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가능하기 때문에 단일민족국가와 공통의 역사를 인지하면서 정치적 과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전협정 이래로 줄곧 논의된 통일인 만큼, 어느 쪽이 주도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통일 자체는 이제 남북한 모두가 동의하는 당위가 되었다. 하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주변국, 특히 현재 가장 대립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는 꼬인 중일관계의 갈등을 한국이 나서서 그들의 갈등적 이슈에 개입하여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한반도 관련 이슈에 대해서만큼은 그 두 국가가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의 성공 여부의 분수령이 되는 이슈로서 중국에게는 주한미군 주둔, 일본에게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해 계속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했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유엔군, 즉 현재의 주한미군에 대한 중국의 입장이 상당히 전향적으로 선회했다는 점이 통일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중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주요 대상은 미국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반도 정책은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하위 틀에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주둔에 관해서는 반기지는 않지만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현상 유지 차원에서 존중한다.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 김일성은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시기인 1994년 미군이 한국에만 주둔하지 말고 북한에도 주둔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1996년 이종혁 노동당 부부장은 미국 조지아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에서 주한미군이 남북한군 사이에 평화유지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주둔기간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때까지라는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조선일보」, 2001. 4. 17.)


     중국에게 한국은 매우 이중적 의미를 가진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은 중국 경제발전의 모델국가이자, 비중 있는 무역상대국이다. 지리적으로 인접국이며 문화적 동질성의 공유 때문에 정서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군사•안보 측면에서 한국은 냉전, 한국전쟁, 한미동맹 등 미국 변수와 북한 변수를 포함하는 부담스런 존재이다. 반면 북한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동맹국이며 전쟁을 같이 수행했던 동지애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지만, 경제위기와 북핵문제로 인해 동북아의 안보 위협을 가중시키는 등의 부담을 동시에 주는 상대이다. 북한은 많은 부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한 안보적 수단이자, 자국의 동북 지역 진흥을 위한 잠재적 자원 배후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한국과 북한 모두를 포용하고 싶어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적 문제 해결을 강조하는 등 한반도에서의 갈등이 최소화되기를 희망한다.[각주:2]  또한 중국은 남북한과 외교관계를 모두 유지함으로써 현상 유지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 기조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한반도 현상 상태가 급속히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각주:3]  한국의 언론인들은 중국이 한국과 북한에 동등한 관심을 가지고 동등한 협력적 조치를 취한다는 점을 줄곧 간과한다. 특히 한반도와의 관계 개선을 외교부에서 말했을 때 이를 한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축소 해석하거나, 한반도의 비핵화를 북한의 비핵화로 축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초보적인 국민들의 의식 개선은 이 부분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첫 단추라 할 수 있다. 


     통일의 추진력으로 중국에게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중국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으로 한반도 내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이 개입하여 군사력을 소모할 유인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 후 전후 복구를 위해 중국에 대한 한국의 기존의 신규 투자가 끊길 것을 염려한다. 중국이 강조하는 것은 ‘평화’이다. 한중수교 공동성명에서도 중국은 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한중수교 공동성명),1992년 제5조.)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도 국가수반으로서는 최초로 “한반도 문제는 주변국의 이해와 협력 아래 남북한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면서, 한반도의 자주 평화 통일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힌 바 있다.[각주:4]  그런데 1992년의 한중수교 당시 중국이 취한 두 개의 한국 정책으로 중국은 북한과 소원해졌다. 당시 북한의 기근이 심화되고 1993년 3월 북한이 NPT를 탈퇴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원한 중국으로서는 북한과의 양국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끌고 나갈 추진력이 결여된 상태였다. 


