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배경지식은 내가 책의 글을 읽고 이해하기 위하여 도움을 주는 지식을 말한다. 배경지식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우리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그 글을 잘 이해하게 만들기 위해 순간 튀어나온다. 지금 내가 말하는 책은 소설책 뿐만이 아니라 어떤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는 글, 그리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연구 자료 등도 포괄한다. 즉 모든 종류의 글이다.

  글은 글이 보여주는 상황을 100% 묘사하지 못한다. 영화가 스크린에 투사하는 활동사진과 음향이 어떤 한 상황을 100% 묘사한다 가정했을 때 글은 묘사가 필요한 100개(난 이것을 묘사 단위라고 부르겠다) 중 가장 중요한 50개만 묘사해줄 뿐이다. 혹은 100개를 모두 묘사하긴 하지만 독자가 스스로 상상을 통해 더 묘사해야 할 여지를 남긴다.
우리가 글을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이 묘사하지 않은 50개까지도 상상해낼 줄 알아야 하고, 그것(상상)을 위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작가는 100개의 묘사 단위가 모두 존재하는 상황에서 50개만 뽑아 글에 표현해낸다. 우리는 그 50개를 상상의 시발점으로 삼고 나머지 50개도 상상해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100개 중 50개를 뽑는 일에 주의를 다하고, 우리는 50개에서 작가가 느꼈던 100개를 도출해 내는 것에 주목한다. 따라서 서로 역할이 정반대이다.

 
나에게 있어서 상상은 곧 영화의 장면을 내 머리에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인간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쉽게 전달해준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의 영화 장면 생성은 곧 완벽한 글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상상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주어, 명사, 동사, 부사, 형용사 등이 글 속에서 어떤 장면을 생성하는 재료로 작용하는 지 명확히 알고 그 단어들을 바탕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여러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문장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내가 생성하는 장면이 뒤엉키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상상을 할 대상은
첫째 눈에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
둘째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
셋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것,
넷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이다.

시각적인 묘사 단위 외에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의 묘사 단위는 위의 네 가지 상상의 대상에 상황에 따라 해당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상을 하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첫째 눈에 보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인물들의 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공간이고, 의견을 피력하는 칼럼에서 말하자면 현 상황 속에 들어있는 모든 물건이다. 글에서 추상명사 외의 명사의 역할은 눈에 보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형용사가 덧붙어서 명사에 의미를 추가한다. 추상명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준다.

  I got dressed. 라고 누가 말했다면 그 사람이 입은 옷의 모습까지도 상상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 옷이 하늘거리는 연두색 드레스여야 그 상황에 어울린다면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에게 연두색 드레스를 입히고 영화 장면에 집어넣어야 한다. 정말 연두색 드레스인지는 글에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지만, 드레스는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보조적으로 추가되는 '묘사 단위'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연두색 드레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사진을 통해서도 혹은 실제로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상상해낼 수 있었을까? 그래서 평소에 많은 시각 자료를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은 아무리 묘사가 정확하고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글 자체는 수천 수만 개의 단어들이 '독자'와  '이해의 대상'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종이에 불과하다.

  둘째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인물들의 행동과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 등이다. 특히 대화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소설에서 누가 따옴표 속의 말을 하고 있는지, 누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상상해 내는 것은 중요하다. 글에서 동사의 역할은 우리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을 상상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부사가 덧붙어서 동사에 의미를 추가한다.

 내가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하나의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을 때 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상상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장면 안에 2개 이상의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이들을 한꺼번에 같이 떠올리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씩 상상해서 장면 안에 채워넣되 2개 이상의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가지 묘사 단위들이 동시에 묘사되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소설에서 말하자면 추상명사와 추상형용사를 기반으로 묘사해주는 것들이다. 위치를 나타내는 전치사도 셋째 묘사 단위와 관련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다고, 추상적이라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이해가 힘들다고는 말할 수 없다. 추상적인 것들이 글에 등장한다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결국 그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가시화하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가장 단순한 예로 surprise라는 명사이다. 혹은 He was surprised with joy. 와 같은 경우다. 그가 희열을 느끼며 놀랐다면 그의 제스처는 어떨까, 그의 표정은 어떨까 등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상상은 글에 있는 50개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전개하는 글에서 대부분의 경우 셋째 묘사 단위는 어떤 큰 범위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는 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격세력이 맥아더의 동상을 쓰러뜨리려 했고, 미군 평택기지를 반대하는 시위대는 국군을 구타했다. 이 사건 뒤에는 북한의 촉수가 있었을 것이다.' 라는 문장에서 촉수가 바로 셋째 묘사 단위이다. 촉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우리가 상상해야 하고, 한 편의 짧은 글은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촉수가 상징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상상할 수 있는지는 우리의 배경지식에 달려있다.

