기 위해 논리를 점검하였다.

  시대가 진보하여 18세기 즈음에 철학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정치적인 면에서의 철학은 존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봉건주의에 반하여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민주사회 정치인들에게 철학은 반봉건주의와 평등주의이다. 물론 봉건주의 또한 과거의 인간 발달사에 따라 생겨난 철학 사상이지만 말이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노동자·자본가 계급에서 발견한 모순을 지적하고 러시아 시민들에게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를 주장한 것도 그의 개인적인 사색을 통한 사상의 정립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공산주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19세기 초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돈 많은 자본가와 돈 없는 노동자의 모습을 긍정하는 사람도 있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마르크스는 자신이 그 모습을 부정하고 그의 나라 사람들도 그 모습을 부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한편 그보다 일찍 활동했던 아담 스미스는 자신의 생각으로는 자본주의가 인간 삶에 많은 도움을 주므로 자본주의를 지지했다. 이들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세우고 자신들의 사상을 천명하였을 것이다. 이 근거를 세우고 주장을 확립하는 과정이 곧 철학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은 사람들에게 사상을 고취시켜 사상적 단결을 완성할 책임을 지닌 정치가들에게 요구된다.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유일무이의 답은 존재할 수 없다. 워낙 학문의 영역이 방대하고 항상 인간의 머리속 생각의 참과 거짓을 다루어 개인마다 조금씩 견해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물리학을 위한 기초 과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신학에서 시작하여 신 중심의 생각에서 인간 중심의 생각으로 옮겨온 현상에서 연유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철학의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이 없다. 시간은 비가역적(非可逆的)인가에 대한 논쟁을 예로 살펴본다면, 우리 인간이 멈춰있는 시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시간은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자연과학은 명쾌한 답을 그 학문 속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학문이다. 그보다 조금 덜 객관적인 사실로 만든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은 인간이 사회 현상을 관찰하여 빈번히 발생하는 현상을 이론으로 정리한 학문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장 주관적인 생각을 다루고, 주관적으로 정의한 개념에 대한 싸움을 동반하는 철학이 있다. 객관성이 떨어지는 학문이라 정확하고 널리 인식되는 정보가 만연한 현대 정보 사회에서 개인의 감정과 사상을 다루는 철학은 고대 시대에 비해 많이 쇠퇴하였다. 답이 없는 학문, 몇몇 사람들의 논리적인 의견을 배우고 그 의견을 끊임없이 반박하고 재반박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의 특성 즉 끝없는 반박 때문에 철학이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잃지는 않는다. 철학은 정신적으로 메말라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생각을 하고 논리를 계발하도록 유도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은 이렇다.', '여러 사례에 비추어 보아 세계는 가장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와 같이 철학자-누구라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의 주체적인 발상으로 주장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근거가 만들어져 토론의 장에서 그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결국에는 그의 주장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통설로 굳혀진다. 이러한 과정은 철학 발달의 과정이며,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이 빚어낸 자연스런 결과이다. 꼭 절대적인 지식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인간은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하는 컴퓨터와 같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주체가 된 생각을 그 근본으로 하는 철학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 입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2006.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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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교시 학급회의 시간에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사람은 Fixed Cost가 되고,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인생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한 Cost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목적은 인생을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Revenue를 만들어내어 최종적으로 Profit을 만드는 삶을 살아간다. 가장 행복하게 사는 시기는 Average Total Cost가 최소가 되는 부분, 즉 인간의 인생에서 한창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많은 Profit을 만들고 가장 물질적,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시기가 바로 인생의 청장년기이다. 그러나 삶의 절정기는 조용히 쇠하여 회사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학적 이익을 0으로 만들듯이, 인간의 장기적인 인생을 바라본다면 삶을 통해 느끼는 행복은 점차 없어진다. 그리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아무런 이익과 탐욕 없이 조용히 죽는다.

  친구는 완전경쟁시장에서 회사의 단기적,장기적 경제이론에서 인간의 삶을 읽어냈다. 사회의 모습을 분석하고 현상을 채집하여 귀납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경제학은 사회의 모습이 인간 각각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싶어 놀라웠다.

2006.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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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네 가지 '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들을 꼭 숙지하라고 지도하셨다.
그 네 가지 '설'이란 차마설, 이옥설, 경설, 그리고 슬견설이다.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그 소재에 메타포를 주입하여 교훈을 이끌어내는 예술을 우리 조상들은 알고 있었다.

차마설

  사람이 말을 빌려 타는 이야기로, 느리고 야윈 말을 빌려 타면 내 자신이 그 말을 제어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말이 넘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되며 뛰어난 駿馬준마를 빌려 타면 오히려 내 자신이 교만해져 그 말을 더욱 재촉하게 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이 임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인간은 소유욕에서 벗어나 모든 물건을 빌린 물건으로 간주해야한다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왕이 그의 왕권을 백성들에게 빌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왕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루이 14세가 주창한 '왕권신수설'은 그 자신에게 왕의 절대권력의 절대성을 정당화시켰음은 물론이고 국민이 왕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했다. 결국 프랑스 절대왕정은 루이 16세와 억울한 오스트리아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형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가.