     중국의 한반도 안보전략 기조에서 한중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 구축은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중국 방문시 발표된 한중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서 드러난다. 중국은 한중 양국이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김대중 정부 때 선언한 21세기 협력 동반적 관계보다 한 단계 높은 양국간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동의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정권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 통일 정책론을 보는 시각을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한미일 3국회의의 결과를 2003년 7월 한중 북경 정상회담에 전달한 일이었다. 아울러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고 나온 배경에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한 명분이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후로 명확해진 데 있다. 한국과는 경제적으로 긴밀해지는 반면 2003년 당시 중국은 미국과 협력하여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하고 안보리 결의안에 중국이 반대에서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각주:5]  중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상하는 통일 회의론자들이 근거로 언급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은 한반도의 통일이라기보다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일 영토 및 해양분쟁과 관련된 이슈로서, 안보 특히 한반도 38선 이남의 미군 배치에 대해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대치가 없다. 이는 한반도의 한국 주도의 통일을 중국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2003년 부시 정부 이래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중요성은 감소해 왔고, 주한미군이 제 2의 한국전쟁을 억지할 수 있다는 미국의 현실적 안보 위협도 사라졌으며, 오히려 주한미군의 보호와 타 아시아 지역에의 개입 준비를 위해 북한으로부터 더 먼 사정거리의 지역으로 후방 배치를 하는 등 한미동맹의 의미는 중국을 참여시키는 한반도 통일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 방식이나 과정이 남북한 합의에 의해 점진적으로 중국과 유사한 1국 2제의 형태가 되기를 희망한다. 과거의 중국은 일방에 의한 흡수통일 방식을 반대했으나 점차 현실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수용하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중국 고위 관료들이 한반도가 남한 주도로 통일돼야 하며, 이런 입장은 중국의 지도부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위키리크스』, 2010년 11월 30일.)[각주:6]  또한 중국은 남북한이 기존에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북한이 파기한 데 대해 내심 불만을 토로하였다. 중국은 항상 남북한 관계개선을 미북 관계개선보다 먼저 촉구하였으며 남북한이 이미 합의한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하기도 하였다.[각주:7]


     중국의 한반도 대치상태 해소와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에 대한 선호는 점진적인 관계 개선 방식이다. 이때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첫 단추인 주한미군 후방배치안에 대해 찬성하며, 미국이 조선인민군 후방배치라는 북한 측에 대한 보상(quid pro quo)을 제안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만족한다. 중국, 한국, 미국은 북한에게 비핵화 외에 특별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고 있지 않으며 이 상황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북한 간의 자주적인 합의형 통일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6자회담의 실패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및 유지, 그에 따른 남한의 핵무기 보유가 논의되는 상황이라면 중국과의 협력이 더욱 어려워진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한국 정부가 중국에 협력을 구해야 할 것은 이미 진행되는 경제적 협력이 아니라 탈북자 인도에 관한 협력이다. 국경지역 북한 탈북자를 정치적 난민으로 규정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원하는 통일을 가장 빨리 이루어낼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탈북자가 반드시 한국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다민족을 통치하는 중국 중앙정부로서는 탈북자에 대한 시각이 한국과 다르다. 중국에게 탈북자는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티벳 지역이나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의 이민족과 같이 인식되기 때문에 한국과의 인식 차이가 중국으로 하여금 주저하게 하고 있다. 서독-헝가리-동독을 남한-중국-북한과 등치시켜 생각하는 것은 냉전 질서와 탈냉전 질서의 차이를 고려하지 못했으므로 그릇된 방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헝가리와 같은 소련 눈치보기 혹은 공산권 붕괴에 대한 우려는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을 한국 정부는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사 이래 최고의 한중관계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이라도 막상 통일이라는 한국의 국익을 달성하고 나면 떠오르는 문제가 있다. 중국의 공공외교를 살펴보면, 통일한국의 민족주의적 영토 회복 움직임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를 사전 차단하려 할 수 있다. 중국은 통일 이후 조선족 자치 지역의 분리 독립 확산을 경계하고 있으며, 간도 지역의 고토 회복 운동 등의 부활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대비 차원에서 고구려사 왜곡 작업을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역사 문제를 자국에게 유리하게 주장하는 외교적 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각주:8]  통일 이후 한국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주한미군이 아니라 중국과의 역사인식 차이에 따른 대립이다.


