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Macchiato/사회과학적인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1.08.30 고시촌과 학원 문화가 빚은 청년실업
  2. 2011.01.18 레비나스 평전(마리 안느 레스쿠레, 살림)
 나에게 한국의 청년실업이 무엇 때문이냐고 질문한다면 간단하게 한국에만 있는 고시촌과 학원 문화가 그 원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두가 학원에 의지하거나 고시에만 매달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문계열의 청년들이 전체 청년들의 1/3이고 그중 고시와 관련된 과에 속한 청년들이 절반이라면 1/6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문화가 한국 전체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시험을 준비하게 해주는 동네, 시험은 공정한 경쟁이라고 비쳐질 수도 있지만 다양성을 파괴하고 100명을 경제활동인구로 쓸 수도 있을 것을 10-20명만 쓰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다른 시험과 달리 고시와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하지 않고 그것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동네로 가야만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고 믿는다. CPA, CPA, 제2외국어, 프로그래밍 자격증 등을 준비하는 사람은 따로 그러한 자격을 준비하게 해주는 동네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원래 있던 곳에서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으며 병행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고시와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고귀하게 남겨두려는 인식도 퍼져 있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은 계속 고시촌이나 학원가에 머물러 있을 것이지만 그들의 준비기간은 시험을 더 잘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경제적인 기여를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직업이 없는 사람이 직업을 찾아다니면서 이 직업 저 직업 산전수전을 겪는다면 그 사람은 커피를 만들고 고기집 메뉴를 서빙했으며 건물 유리창을 닦았다. 재화와 서비스가 불특정다수에게 공급되었다. 언제 붙나 하고 생각만 하고 풀었던 문제집을 또 풀면 지식이 한 겹 더 쌓이고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시험이 매월 있거나, 내가 원하는 날짜에 아무 때나 볼 수 있거나, 적어도 1년에 3번 이상 있는 것도 아니라서 한 번 떨어지면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한다는 점도 고시와 입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사회 속에 정(靜)적인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게 한다.

 한겨레의 2008년 기사를 보면 일본의 청년실업 연구 시민단체가 한국의 노량진 고시촌을 찾고 '만약 고시에서 떨어지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길이 있는가'를 물어본다. 신문은 답을 주지 않는다. 고시는 떨어진 사람에게 다른 길을 주지 않는다. 고시를 위해 배운 지식을 면접이나 회사/공공기관에서 만든 필기시험에 그대로 옮겨 사용하여 인턴이나 정규직 자리를 얻는 경우는 없지 않다. 9급공무원, 7급공무원, 한국전력 등 정부 부문에는 꽤나 많은데 고시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 Plan B로 전환하지 않고 계속 매달린다. 명분을 신경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험이고, 점진적인 성장보다는 한번에 아주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만드는 시험이기 때문에 그 성취의 달콤함을 알게 되면 중독되어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미국에서 이런 식의 큰 시험을 보지 않고 인턴사원과 정직원 취업만을 통해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나가면서 진로를 헤쳐나가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 하에서 정해진 학습 범위를 가지고 해결 능력을 다투는 형태의 경쟁보다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한 가지를 끊임없이 홍보하여 자기 편의 사람을 만들어가며 형성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한 단계씩 진보한다. 그래서 한국보다 이력서에 함께 첨부되는 referral(추천서)이 중요하고, 추천서를 써준 사람은 추천서에 대해 큰 책임을 진다. 추천서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추천서를 쓴 사람이 지원자의 자질을 보증하는 사람이 되며, 당연히 보증인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업종에 알려져 있으면 지원자의 자질도 높게 평가된다. 한국보다 더 인맥에 따라 당락이 좌우되는 시스템이 미국이다. 하지만 이 인맥은 실제로 직장에 들어간 후에 보여준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 인맥으로, 한국 사람들이 경멸하는 부정적인 학연과 지연과는 전혀 다르다. LinkedIn에서 같은 과 나온 선배,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람만 검색해서 인맥 신청을 모조리 한다고 사람들이 받아줄까, 그것은 절대 아니다.

 이 동(動)적인 인맥 형성 과정은 가장 높은 자리를 바로 안겨주지는 않더라도 점진적으로 모든 사람이 적합한 장소에 고용되어 일하게 해준다. 동적인 인맥 형성 과정의 문화가 다수에게 좋은 가치로 퍼져 있으면 사람들은 Boot Camp를 소중한 일자리로 생각하게 되고, 지금은 부족하지만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다짐, 혹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나의 꿈을 펼칠 수 없으니 빨리 조금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실력을 쌓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다짐은 크던 작던 경제학이 '생산'으로 여기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고시촌과 학원 문화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와 선비 문화와 연계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하지만 연계가 완전히 없지는 않다. 고위공무원이 되기 위한 시험에 응시하려는 대학생은 그에 실패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사회에 내보이지 않고 그 시험 하나에만 매달리더라도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는다. 수험생의 각 가정이 떠안는 경제적 부담은 그 가정 안에만 해당되는 '집안 사정'일 뿐 그 집안 사정이 모여서 청년들에게 해당되는 문제가 된다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계속 고시촌을 미화하려는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공부를 잘 해서 고시에 빨리 합격하고 학원가를 빨리 탈출하는 수험생들에게는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적성을 잘 파악하고 적시에 뛰어들어 최고의 성과를 얻고 박수를 받을 때 떠난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떤 Plan B가 있느냐는 점이다. 수험생 각자가 출구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는 고시생이고 다 같은 수험생이며 고시촌과 학원가는 우리의 명분을 정당화해주는 공동체의 방패라고 안일하게 생각한다면 청년실업을 해결하기 위한 중소기업 진흥이나 비정규직 처우 개선 등의 문제는 당사자들에게 그리 효과적으로 관련되지 않고 정부 혼자 벌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으로 남아있게 된다.

