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판단기준은 내 집에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를 아는가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쾌락적인 것들은 불필요한 것들입니다. 나는 축재를 위해 살지는 않아요(...). 나는 삶을 위해 삽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나는 순간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데, 이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죠" 라고 덧붙인다.


 '그곳에는 광고업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있습니다'

 주말마다, 그는 집에서 '멋이 없는 더러운 바지'를 입지만, 일을 할 때에는, 아주 세심하고 우아하게 정장을 한다. 그는 파리의 빅토르 위고 거리에 있는 광고업자들을 위한 재단사인 반스Barnes의 상점에서 양복을 구입한다. "그곳에는 영국 산 직물, 영국 황태자가 입는 다소 호화스러운 체크 무늬 의류와 같이 광고업계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위 공무원들이 입을 수 있는 옷차림이 아니며, 은행가들도 이를 더 이상 이용하지 않죠(...). 은행에서는 단색의 셔츠가 필요합니다. 은행은 광고업계에 비해 그다지 과시적이지 않거든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쓸 따름이죠(...). 직업상, 우리는 사회계급이나 사회적 카스트로 쉽게 사람들을 분류해 냅니다. 그런 일은 한 카스트에 어울리는 제품을 제대로 부여하는 문제죠. 어떤 새로운 사람이 대행사에 들어올 때, 곧 우리는 한 눈에 그를 판단합니다(...). 커다란 깃이 있는 우단 의상을 입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별로 없고, 뭔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을 그 의상으로 상쇄하는 사람이죠." 잠시 동안, 대행사에 '아주 평범한 배경을 가진 경리부장'이 있다 갔다. "그가 왔을 때, 그는 너무 보기 안 좋은 옷차림을 했기 때문에 사무를 방해했죠(...). 마치 무슨 젊은 노동자처럼 옷을 입고 있었거든요." "가령, 어울리지 않게 깃이 작고, 아래가 꼭 끼며, 다소 짧고, 화려한 색깔을 가진 셔츠와 꼭 끼는 넥타이와 함께 양복을 입는 것은, 우리의 기준에 따르면, 보기 흉합니다."


신흥 쁘띠 부르주아지는 남에게 상품을 권하고 이미지를 만드는 여러 종류의 직업(판매, 마케팅, 광고, PR, 패션, 실내장식 등)과, 상징적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제도에서 자기를 실현하게 되는데, 그러한 제도에는 최근에 상당히 확산된 다양한 의료보건, 사회부조관계의 직업(결혼생활상담원, 성문제 전문가, 식이요법 영양사, 취직 어드바이저, 육아전문의 보모 등)과 문화생산 및 촉진에 종사하는 직업(문화활동지도자, 학외활동교육자, 라디오 및 TV제작자와 사회자, 잡지기자 등)과 더불어 공예가나 간호사 같은 기존 직업도 포함된다.


소유하는 자본이 크면 클수록 문화적 환경에 의해 제공되는 기회가 가져다주는 이익은 커지고, 또한 집단의 문화자본이 크면 클수록 그 집단이 그 성원에 대해 가하는 순응 유도 압력도 커지므로, 파리사람과 지방사람 간의 격차는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커지게 된다.


현재 부르주아지와 쁘띠 부르주아지의 거리를 특징지우는 것처럼 17세기의 귀족과, 절약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부르주아지 사이의 거리를 특징지웠던, 돈을 일일이 세보지 않고 소비하는 기술은 그 존재 자체가 사회관계자본의 재생산에 종속되는 계급의 제한된 경우에서는 명백한 교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작은 그 아들에게 대귀족처럼 돈을 쓰는 법을 배우도록 금으로 가득 찬 지갑을 넘겨주었다. 아들이 쓰고 남은 돈을 가져오자 공작은 아들이 보는 앞에서 그 금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어디에선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노동자는 명령의 실행자로서의 성향을 모든 생활영역에서 취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민중계급의 생활양식은 위스키나 회화제품, 샴페인이나 음악회, 항해여행이나 미술전람회, 철갑상어나 골동품 같은 사치재가 없는 만큼이나 이러한 재화에 대한 수많은 값싼 대체재가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샴페인 대신 '발포성 와인', 진짜가죽 대신 '모조가죽', 회화 대신 조잡한 착색 석판화chromo가 그것인데, 이런 것은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재화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제2단계에서의 박탈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대중문화culture populaire'는 '대중'과 '문화'라는 역설적인 말들이 결합되어 통용되고, 바라든 바라지 않든 지배자 측에 의해 문화의 정의가 부과되는 것인데..


