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나와 효섭이형과 창우형은 신촌의 고기집에서 푸짐하게 한 사람 당 5900원으로 마음껏 배를 채웠다. 1학기가 끝나고 이제 일상의 굴레에서 잠시 삐져나와도 주위에서 뭐라 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대가 왔다. 곧 장마가 시작됨을 하늘도 알려주려는지 오후 6시부터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비, 의자에 마주하고 앉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걸어가면서 팔짱을 끼는 연인들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땅에 살포시 내려앉는 그 비는 저쪽 거리에서 조용히 우리들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사실 나는 지난 1학기 동안 형들 혹은 친구들과 서너명이 함께 고기집에서 저녁과 술 한잔을 함께 했던 경험이 없었다. 초밥 가게와 서양식 레스토랑 같은 정돈된 곳에서만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을 뿐이었다. 깔끔함을 좋아하는 나의 위상을 떨쳐버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지난 한 학기동안에는 꼭 그런 깨끗한 곳만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제 밤 나에게 '비오는 날의 고기집'은 새로운 분위기를 선사해주었다. 나를 쉽게 놓아주고 내 자신이 쉽게 풀어질 수 있는 분위기, 남자들만의 솔직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수 있는 분위기 말이다. 같은 신촌이라는 공간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 기분이 들어 속으로 기분이 참 좋았다.


  고기집을 나와서 우리 셋과 지난 어울림 회장이었던 오혁이형 이렇게 넷은 먹자골목의 끝, 약간은 어둡고 쓸쓸한 그곳으로 걸어갔다. 나트륨등 아래의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활기찬 공간에서 빠져나와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떠드는 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우리 넷은 자동차가 비를 뚫고 분주히 움직이는 굴다리 밑을 지났다.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들도 이렇게 도시에서 조금은 구석진 곳을 걸어다니며 속으로 깊은 생각을 하며 거리의 아름다움에 취했을 것이다. 긴 통로를 빠져나와 우리는 이번 9월 일일호프를 열 장소인 NOVA라는 주점에 들어갔다. 파리의 작은 호텔에 나만의 작은 짐을 풀어놓고 늦은 밤 혼자서 커피를 마시러 골목길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평소에도 서울과 파리는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저 멀리 흰색 간판이 보이는 그 순간 신촌 구석진 곳의 한 컷짜리 풍경은 지난 파리 여행에서 담아온 풍경에 겹쳐져 더욱 나를 아련하게 했다.


  NOVA는 매우 은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위치도 별의별 사람들 가리지 않고 환영의 메시지를 던지는 요란한 신촌 한복판이 아니라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 지역이었다. 아는 사람들만 끼리끼리 찾아와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기쁜 일과 푸하하 웃을 일과 힘든 일을 적당히 섞어 이야기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지금 말하기 정말 이상하지만, 처음에는 'NOVA'라는 가게 이름에 초신성 폭발(supernova)을 생각했다. 자미로콰이의 음악이 갖는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지는 투명한 플라스틱 벽과 요란한 네온싸인, 그러면서도 그리 요란하지는 않은 음악이 이곳 NOVA에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긴 파리에도 이런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곳 NOVA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추측은 완전히 뒤집혔다. 네온과 아르곤이 들어간 형광등이 줄지어 늘어설 줄 알았던 천장과 벽에는 은은한 노란 색 백열등이 가리워져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바닥과 벽과 천장은 나무로 되어 있어서 삶의 슬픔이 담긴 음악도 부드럽게 공간에 채워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점의 크기는 학생회관의 푸른샘보다 약간 작아서, 보통 우리들이 스타벅스나 할리스 커피같은 곳에 갔을 때 느끼는 크기와 비슷했다. 나는 내부를 들여다보며 이정도 크기면 조금 더 이상적으로 아담하고 조금 더 인간적이고 조금 더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에 안았다.