     일본의 경우는 한일관계가 건설적인 상태에서 일본이 지지한 대북정책을 보다 통일이 실제로 달성될 수 있도록 수정해도 한일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되게 하는 것과 전통적으로 유지된 비핵화에 대한 공감을 되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통일은 일본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발표된 한일정상 간의 공동성명에는 통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것은 양국 정상 간의 공동성명이 한일관계 발전에 초점이 두어졌다는 원인도 있으나 국민의 정부 이후 통일보다는 남북한 평화공존을 더 강조하는 통일정책을 한국 정부가 채택해 왔기 때문에 공동성명에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표현을 굳이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생각된다.[각주:9]  특히 주목할 점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10월 일본 국회 연설에서 “한반도 통일보다는 먼저 남북한 간의 평화와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金大中•韓國大統領国会演説の要旨”『読売新聞』, 1998年 10月 9日.)고 언급하여 통일보다는 남북한 평화공존에 방점을 두는 통일관을 밝혔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2003~2008)의 통일외교는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일본 정부의 일정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2006년 4월 이후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2006년 10월의 북한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북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서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고 나갔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각주:10]  반면 이명박 정부에서는 북한의 핵실험 및 천안함 폭침 사건 등으로 한일 간의 대북정책공조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한일군사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할 정도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및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필요성에 한일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각주:11]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 이후 한일 간에는 이산가족문제와 함께 일본인 납치자 문제가 동시에 언급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2012년 5월 이명박-노다 수상 간의 한일정상회담에서는 노다 수상이 납치문제에 관한 한국의 지지에 대해 감사를 표명하면서, 이산가족 재회문제를 포함한 인도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계속 협력한다는 의지가 표명되었다. 이 정상회담은 한국은 북일 국교정상화를 지지하고, 일본은 남북협력 관계 및 통일을 환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한일 신시대 공동연구 보고서에서 등장한다. 즉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한일 양국이 지지하면서 나아가 남북한 통일도 일본이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외교가 가장 잘 표현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보고서에서 한일이 중국에 대해 통일을 지지하도록 희망한다고 밝힌 점에서 對일본 통일외교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각주:12]


     일본의 경우는 군사적 보통국가주의와 보수적 현실주의자들의 국제공헌론, 그리고 현재의 집단적 자위권 논의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입장과 결부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군사적 보통국가주의를 한국이 묵인하는 대가가 필요하다. 오자와 이치로 일본 총리는 국제연합군에의 자위대 참가가 일본의 현행 헌법, 미일 안보조약, 유엔헌장의 틀 속에서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위대를 강화한다고 할지라도 양적인 확대가 아닌 질적인 확대를 지향하였다. 국제공헌에 군사적 역할을 인정하는 점에서 그의 생각은 기존의 보수주의자와 다르지만 국제연합에 자위대가 참가하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13]  외교적 국제정치력 신장을 주장하는 보통국가론은 즉각적으로 후나바시 요이치의 ‘지구시민파워’(global civilian power)나 다케무라 마사요시의 ‘작지만 빛나는 나라’와 같은 소프트 파워론을 등장시켰다.[각주:14]  지구시민파워론자들은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에 관해서는 일본은 원폭피해국가로서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며, 특히 북한, 중국에 대해서는 심각한 비판을 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일본의 미일안보동맹의 의존도를 줄이고 다자간 안보체제의 수집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며, 문민통제의 방위정책을 강화하여 비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는 군사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각주:15]


      일본의 재무장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는 등 일본 주변에서 전쟁에 돌입할 경우 자위대를 동원해 미국을 후방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북한은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중국 등 주변국과 함께 일본의 보통국화를 ‘군국주의 부활’, ‘재침 책동 노골화’로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일본의 재무장을 구실로 핵무기 보유를 역으로 합리화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각주:16]  미일안보동맹의 의존도를 줄임과 동시에 일본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내세워 일본 주도의 집단적 자위권을 확대하고 있는데, 사실 북한에게 이는 큰 위협이다. 한국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북한의 이익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이지만, 주한미군에 의한 직접적 위협에 비해 북한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를 직접적으로 꺾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이 고려할 만한 선택지다.


     일본의 정권이 하토야마 총리의 민주당 정권으로 회귀할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에 반대되는 지역주의가 다시 대두할 것이다. 이때 한국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의 선결조건으로 한반도 통일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국력 차이와 관련없이 한반도 스스로 일방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일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한반도 통일 없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 통일을 지지해야 하고,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북한의 건설과 동북아 개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각주:17]  일본에 대한 한국의 견제는 중국에 대한 견제에 비해 더 강도 높게 이루어지는데 이는 미국의 입장과 같다. 조셉 나이 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는 최근 냉전종결 등의 전략환경의 변화와 함께 다자간 안보체제에 관한 미국의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으며, 특히 일본의 독자적 노선을 다자간 안보의 틀 속에서 소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냉전 후 미국의 중대한 이익인 동아시아의 안정적 균형에 있어 위협세력은 현재 중국일 것이며, 장기적으로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중 연계일 것이다.[각주:18]  그러나 일중 연계는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결조건인 바, 미국의 양보를 구하는 것은 어떤 주변국도 할 수 없는 한국의 독자적인 과제가 된다.


