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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여유로울 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희를 향한 본능을 찾아 헤맨다. 인간은 누구나 현재와 미래를 향한 걱정 없이 삶의 순간 하나하나를 즐기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놀이터에서 남자 친구 여자 친구 가릴 것 없이 단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같은 순간 속의 그들과 친구가 되어 놀았다. 이러한 유희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물질적인 대가는 없었다. 친구들과 논다고 해서 떡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옷을 더럽히며 손톱 사이에 흙을 묻혀넣으며 순간의 즐거움에 충실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어른으로 성장해가면서 이러한 본능은 차츰 시간관리와 직장과 이해관계에 의해 사그라들었다. 계획적인 삶을 통해 정말로 자신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일만을 골라 취하는 사람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관심은 결국 어렸을 때 가지고 있었던 '단지 놀고 싶은 본능'은 하등의 가치로 치부되어 절대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완벽주의자 혹은 Workaholic을 만들었다. 나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내가 하루 중 아무런 걱정 없이 즐거움만을 찾아서 주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지를 되새겨보았다. 거의 없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을 손가락으로 때려주기, 공원을 돌면서 아이스크림 먹기, 주변에 핀 꽃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것을 따서(물론 환경을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머리에 꽂고 사진 찍기, 긴 계단을 누가 먼저 올라가나 시합하기..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시대의 시간 죽이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들이 실제로는 원자화되고 외로운 현대의 인간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고독을 잊고 아무 준비 없이 서로 대면하고 부대끼는 일, 직업인이 아닌 순수한 인간으로 만나는 일이 순간 그리워졌다.


  어렸을 때 나는 분명 친구들과 만나고 놀고 헤어지는데 있어 매우 자연스러웠고, 나의 놀이는 대부분 놀이터와 공터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지금의 나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노는 방법과 현재를 즐기는 마음 모두를 잃어버렸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 나는 날씨 좋은 오후 혼자서 놀이터로 갔다. 7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 대여섯 명이 시소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끊임없이 친구들을 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흔들리는 시소 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즐기는 데에는 아이들의 동의와 합의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일부러 시소 중간에서 위태롭게 걸어다니거나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하는 등 요즘의 나처럼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려 신경쓰지 않았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사이의 대화는 아무런 논리적 연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재밌어?' '오오.. 넘어진다 넘어진다' '우리 늦게까지 놀 수 있어.' 같이 간단한 대화로만 이루어졌다. 아이들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지금의 나와 완전히 반대였다.


  조용히 놀이터 벤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면서 내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보게 되었다. 어차피 인간이라면 실수도 할 수 있고 Time Killing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장난을 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곳을 구경도 하러 간다. 일상이 있다면 비일상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인데, 나는 극단적으로 안정 속의 개인적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는 일상을 확립하는 데 인생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는지 반성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유희와 비일상을 위해 나의 마음 속에 여유로운 공간을 크게 만들어놓는다. 놀이터의 아이들처럼 본능적으로 원초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상에서 벗어나 얻을 수 있는 로맨스와 행복을 위해서 나를 스스로 묶어놓은 수많은 족쇄를 풀었다.

2007. 4. 22.

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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