  넷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의 전개, 상황의 선후 관계, 심리 상태의 변화와 같은 것들이다. 소설에서는 심리 묘사에서 넷째 묘사 단위를 건드린다. '난 너를 저주한다.' 라는 문장이 글 속에 들어있을 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저주한다니 어떻게 저주하지?' 그리고 그때 저주의 주체가 이전에 경험했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쉽게 '어떻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소설에서는 넷째 묘사 단위에 대한 이해가 쉬운 편인데, 문제는 이 '넷째 묘사 단위'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에 너무나도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의 오피니언, 사설, 칼럼 영역은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많이 읽으면 머리가 아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추상적인 논리의 전개에 많이 쓰인다. 한 예로 주장이 깨졌다. 와 같은 말에서 '깨졌다'는 단순히 접시가 깨지는 것과는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글에서 쓰이는 동사는 단순히 사물이 주어가 되었을 때의 의미와는 다르게 추상적인 개념을 묘사하기 위해 쓰인다. '남한이 체제와 동맹의 끈을 풀다.' '북한이 민노당이란 진보정당을 겨냥한다.' '당이 당 속의 적색 기운을 씻어낸다.' 와 같은 예문에서 '풀다', '겨냥한다', '씻어낸다' 등은 운동을 하다가 신발끈이 풀려졌을 때의 '풀다'와 오늘 잡아먹을 꿩을 '겨냥한다' 와 손에 묻은 케찹을 '씻어낸다' 등과 같은 쉽게 눈에 보이고 움직이는 묘사 단위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상상력이 글의 이해력을 좌우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Power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경험론을 믿는 사람이다. 경험론이라는 말이 나의 생각을 100% 포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나는 미리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경험이 있어야 책과 글을 읽을 때에도 이해가 잘 된다고 믿는다. '생생'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풍부한 '상상'의 날개를 펴간다면 글을 읽을 때마다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마키아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는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과 말을 할 수가 없다. 인간관계는 대화로 생겨나고, 대화는 곧 언어로부터 출발하고, 언어 안에는 곧 뼈와 살이 되는 지식이 담겨 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그 이야기에 동조해주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과 말을 할 수가 없고 그 사람과의 인간관계 형성도 불가능하다. 내가 공부하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에는 많이 알아야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많이 알면 알수록 친구들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우리 국어 선생님께서 계속 소설책과 역사책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하신 이유도 결국에는 폭넓은 공부로 얻은 지식을 가지고 글을 생산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내 글을 다른 사람이 읽고 나면 그 사람은 그 글에 대해서 나와 이야기할 것이다. 그 이야기가 곧 인간관계 형성의 씨가 되지 않는가. 인간이 점점 성장하면서 교양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다면 깊은 주제에 관한 대화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많이 아는 지식의 분야와 다른 친구들의 것이 다를 때에는 내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내가 친구들의 관심사를 맞추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인간관계 형성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친구들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자신에게 특별히 와닿지 않고 흥미가 없는 주제의 지식이라도 그 지식을 알고 있으면 더 주위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 친구들의 관심사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자. 주위 사람들을 알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주위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공부를 많이 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고 있어야 어느 주제에 대한 대화가 튀어나와도 그 대화에 참여하고 언어로써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결국 공부를 평소에 많이 해두면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잘 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주위 사람들을 자신 주변으로 몰려들게 한다. 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이다. 꼭 학문적인 서적을 정독하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라 공부는 생활의 일부이고 주위 사람들과 깊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
  과연 인간은 활자로 인쇄된 책만을 읽고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완벽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활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그 활자를 읽고 내가 어떤 풍경이나 상태나 동작을 영사기에 투사하듯이 이해의 도면을 구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17세기 유럽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인간의 모습과 그 주위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요란하게 바뀌는 TV의 화면과 같은 것들과 접하지 않는 사람은 글만으로 이해하는 세계의 영역을 좁게 한정지어 놓기 마련이다. 형이상학적인 저서는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묘사하여 주므로 활자를 읽으면서 단순히 생각만 함으로써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수필이나 소설이나 희극과 같은 대부분의 글에서는 글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배경 지식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직접 경험을 통해 자기 주위의 세상이 가진 모습을 보고 듣는다. 그리고 직접 경험으로 얻은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책을 읽어서 활자만으로도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그렇기에 단지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전에 내가 과연 그 책 속의 활자를 통해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배경 지식이라 함은 곧 이미지를 말한다. 한국에서 살던 사람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고, 따라서 한국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저절로 쌓을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한국에 관한 문학 작품이나 혹은 한국의 시사 이슈를 밝히는 글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한국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미 직접 경험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알고 있기에, 올바른 영상을 바탕으로 활자 하나하나에 상상력의 흐름을 주입시켜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6세기의 중국에 대한 소설을 읽는다면, 나는 똑같은 글을 읽고도 6세기 중국에서 생활해온 사람과는 다른 영상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은 완벽한 이해에서 약간 멀어지게 된다. 약간 멀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래도 6세기 중국 사람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추측하여 떠올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 어렸을 때 만화나 TV 등을 통해 중국의 문화를 간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여기서의 간접 경험은 오직 활자만을 통하여 얻는 간접 경험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중국 소설의 예를 가지고 계속 논의를 전개하자면, 한국 사람인 나는 6세기 중국의 참모습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활자를 통해 이해를 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내가 영화나 만화나 TV 등을 통하여 중국 사람들의 복식이나 중국의 자연 경관, 혹은 건물의 모습,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 대한 인터뷰 등을 많이 접해보고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록 활자를 통한 이해의 반경은 더욱 넓어진다는 사실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양한 매체와 끊임없이 접하여 지금 자신이 발을 딛고 생활하는 세계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도 간접 경험을 통해 확실한 이미지를 쌓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문학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 찍기와 영화 감상을 좋아하고, 자신의 서재나 연구실에 외부 세계의 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 조형물이나 장식품을 놓아두는 이유도 곧 그들이 간접 경험을 자연스럽게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앞서 정의한 배경 지식이 하나도 없더라도 활자만을 통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영역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영역은 형이상학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고, 논리의 싸움이 전개되는 토론의 장이거나 학습이 선행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영역이다. 하지만 흔히 추상 명사라고 하는 단어들과 한자로 이루어진 많은 관념적인 동사들-우리가 논술에서 많이 볼 수 있는-또한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을 이미지로서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결국 그 단어들의 조합인 한 편의 글 또한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간단하고 당연하기까지 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면, '협상' 이란 단어를 읽고 나서 조금 더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장면이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 좋다. FTA협상을 진행하는 TV 뉴스를 평소에 보아 두었거나 학교의 임원으로서 협상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활자에서 '협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
 
