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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해보기 전에 나는 연인과의 대화는 친구와의 대화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는 편히 말하던 나의 고민이나 나의 실수담이나 서로 놀리는 말들을 연인 앞에서는 절대 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평소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연인에게는 '완벽한 매너와 말솜씨로 무장한 사람'으로서 다가가야 한다고 믿어왔다. 즉 연인에게는 불만을 표해서도 안 되고 항상 과장된 반응을 보여야 되고 몇 초 동안이라도 침묵이 오가면 절대 안 되는 줄 알았다. 이제 와서 그런 옛날의 신념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달았으나, 전에는 정말 심각하게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의 나의 처세를 두 가지로 갈라놓는 데 주력했다. 연인이나 친구나 지금의 어린 나에게는 그저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괜히 내 머리를 말도 안 되는 생각과 이론으로 채워놓고 사람들의 특성이라는 자극에 따라 내가 반응하도록 나를 디자인해 왔었다. 그리고 그러한 '디자인'은 내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에게 다가갈 때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긴장감의 결과는 여자에게 부담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갖는 언행의 범위는 친구와 연인 관계가 공유하는 범위에 연인 사이에서만 가능한 언행의 범위를 합친 것이다. 집합 A와 집합 B 그리고 그 사이에 교집합 C가 있다면, A가 친구 관계에서의 언행의 범위이고 B가 연인과의 언행의 범위이다. 풋풋한 대학생 시절에는 교집합 C가 무궁무진하게 넓다. 활동의 자유가 허락된 우리들은 대학생 시절에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도 계획하고 실천하지만 주위의 영향을 받고 나서도 계획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B-C 즉 친구에게는 할 수 없지만 연인에게는 할 수 있는 언행의 범위는 대학생 시절에는 그리 넓지 않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 둘만의 밀실이 넓어지고 둘 이외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경향도 조금씩 커진다. 꼭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위를 둘러보고 드라마를 시청한 결과 그러한 답을 내렸다. 결국 대학생인 나에게 연인을 향한 처세와 친구를 향한 처세는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고 친구와 대화하듯 연인과 대화하는 능력이다. 끊임없이 연인의 일상과 상황을 알려 노력하고 그러면서 대화의 양을 늘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 항상 좋은 것만 주려 고심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갔을 때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친구들과의 대화 + 알파'가 연인들과의 대화라면 그 '알파'는 중간에 가끔씩 들어갈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는 '알파'를 중심으로 보여주느냐 아니면 '자연스럽고 평범한 대화'를 중심으로 보여주느냐에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의 모든 대사는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다. 지루함과 평범함이 대부분인 현실 즉 일상 속에서 비일상으로서의 '알파'를 만들고 찾아내고 같이 즐기는 일이 우리의 일생 중에서 얼마나 작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과거의 나처럼 연인과의 대화는 드라마처럼 특별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자극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의 경우에는 더하다. 대학생이 되어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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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이 언제 어디서 모이자고 멤버들에게 연락을 주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자기가 먼저 모임 장소에 10분 전에 도착해서 먹을 것까지 세팅이라도 할 것같이 펄쩍펄쩍 긍정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아리에서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적인 약속을 취소한 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감정으로 '그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진짜 가고 싶은데 그때 과외가 있다며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겠다고 선언하는 적극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자나 커뮤니티 공지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동아리의 아무도 모른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동아리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집단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 동아리는 그 사람에게는 '세컨'으로서의 동아리, 즉 더 중요한 다른 집단에서 충실히 활동한 다음 시간이 남으면 그때 활동을 개시하는 동아리이다. 동아리보다 중요한 다른 동아리, 애인, 혹은 친구가 있다면 그 동아리의 중요성은 묻혀버린다. 그 사람은 그 동아리에 대한 애정을 완벽하게 쏟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동아리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가 힘들 때 우리는 그 동아리를 세컨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자신은 열심히 활동하려 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태도와 능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그럴 때에는 자신이 가치없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그곳에 대한 애정이 사라져 자신의 넘치는 애정을 다른 곳에 쏟게 될 것이다.