     노무현 정부 때의 노력이나 이명박-노다 공동성명과 대칭되는 내용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공동성명에서 한중이 일본에 대해 통일을 지지하도록 희망하는 내용이 들어가거나 혹은 공동연구 보고서에 이와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면 통일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을 레버리지로 활용하여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는 전략이다. 여기서 내용은 비핵화를 중심으로 할 것이다. 일본의 반핵운동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걸쳐 있었고, 이것이 한반도의 비핵화 이슈와 맞물려서 한국 정부가 일본을 의식하여 비핵화를 공고히 할 개연성을 높인다. 1993년 5월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노동1호 미사일 실험을 강행했을 때 일본은 미국과 함께 북한을 맹비난했고 김일성 정권은 더욱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 바 있다. 강경한 북한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정권을 막론하고 한결같았으나, 지금의 변수는 아베 정권의 보통국가화, 원자력발전소 재가동과 군사적 목적의 핵개발 의도이다. 북일국교정상화가 북한과 일본의 핵무기 개발 공고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도 중국 레버리지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동의를 얻는 일은 소극적인 외교 행위이지만,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일은 한국 주도의 적극적인 외교 행위이다. 통일연구원의 보고서는 2013년 일본 학자 20명을 대상으로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한반도 통일공공외교에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였고, ‘북한 개혁개방’이 1위로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그 뒤를 ‘북한의 국제사회 편입’과 ‘북한 비핵화’가 이었으며, ‘북한의 민주화’는 가장 낮은 4위로 나타났다.[각주:19]  중국의 경우도 북한의 개혁개방은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한반도 통일 단계의 초기 단계로 이상적이다. 한반도의 통일이 지나치게 남한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일부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한국을 독자적인 행위자로 상정하지 않고 강대국 사이에서 복수의 강대국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 중견국으로 간주하여 통일 가능성을 바라보았다. 중국과 일본의 현재의 영토분쟁과 역사인식 갈등은 한반도 통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대립점이다. 하지만 양국이 언제까지나 대립만을 하고 있다면 통일은 반드시 과정 중에서 한쪽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한국은 반대하는 쪽의 편을 들면서 과정이 중지할 것이다. 과정을 중지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쪽도 반대하지 않는 조건을 형성해야 하며, 그 조건은 곧 주한미군과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양국의 굳건한 동의와 신뢰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핵화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일본과 모순적인 태도의 현재 아베 정권의 입장 변화는 한국이 취할 최우선 과제이다.


참고문헌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연구총서 03-07 (서울: 통일연구원, 2003).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서울: 통일연구원, 2012).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연구총서 03-08 (서울: 통일연구원, 2003).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13).


  1.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64. [본문으로]
  2. 위의 책, p. 65. [본문으로]
  3.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p. 7. [본문으로]
  4.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66. [본문으로]
  5.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p. 28. [본문으로]
  6.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67. [본문으로]
  7. 최준흠,『중국의 한반도 안보 전략과 한국의 안보정책 방안』, p. 26. [본문으로]
  8. 이교덕•이기현•전병곤•신상진, 『중국의 對한국 통일 공공외교 실태』, p. 75. [본문으로]
  9.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 p. 154.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53. [본문으로]
  11. 위의 책, p. 186. [본문으로]
  12. 위의 책, p. 155. [본문으로]
  13.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p. 8. [본문으로]
  14. 위의 책, p. 11. [본문으로]
  15.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p. 12. [본문으로]
  16. 위의 책, p. 62. [본문으로]
  17.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 p. 163. [본문으로]
  18. 김영춘, 『일본의 군사안보전략과 한반도』, p. 15. [본문으로]
  19. 황병덕 외, 『한반도 통일공공외교 추진전략 (II): 한국의 주변4국 통일공공외교의 실태 연구』, p. 181. [본문으로]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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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련 국가와의 국경분쟁의 역사로 보는 향후 중국과 인도·북한의 국경분쟁 가능성 연구

