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 평전(마리 안느 레스쿠레, 살림)

 당시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수업과 생활은 지금과는 달리 엄숙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학은 부득이한 선택의 장소이거나 별 생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었다. 대학은 일종의 정복의 대상이자 목표였으며, 하나의 이상이었다. 대학 구성원들은 대학이 상징하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에게만 예비된 세계에 적합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 예컨대 대학 보고서와 대학생들의 기억들은 교수의 권위, 지식, 조국 등을 학생들이 하나같이 존경했음을 매우 단호하고도 정중한 어투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가 그토록 젊은 나이에 ENIO의 책임자 자리에 임명된 사실을 부당한 특혜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 자리는 지중해 연안의 학교장들이 말년에 일종의 보상 차원으로 임명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레비나스 때문에 근 30년 동안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교장 레비나스는 학생들의 성격을 면밀히 관찰할 줄 알았다. 그는 또한 그들이 가진 '지중해적' 개인주의를 고려하여 자발적으로 학교의 복습교사 제도를 없애는 대신 학생들이 혼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 지중해 쪽 국가의 학생들이 정말 자습을 선호하나요?

 '오타르키아(autarkia)',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라는 고상한 가치에 관계된 고전적 사유에 강하게 저항할 필요가 있다. 완벽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완전함이라는 것은 하나의 체계에 해당되는 것이지, 한 존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숙생들과 더불어 토요일 점심을 함께 하는 습관을 지켜나갔다. 이때 그는 다른 학생들이 앉는 테이블과 직각을 이루는 헤드 테이블에 부인과 함께 앉아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매우 뛰어난 학생들 몇몇만이 그와 함께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헤드 테이블의 존재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거부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이 토요일 식사에서 학생들이 그의 주위에 매우 가까이 자리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갈등을 싫어했을 뿐 아니라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양쪽 편 모두 이러한 종류의 대립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태는 거기에서 멈추어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후일 레비나스는 1968년 5월 사태 속에서 자신의 주된 철학적 주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학기 초에 누구도 발표를 자원해서 하지 않으려 할 경우 그는 즉석에서 세미나를 휴강시켜 버렸다. 발표가 진행될 때면 그는 발표자와 함께 깊은 생각에 빠졌으며, 종종 자신의 생각에 도취되어 발표를 방해할 만큼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그래서 발표가 매우 어렵게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레비나스가 70년대 말(거의 말년)에 이스라엘에 처음 발을 딛고 그의 새로운 유대주의를 전파했을 때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준 곳은 일란 종교대학 하나뿐, 그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독일 철학의 요소, 시대에 뒤떨어진 히브리어, 하시디즘에 대한 반발 등은 '안 먹혔다.' 

..그가 앵글로색슨 전통에 완전히 무지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푸대접을 받았던 근본적인 이유로 보인다. 이스라엘 문화의 대부분은 미국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이 어떻게 갈려있나를 보는 눈은 어느 분야에서나 중요한 것 같다.

특히 1929년 다보스 대토론회는 내게 이상적인 대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를 남겨주었다.

 1929년 다보스(Davos)에서의 대토론회: 스트라스부르대학의 샤를르 블롱델은 레비나스를 위해 15일간의 체류비를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일을 추진. 목적은 공부에 지치고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 높은 산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학문과 스포츠 사이에 더욱 더 바람직한 합일점을 찾는 것(토론회가 끝나고 학생들은 알프스산맥에서 스키를 탔다) 마지막으로 국적이 서로 다른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마지막 목적은 지금에도 흔히 유효하다.

 이 학술 모임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평화적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다보스의 첫번째 모임은 쿠르하우스(Curhaus) 호텔에서 열림. 개막일의 주인공은 알베르 아인슈타인. 스트라스부르 대학은 학사자격을 취득하였고 곧 D.E.S.를 받게 될 문학 전공 학생 한명과 외국 출신으로 학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곧 박사학위를 받게 될 철학과 학생 한명을 선발했다. 이들 두명의 학생 중 외국인 학생이 레비나스였다. 모든 참가자들은 벨베데르 호텔에서 머물렀고 덕분에 모임이 매우 용이했다.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학생들은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보스 시당국은 이 모임의 지적이고도 정신 위생적인 부분을 위해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슬로프 이용권을 지급했다. 모임이 끝나면 술집으로. 다보스의 두번째 모임에서 하이데거와 카시러의 역사적 논쟁이 전개.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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