  모든 동아리의 초기는 활력이 넘치고 생산적이다. 동아리의 설립 멤버들은 자신들의 모든 대학 생활을 그 동아리에 헌신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가 많고 동아리에서 즐거움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그 동아리는 초기 멤버들에게 우선순위 1순위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동아리는 점차 회원들의 가입과 탈퇴를 자유롭게 규정하여 놓는다. 이것은 동아리의 정체성과 제도의 발전과 함께 같이 신장되는 긍정적인 자유이지만 그 동아리가 어느 누군가에게 '잠깐 놀다 갈 동아리'로 인식되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정한 동아리를 '세컨'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한두 명일 때에는 동아리 전체의 운영과 유지, 즉 생명에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동아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 동아리에 대한 우선순위를 2위, 혹은 3위로 설정한다면 그 동아리는 당연히 시들해진다. 그리고 시들해진 동아리는 얼마 못 가 곧 문을 닫게 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시들어진 수많은 집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지만 평생 한 번 만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과 1학년 교양 수업의 조모임을 같이 할 때, 그 조모임 커뮤니티는 그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을까. 또 일년에 한 번 있는 행사에 참가해서 그 행사 관련 커뮤니티에 가입했을 때, 그 커뮤니티는 어떤 우선순위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질 것일까. 사람들은 평생 친구, 평생 몸담을 동아리에 최고의 애정을 줄 것이고 그러한 커뮤니티는 사소한 한 때의 반강제적인 집단으로 여기고 매우 강제성을 띤 모임이 있을 때에만 참석할 것이다. 물론 조모임 커뮤니티 같은 예시는 낮은 우선순위를 가진 집단의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입한 동아리를 살펴보아도 그 정도의 애정 결핍과 낮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 동아리는 충분히 존재한다.

  하지만 복수 개의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의 우선순위를 한 동아리에만 부여하지는 않는다. 세 개의 동아리 모두에 똑같은 애정을 가지고 그곳에서 똑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 세 동아리의 우선순위는 모두 '높음'이고 세컨으로서의 동아리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설정이지만 현실에서는 제일의 우선순위가 두 개 이상의 동아리에 부여되기가 힘들다. 정말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 동아리 활동을 한다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컨으로 밀려나는 동아리들이 많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컨 동아리의 우선순위를 다시 1순위로 바꾸던지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그 동아리의 구성원인 이상 나는 그 동아리의 행사에 꾸준히 참가하고 다른 멤버들을 동료를 넘어선 친구로 맞이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동아리를 탈퇴해야 한다. 동아리는 방안의 식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고 물과 영양분을 주지 않으면 금세 시들게 된다. 동아리는 순간의 즐거움, 때에 따라 바뀌는 자신의 욕구 충족 때문에 가끔씩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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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리에서 활동하다 보면 같은 동아리 내의 친구나 선배와 의견 충돌을 빚을 때가 있다. 특히 음악 동아리의 경우 그러한 의견 충돌은 개인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고질병으로 남는다. 어떤 성향이 이 동아리 안에서 '적합하다' 혹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이상 한 성향만 받아들이는 태도는 주관적인 아집에 불과하다. 실제로 단순히 동아리의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한 음악 성향만 강제하는 사람이 몇 있다. 그 성향이 그 동아리의 정체성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성향이 아닌 단순한 그 선배 개인의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후배들은 많은 불만을 갖는다. 선후배 사이뿐만 아니라 동기들 사이에서도 성향의 차이는 의견 일치와 일의 진전에 큰 차질을 빚어낸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가 선행되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 방법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팀을 구성하여 팀과 팀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 독자적인 일을 추진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두번째 방법에 비해 조금 더 실용적이고 '성향 불일치 이후에 더 유용한' 방법이다. 동아리의 구성원이 매우 많을 때에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경향을 갖는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가입과 탈퇴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동아리(오디션이 있는 동아리를 제외하고)이기 때문에 같은 동아리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과 친해질 필요는 없다. 그래서 동아리 내에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까이 하기 마련이다. 첫번째 방법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를 자연스레 동력으로 이용한 것이다. 한 동아리 안에 2~3개 정도의 팀이 있으면 적당하다. 하지만 만약 동아리 내에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특별한 성향을 가진 소수가 발생하거나 혹은 여러 팀 구성원의 인원이 너무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면 첫번째 방법을 쓸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노력의 기회와 그에 따른 똑같은 만족감을 주는 것이 동아리의 원칙인데, 위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차별받고 억압받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성향이 다른 멤버들의 성향과 너무나도 다르고 특별하다면 자신의 성향을 고집하는 마음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다른 멤버들에 비해 더 많이 해야겠지만 말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이지만 그만큼 실현 가능성도 낮은 방법이 첫째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처음부터 동아리의 성향을 결정하는 방법이다. 