I. 서론

     냉전 당시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국가들 중 소련이나 베트남과 같이 명백하게 중국에 반대 입장을 취하며 공산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국가들과 달리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줄타기 외교를 실시한 국가들, 즉 북한,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몽골과 중국의 정치적 관계를 살펴보면 여러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69년 중국과 소련은 전바오 섬(러시아명 다만스키 섬)에서 영유권 쟁탈에 따른 국지전을 치르었고, 1979년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공산주의 국가들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과 비슷한 생각을 갖던 유럽 특히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공산권 국가들과도 전쟁이 일어남을 보고 경악하였다. 하지만 북한,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몽골과는 국경 획정을 목적으로 한 무력 충돌이 냉전 시기 이루어지지 않거나 있더라도 방어적으로 진행되었다. 1960년 1월 말, 중국은 영토 할양을 한 뒤 버마와 국경 협정을 체결했다.[각주:1]  3년 후, 몽골(1962년), 북한(1962년), 파키스탄(1963년), 아프가니스탄(1963년)과의 국경 협정이 뒤를 이었다. 왜 마오쩌둥의 강력한 리더십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가들에게 강경책으로 일관하는 중국 일방주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군사적 능력의 비교우위와 열위를 통해 1960년대 초 중국은 주변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결정하였으므로 현실주의적 국제질서 하의 중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당시 중국이 국제연합의 회원국이 아니었고, 지리적 특성 상 다른 국가에 비해 많은 국가와 국경을 마주한 중국은 상대국의 군사력의 우위와 침략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먼저 상대국에게 협상과 조약 체결을 권할 수 없었다. 무역과 인적교류를 통한 국민의 의사에 대한 존중, 행위자의 다각화를 통한 위협 해소는 공산당과 군이 일체가 되고 인민이 당의 결정 사항에 복종하는 중국 국내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중국은 자국을 침략할 것으로 생각되는 주변국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다. 하지만 위협을 없애기 위한 동맹을 체결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 대해서는 군사력을 단일 국가 차원에서 공격 형태로 사용하는 것이 추가적인 안보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일종의 낭비라고 생각했으며, 중국에게 낭비가 필요없는 대표적인 국가는 인도와 북한이었다. 정치학자 Taylor Fravel이 제안했듯이, 중국은 주변국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고 내부적으로 약하면 국경 분쟁을 타협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각주:2]
     냉전 시기인 1959년의 중국을 본다면 중국은 소련에 비해 군사적 열세에 있음을 자각했다. 소련이 중국의 영토 이익을 침해하는 가장 큰 위협인 상황에서 중국은 적극적으로 동맹을 규합하여 소련에 대항하는 균형 정책을 취하기보다는 먼저 중국 자신의 영토를 군사적 충돌이 수반되지 않는 방법으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냉전 시기인 당시 중국과 비공산국가 간 동맹이 체결될 수 없는 제약도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 즉 소련의 편에 서지 않은 비동맹 인접국에 먼저 접근하여 쉬운 외교적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국공내전을 종결시킨 중국은 영국의 지배에서 해방된 인도와 함께 저마다 소련과 미국의 패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제3세계의 대변인 역할을 자칭하고 있었다. 중국은 1959년 8월과 10월에 인도와의 국경 관련 갈등이 일어났을 때 소련이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여 이에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인도를 침공하지는 않았다. 대신 소련과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북한에 대해서는 당시 김일성 정부가 같은 공산주의 정부로서 북한 체제 자신의 생존을 꾀하고 반대세력을 숙청하면서 소련보다 중국에 더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므로 무력으로 북한을 제압하려는 계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 사이의 영토 경계선 획정에 관한 조약인 조중번계조약은 2000년이 되어서야 그 내용이 한국 학계에 알려졌다.
     마오쩌둥 정부의 주변국과의 관계는 방어적 현실주의의 틀에서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에 따르면 적국의 행위 동기와 능력을 파악하고, 아국의 상황과 비교하여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울러 국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안보를 극대화하는 것이 국가의 우선 과제이다. 중국에게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제일의 국익이었으며, 이를 위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군사력을 사전에 준비하는 것은 제1차 국공내전(1927~1937) 부터 이어져 왔다. Paul Godwin은 마오쩌둥의 “핵심 교리적 원칙”을 그가 “공격적인 방어, 혹은 결정적인 관여를 통한 방어”라고 정의한 “적극적 방어”라고 적시한 바 있다.[각주:3]  중국의 인도와 북한에 대한 안보 정책은 일관되게 억제 혹은 강압 둘 중 하나로 전개되었다. 이때 차선책인 선제공격을 제쳐두고 중국은 이슈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선제적으로 억제하거나 강압하였다.