  우리들은 깔루아 밀크와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 칵테일 종류가 다양하고 남자들을 위한 양주도 있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이 왔을 때 성숙하게 앉아 음악에 귀를 기울일 것 같다. 확실히 MT와 새터같은 행사에 사람들과 처음으로 안면을 트기 위해 마시는 맥주와 소주와는 다른 술이 그에 걸맞게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주점 누나는 주로 한국 노래 중에 통기타가 들어간 곡을 틀었는데, 70년대의 남자 둘이서 느끼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아닌 조금 더 비트가 살아있는 곡을 틀었다. 그중 '살다보면'이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 넷은 '아, 이 노래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하고 느꼈다. 하지만 꼭 한국 노래가 아니어도 외국 노래 중에서도 사람의 슬픔과 그리움과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우는 마음' 등을 표현하는 노래가 있다면 그것도 잘 어울릴 듯싶다.


  주점의 가운데에는 네모난 바와 의자가, 바 안에는 커즈와일 PC88 스테이지 피아노와 통기타가 놓여있었다. 보컬과 키보드가 이곳 안으로 들어가 앉아 음악을 만들며 바에 앉은 사람과 눈으로 말로 소통할 것이다. 저편에는 전자드럼이 있었다. 나는 주점 누나에게 가서 드럼을 잠깐 쳐보겠다고 한 뒤 전자드럼의 성격을 알아보았다. 라이드 벨이 안 된다는 점만 빼고는 모든 것이 어쿠스틱 드럼과 똑같았다. 크래시는 하나였고 스네어는 그리 크지 않아서 림샷을 할 때에 조금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스네어 테두리를 때리면 림샷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내가 어울림 22기 기장을 맡았으므로 세세한 면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칵테일을 홀짝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형이랑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다시 칵테일을 마시고 이쪽 저쪽을 살펴보았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자 효섭이형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 일일호프는 확실히 대동제의 공연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약 4시간 동안 충분히 우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팀 구성원들 간의 우정을 확인하자는 제안이었다. 즉 음악을 남들을 위해 들려주는 것을 뛰어넘어 곡 사이사이에 멤버들이 마이크를 잡고 길게 말도 하고, 우리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유머와 이벤트도 선사해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가만히 생각을 해본 결과 곡과 곡 사이에 3분 정도 어울림 멤버 중 한 사람이 말을 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다음 들려줄 곡에 대한 소개, 그 곡을 선정한 이유, 곡을 연습하면서 멤버들과 있었던 에피소드와 같은 말로 사람들의 눈과 멤버들의 눈이 서로 오가고 마주치고, 같이 웃고 기뻐하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곧 나른함에 잠겼다. 정말 편했다. 교수님이나 사과대 선배들 앞에서 내가 가졌던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단지 내 마음은 밖에 보슬보슬 내리는 비와 함께 촉촉히 젖을 뿐이었다. 셋이 이야기를 한참 나누면서 우리들의 목소리는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끔 대화가 끊겨 침묵을 했지만 그 침묵 마저 달콤했다. 이곳에 와서 어울림의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조용하고 진솔한 대화의 그 활기와 침묵하여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는 달콤함을 함께 즐기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특히 연인들끼리, 정말 친한 친구들끼리 와서 테이블 하나씩 맡고 칵테일 한 잔씩 마신다면 그들을 위한 이벤트도 다양하고 풍성할 것이다.


  오혁이형이 먼저 가시고 10분 뒤 우리들도 주점에서 나왔다. 거리에는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걷지 않았다. 차도에서 발광어류들이 군집이동을 할 뿐이었다. 밤 10시 쯤이었는데, 나에게는 그 순간이 늦은 밤 12시처럼 아늑했다. 정말이지 이번 일일호프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조용하고 진솔해볼 기회를 찾아다녔던 사람에게 고마운 오아시스가 될 것만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연습인가,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효섭이형과 창우형에게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왔다. 272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차창에는 빗방울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대학로를 지나갈 때에는 창 밖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을 들으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속으로 많이 생각하고, 많이 흐뭇해하고, 많이 즐거워한 하루였다.


2007.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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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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