동아리의 모토와 정체성을 먼저 밝혀 놓고 멤버들을 소집하는 것이다. 음악 동아리의 정체성이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동아리가 전통적으로 고수하는 어떤 성향이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구성원들의 수많은 성향을 정리하고 규합하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멤버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성향을 표출하기 전에 동아리 전체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재즈 동아리의 예를 들자면, 우리 동아리가 퓨전 재즈는 지양하고 대부분 스탠다드 재즈를 지향하기 때문에 컨템포러리 재즈를 좋아하는 나는 그러한 성향을 조금 억제하고 스탠다드 재즈를 더욱 더 좋아하려 노력했고 지금은 스탠다드 재즈에 푹 빠져 있다. 강제로 나의 성향을 억제하고 수정한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그러한 강제에 따라야지만 이 동아리가 나에게 호의적으로 효용과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성향을 바꾸었다. 물론 처음부터 전통으로 규정되어 온 동아리의 정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성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동아리의 몇몇 구성원들이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성향이고 '점'으로서의 성향이다. 동아리에는 '선'으로서의 성향이 동아리의 역사를 꿰뚫으며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특별한 성향이 규정되어 있지 않고 동아리 안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자신들의 자유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동아리가 가장 좋지만, 조금 더 동아리 구성원의 현실적인 단합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정체성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모든 국민들은 '우리는 똑같이 한국 사람이고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할 것이다' 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뭉칠 수 있었다. 분명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이던 그때 응원의 함성을 단순한 소음 쯤으로 치부하던 사람들이 몇몇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붉은악마 대중'에 반발하지 않았던 것은 그 사람들 또한 대한민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응원을 하러 거리로 뛰어나가는 성향이 어느 정도 강제로 작용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고 자연스레 단합에 순응했을 것이다. 이처럼 단체를 이끌어나가는 힘은 단체의 의견 일치와 단합에 있다. 무한한 자유가 보장된 대학생들에게도 단체 활동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공통 성향을 창출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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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에 와서 새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도 우리는 몇몇 사람들과는 한 번의 만남에 그치지 않고 계속 만남을 이어간다. 아무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 살 수 없다 해도 우리는 대학교에서 혼자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를 하고 그와 친해지려 한다. 같이 조모임을 해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만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과 조금 더 친해지고 싶고 그 사람을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만난다. 마주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친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그 사람을 계속 만나는 우리들의 모습은 가만히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들이 대학교에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 사람과 있으면 즐겁기 때문에 만나고, 그 사람과 내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 만나고, 서로 물질적, 지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이득을 가져다주니까 만난다. 과거에 같이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학연이나 지연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과거에 함께 했던 일이 하나도 없어도 괜찮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여도 괜찮다. 다만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리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앞서 말한 세 가지 기준으로 저울질한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더 만나고 싶기도 하고 그 사람과 그만 만나고 싶기도 한다. 동아리에서 서로 생전 못 보던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우리 친구하자!' 라고 해놓은 다음 그들 둘이 꾸준히 만날 것인지 여부는 그러한 기준이 충족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소개팅에서 만난 이성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우리들 중 어느 두 사람이 서로 같은 집단이나 일에 소속해서 꾸준히 마주치거나 혹은 같은 고향에서 자라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들의 만남의 초기 단계에서는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되지 뭐. 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만남의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계속 즐거움과 도움과 이득을 주어야 관계가 유지된다. 이러한 관계는 냉정한 Give & Take의 관계와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쉽게 자신의 참모습을 건네주지 않고 약간의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 만남의 초반에는 이러한 냉정한 내적 판단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상대방의 냉정한 판단을 염려하면서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즐거움과 도움과 이득을 주기 위해 자기를 갈고 닦은 다음 상대방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상대방은 그 사람에게 기쁨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과의 훗날의 만남을 기약할 것이다.