II. 1959년 중국과 인도

     인도의 경우, 중국은 이러한 대화 우선의 적극적 방어를 실천하였다. 국경 분쟁의 시초가 되는 사건으로, 중국은 티베트인들의 폭동을 인민해방군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티베트 달라이 라마와 추종자들을 인도가 정치적 난민으로 받아들여 보호하고,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이러한 정치적 난민 대우에 찬성하였다. 티베트인 폭동에 따른 중국과 인도의 관계 악화로 인해 중국은 동쪽 NEFA와 서쪽 Aksai Chin 지역의 국경을 정확히 설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각주:4] 국경 분쟁지역은 현재의 부탄과 버마 사이의 지역과 네팔과 파키스탄 사이의 지역 두 곳이었다. 인도의 영국 식민지 총독 헨리 맥마혼(Henry McMahon)이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1914년 설정한 선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으나 국제법적으로 중국과 인도 양국이 이를 동의한 적은 없었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내세우며 주변 공산권 국가들에게 반제국주의를 적극 주장하였고, 국경이 제국주의의 잔재로 인식된 것도 중국의 군사적 행동에 큰 요인이 되었다. 중국의 국익은 티베트인들의 폭동을 진압하고 인도와 상호 불가침 기반의 친선관계를 확립하며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었으며, 국경의 확장이나 인도의 공산화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가 많았으나 다자 협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대화 우선이라는 원칙은 평화적 대화가 아니었는데, 이는 중국이 맥마혼 선과 심라 회의[각주:5] 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방어적 현실주의는 티베트를 놓고 의견 충돌이 빚어진 인도에 보복하거나 인도로 세력을 팽창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증명된다. 1959년 4월 중국과 인도군이 국경분쟁지역으로 진주하였으나, 중국은 1950년대 초부터 관찰을 통해 사실상의 국경이라고 생각했던 히말라야 산맥에서 진군을 멈추었다.[각주:6]  오히려 맥마혼 선이 실제 지리를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중국에 선제공격을 한 것은 인도 쪽이었고, 이를 통해 국지전이 발발하였다. 네루는 티베트에 대해 미국과 영국과 세력을 규합했다는 중국의 선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959년 10월 15일 시작하는 중국-인도 간 대화를 제안한 중국은 1주일 간 국경지역의 인민해방군 진주를 실시한 뒤 이후 10월 27일에 저우언라이 총리 명의로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에게 분쟁 중지를 권유하고 3주간 당시 진군 상태를 유지하였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인도에게 11월 21일에 중국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국경 지역 인민해방군을 “국경 수비대”로 명명하여 “중대한 군사적 행동의 이미지를 줄이고자” 노력하였다.[각주:7]  인도는 소련과 미국 양측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인도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중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네루는 항공작전 지원을 미국에 요청했지만 중국이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미국과 소련 모두 인도에 개입하는 것을 적극 막았기 때문에 결국 인도가 강대국을 등에 업고 반발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스스로 강대국이 아니었음을 인식한 중국은 국가의 최우선 과제인 안보에 집중하며 주변국의 대중국 동맹을 억제시키고 안정을 꾀하였고, 그 수단인 인민해방군과 인민해방군을 단독으로 지휘한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단일국가 중국의 현실주의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는 위협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는 다른 근거로, 1960년대 초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미국과 대만 문제, 소련과 신장 문제, 그리고 인도와의 국경 분쟁에 대해 위협을 과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각주:8]
     마지막으로 당시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평가를 받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주변의 비동맹 약소국들 중 부탄, 네팔, 파키스탄 등은 인도네시아의 회담에서 일제히 중국을 비판했지만 그들이 중국에게 군사적 위협은 되지 않았다. 중국의 국익을 달성하는 수단은 레짐의 패권이 아니었으므로, 주변국에게 중국의 입장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자국의 안보를 공고화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인도와 중국의 협상 결렬에 대해 중국에는 여론의 개념이 부재하여 저우언라이가 권력에서 하야하는 일이 없었지만, 네루 총리는 강경파로부터 극렬한 내부 비난을 감수해야 하였다.