(성과 계급에 무관하게 모두에게 의견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적 자발주의spontanéisme démocratique와, (이 권리와 의무를 '지성'intelligence과 '역량'compétence으로 인해 선출된 '전문가'들에게만 국한하는) 기술관료적 귀족주의aristocratisme technocratique 사이에 존재하는 이율배반은, 기술관료적 선발로 인해 모든 경우에 배제됐을 사람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게임으로부터 배제하게 하는 메커니즘 속에서 그 이율배반의 실제적 해결책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생산노동자나 사무직 노동자들(뤼마니떼L'Humanité나 다른 극좌파 신문을 읽는 가장 정치화된 일부를 제외한다면)은 일간신문에서 정치적 안내자나 도덕적 문화적 조언자의 역할(신문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단지 '르 피가로'지의 일부 독자들에게서일 것이다)을 실제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으며, 또한 정보획득, 자료수집과 분석의 수단으로 간주하지도 않는다.


보도지presse d'information와 저속지presse de sensation 사이의 차이는 행동이나 발언이나 사고에 의해 정치를 실제로 하는 살마들과 정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 능동적 의견과 수동적 의견 사이의 대립을 결국 재생산한다.


(노동자) 그들은 상징적 투쟁수단을 선호하며, 맨 먼저 도덕적 지배관계를 정립하는 교육운동이나, 열광적 신뢰의 대상인 '정보', 그리고 오로지 동일한 '이유'에 의해서, 일종의 윤리적 독촉을 실행하려는 동일한 의지에 의해서 단합된 개인들의 엄밀한 계열적 집단편성인 협회association가 실현하는 집단적 행위의 특수형식이 있다. 봉사활동은 선의의 과시적 소비이고, 그 자체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 순전히 무사무욕적인 윤리적 활동이며, 그것의 실행자에게 여러 권리를 부여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큰 것은 의분(義憤)의 권리이다. 그리고 이 권리는 '자기 몫을 한' 사람, 자기의 의무를 완수한 사람, 특히 누구에 의해서도 승인되는 기성사실을 만든 사람의 완벽함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다. 엄밀하게 '무사무욕'하고 '청결하고', '고결하고', '정치'와의 어떤 타협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행위는 실제로 사회적 승인의 가장 완벽한 형태인 제도화의 기도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인데, 모든 협회들이 다소간 비밀리에 추구하는 것이다. 


개인들은 의견에의 접근 가능성, 혹은 의견을 구성하는 수단에의 접근 가능성(전국지의 구독과 같은)이 박탈될수록 그만큼, 지방에 기반을 둔 집단들(또한 場들도)이 행사하는 스크린 효과effet d'écran (혹은 허구적 문맥화 효과)에 더욱 민감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사회공간 내에서 접하고 있는 위치를 평가하는 참조물로서 지리적 기반을 가진 사회적 하위공간(촌락, 인접집단 등)을 드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가정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피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공간에서의 지배자들(소토지 구역에서 50ha의 토지소유자, 지방의 명사, 직공장 등)은, 나무를 보고 숲은 못 보듯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선택과 조화되는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된다.


3기능 체계structure triadique(인도-유럽어계 제 민족의 신화가 기본적으로는 지상권을 맡는 사제, 힘을 행하는 전사, 풍요로움을 맡는 생산자라고 하는, 실제 사회에 있어서의 기능 구조에 따라 조직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의 재현은 조르쥬 뒤비(Georges Duby)에 의해 그것이 정당화하는 봉건사회의 사회구조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적용되었는데, 3기능체계의 재현은 계급분화된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2개의 분할원리가 교차하는 필연적 결과이다. 즉 하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분할이고, 다른 하나는 상이한 원리들의 이름으로 지배를 위해 경쟁하는 지배집단 내의 제 분파 간에 보이는 분할인데, 후자는 봉건사회에서는 전사bellattores와 학자oratores의 분할이고, 오늘날에는 경영자와 지식인의 분할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맥더미의 궤변

한 사람이 A=B, B=C 그리고 동시에 A<C를 가지고 있다. 혹은 A1=A2, A2=A3, ... A99=A100 그리고 A1<A100이다. 달리 말하면 비록 한 알의 소맥이 소맥더미를 만들지 못하고 두 알, 세 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명백하다고 하더라도 소맥더미가 264알부터 시작되는지 265알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265알부터는 소맥더미가 되고 264알로는 소맥더미가 안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교제도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입된 분류법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배계급 측의 여러 가지 학문에 의해 생산된 수많은 윤리적, 미학적, 혹은 정신의학적, 법률적 분류법은 자신의 외견상의 중립성으로부터 특정한 효력을 이끌어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모두 사회적 기능에 종속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분류법은 상대적 자율성을 띤 여러 場의 고유한 논리와 언어에 따라서 생산되며, 지배적 아비투스의 분류도식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이러한 도식을 낳는 사회구조에 대하여 실제적인 종속dépendance réelle을 야기하는 동시에, 외견상의 독립apparence de l'indépendance을 추가하였는데, 외견상의 독립은 분류투쟁lutte des classements과 계급투쟁lutte des classes의 한 상태를 정당화시키는데 공헌한다. 확실히 半자율적인 분류체계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서는 학교적 '성적평가'의 원리인 일련의 형용사의 체계(秀, 優, 美.. 可 등)이다.