  결국 어느 장르의 글에 상관없이 인간은 활자만으로는 상상력으로 대표되는 생각을 깊게 전개할 수 없고, 따라서 항상 다양한 매체와 접하면서 오감을 모두 이용하여 활자를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책보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보다 여행을 좋아한다. 간접 경험은 아주 조금만 있어도 괜찮다. 티끌만한 간접 경험의 씨앗을 바탕으로 하여도 거대한 한 권의 책을 완벽하게 이해할 가능성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이 때 티끌만한 씨앗은 나의 순수한 상상력에 의해서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고, 그 나무는 가지에 알찬 이미지를 담고 있는 열매를 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열매의 껍질을 까서 활자와 함께 섭취하여 '완벽한 이해'에 도달한다. 인간이 아무리 생각을 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아무런 input 없이 진리를 향한 output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인간은 활자를 통해 생각의 날개를 펴기 전에 다양한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과 자신의 곁에 있는 세계를 통한 직접 경험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물론 교양인이나 지식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느끼면서 만족하는 데 그치고 말겠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마키아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은 그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폭넓게 꿰뚫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의 담론을 마치 홈이 파져있는 선로를 따라 모노레일이 움직이듯이 끌어나가면 누구나 그 의견을 일차적으로는 수용한다. 비판은 발언이 끝난 후에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과 그 발언을 대조해 본 후에 이어진다. 즉 어떠한 불완전한 주장이라도 정당성을 가진다.
 
