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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05 2003년 1월 뉴질랜드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 겨울, 나는 아버지 친구의 소개를 받고 뉴질랜드로 2달간 혼자 단기 어학연수를 갔다왔다. 워낙 어렸고 정규 학교교육을 받기에는 기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나는 Shore English라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일주일에 5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이 있었고 영어뿐만 아니라 곁가지로 수학(고등학교 1학년 10-가 할때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도 하고 뉴질랜드 선생님과 Auckland Takapuna 주변 견학과 현장학습도 했다. Auckland 도심까지 학원 아저씨와 차를 타고 가서 볼링을 같이 치고 영화를 봤던 기억도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집은 아버지 친구네 집에서 홈스테이 식으로 했다. 아버지 친구분은 나만 있는 2층의 작은 방을 마련해주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Holden 회사 차 말고 작은 일본 차로(Honda였던 것 같다) 매일 나를 학원까지 데려다주셨다. 언덕 위의 주거단지 마을에 있는 5층짜리 별장처럼 생긴 하얀 집의 2층이었는데 그곳에서 학원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아버지 친구 아들은 나와 같은 나이였는데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고 Westlake Boys High School에 다니고 있었다. (옆에는 Westlake Girls High School이 있었는데, 이곳에 다니는 일본계 혼혈 애들이 진짜로 이뻤다!!) 뉴질랜드는 교육과정이 한국보다 전체적으로 1년씩 빨라서 high school에 바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빠른 89였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성진이였고 성진이와 나는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온 다음에는 어머님의 저녁 준비를 도와드리고 저녁을 먹은 다음 같이 쇼핑몰로 놀러가거나 옆의 늪지대 있는 정돈되지 않은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거나 집앞 시멘트 바닥에서 Frisbee를 던지면서 놀곤 했다. 맞다, 글을 쓰면서 방금 또 생각난 건데 성진이 집에서 언덕 아래쪽에 있는 하얀 담을 넘어가면 잔디밭이 있는 영국계 내외분이 계신 집이 나왔다. 이 집은 크기는 작지만 마당이 넓어서 그 집 아들(8살 정도)과 같이 야구나 럭비를 하기도 했었다.

 사실 뉴질랜드에 갔다온 후 영어학원의 성적표와 팜플렛, Rotorua와 Taupo 관광지에서 성진이네 가족과 찍은 사진 몇 장만으로 두 달간의 기억을 갈무리한 나로서는 그 이후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다시 서울 학생의 생활에 젖어들어갔고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부담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은 그때는 별거 아닌 걸로 여겨졌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들은 음악이 지금 내가 듣는 Pop 음악의 근간을 만들었고, 그때 했던 운동 종목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 종목이 되었으며, 그때 영어로 입을 풀어놓은 게 나의 고등학교 1학년을 잘 넘기게 해준 든든한 지원이 되었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나는 22살, 7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작년 겨울쯤에 갑자기 생각이 든 건 두 가지였다. 2003년 1월과 2월의 뉴질랜드 음악 차트를 보면 그때 내가 TV와 라디오와 거리에서 그렇게 많이도 들었던 좋아하는 Pop 음악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학원이 있던 Anzac Street를 이용해서 내가 두달 간 몸담았던 곳의 스트리트뷰를 볼 수 있겠다. 잠깐 번뜩하고 생각난 추억여행의 아이디어를 나는 다이어리에 적어놓았다. 그렇게 해놓고 언젠가는 추억을 다시 들추어 잊혀진 기억에 불을 지피자 생각했는데 그동안 또 나 자신을 여러 가지 일로 채찍질하고 쳇바퀴 굴리다보니 실천은 계속 뒤로 미루어졌다. 그런데 오늘, 하늘은 맑고 날씨는 덥고 나는 기분 좋게 혼자 아침을 보내며 느긋하게 쉬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딱 7년 전의 그 느낌이 개기일식을 하듯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바로 구글을 띄우고 검색어를 입력했다.