이옥설 :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경설 : 자신의 거울은 깨끗하게 하되 남이 보았을 때에는 그리 깨끗하지 않게 보이도록 하라는 교훈을 준다.
슬견설 : 자신의 주관적인 분별심을 버리라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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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 경설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경설의 주된 내용을 지금 나의 상황, 그리고 내 친구들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공부를 많이 한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나 어제 수능모의고사 언어 풀고 정석 13장 연습문제 다풀고 AP거시경제 16에서 18과까지 복습하고 잤더니 새벽 2시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 개개인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깨끗한 거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가짐이다. 언젠가는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은 약간 공부를 안 하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우리들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마음 자세가 도덕적으로 어긋나거나 비정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마음 속 거울, 자기의 목표와 이상 같은 자신만의 절대적인 가치만큼은 누구의 그것보다 위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내보이게 된다면 나의 가치는 조금 혹은 많이 손상된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 속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이 휘황찬란하며 장엄하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가치의 위상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 사람의 능력 또한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겸손하기 때문에 남에게는 그 능력을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의 마음 속 거울을 볼 때 흐릿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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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역에서의 짧은 생각

  카페라떼를 마시면서 청담역의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머릿속엔 오직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평소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이 기다림을 요하지 않으며 바로 역으로 도착할 때 나는 그것을 작은 행복으로 여겼다. 승강장에 도착하고 10분이 넘도록 지하철이 오지 않을 때에는 작은 분노가 일기도 했다. 나는 재촉하는 일상 속에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같이 카페라떼 컵을 들고 있을 때에는 컵을 들고 지하철에 탑승했을 때 많이 불편하다. 다 먹은 음료수 컵을 30분 동안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불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보통 지하철 타는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책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기 전 커피를 다 마시고 미리 쓰레기통을 찾아 버린 다음 지하철을 탄다. 컵을 버릴 곳을 찾기 전, 혹은 커피를 다 마시기 전 열차가 도착하면 나는 타지 않고 다음 차를 탄다. 시간은 좀 더 지체할지라도 내가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 시각에 맞춰 도착한 차를 보낸다는 일에는 씁쓸한 마음이 남기 마련.

  오늘은 전철이 내가 승강장에 도착한 후 5분 후에 도착했다. 그 5분은 평소에는 나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골칫거리지만, 오늘의 5분은 나에게 커피를 다 마시고 컵을 버리는 여유로움을 허락해 주었다. 재촉하는 삶이 꼭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2006.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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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실천한 집'
브리트니 스피어스 집이라 사치스러운 풍경도 없지 않지만,
아름다움이 꼭 위의 그림 같은 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충분히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주위 환경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


  지난주 프랑스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프랑스의 지방분권 체제를 주제로 다룬 일요스폐셜을 보여주셨다. 한 2년 전 쯤에 방송된 거라 우리는 KBS가 만든 VCD로 보았다. 수업시간 안에 다 못 봐서 아쉽기는 하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는 왜 한국은 진작부터 지방분권 체제를 도입하지 않아서 이렇게 서울과 지방 사이의 격차가 심할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주제는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스트라스부르로 옮겨간 원래에는 파리에 있었던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 다른 하나는 프랑스 북서부 해안가에 있는 부르타뉴 지방의 노인 복지 프로그램, 마지막 하나는 프랑스 전역의 대도시를 연결하는 고속철도와 이것이 가져온 지방분권화의 수월함이다.

  처음에는 스트라스부르의 이쁜 도시 풍경이 나오면서(정말 벽돌로만 이루어진 도시였으며 어떤 어색한 현대식 건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페에서 테이블에 앉아 쥬스를 마시고 Casse-croute를 먹는 스트라스부르 사람들이 마냥 부러웠다.) 프랑스의 최고의 정치인사들을 배출한 ENA를 소개했다. ENA의 멋진 수업환경은 나를 매료시켰는데, 그 이유는 다른 대학교와는 다르게 교실 내부가 세련되게 디자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만들어진 책상과 군더더기 없는 벽에서 심플한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참고로 내가 필기구 중 STAEDTLER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회사 제품이 세련된 디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만 읽고는 어떤 미학인지 알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도움 자료로 그림을 찾아다녔는데 적합한 그림이 없었다.