  인간이란 속으로는 이렇게 냉정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야 단순한 우연을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갈 수 있다. 우리들은 나이를 먹고 넓은 사회로 나갈수록 오랜 환경적 요인에 따라 형성된 관계보다는 호감과 능력과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분석해서 형성한 관계를 더욱 많이 갖게 된다. 그만큼 타인이나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서 만드는 관계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자기 관리와 자기 쇄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당신이 넓은 세계에 나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엄청 많을지라도 그 사람들은 당신과 예전에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남'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길 바란다. 그리고 서로 남이었다가 친구나 애인 사이로 바꾸는 과정에 즐거움과 도움과 이득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선행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이것은 결코 슬픈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해주는 고마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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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는 아무래도 시험일 것이다. 학점이 대학 생활에 있어 우선적으로 취득해야 할 가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좋지만 일단 나의 객관적인 능력의 척도를 높이고 남과의 관계에서의 능력도 더불어 높아지는 것이 올바른 자기 발전의 순서다. 우리는 수많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만 대학생의 경우 가장 커다란 가치인 학점과 인간관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는 공부에서 손을 놓고 친구들과 끊임없이 만난다. 그 때가 우리가 말하는 '평소'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평소에 사람을 잘 사귀어 놓아야 내가 위급할 때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나 외로울 때 같이 있어줄 사람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친구를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시험이 임박하지 않았을 때에는 공부보다 친구 만나기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들의 처세는 달라진다. 그동안 열심히 친구들을 만났으니 이제는 인간관계를 번성하게 하는 작업을 멈추고 잠시 쉰다. 남들에게도 잘 보이면서 자기 몫 또한 확실히 챙기는 멋진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이러한 삶의 패턴을 유지할 것이다.

  평소에는 자기 스스로 세워 놓은 공부 계획도 취소하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나 MT나 여행 등에 참가하여 이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가 개개인에게 차별된 이득을 주는 일이 등장했을 때는 속된 말로 '버로우 burrow'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친구들과 만나는 일을 멈추고 공부에 힘썼을 때 이러한 행동 패턴의 변화가 비난받을 만한 행위는 전혀 아니며, 그렇다고 '버로우'를 통해 평소에 쌓아 왔던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신경을 써야 할 때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적시적소에 행동하는 바람직한 인간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버로우'를 통해 공적 영역에서 벗어나 사적인 영역으로 탈피했을 때 우리들이 취하는 모든 자기 발전의 활동은 나중에 다시 공적 영역으로 되돌아갔을 때 자신을 남들 앞에서 빛나게 하는 토양이 된다. 평소에도 '버로우'의 시간은 있다. 밤늦게까지 신촌에서 놀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의 사적인 시간은 시작된다. 이때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먹고, 피로한 몸을 잘 씻고, 한가하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느라 못했던 복습을 한다면 사적인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하면 무언가 주위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데 있어 부적절할 것 같은 모든 행동을 '버로우'할 때 끝내는 자세, 이 자세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태도이며 특히 대학생에게 필요하다.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 어떻게 본다면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누린 사람, 참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생활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생각의 틀에 숨어있다. 공적인 영역에 흠뻑 빠지다가도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는 삶의 패턴, 성장과 후퇴를 반복하며 서서히 발전하는 경기변동의 그래프를 그리며 진행되는 모습은 성공적인 삶을 위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상황을 잘 파악하여 자신이 '버로우'를 해야 할 시기나 기간을 적시에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열쇠를 가지고 제대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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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의 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무대 위로 밀어올리는 남자들이 있다. 커다란 목소리로 그 시간 동안만큼은 모임 속의 모든 이들을 단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들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점점 흥분해간다. 그들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쌀쌀한 날씨에는 분위기를 더 띄우자며 먼저 외투를 벗고, 밤이 깊어갈수록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씩 가까이 다가가 서슴없이 본능에 충실한 한마디를 던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나름대로 헌신적인 사람으로 평가하고 그와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려 하면 그는 오늘 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먼저 병나발을 분다. 몇 번 소리를 지르고 하늘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욕을 해대고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끌어안고 있다가 이내 그는 정신을 잃고 사람들 사이를 헤맨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많은 여자들은 아무런 로맨티시즘 없이 그와 약간의 대화를 나누다가 저 멀리 사라지는 그를 보고 이내 제 갈길로 다시 찾아간다.