  면접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사설과 칼럼 등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 나갈 경우에는 그것이 사실적인 사례에 대한 조망이 부족한 불완전한 주장이라도 정당성을 갖는다. 그 담론을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당연히 최근 벌어진 시사의 모든 소식, 지금까지 인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 온 사회과학자의 이론, 그리고 지금까지 있어 왔던 모든 정치인이 가졌던 사상과 주장을 모두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펴는 사람은 항상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사회 현상이나 사건의 호수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한 컵을 떠올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모노레일의 노선이 아닌 그것과 90도로 교차하는 다른 노선에 대해서는 차마 그 노선을 달릴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은 불완전하고, 언제나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규범적 진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발언 혹은 글인 이상 반증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 의견이나 주장에서 문제는 그 사람이 호수에서 담아오는 한컵이 얼마만큼 많은 물을 담아오는가다. 즉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의 양이 중요하다. 누구나 모든 인간이 딛고 서 있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근거를 채취하여 발언을 뒷받침하는데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면, 근거가 많을 수록 그 사람의 주장이 더 많은 설득력과 정확성을 얻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물컵이 정말 손에 앙증맞게 쥐어질 정도로 작고, 이 컵으로 저 멀리 있는 지식과 사실의 호수에서 물을 떠온다 해도 그것이 나의 의견을 뒷받침하는데는 너무 미약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일단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피력해야 하는 때가 오면 용기를 내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일단 내가 파 놓은 모노레일의 노선을 따라 달려야 한다. 면접과 같은 실제 상황에서도 답변을 시작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내가 끌어올 수 있는 지식을 모두 끌어 온 후에,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논의를 전개해야 면접에서 최소 요건인 발언의 완성은 달성할 수 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사실적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서 오직 언어적인 측면에서만 그것을 들었을 때 조차도 그 발언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논의를 하는 주제에 따라 사실적 근거를 많이 끌어오면 끌어올수록 더 좋은 의견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고, 도저히 내가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지식을 끌어오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반면 자신만의 논리성을 갖추는 일은 어느 경우에서나 필요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나도 이 '사실적 근거' 가 어느 지식의 범위까지를 포괄하는지는 확실한 입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내가 신문을 읽지 않고도, 유명한 저자의 책을 읽지 않고도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나는 사실적 근거를 많이 끌어오는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나의 생각도 치밀한 사전 조사가 없이 말한 것이지만 일단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내가 현실 속에서 많은 사례와 근거를 끌어올 수 있다면 논의는 더욱 풍부해지고 면접의 경우에는 면접관에게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현실의 정황을 완벽히 꿰뚫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주눅들기보다는, 일단 용기를 내어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세상의 흐름이 계속 생산하는 이론과 사건과 특정인의 주장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불완전한 주장이라도 그것을 경청하는 것은 청자와 독자의 제일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면접을 준비하는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2006. 10. 18. 
Posted by 마키아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근현대사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나는 책에서 배운 내용이 옛날이나 혹은 지금 현실 세계에서 그대로 적용될 때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비단 책 속에서만 있었던 어떤 지식의 단편이 아니고 나의 눈을 책에서 세상으로 조금만 옮겨 놓아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책에서만 보아 왔던 지식을 '현실화' 시킬 때, 나는 더 그 지식에 대해 정확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공부는 현실 속에서의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매력적인 존재로 보일 것이다. 또한 과장된 주장을 막기 위해 현실 속에서의 학문을 추구하는 자세는 조금 더 시험 성적을 올리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태도이기보다는,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공부를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던 독재 체제, 그리고 약 31년간 지속되어 왔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야당 정치인의 투쟁, 이런 것들을 단순히 근현대사 과목의 시험이나 심층면접을 위하여 외워야 하는 지식으로 생각하지 말자. 내가 딛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땅, 서울시청 앞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면 서울시청 앞이라는 공간 속에서 근현대사에서 배운 지식이 줄줄이 펼쳐질 것이다. 법과 사회 교과서에서 따분하게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던 행정법과 행정 구제제도에 관한 부분을 좀 더 재미있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인터넷으로 항고 소송에 대해 사정 판결을 하는 법원에 구경 정도는 해보는 것이 좋다. 경제 시간에는 소득 불평등이 어쩐다 하고 여러 미국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것들을 단순히 이론으로서만 외우려 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이 이론을 발견하려고 해보자. 정말 불평등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통해 몸소 체험해 보고, 그로서 현실에서의 소득 불평등이 얼마나 심한지 뼈저리게 느껴보는 기회를 가져보자.

  그런 점에서 나는 입시준비를 위한 학원에서 선생님이 나누어 주는 유인물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학생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들은 책이나 A4 프린트에 주어진 내용만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 체계를 만들어간다. 자신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진짜 현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선생님의 말이나 저자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비판을 하더라도 그 비판은 자신의 생각이 대부분이어서 때로는 현실의 본 모습과 외람되어 있을 때도 있다. 결국 현실과 책을 하나로 보지 않고 공부는 오직 공부일 뿐이라는 인식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반발은 이렇다. 혹자는 이렇게 내 담론에 받아칠 수 있다. '그렇다면 수학이나 물리/화학 같은 딱 떨어지는 이과 과목이나 세계사, 외국 문학과 같이 직접 경험을 통해 지식을 구체화할 기회를 갖기 힘든 과목은 어떻게 할 거냐?' 그렇다. 한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일종의 '메타포' 같은 것들을 통해 이과 과목과 세계사 혹은 외국 문학을 좀 더 잘 이해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우선 전자의 이과 과목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과 과목도 필요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과 과목에 대해 '더 나아간 흥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 말하자면 간접 경험이라는 것을 들고 나오고 싶다. 나는 내 담론 속에서 입시학원 프린트 혹은 EBS 속성교재 속의 내용과 '생생한 간접 경험' 을 구분한다. 전자는 정말이지 활자 그 자체다. 활자로서 외우도록 강요하고, 현실과 연관지어 공부를 즐겁게 만들 여지를 정말 조금만 남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세상은 넓다' 같은 프로그램으로 우리는 세계 사람들의 모습과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계사 책에서만 보던 피라미드를 TV 속에서 보면서 고대 이집트 문명을 좀 더 깊게 알아보고 싶은 애정이 들게 된다.