"new zealand 2003 january music chart"

제일 위에 바로 결과가 나왔다. .nz인 걸 보니 뉴질랜드 사이트다. 100%다. 이곳에 내가 듣던 음악이 모두 다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사실 몇달 전에 멜론 플레이어에 '2003 January Auckland'라는 마이앨범을 만들고 이 안에 내가 뉴질랜드에 있을 때 중학생 때 들었던 음악을 기억에 남아있는 것만 되살려서 집어넣어 놓았다. 7곡밖에 안 되었었다. 그런데 차트를 발견하고 2003년 1월과 2월의 주간 Top 50 Singles Chart를 하나씩 열어서 안에 있는 곡 제목을 하나씩 읽어보니 정말 놀랍게도 내가 7년동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던 Pop 음악의 선율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뉴질랜드 음악 차트 사이트 http://www.rianz.org.nz/rianz/chart.asp

 여기 있는 곡은 바로 Melon Player 안의 마이앨범에 등록을 해서 재생시켰다. 잊혀졌던 음악이 추억이 되어 돌아왔다. 내 품에 다시 돌아온 음악들은 나에게 최고의 편안한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마치 7년동안 잊고 있었던 곡들을 다시 듣는 건 7년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똑같았다.

 그렇게 30여 곡을 모아서 마이앨범을 완성시켜 통째로 재생시켜 놓고 나는 구글 지도로 갔다.

"takapuna auckland"

지명을 쳤기 때문에 검색 결과 맨 위에는 지도가 나오게 된다. Takapuna 지역의 축소 지도가 나왔고 조금만 확대하니까 Anzac Street가 나왔다. (나는 그 많은 길들 중에 이 길 이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여행을 할 때에는 전체의 단 한 부분만 알면 나머지는 저절로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스트리트뷰로 Anzac Street를 쭉쭉 달렸다. 처음에는 roundabout(빙글빙글 도는 교차로. 영국령 국가의 한적한 지역에서 교차로 대신 있는 도로) 과 주변의 정리되지 않은 수풀만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거리 저 멀리 보이는 7층짜리 흰색 건물이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영어학원 간판을 찾아냈으며 학원 근처의 아담한 쇼핑몰 Westfield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던 해변의 버거킹과 fish & chips 가게, 버스를 타던 정류장도 보였다.


▲ Shore English를 구글 스트리트뷰로 찾아내었다

 분명 이 사진은 2010년에 찍은 거일텐데, Takapuna의 거리는 7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안 변해도 너무 안 변했다. 오히려 그러한 '정체된 도시'는 나의 추억여행의 방해요소를 전혀 남겨주지 않아 나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이 지역은 내가 생각해도 발전이 필요 없다. 느린 삶의 템포를 가지고 바다와 함께하는 활동적인 삶. 서울에서 빡빡한 학생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 정도의 도시는 휴양지로서의 천국이지 절대 도시처럼 보이지 않는다. 방학때마다 가서 살다 오면 딱 좋은 그런 동네다. 그리고 마침 내가 이 곳에서 딱 두 달만 있다 왔다는 게 나는 정말로 감사하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공간을 초월한 접근성은 초고속으로, 그리고 매우 쉬운 방법으로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그리고 추억을 되살리는 여행에서 나는 모든 과정에 대해 온전한 통제를 할 수 있었고, 옛날의 기억과 다시 마주치는 일을 운명이나 우연에 맡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검색과 UI 상호작용이라는 아주 주체적인 과정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계속 바빠서 미루어 오곤 하고 할 기회가 생기면 까먹곤 했던 일을 해냈다. 뿌듯한 기분이 밀려온다.

ps 혹시 성진이가 이 글을 보면 이곳에 댓글이라도 달아줬으면 좋겠다. 그땐 너무 어려서 서로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고 집전화번호도 수첩에 적어오지 못했는데, 디카로 사진도 한 장 못 남겼는데 그게 너무나도 아쉽고 후회된다. 성진이는 뉴질랜드에 정착해서 살고 있을까? 아마 Auckland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facebook에서 나도 Westlake Boys High School로 검색해볼게. 혹시라도 한국에 왔으면 꼭 다시 만나자!!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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