  방금 이야기한 상상의 인물인 '그'가 조금 더 자신의 평소 이미지를 차분하게 관리해 왔다면, 게임과 장기자랑과 술과 같은 순간의 쾌락을 위한 도구에 심취하여 자신의 깨어 있는 정신을 죽도록 내버려두지만 않았다면 그가 관심을 가졌던 주위의 이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남자는 적극적이어야 하지만 언제나 '그 이성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성의 이미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 한다. 대학교의 MT와 같이 긴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유흥을 즐기는 활동 속에서 과연 주목받는 일이 가치있는지는 의문이다. 제 한몸 가눌 수 없이 대중의 박수와 환호를 먹고 사는 마당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의 적극적인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심심해하지 않고 즐거워하게 만들기 때문에 긍정적이지만, 즐거워했던 사람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적극적인 그 모습이 도를 넘어섰을 때 그에게 등을 돌린다. 이성의 경우 이 현상은 더욱 심하다. 동성 친구들은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그를 친구로서 동정심을 가지고 부축해 줄 수 있겠지만, 이성 친구는 그러한 부축을 선뜻 자원할 용기와 근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단체 속의 사람들이 함께 노는 '짧은' 시간에 '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적극성을 보이는 남자보다는 평소의 '긴' 시간에 '자신'만을 대상으로 하여 열심히 접근하는 남자에게 훨씬 더 큰 호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기의 이미지가 가벼운 이미지로 손상되어도 좋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보다 굳건히 자신의 무거운 이미지를 고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자의 남자를 향한 농담과 비방과 조롱이 자연스럽게 먹혀들어가는 남자들이 연애에서 성공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남자들의 크나큰 착각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던 여자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연속해서 보인다고 실제로 그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인 줄로 여기는 착각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행위가 곧 적극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곳에서는 착각하는 남자들의 수가 배로 증가한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주목받는 이들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마당발의 성격을 띠고 동시에 이러한 착각을 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남자도 없다. 만약 자신의 성격이 소심하여 술을 매개로 좋아하는 이성과 친해지고 싶다면 반드시 장시간동안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를 많이 해라. 혼란스러운 MT방에서 긴장이 풀어진 여자들이 바로 넘어올 것이라는 기대는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원래부터 옳은 방법으로 여겨져 왔다.


