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표가 등장하고 앞으로의 몇 주간 혹은 몇 일간 언제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예정해놓는 문제는 20세기 산업화와 기계적인 일상이 부상하면서 우리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거나 마음 가는 대로, 느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태도는 생산을 하는 '일하는 시간'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앙숙이 되었으며 대신 그러한 태도는 여가에서만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하지만 여가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 중에 틈틈이 나는 쉬는 시간, 장소를 이동하는 시간, 그리고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에도 즉흥적인 행동은 이루어진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어떤 옷을 입을지는 그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생각해보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특별히 결혼식에 하객으로 가야 한다거나 장례식에 조문을 가거나 드레스 코드가 있는 클럽에 갈 때가 아니라면 당일 전부터 그날 어떤 옷을 입을지를 계획하지 않는다. 옷장 앞에 선 그 순간 창밖의 날씨, 어제의 좋고 나쁜 기억, 잘 보이고 싶은 사람 등을 고려하여 우리는 별 특징 없는 하루의 옷차림을 고른다. 내가 디자이너의 패션소를 보조해주는 모델이 아닌 이상 내 옷차림은 시계열 단위에 짜맞춰진 계획표를 따를 필요가 없다. 옷 입기는 즉흥적인 행위이다.


  먹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로 점심, 저녁 시간이 되었을 바로 그 때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무엇을 먹을지는 그 순간 주머니에 얼마가 있는가, 전날에 먹지 않는 새로운 메뉴가 무엇인가, 가까운 외식 장소가 어디인가, 같이 밥을 먹을 친구는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가에 의해 단시간에 결정된다. 현재 자신이 보디빌더가 되기 위해, 혹은 다이어트를 위해 식이요법을 수행중이지 않은 이상 먹는 행위 역시 즉흥적이다. 즉흥적인 행위는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취약할지 몰라도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단연 뛰어나다. 그리고 행위자를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어준다.

  공부도 이렇게 입고 먹는 것처럼 할 수 있다면 공부는 최고의 여가 활동으로 우리 곁에 자리매김할 수 있다. 지금 연등시간(군대의 야간자율학습)에 나는 아무 계획도 없이 그때그때 하고 싶은 공부를 바꾸어가면서 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독서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겁게 빨리 흘러간다. 내가 하는 공부는 6개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데 모두 다 전역 후의 내게 피와 살이 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반드시 이 과목을 공부해야만 한다는 의무는 나에게 한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 언제 어느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계획표는 매우 장기적인 계획이어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큰 축복이다. 수능을 죽어라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나의 한가로운 천성이 가져온 나이브한 생각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니 불안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의무가 없기 때문에 나의 학습 활동은 여가라고 불릴 자격이 있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여가는 언제나 즐겁기 때문에 공부도 즐겁다.

  그런데 대학생 신분일 때의 나의 모습은 지금의 여유로운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시험 일정에 나를 맞추어야 했고, 조를 구성하여 공동 프로젝트를 할 때는 친구들의 개인적인 일정과의 충돌을 통한 타엽에 에너지를 쏟았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공부는 아예 안 했던 것 같고, 책이나 프린트물 하나를 볼 때마다 그 순간 나는 곧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물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한 의무와 목적이 나를 옥죄던 상태, 그 때의 나는 지금의 '全無한 의무와 잠재적인 목적' 상태와 완전히 달랐다.

  의무가 있을 때는 의무감을 에너지로 성취를 하고 결과물을 만든다. 반면 의무가 없을 때는 즉흥성과 자유를 에너지로 삼는다. 이는 공부가 일이냐 여가냐라는 이분법과도 서로 통하는 이리다. 공부가 일인 상황에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은 많이 있다. 그런 종류의 공부법 설명서를 구매하는 독자들은 실제로 큰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자라나는 10대 초중반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에게 공부가 여가일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공부가 여가인 상황에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절박한 사람만이 책을 구입하는 소비성향에 출판업계가 굴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의무감이 없고 공부가 여가라면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고르듯 즉흥적으로 공부할 책을 집도록 권하고 싶다. 순간의 느낌이 최고의 만족감을, 나아가 고도의 집중력과 지식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낼 결과물을 낳는 시초이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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