 나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에 걸쳐서 수십 차례 다녀온 현장학습이 참 좋다고 여긴다. 현장학습 가지고 공부 더 잘하는 거 아니다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일단 내가 지식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접합하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것으로 학문의 반은 성공한 것이다. 정말로, 심지어 대학로를 걷다가 파랑새극장 옆에 있는 흥사단 건물을 본 경험도 나중에 내가 역사를 조금 더 공부하려는 의지에 보탬이 된다. 그러면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수많은 사회탐구 과목을 배울 때, 책에서 얘기하는 것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서 '현실 세계도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데, 참 신기하네.' 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공부가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의 만사(萬事)에 대해서 아는 것의 지평을 넓혔다는 뿌듯함과, 현실을 설명하면서 똑 떨어지는 이론을 만들었을 때 그 명확함과 정교함에 대한 감탄과,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동시에 느껴진다. 일상 속의 체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학문의 자세, 참 이상적인 공부 방법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항상 안주해 있는 이 현실과 책 속에서의 학문을 하나로 생각해서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을 했다고 여긴다. 국소적인 예시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치학을 정말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에 몸을 담고, 경제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증권회사 혹은 무역 관련 업종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국 역사를 잘 알려면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를 하면 된다. 꼭 이러한 직업을 성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데, 그렇다면 참여연대에 직접 가입하거나 혹은 우리나라의 여러 비정부기구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고, 직접 소규모 주식투자를 해보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조선시대 유물을 관람한다면 어떨까. 책에서만 보아서 실제로 경험은 해보지 못했던, 그래서 잘 이해가 깊이 와닿지 않았던 내용이 이제는 구체적인 현실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보다는 로크의 경험론과 비슷하다. 데카르트라면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고, 세상을 인지할 것이다. 생각하면서 존재하는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크라면 모든 사람이 흰색 도화지와 같은 생각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경험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완벽히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로크의 주장과 같이 어떤 지식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직접 현실을 경험하여 지식을 현실 세계에 투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여러 학문을 일상에서 와닿게 해줄 수 있는 도시 같다. 적어도 한국과 연관된 점이 있는 학문에 있어서는 그렇다. 신도시나 소규모 지방 도시와는 다르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로 나가기만 하면 조선 시대의 도읍지였던 한성의 유적이 있고, 헌법재판소와 한국은행과 청와대와 서울시청이 있다. 세종로는 때때로 시위하는 노동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광화문역 7번 출구를 지나며 볼 수 있는 많은 거지들, 북악스카이웨이 쪽에 있는 늙은 부자들과 강남 타워팰리스의 신흥 부자들, 그리고 달동네의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보기만 해도 우리 사회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진리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모든 학자들과 학문을 배우는 모든 학생들, 그들은 모두 인간과 인간이 모인 사회와 인간 주위의 자연과 이런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세계까지도, 우리가 '세상' 이라고 말하는 것 속에서 참모습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나의 의견을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직접 세상의 모습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공부를 즐겁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고, 진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의 학문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공감을 하거나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나는 정말 기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마키아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부를 안 할때 우리의 마음은 풀어진다. 하지만 어떤 일에 몰두해야 되기 때문에 생기는 피로 같은 건 없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는 시간, 이런 시간에는 일부러 졸지 않으려 치켜뜬 눈에 힘을 빼도 졸리지 않는다. 내가 특별히 한 곳에 온 정신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는 때, 그 때를 공부하면서 돌이켜 보았을 때 공부하는 나는 얼마나 괴로웠는가?

  이제 다시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는 당신.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정신을 집중시킨다. 주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당신의 반경 50센티미터 주위를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고 있을 뿐 다른 곳은 어두컴컴해서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당신은 책 속으로 빠져들어 책 속의 줄글을 달려나갈 준비를 한다. 지식을 얻을 준비를 하고 풀어진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너무 공부에 몰두하면 오히려 졸리다. 에너지를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그리고 깊은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사색을 하듯 공부하면 졸리다. 풀어진 상태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머리를 맑게 하고 잡념을 흘려보낼 뿐, 나와는 친근한 사이에 있지 않았던 저 먼 곳의 새로운 지식을 정수리에 들이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할 때만큼은 다르다. 지식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생각에 잠겨 집중 상태로 들어가려 하면 졸리다. 단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심취하듯 공부해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그러한 공부에서는 오히려 미친듯이 빠져드는 게 좋다. 그러나 다른 공부에서는 그렇지 않기에 방관자의 입장에서 공부하되, 습득할 지식은 다 습득해야 한다.