  적극적인 모습은 참 좋다. 놀라움과 기대감이 결여된 일상에서 잠시 사람들과 탈피하는 일도 좋다. 하지만 적극적인 사람은 평소의 자신의 모습으로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되돌아갈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자신의 좋은 측면을 강조하기보다 소수자나 약자의 모습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강조한다면 주위의 사람들과는 동성과 이성을 불문하고 깊은 인간관계를 가지기 힘들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특별히 술을 조심해야 한다. 잠깐 동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을 거닐며 사람들의 호응을 주도했던 이들이 몇 시간 뒤 저 뒷구석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처량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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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나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모습만을 보이려 애쓴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개인이나 집단과 충돌한 적은 없다. 적어도 내 얼굴에 달린 두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드넓은 초원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내가 먹을 만큼의 풀만 뜯고 유유히 활보하는 한 마리의 양처럼 나는 살아왔다. 난 내가 풀을 뜯어먹음으로써 다른 양들이 엄연한 피해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의 배를 채우고 내가 사라지는 순간, 나의 시야가 자취를 감춘 그 초원에서 다른 어떤 양 한마리는 나 때문에 자신의 먹을 풀을 빼앗기고 만 셈이 된다.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사람들과 이미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과정은 생각해보면 수도 없이 많은 듯하다. 아무리 나의 입장으로 생각해서,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고 여기더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말과 행동이 모욕이나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나를 평소에는 좋아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싫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쉽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면 웃으면서 맞장구를 쳐주던 친구들은 어느날 나를 피하고 나에게 매서운 눈총을 보내고 쓴소리를 한마디 던지고 사라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나에게 직접 대면하여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난 너 때문에 지금 많이 서운하다. 그날 왜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그런 말 한마디를 던질 수가 있니' 같은 말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에게 서운한 마음을 무언의 행동 패턴으로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무언의 반응을 빨리 관찰하고 나에게 서운했던 이들에게 '누구누구야, 요즘 나에게 서운한 일 있어? 도통 보이질 않네. 예전에 내가 말실수 같은 걸 한 적이 있다면 말해봐. 나도 모르는 나의 실수가 있었나봐.' 정도의 말을 던져 주어야 한다. 그러한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으면 나와 나에게 서운한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된다. 소위 '서로 쌩까는' 현상이 대두하는 것이다.

  자신은 남들에게 항상 물질적,정신적 도움을 제공하고 웃음을 선사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을 주선해 주며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좋게 다가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나의 가치관이 아닌 그 사람의 가치관이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했다고 자만하는 사이 다른 사람은 벌써 나에게 약간의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내가 주도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는 다른 사람을 한번 더 감싸주고 그들에게 한번 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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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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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나와 부대껴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잘 지낸다. 이 '잘 지낸다'라는 표현은 '서로 아무런 문제 없이 각자의 독립된 활동을 추구할 수 있고 가끔 공식적인 자리에서 협력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나의 노력은 긍정적인 효과로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나와 별 탈없이 잘 지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친구의 약점을 놀려 친구와 나 모두를 즐겁게 만든다던가, 직업에서의 활동 외에 사생활에서의 활동을 거의 모두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낯을 가리는 나의 성격 때문일까 걱정이다.

  나는 지금 나와 연결된 모든 사회집단에서 잘 지내지만 소원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마치 모든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 노력하다 특정한 몇몇 사람들에게 엄청난 친밀감을 안겨주지 못하는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처럼, 나는 대중에 해당되는 나의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을 취하고만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친구들을 놀리거나, 그들의 인생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거나, 재밌는 사람이 되어 친구들 사이에서 시종일관 대화를 주도하지는 않는다. 이 세 가지 일에 통달하고 싶지만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나의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단정한 말투와 성격을 다듬는데 만전을 기울인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내가 땅으로 엎어지거나 눈물 콧물을 동시에 흘린다거나 친구들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일은 전혀 없다. 이것이 이미지 관리임을 깨닫는 순간 나는 자신에게 새삼 놀랐다.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정치인도 아닌데 왜 나는 이미지 관리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정했다. 잘 지내면서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곁에 많이 두어 나의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고 싶다는 간절한 목표 아래에서 나는 결심했다. 우선 이미지 관리를 그대로 놓아두고 이 시대가 원하는 '재밌고 웃기는 사람'의 캐릭터를 배워나가야겠다. 하지만 내가 모든 사람들 앞의 개그맨이 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개그맨은 대중에게 호소할 뿐 특정한 개인들의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언행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친구들이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칭찬하고 격려하며, 친구들의 외모를 유심히 살펴보아 친구에게 정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겉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내 이야기를 듣는 친구들이 모르는 다른 친구들의 해프닝을 일화로 들려주며, 물질의 도움을 받아 내가 가진 스포츠/음악/미술에서의 능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과정에서 가끔 예상치 못한 말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유머와 개그로서의 말은 '단지 말뿐이므로'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엄청난 불이익을 가져다주더라도 실제로는 아무런 실현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와중의 나의 진실된 의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는 조금 더 친구들과 친해지려 노력할 것이다.