 건전한 비판과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답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 대한 더 정확한 진단은 함께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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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 평전(마리 안느 레스쿠레, 살림)

 당시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수업과 생활은 지금과는 달리 엄숙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학은 부득이한 선택의 장소이거나 별 생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었다. 대학은 일종의 정복의 대상이자 목표였으며, 하나의 이상이었다. 대학 구성원들은 대학이 상징하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에게만 예비된 세계에 적합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 예컨대 대학 보고서와 대학생들의 기억들은 교수의 권위, 지식, 조국 등을 학생들이 하나같이 존경했음을 매우 단호하고도 정중한 어투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가 그토록 젊은 나이에 ENIO의 책임자 자리에 임명된 사실을 부당한 특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 자리는 지중해 연안의 학교장들이 말년에 일종의 보상 차원으로 임명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레비나스 때문에 근 30년 동안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교장 레비나스는 학생들의 성격을 면밀히 관찰할 줄 알았다. 그는 또한 그들이 가진 '지중해적' 개인주의를 고려하여 자발적으로 학교의 복습교사 제도를 없애는 대신 학생들이 혼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 지중해 쪽 국가의 학생들이 정말 자습을 선호하나요?

 '오타르키아(autarkia)',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라는 고상한 가치에 관계된 고전적 사유에 강하게 저항할 필요가 있다. 완벽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완전함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계에 해당되는 것이지, 한 존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숙생들과 더불어 토요일 점심을 함께 하는 습관을 지켜나갔다. 이때 그는 다른 학생들이 앉는 테이블과 직각을 이루는 헤드 테이블에 부인과 함께 앉아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매우 뛰어난 학생들 몇몇만이 그와 함께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헤드 테이블의 존재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거부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이 토요일 식사에서 학생들이 그의 주위에 매우 가까이 자리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갈등을 싫어했을 뿐 아니라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양쪽 편 모두 이러한 종류의 대립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태는 거기에서 멈추어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후일 레비나스는 1968년 5월 사태 속에서 자신의 주된 철학적 주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학기 초에 누구도 발표를 자원해서 하지 않으려 할 경우 그는 즉석에서 세미나를 휴강시켜 버렸다. 발표가 진행될 때면 그는 발표자와 함께 깊은 생각에 빠졌으며, 종종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어 발표를 방해할 만큼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그래서 발표가 매우 어렵게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레비나스가 70년대 말(거의 말년)에 이스라엘에 처음 발을 딛고 그의 새로운 유대주의를 전파했을 때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준 곳은 일란 종교대학 하나뿐, 그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독일 철학의 요소, 시대에 뒤떨어진 히브리어, 하시디즘에 대한 반발 등은 '안 먹혔다.' 

..그가 앵글로색슨 전통에 완전히 무지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푸대접을 받았던 근본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스라엘 문화의 대부분은 미국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이 어떻게 갈려있나를 보는 눈은 어느 분야에서나 중요한 것 같다.

특히 1929년 다보스 대토론회는 내게 이상적인 대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를 남겨주었다.

 1929년 다보스(Davos)에서의 대토론회: 스트라스부르대학의 샤를르 블롱델은 레비나스를 위해 15일간의 체류비를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일을 추진. 목적은 공부에 지치고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 높은 산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학문과 스포츠 사이에 더욱 더 바람직한 합일점을 찾는 것(토론회가 끝나고 학생들은 알프스산맥에서 스키를 탔다) 마지막으로 국적이 서로 다른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마지막 목적은 지금에도 흔히 유효하다.

 이 학술 모임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평화적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다보스의 첫번째 모임은 쿠르하우스(Curhaus) 호텔에서 열림. 개막일의 주인공은 알베르 아인슈타인. 스트라스부르 대학은 학사자격을 취득하였고 곧 D.E.S.를 받게 될 문학 전공 학생 한명과 외국 출신으로 학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곧 박사학위를 받게 될 철학과 학생 한명을 선발했다. 이들 두명의 학생 중 외국인 학생이 레비나스였다. 모든 참가자들은 벨베데르 호텔에서 머물렀고 덕분에 모임이 매우 용이했다.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학생들은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보스 시당국은 이 모임의 지적이고도 정신 위생적인 부분을 위해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슬로프 이용권을 지급했다. 모임이 끝나면 술집으로. 다보스의 두번째 모임에서 하이데거와 카시러의 역사적 논쟁이 전개.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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