  공부는 그렇기에 공부 안 할때와 같은 마음 상태와 컨디션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특별히 책에 몰두하지 않아도 있는 지식을 남김없이 챙길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정확히 읽고, 마치 문장 사이의 글자, 글자 안의 자모 하나하나를 돋보기를 가지고 들여다보며 읽는다면 그 텍스트에 집중할 수는 있어도 집중을 통해 너무나도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그래서 졸게 된다. 반면 텍스트를 아무 생각없이 소리내서 읽어보면 당신은 그렇게 공부에 몰두하지도 않으면서 책의 내용을 습득하고 있게 된다. 공부를 안 할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하고 남의 이야기도 특별히 귀 기울이지 않고 다 듣는 것처럼 공부할 때에는 나의 '아무 생각 없는 상태' 를 이용해야 한다. 아무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지식을 배우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전환해 보는 건 어떨까.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도, 풀어진 상태에서도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고 TV를 보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상태에서도 나의 뇌는 정신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칼럼 >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실적 근거가 불완전한 주장의 정당성  (0) 2008.07.26
현실 속에서의 학문  (0) 2008.07.26
지식을 잘 습득하려면?  (0) 2008.07.26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0) 2008.07.26
공부를 통한 자기 존중  (0) 2008.07.26
Posted by 마키아또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식을 잘 습득하려면?
그 진리를 완벽하게 터득할 수는 없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 그 지식이 불변할 진리로 고정될 것임을 안다
*지식의 단편 : 우리가 배우는 지식을 하나하나 개체화시켰을 때 개체를 지칭.
  지식의 단편 하나를 배울 때에는 그 지식이 명료하여 다른 생각으로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여라. 지식의 단편을 배우는 과정은 새로 산 TV의 채널을 한 채널로 고정하는 과정과도 같다. 채널이 뜻하지 않게 마구 바뀐다면 그 지식의 단편(TV)은 쉽게 잊어버리고, 따라서 지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한 번 배울 때 확실히 배워야 한다는 말은 지식을 불변할 진리로 고정해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전에 배운 내용을 다시 기억해내려고 하는데 그 내용과 비슷한 다른 내용과 자꾸만 헷갈리면 결국 그 내용은 물론이고 그 내용과 헷갈리는 다른 내용도 끄집어내어 지식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 지식을 '지식 단편의 네트워크' 와 연결시킨다
  모든 지식의 단편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들이 연관성을 갖게 되면서 지식의 단편은 생생히 기억 속에 남는다. 연관성이 없는 지식의 단편은 일시적으로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새로운 한자를 배우고 그 한자가 어떤 단어에 쓰이는지 모른다면 그 한자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다. 그 한자, 즉 지식의 단편은 지식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한자를 한자 자체로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그 한자를 쉽게 잊어버린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메타포'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메타포' 가 지식과 지식, 사물과 사물을 서로 연결시켜주며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지식이 있으면 그 지식에 뒤따라 연상되는 다른 지식, 그리고 그 지식에 뒤따르는 지식.. 이렇게 지식과 지식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으면 나는 지식을 쉽게 기억해낼 수 있게 된다.
 
- 그 지식을 왜 배워야 하는지 안다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공부할 때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면 책에 써 있는 글도 머리에 잘 안 들어온다. 나는 지금 왜 공부를 하는가, 공부를 해서 얻을 수 있는 자격증이나 좋은 점수가 있어서인가?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 지식 습득의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고 따라서 지식도 잘 습득할 수 있게 된다.
 
- 오감으로 그 지식 습득을 위해 헌신한다
  단순히 눈으로만 책을 읽으면 뇌의 기능을 온전히 지식 습득에 치중할 수 없다. 지금 당신의 오감을 체크해 보아라. 책으로 시선을 보내다가 주위의 다른 재미있는 사물에 시선을 보내지는 않는가. 도서관의 저 멀리 앞으로 보이는 재수생이나 대학생이 너무나도 이뻐서 공부를 할 수가 없는가. 지금 당신이 듣고 있는 음악이 있는가. 그 음악의 가사가 너무나도 좋아서 가사를 음미하느라 제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는가. 아니면 리듬에 심취하여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고 있는가. 옆에 껍질을 까지 않은 사과를 놓고 공부하면서 가끔씩 먹는데 자꾸만 껍질이 이 사이에 걸리는 게 마음에 걸리는가. 사과가 갈변하지는 않았는지, 또는 철지난 사과처럼 떫떠름해서 도저히 못먹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후각과 촉각은 비교적 뇌의 기능이 온전히 지식 습득에 치중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두 감각도 공부할 때만큼은 아무런 대상에도 점유된(occupied) 상태가 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위와 같이 오감 중 어느 하나라도 온전한 지식 습득으로의 집중을 방해한다면 지금이라도 고쳐라. 시선은 오직 필기구와 책과 같은 공부와 관련된 사물에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음악은 되도록이면 가사가 없는 Instrumental 음악으로, 꼭 클래식이 아니어도 괜찮다. 단 리듬이 나를 사로잡는 음악이면 곤란하다. 음악이 흘러나와도 무관심할 수 있고, 오히려 그 음악이 나를 공부에 더 집중하게 해 준다면 그 음악을 들어라. 지식을 습득하면서 되도록이면 씹어먹는 음식은 먹지 말고, 초콜릿이나 사탕과 같은 종류의 당류가 뇌의 활동에 좋은 것 같다. 또 더운 여름에는 아이스커피도 좋다. 그리고 후각을 무시하지 말라. 어떻게 보면 시각 다음으로 우리의 오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감각이 후각이다. 우리는 항상 숨을 쉰다. 이제 후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는가? 놀고 있는 후각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아로마테라피가 좋을 듯하다. 집중을 도와주는 향을 골라 보자. 참고로 나의 경우에는 꼭 아로마테라피가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향수를 조금 뿌리고 공부하니까 집중이 잘 되었다.
 