III. 1962년 중국과 북한

     북한은 인도와 달리 미국과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고, 자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소련이나 중국 중 한 편에 의존하면서 김일성 특유의 주체사상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6.25 전쟁 후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강화하였고 1961년 7월 중국과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동맹관계로 발전시켰다. 한편 동년 소련과도 북소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중국이 인도와 북한과의 국경 문제에 개입하게 된 동기는 모두 소련의 선제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같다.
     중국은 59년에 무력충돌 사태로까지 비화한 중.인 국경분쟁을 경험하면서 주변국가와의 국경선 획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소련이 중.인 국경분쟁에서 중립을 취해 충격을 받고 60년대 초부터 아프가니스탄, 몽골, 북한 등과 역사적 과제로 내려오던 국경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 나섰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두산 일대와 압록강,두만강의 섬들에 대한 국경선 획정 문제가 제기됐다. 북한도 국경 문제가 향후 양국관계의 불씨로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각주:9]  1962년 평양을 방문한 저우언라이 총리는 3월 30일 당국자들과 함께 중국과 인도, 중국과 몽골, 그리고 중국과 북한과의 경계선 획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중국 지도부는 북한도 언제든 동맹관계를 끊고 소련과 다시 가까워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양국간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 상태는 그 어떤 국제기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한국] 사회에서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대가로 북한이 백두산 천지 일대를 중국쪽에 할양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통설처럼 여겨져 왔다. 이러한 주장은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대북(對北) 불신감에 의존해 하나의 '사실' 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할양설' 을 부정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정확한 증빙자료를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최근 들어서야 1997년 중국에서 발간된 '저우언라이 연보(周恩來 年譜) 1949~76' 와 95년에 발간된 '진의(陳毅)연보' 등을 통해 '조중변계조약' 이 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체결됐으며, 6개월 정도의 현지 탐측조사를 거쳐 64년 3월 20일에 '중조변계의정서' 를 체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각주:10]  즉 중국과 북한의 국경 설정은 같은 전쟁에 참가했다는 의식을 공유함에 따라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중국이 판단했을 때 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다고 방어적으로 생각해서 나온 결과이다.
     감소한 양국 간 적대관계를 알기 위해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한 시점도 주목할 만하다.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1962년의 중국이 그 이전인 1958년 김일성 주석의 요청에 의한 중국인민지원군 철수 직후부터 북한을 보는 시각은 적대적이었고, 김일성 정부가 공산주의 레짐 안에서 중국과 항상 동맹국 혹은 연합국의 입장에서 정책을 수행해나갈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1960년 11월 모스크바회의에서 국제공산주의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자 북한은 좀 더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참고로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일 뿐 수정주의, 교조주의, 주체사상 등 각국의 국내정치적 상황에 의해 변형되기도 했기 때문에 동맹과 다른 개념이다.
     중국은 방어적인 자세로 긴장 완화를 이용하여 국경 협정을 체결했으므로, 그것은 완화된 긴장의 결과였으며 이후에 점차 완화된 긴장의 원인이기도 했다. 조중변계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62년 가을부터 1964년 10월간 북한과 소련의 양국간 정부대표단의 방문이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964년 말, 북한과 소련은 통상협상을 체결하였다.[각주:11]  설상가상으로 1965년 4월 반둥회의 10주년 기념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은 자주노선을 천명하여 그때부터 중국과의 긴장이 높아지지만 한번 체결된 국경조약은 변함이 없었다.

