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치체계는 우유와 치즈와 초콜릿, 그리고 양파와 고추와 씨즈닝을 명확히 구분하는 이분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 맛과 짠 맛의 구분일 수도 있고 색깔에 따른 구분일 수도 있으며 어울리는 음료 종류에 따른 구분일 수도 있다. 분명 그 둘은 겨울과 여름, 클래식과 펑크락, 설탕과 소금처럼 명확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는 분명 조용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응접실에서 쿠키 종류와 우유, 쥬스, 차, 커피 등을 교회 집사님들과 같이 먹고 마셨던 수많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그 때마다 봉지과자는 테이블 위에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변에서 돗자리르 펴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실 때에는 언제나 봉지 과자에 양념가루가 있는 것들만을 고집했다. 맥주가 지배하고 있을 때 감히 쿠크다스나 버터와플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임의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에서 갑자기 사먹는 과자는 테이블 위에 항상 뒤죽박죽 펼쳐져 있다. 단지 먹고 이야기하는 것에만 가치를 둔 모임에서 과자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매번 꼭 어느 한 명이 나서서 초코송이, 씨리얼, 다이제 같은 과자를 틀에서 꺼낸 다음 뜯어놓은 썬칩이나 새우깡 봉지에 던져 넣었다. 심지어는 한 손을 가져와 초콜릿과 씨즈닝이 고루 섞이도록 버무리는 만행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한 결과의 모습은 마치 케이크와 삼겹살을 한입에 같이 먹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렇게 뒤섞인 상황을 자아낸 사람이 바쁘게 흘러가야만 하는 모임 속에서 익명성을 띤다는 것이다. 아무도 과자의 상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뒤죽박죽 한 자리에 섞인 과자는 모두의 기호를 고루 반영하겠다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인가? 내 눈에는 구분이 없이 섞여 있는 결과물은 생산성 없는 정당 간의 타협안, 노사 간의 절충안과도 같아 보일 뿐이다.

  솔직히 이 사소한 문제에 더 화를 내어 보고자 한다면 배고팠던 우리나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먹는 게 중요했지 얼마나 운치 있게 먹느냐, 어떤 음악이나 인테리어나 조경 안에 둘러싸여 먹느냐 등은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된 것 같다. 초가집과 산 능선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마을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무작정 포크레인 부대를 때려넣고 흙을 무참히 퍼간 도시개발의 사례는 대한민국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고 이는 지금의 매력없는 도시 경관이 증명한다. 음식을 사먹는 작은 일에서부터 도시를 건설하는 큰 일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하나의 목적에만 집중한 나머지 결과물의 아름다움과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뒤죽박죽 형상을 만들어놓는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편적 행태는 다른 분야의 사소하거나 중대한 일에도 전염되었다.

  하지만 뒤죽박죽인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다. 비빔밥에는 밥과 고기와 야채가 뒤섞여 있지만 그 뒤섞임 덕분에 세계인이 칭찬하는 맛을 만들어낸다. 탈춤은 연극을 하는 사람과 연극을 보는 사람이 모두 대사를 내뱉고 주고받으면서 흘러가 매 공연마다 다른 예술을 펼쳐나가게 되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아름다운 극 장르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탈지유와 코코아파우더 그리고 팜유와 씨즈닝을 뒤섞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그 두 종류를 섞었을 때 독특하고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다.

  결론은 구분의 판정승이다. 이제 우리도 스타일에 따른 구분짓기와 종류별로 묶고 꾸미기에 신경 쓸 여유가 충분히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고 견문이 넓어졌다. 그러한 발전을 실생활에 펼쳐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중 하나가 먹는 모임을 단순히 먹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특정한 분류를 기반으로 하여 음식들의 스타일을 살려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개인적 기호를 보다 존중해주는 모임으로 바꾸는 일이다. 내게 "애가 쪼잔하게 뭐 이런 것까지 신경 쓰니" 혹은 "남자가 왜 그리.."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나 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설득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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