남녀간, 연령층간의 대립이라든가 세대간의 대립처럼, 다양한 지배형식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여러 도식이나 상투어의 표현형 역시 비슷한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령 소위 '청년층'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연장자들이 제시하는 정의를 받아들여 많은 사회에서 그들에게 부여되는 일시적 자유권('젊을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지')을 이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귀속된 적합한 일, 젊은이의 '고유한 미덕', 즉 용기, 사내다움, 열정 등을 실현하고, 중세귀족의 자제라면 무술 수행, 르네상스기의 피렌체 청년이라면 연애와 폭력, 그리고 오늘날의 젊은이라면 rule에 입각한 유희의 열광(스포츠나 록음악처럼)을 실천한다.각자 자신의 고유한 사안에 관여하면서, 요컨대 자신을 '젊음'의 상태로, 즉 무책임한 상태로서 유지하고, 책임 있는 행위를 포기하는 대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자유를 향유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그는 '아름다운 것beau'과 '매혹적인 것joli' 사이에,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쾌락plaisir과 향락jouissance, '아름다운 것beau'과 '쾌적한 것agréable', 즉 '뜻에 맞는 것ce qui plaît'과 '즐겁게 하는 것ce qui fait plaisir' 사이에 설정한 대립과 똑같은 대립을 설정하고, '매혹적인 것'을, '의지에 대해 그것의 성취와 만족을 직접 제공함으로써 의지를 자극하는 것', '미의 직관에 필요한 순수직관상태로부터 감상자를 끌어내는 것', '의지를 직접 만족시키는 대상을 보는 것에 의해 의지를 틀림없이 유혹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순수취향이 거부하는 것은 사실 대중적 관객이 굴복하게 되는 폭력이다(대중음악과 그 효과에 대한 아도르노의 서술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즉 그것은 자기에 대한 경의를 요구하는데 이는 거리를 계속 유지하게 하는 거리감이다. 순수취향은 예술작품에 대하여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도 갖지 않은 궁극성으로서 존재하고, 관객을 칸트적 정언명령에 따라 취급하기를, 즉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대우하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칸트의 순수취향의 원리는 향락을 부과하는 대상물에의 혐오, 그리고 그 부과된 향락에 만족하는 조야하고 통속적인 취향에 대한 혐오이자 거부이다.


만약 칸트의 '負量의 개념'의 논리에 따라, 극복된 악덕의 양에 의해 미덕의 크기를 재고, 부인된 충동과 정복된 통속성의 강도로 순수취향의 강도를 측정하려는 미학을 상정하고 그 미학의 함의를 추종한다면, 가장 완성된 예술은 문명화된 야망과 억제된 충동, 승화된 조야함의 대립적 명제를, 가장 긴장도가 높은 상태로 포함하는 작품들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 너무 즉각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쾌락을 억제하는 것은 '순수'쾌락의 경험을 위한 선행조건이었지만 이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쾌락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 결과 유미주의자의 쾌락의 가장 순수한 형식, 즉 정화되고 승화되고 부인된 감각기능은 역설적으로 금욕, 즉 훈련 속에, 일차적이고 원시적인 감각기능과는 정반대로 단련되고 유지된 긴장 속에 존재한다.


칸트는 '자유로운 예술'과 '보수를 바라는 예술'을 대립시키는데, 전자는 '그 자체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고, 그 所産은 자유이며(그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즐겁게 하고 감상자에게 어떤 강제도 행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자는 '賃金처럼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의해서만 매력적이고 따라서 강제적으로 부과되는' 예속적이고 비굴한 활동이며, 그 산물은 감각될 수 있는 매력의 노예화하는 폭력으로써 감상자에게 강요된다.


칸트는 먼저 (대학에 소속된) '동업조합적 학자' 혹은 재야의 '독립학자'와, 단순한 '학색수득자' 즉 성직자, 법무관, 의사처럼 대학에서 획득한 지식을 파는 '실무가와 학식의 전문직인'을 구별하고, 마지막으로 후자의 고객, 즉 '무지한 사람들로 구성된 일반대중'을 구별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세속적 차원에서 지배적인 제 학부, 즉 법학부/의학부/신학부와, 세속적 차원에서는 피지배적이나 비세속적 차원에서는 지배적인 학부, 즉 철학부를 대립시킨다. 철학부는 세속적 권력은 없으나 '정부의 명령에 독립적'이고,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인데, 그 자신의 법, 즉 이성의 법만을 알고 있으며, 그 비판력을 완전한 자유에 의해서 발휘하는 근거를 부여할 수 있다.


출처: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 삐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새물결.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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