  진심으로 다가가면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다. 용기를 내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털어내면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솔직하게 다가온다. 친구는 그런 존재이다. 하지만 틀에 박힌 진심의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 역동적인 시대에서 적당한 유머는 필수적이다. 진심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말뿐인 유머와 개그로 수시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이다. 단지 잘 지내기만 하는 친구들과 서로 가지고 있는 '서로에게 잘 보이려는 벽'을 허물고 그들과 소원한 관계에서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도록 만드는 유머와 개그는 오늘날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묘약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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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나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인 사고방식의 오류를 안고 살아갔다. 나에게 지란지교, 관포지교, 죽마고우, 백아절현과 같은 네글자의 고사성어가 가르쳐주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정과 지혜는 21세기의 험한 사회에서 너무나도 부적합한 것처럼 보였고, 개인과 가족만이 행복하면 자신의 인생 또한 즐거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바로 지금인 줄 알았다. 즉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중간에 곁가지로 다가오는 수많은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피를 나눈 가족들과는 사뭇 다른 이들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들과 나 사이에 영원히 이어지는 끈은 없었고, 나는 다른 이들에게 내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들을 대하는 나만의 특별한 자아를 가지고 그들과 대면했다.


이와 다르게 나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사이에는 서로가 진실된 모습만을 보여준다.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와 가족들은 서로 자신들의 약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약점을 서로 감싸주는 과정에서는 상담원과 고민하는 학생 사이의 서먹함이 아닌 즐거움이 담뿍 드러난다. 또한 부시시한 머리로 함께 정겹게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모든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보여준다. 양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어깨에 티끌 하나 앉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쓰며 사업차 만남을 할 때의 예절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서로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는 '친교'가 우세한 집단이 바로 가족이다. 나아가 이러한 친교를 바탕으로 하여 가족들은 서로의 단점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하고, 서로의 장점에 대해서 칭찬하기를 즐긴다.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서 남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자아는 없다.


친구들 대여섯명이 모여 같이 놀러나가는 자리나 학교 선배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집에서와 같이 행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남들이 최근 어떤 일을 하고 지내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직 그 만남 속에서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모임이 파할 때까지 호감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적극적으로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거나 간단한 게임의 진행을 맡아 많이 이야기한 적은 있더라도, 그러한 일은 어디까지나 평소의 나의 생활과 매우 유리된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남들을 즐겁게 해주고 남들에게 호감을 주려는 나의 노력은 근본적으로 그 바닥에 '예절'을 깔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가는, 쉽게 말해 그들의 프로필을 작성하는 일인 대화(Conversation)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며 공감대를 만드는 대화는 곧 친교로 발전하는데, 친교를 만들어야만 하는 친구들 사이의 모임에서 나에게는 친교보다 예절이라는 가치가 우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이렇게 기억했을 것이다. 적극적인 척하는 소극적인 아이, 남에게 좋은 면만을 보여주려 애쓰는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자기 비판을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꽤나 피하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만난 사람이고 또 언젠가 우연히 떠날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인생이라는 '주막'에 수많은 '나그네들'이 오고 갈 것이라는 이러한 사상체계는 매우 잘못되었다. 나의 주막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나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의 가족이 아니면서도 나와 몇년씩 같이 지내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이들이 주위에 꽤 많다.