후기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요? 고등학교 생활이 뭐 그렇습니다. 이 때 아니면 공부를 언제 하겠습니까. 저보다 나이가 6살 정도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고등학교 때가 제일 편했고, 제일 재미있었고, 가장 무언가를 배우려 할 때 머리가 잘 돌아갔던 때라고 말이지요. 우리 모두 열심히 삽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칼럼 >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실 속에서의 학문  (0) 2008.07.26
공부할 때에는 공부 안 할때처럼  (1) 2008.07.26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0) 2008.07.26
공부를 통한 자기 존중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3)  (0) 2008.07.26
Posted by 마키아또
,
  사람은 모두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퍽 떠오르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소위 '잡념' 이 아니라 뇌를 강타하여 사색의 깊은 곳까지 이르게 하는 그러한 생각, 우리는 지금 할 공부가 있는데도 뜻하지 않게 그러한 생각의 세계로 빠져들 때가 있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내 인생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만한 대화를 친구와 한 후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같은 생각이 떠오를 때가 갑작스런 사색에 사로잡힐 때의 구체적인 예이다. 이렇게 나의 주된 의무가 계속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 때문에 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이와 같다.

 우선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충분히 깊게 하라. 그리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면서 얻을 수 없는 지식이나 삶의 교훈을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서 우연히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 억지로 그 생각을 멈추려 한다면 그 행동은 뇌의 본성을 거역하는 행동과 같다. 좋아하는 여자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르는 데 '아, 그래도 공부해야지.' 하고 생각을 억누르려 한다면 더욱 더 그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번 생각을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게 오히려 좋다. 좀 더 경제학적인 비용-편익 분석에 대입하자면 다른 생각에 빠지면서 잃는 의무 이행의 시간, 즉 비용보다 생각을 깊게 하면서 얻는 삶의 방향 설정, 삶에서의 깨달음, 즉 편익이 더 크다. 생각의 끝을 봤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들어갈 준비를 하자.

 다음 단계는 그 생각을 글로 풀어 쓰는 단계이다. 즉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자 마자 바로 비워내기 시작하는 작업이다. 글로 풀어 쓰기의 대표적인 예로 블로그 포스팅이나 일기 쓰기 등이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꼭 글로 풀어 쓰면서 생각을 비워낼 필요는 없다. 다른 수단이 많이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글로 다 쓴 후, 생각을 모두 비워낸 후에는 '이제 본연의 의무로 돌아가야겠다.' 하는 느낌이 생생하게 와닿을 것이다. 이 느낌이 오지 않으면 생각을 더 비워내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을 비워내고서야 다시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의무의 수행-대표적인 예로 공부-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 이제부터는 더욱 열심히 해야지.' 라는 결의가 마음 속에 박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뇌를 강타하는 생각이 반드시 학업 능력을 좋게 만든다던지 하는 이득을 가져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가장 첫째로 삼아야 할 일은 의무와 싸우는 일이며, 그런 점에서 잠시 다른 생각의 길로 빠지는 것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색은 곧 나의 성숙을 낳으며, 결국에는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 나는 반드시 그러하리라 믿는다.

'칼럼 >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할 때에는 공부 안 할때처럼  (1) 2008.07.26
지식을 잘 습득하려면?  (0) 2008.07.26
공부를 통한 자기 존중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3)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2)  (0) 2008.07.26
Posted by 마키아또
,
내가 공부를 잘 하면 나는 나를 존중하게 된다. 공부를 잘 한다는 말은 꼭 높은 시험 점수를 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부를 할 때 나는 지식의 과수원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그 사과(지식)가 너무 높은 곳에 있다면 나는 지식을 많이 얻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성과 없는 학문 활동에 한숨 쉬고 나의 존중을 한 단계 깎아내린다. 하지만 내가 과수원에서 풍부한 양의 사과를 따 왔을 때에는 지식도 풍부해지고 풍부함에서 오는 만족감에 휩싸인다. 하루의 공부를 시작하고 끝냈을 때 오늘 내가 얼만큼의 지식을 얻었나를 나는 돌이켜본다. 많은 지식을 얻어 그 지식이 가만히 있어도 머리를 콕콕 찌를 때 나는 행복하다. 내가 투자한 시간이 그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종일 공부해 놓고 얻은 지식이 하나도 없으면 괜히 쓸쓸해지고 답답해진다. 자기 존중을 깎아내린다.

  오늘 오전에는 책을 펼쳐보아도 지식이 들어오지 않고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에 대한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그렇게 몇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페이스를 되찾아 사과를 따기 시작했다. 나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2006. 4. 23.