IV. 결론

     마오쩌둥은 제3세계의 지도자 국가로 중국이 나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제3세계국가와의 국교 수립을 집중적으로 수행했고, 이때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면서 냉전체제 하에 진영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중국과 동맹은 아니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중국의 소련 견제에 이바지했다. 중국에 적대적인 강대국의 주변국 지지가 강화되나 그 강대국으로부터 중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경우에는 주변국과의 적대관계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증가한 적대관계는 국경 지역의 방어적 국지전으로, 감소한 적대관계는 우호적인 국경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의 행동은 떠오르는 중국의 라이벌에 대항하여 먼저 동맹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며, 중국인민지원군을 경계를 맞댄 국가에 추가로 파견하는 것이 아니었다.
     2014년 현재 시진핑 정부의 국경 관련 정책 역시 이와 같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중국은 국경 분쟁에 있어서는 남중국해에서 베트남, 동해에서 일본과의 갈등 양상에만 치중해 있다. 불분명했던 국경을 획정하는 단계에 있었고 동맹을 확대하여 중국을 압박하려는 거대한 소련의 힘이 존재하던 1960년대에 비하면 중국의 방어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는 국가의 수도 줄어들었으니 다자적 레짐을 만들기 위한 협력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는 낙관적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며 중국에 압박을 가하는 일본 그리고 미국이 점점 더 1960년대의 소련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 시기에 오면서 중국은 북한을 관리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하는 대국의 책임을 가진 중국은 북한의 평화 유지에도 관여할 필요성이 있고, 그래서 북한에 대해 방향성을 바꾸더라도 해서 북한을 타이른다. 한편 인도는 2014년 대선 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긴밀한 협조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군사동맹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특정 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균형 정책이 수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1960년대 소련의 대베트남 이데올로기의 전파나 2010년대 일본의 대인도 경제적 인프라 구축 지원 활동은 모두 균형 정책의 일환이다. 북한 역시 납치자 송환과 경제적 제재 해제를 골자로 일본과의 협력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이 인도와 북한을 대상으로 한 외교정책은 그 두 국가가 중국에 대항하는 대국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명확한 듯 보였던 국경은 다시 1960년대 상태로 회귀할 수 있으며, 대국과의 동맹을 통해 직접적 위협을 느낀다면 중국은 최초의 방어적인 상태에서 언제든 공격적으로 전환할 수 있음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삶에 관계한 전세계인들은 직시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M. Taylor Fravel, Strong Borders, Secure Nation: Cooperation and Conflict in China’s Territorial Disput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논문]
박종철, 「1960년대 북한·중국의 ‘긴장된 동맹’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Allen S. Whiting, “China's Use of Force, 1950-96, and Taiwan”, International Security, Volume 26, Number 2, Fall 2001.
Lorenz Lüthi, “Sino-Indian Relations, 1954-1962”, Eurasia Border Review Special Issue, Spring 2012.
Paul H.D.B. Godwin, “Change and Continuity in Chinese Military Doctrine: 1949-1999,” Conference on PLA Warfighting, 1949-1999, Center for Naval Analysis, Alexandria, Virginia, June 3-4, 1999.
Xuecheng Liu, “Sino-Indian Border Dispute and Sino-Indian Relation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ume 55, Number 1, February 1996.
[신문기사]
이종석, 「중앙일보 입수 '조중변계조약서' 의미」, 『중앙일보』,  2002.2.23.
“Red Chinese Sign Pact with Burma”, NYT, January 29, 1960, 4.


  1. “Red Chinese Sign Pact with Burma”, NYT, January 29, 1960, 4. [본문으로]
  2. M. Taylor Fravel, Strong Borders, Secure Nation: Cooperation and Conflict in China’s Territorial Disput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 [본문으로]
  3. Paul H.D.B. Godwin, “Change and Continuity in Chinese Military Doctrine: 1949-1999,” Conference on PLA Warfighting, 1949-1999, Center for Naval Analysis, Alexandria, Virginia, June 3-4, 1999. [본문으로]
  4. Lorenz Lüthi, “Sino-Indian Relations, 1954-1962”, Eurasia Border Review Special Issue, Spring 2012, p. 105 [본문으로]
  5. 1914년 인도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 지역의 도시인 심라(Simla)에서 영국의 헨리 맥마혼과 인도 외교부 대표들이 인도와 티베트 거주지역 사이의 경계선인 맥마혼 선을 확정짓는 심라 협의(Simla agreement)를 체결한 양국간 회의 [본문으로]
  6. Xuecheng Liu, “Sino-Indian Border Dispute and Sino-Indian Relation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ume 55, Number 1, February 1996, p. 26 [본문으로]
  7. Allen S. Whiting, “China's Use of Force, 1950-96, and Taiwan”, International Security, Volume 26, Number 2, Fall 2001, p. 113 [본문으로]
  8. 위의 논문, p. 128 [본문으로]
  9. 이종석, 「중앙일보 입수 '조중변계조약서' 의미」, 『중앙일보』, 2002.2.23. [본문으로]
  10. 위의 기사. [본문으로]
  11. 박종철, 「1960년대 북한·중국의 ‘긴장된 동맹’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p. 14 [본문으로]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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