오래 되고 참된 사귐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가족과 같이 생각하고 나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가능하다는 뻔한 진리가 이제 눈에 선하다. 물론 가족은 친구와 다르다. 가족들에게 내가 가져다주는 물질적,정신적 혜택은 친구들이 받을 혜택과 큰 차이를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나의 성품, 특별히 대화하는 태도나 화제의 종류는 가족들이든 친구들이든 상관없이 같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조금 바꾸어서 친구들이 또다른 가족이고, 예절보다 친교가 우선시되는 인간관계의 폭을 더 넓힌다면 어떨까. 진실된 자아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얻는 즐거움 또한 무한으로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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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세련되었다고 믿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면적으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며 매일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일에서는 다른 누구보다 꼼꼼한 솜씨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들에게 동정의 눈빛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경쟁하지 않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일 것이고, 그들을 굉장히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경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남의 도움을 전혀 요청하지 않고 야무지게 자신들의 일을 처리한다. 서로 도와주면서 쌓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혜택은 그들과는 먼 이야기이다. 그러나 혼자서만 살다가는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에 부딪친다. 그렇기에 사람은 주변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중 서로 약점을 드러내고 서로 약점을 감싸주기 위해 부조하며 살아가는 것은 남을 도와주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사회'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그 사람과 더욱 가까워졌다는 뿌듯함이 대부분이다. 조선 시대에 특히 발달했던 상부상조의 전통은 한 마을 안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살아가도록 해 주었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도록 하는 일종의 제도로 작용했다. 법과 도덕의 중간 성질을 가지고 있는 '禮'로써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도해냈다는 점에서 상부상조의 전통은 단순히 도덕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지금의 많은 TV 드라마, 그중 여러 가족들의 삶을 깊게 다룬 드라마를 보면 극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부모님이나 형제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자신들의 약점을 다른 인물들과 드라마의 시청자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곧 어려움에 빠졌던 인물은 다른 인물의 도움을 받아 기쁜 웃음을 지으며 어려움을 극복한다. 그 인물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는 멋진 남자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약점이 드러난 인물에게 까탈스럽게 굴던 여자 주인공이 진심으로 화해를 청하기도 한다. 지금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특히 인정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도와주며 서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최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개인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가구 단위, 혹은 개인 단위의 경제력을 늘리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려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았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거나, 먹을 양식이 부족하거나 하여 사람들은 서로 도와주기 위해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점차 개인 혹은 핵가족 한 가구 단위의 인간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중요해짐에 따라 서로 도와주면서 느끼는 따뜻한 인정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들은 우선 자신에게서 약점을 찾지 못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남들의 능력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조금도 열등한 능력이 없다. 그들이 남들보다 열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거나 혹은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 관련된 능력이다. 또한 그들은 당장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 너무나도 완벽을 꾀한다. 자신이 혼자의 힘으로는 끝내기 힘든 일이 있다면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노력하여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일을 완수한다. 어려움이 있을 때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융통성보다 자신이 이번 기회에 스스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자존심이 더 우세하게 된 셈이다.


  자신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원칙처럼 고수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쌓아가는 인간관계에 대해 무지하다. 뛰어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으므로 자신이 도움을 받지는 않는다. '완벽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람은 남들에게 도움을 받는 일 전혀 없이 자기보다 부족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만 한다. 완벽한 그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회사나 같은 학교에 소속해 있어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이 상황에서 도움을 받기만 하고 도움 줄 여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남을 도와주려는 호의가 다른 사람에게는 굴욕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있다.


  인간들이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려면 둘 이상의 인간들이 모두 자신들의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해야 한다. 약점이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의 말은 거짓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한번쯤 느끼게 되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며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은 삶을 보내게 된다. 자신을 일부러 '완벽한 사람'으로 못박아버리려는 마음은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게 되는 결과로 인하여 자신의 인간관계를 빈약하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열등감과 우월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이 자신 혼자 알아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그때부터 열등감과 우월감이 조금씩 생긴다. 약점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드러내야 솔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가온다. 그렇게 인정을 쌓아가며 서로 도와주는 삶이 가식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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