'칼럼 >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을 잘 습득하려면?  (0) 2008.07.26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3)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2)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0) 2008.07.26
Posted by 마키아또
,
-항상 깊게 생각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만들자.
- 많이 쓰는 공부가 효율적이다. 항상 공부할 때 옆에 작은 Pad와 만년필을 놓자.
- 고1때 가지고 있던 책이나 프린트는 고2때도 필요하다.
- 공부는 누가 숨어서 많이 하느냐가 중요하다.
- 공부중 머리가 고요하면 잠이 오므로 약간의 생기와 소음을 만들어 실제 세계를 몸으로 감지하면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자.
- 살아있음을 느껴라.
- 쉬는 시간에는 기계적으로 문제를 푼다. 나는 이제 고2다.
- 책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사라.
- 점심, 저녁은 소식하자. 점심과 저녁을 일찍 먹고 자자.
- 경쟁은 경쟁이고, 우정은 우정이다.
- 뿌린 대로 거둔다. 많이 공부하면 성적은 는다.
- 일을 벌이는 사람 : 적극적인 사람 ; 벌인 일에 참여만 하는 사람 : 소극적인 사람.
- 남에게 내 이야기를 해라. 남들이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는 자기 PR이 나와의 대화 형성을 한다.
- 공부 방법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좋은 결과가 공부의 성실성을 좌우한다.
- 커피와 차를 즐겨 마셔라. 문학과 특별히 어울린다.
- 쉬운 문제집과 어려운 문제집을 병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TOEFL Listening이나 Reading에서 한 번 읽거나 들은 내용은 바로 머리에 기억해라.
- 선택지를 가리고 주관식으로 중얼거려라.
- 시험을 인식 안 할 수 없구나. 인식하면 잠이 깬다. 인식은 겉으로 내색하지 말자.
- 피로도가 낮다-> 높다, 뇌 활동 효율이 높다 -> 낮다 순서에 의하면
 
          1 창의적 사고활동 - 논술, 에세이
          2 논리적 사고활동 - 수능 언어영역, 토론, 회의
          3 절대적 법칙, 계산 - 수학, 과학
          4 암기 - 영단어, 사회과목 복습, Critical Reading
          5 비교적 쉽고 기계적으로 푸는 문제집 - 수능 외국어영역, 사회탐구영역
            그리고 그 외에 논술을 위한 Research 활동, 배경지식 수집을 위한 독서,
             취미로서의 독서와 뉴스기사 읽기
 
  ∴ 수면,피로 조절을 내가 공부할 과목에 맞추어 하자.
- 항상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다니자. 정보의 빠른 입수가 매우 중요하다.
- 내가 어렵게 느끼면 그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어렵다. 내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 또한 쓰고 있는 방법이다.
- 주말에 열리는 대회에 참가해서 상을 타라.
- 친구들과 대화하면 졸음을 쫓을 수 있다.
- 수능 공부, 문제집을 가지고 내신에 대한 복습, 대회 자료 조사, 대학입시관련 자료 조사 등은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
- 공부할 때에는 책의 도움, 선생님의 도움을 최대한 받자. 책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상이다.
- 이제는 공부할 양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복습이란 한 번 뿐이다.
- 정보의 질적 가치를 따져 고품질의 학습자료만을 가지고 공부해라.
- 고급어휘, 다의어, 문맥에 따라 뜻이 바뀌는 단어가 많은 글(한글) 을 읽고 사전을 찾아보면서 어휘력을 쌓자.
- 생각의 영역을 넓히자.
- 고2는 정보싸움의 시대다.
- New PD 수첩의 '생각의 심지' 를 적자.
- 눈만 피로할 때와 몸이 다 피로할 때가 있다. 전자의 경우 안구운동만 하고 계속 공부한다. 후자의 경우 망설임 없이 자자.
- 시험 공부할 때 오답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자.
-  본 걸 잊어먹지만 않으면 만사 OK // 기억된 지식이 말로, 글로 나오는 것은 나의 본능이지 따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죽어라 공부하기 vs 즐기면서 공부하기. . 결과는 같다. 후자를 선택하자.
- 글쓰기 연습을 할 때에는 꼭 결과물이 대회 출품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고려하자.
- 단어 하나하나의 구체화, 예시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예시로 제시.
- 글을 쓸 때 문장 전체, 글 전체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단어 몇 개의 조합 수준에 머무르는 발상이 이루어진다면 아예 글을 쓰지 마라.
- 아름답고 쉬운, 섬세한 학문을 주 재료로 글을 쓰자. 어렵고 추상적이며 아름답지 못한 한자어의 사용은 지양하자.
- ...적, ..성 같은 말을 쓸 때는 그 전에 ..에 해당하는 내용이 쉽게 서술되어있는가를 확인하라.
 

2006. 3. 26.

'칼럼 >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  (0) 2008.07.26
공부를 통한 자기 존중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2)  (0) 2008.07.26
공부법 여러가지  (0) 2008.07.26
현실을 자각하면서 공부해야겠다.  (0) 2008.07.20
Posted by 마키아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