  마지막에 나온 고속철과 리옹의 신도시에서도 나는 프랑스의 세련미를 느낄 수 있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다섯 방향으로 뿜어져 나오는 철길은 프랑스 전국으로 퍼지는데, 대도시를 꼭 지나게 되어 있다. 프랑스의 지방분권이 성공한 이유는 바로 이 고속전철을 이용하여 파리 시민들을 쉽게 지방으로 드나들게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속철을 소개하는데 참 깨끗하고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겼다. 리옹이라고 파리에서 남쪽으로 고속철 타고 2시간 걸리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 또한 지방 자치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 남는 농지를 신도시로 바꾸어서 그곳에 첨단 기술 산업 단지와 개인 주택과 넓은 잔디구장과 편리한 대형 상점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현대 공학기술을 체험하는 놀이동산도 만들어서 파리 사람들이 하루 내에 관광할 수 있도록 고속철과 연결시키고 또 많은 재미있는 볼거리를 준비했다. 신도시 내의 큰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 자기의 집을 소개시켜 주었다. 신도시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평화로운 농경지 속에 자리잡은 집은 정말 아름다웠다. 수영장도 있었고, 푸른 잔디는 잘 깎여져 있었고, 집 뒤에 있는 과수원에는 체리가 흐드러지게 열렸다. 정말 서울 사람으로서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역시 G7 국가이고 높은 국민소득을 만들어내는 나라라서 그런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모두 발달해 있었다. 파리 중심부는 옛 건물들이 많고, 고전적인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그 곳을 흐르는 센 강가에는 보트 하우스가 다정하게 들어서 있고 광장에서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것과 대조되는 파리의 바깥쪽에는 라 데팡스라고 완전 현대식 건축물로 이루어진 최고로 세련된 신도시가 있다. 지방에는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순박한 과수원 경영자들이 예전부터 내려오던 삶의 모습으로 지금도 계속 살아가고 있다. 작게 나누면 각 마을마다, 크게 보면 각 도시마다 하나의 통일된 Theme를 가지고 있다. 파리 중심부도, 라 데팡스도, 지방의 포도농장도 저희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규정하는 분위기라는 것은 특히 시각적 디자인과 관련이 깊다. 한 예로 파리의 거리에 있는 상점 간판을 들 수 있는데, 정부가 색을 정해주면 모든 간판이 그 색으로 이루어진 간판을 만들어서 미관을 아름답게 유지해야 한다. 맥도날드는 전 세계에 빨간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지만 파리의 한 거리에서는 금색 간판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금색 M 간판을 달았다.

  반면 한국의 풍경은 어떤가. 어설프게 들여온 서양, 특히 미국의 문명이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을 다 망쳐 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통과 현대가 조화되는 순간 볼품이 없어진다. 서울의 어느 곳을 가도 어지러운 풍경만 눈에 들어온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서울에는 '그림'이 없다. 즉 디카로 찍고 싶을 만한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옛 한양 주변의 아름다운 조선의 건축물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국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시각적 미(美)를 실천하는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서양의 문물이 한국의 고전적인 풍경과 시각적으로 조화되지 않는 것일까. 왜 프랑스처럼 전통과 현대를 명확히 구분하는 지역 발전을 하지 않는 걸까. 왜 일관된 Theme을 가지지 못하고 어설프고 볼품없게 mix된 지역만 많은 것일까.

  아름다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위 환경을 아름답게 하려는 한국 사람들의 의식 개혁이 필요하다고 나는 사고를 확장하고 싶다. 예전 70년대 새마을 운동과 그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급속한 경제 발전을 한 한국은 잘 먹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산을 생각없이 깎아버려서 벌거벗은 황토색 산을 만들어버리고 주위의 푸른 산의 경관까지 해치는가 하면, 동강 같은 아름다운 곳에 놀러가서 쓰레기를 막 버리기도 한다. 조선의 아름다움에 한껏 취할 수 있는 서울에 아름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네모난 원색의 콘테이너 모양의 집을 막 짓고, 엿장수 마음대로 간판 색깔을 정하여 거리의 간판은 보는 사람의 눈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제 한국의 거의 모든 곳에서는 순수하고 일관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나는 슬프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나서는 더욱 그러하다. 


2005.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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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의 발전을 위하여 나는 나무같은 블로그를 만들어야 한다.

내 얘기만 하지 말고, 남을 위한 정보와 충고를 주어야 한다.

남들이 흥미를 갖고 덧글을 남길 수 있게 공감대가 형성되는 포스트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한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도록 특별한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따른 포스트를 주기적으로 올려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포스트를 올리기보다는 하루에 한개씩, 정성들인 포스트만 올린다.

안부게시판에 사람들이 안부를 남기면 꼭 그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의 안부게시판에 글을 남겨야 한다.

이웃에게는 언제나 한번씩 방문하고, 리플을 적어도 한 포스트에는 달아야 한다.

과도한 아이템 사용은 지양하고, 깔끔하면서도 나를 나타내는 블로그를 지향하는 아이템을 사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자면 나는 남들을 위한 블로그를 만들어야 한다.


2005.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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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무지 뿌듯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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