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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 들어와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많은 가치들이 둥둥 떠다닌다. 공부, 반 활동, 옛 친구들과의 만남, 동아리, 연애, 종교활동, 스포츠와 휴식, 문화생활, 학교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토론..... 이 많은 일을 모두 24조각의 시간 케익 속에 부어넣고 싶지만 때로는 밀려오는 과제물과 조별 모임, 친척 사이의 행사, 예상치 못했던 불상사 등으로 우리가 이미 계획했던 대로 모든 가치들을 섭렵하기 힘들 때가 있다. 하나의 가치에만 집착해도 좋을 것은 없다. 우정이 과해서 사랑이 부족해지거나, 공부가 과해서 휴식과 종교활동이 부족해질 수 있다. 매주 어느 요일 언제에는 꼭 어떤 일을 하자고 계획을 해도 내가 세워놓은 그 계획이 다른 일로 인해 무산될 때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먹을 만큼의 케익 조각만을 준비해 놓는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먹을 케익은 많이 남겨놓는다. 그 케익이 딸기 케익일지 치즈 케익일지 초코 쉬폰 케익일지는 내가 결정하지 않을 때가 많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는 그 시간들이 어떤 가치를 위해 소비되는지 또한 내가 관여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도 뺏어먹지 못할 나만의 케익이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나의 하루는 만족스럽고, 나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 다음 기분 좋게 다른 친구들과 새로운 맛의 케익을 서로 나누어 먹고 바꾸어 먹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기뻐한다. 나는 혼자 있게 되는 시간, 즉 집에 있거나 공강이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에 나만의 시간을 마련해 두고 사람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잦은 금요일 밤과 주말에는 스스로 무언가를 계획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주도하는 행사가 있다면 그 반대겠지만 말이다.


  공부의 경우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는 긴 시간 동안 신문이나 TIME지를 읽고, 공강 시간에는 혼자 집중하여 학과공부를 할 수 있도록 조용히 연합신학대학원 도서관으로 향한다. 다른 시간에 공부 외에 다른 가치에 나를 맡기기 위하여 학생의 본분이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학문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시간대에 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의 케익도 나만 먹기 힘들 때가 많으므로 수업이 끝난 직후부터 3시간 동안에는 공부와 같은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 씁쓸한 맛을 내는 '공부' 케익은 너무 써서 일정량만 먹지만 매일 꼭 먹는다. 운동과 휴식도 마찬가지다. 매주 3회 운동하고 여러 가지 영양제를 섭취하는데, 이 일은 반드시 규칙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므로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는 저녁 9시에 배정해 놓았다.


  대학에 오고 나서 으레 만나게 되는 수많은 정기모임과 뒷풀이와 MT는 나 스스로의 계획만으로 이루어진 삶을 힘들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런데 단순히 타인의 의지가 나의 계획에 간섭하는 것에 화를 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타인을 존중하는 배려심을 발휘하는 동시에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나만의 계획을 단순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너무나도 이기적이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주 어느 요일 몇시에 정기적으로 하는 일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두 계획해 놓았는데, 이것이 현실성을 갖지 못하게 되면서 차츰 융통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약속을 불문하고 모든 약속은 아무리 늦게 해도 약속 날짜 5일 전에 하게 되기 마련이어서, 나는 약속을 하는 순간까지 자유롭게 남겨두었던 시간들을 그때 되어서 정리해 나가면 된다. 갑작스런 약속이 찾아온다면 그 약속은 단호하게 거절해도 된다. 약속을 그렇게 늦게 한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사람들과 만나는 일' 케익은 우정과 사랑을 담고 있는 매우 달콤한 케익 조각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 내가 하루에 꼭 먹기로 결심한 케익 조각들을 못 먹게 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술은 과하면 안 된다.


  우정과 사랑이라는 가치가 꼭 약속을 통한 행사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중에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은 생각해보면 참 많다. 마주치면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이라도 대화를 꼭 하기를 바란다. 특히 문자메시지의 경우는 잘게 쪼개진 시간에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일이다. 작은 아이스크림 숟가락으로 케익을 떠먹는 정도지만 하루 중에 아예 '우정과 사랑' 케익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하나만 더 말하고 싶은데, 사랑이냐 우정이냐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내가 주도해서 우정과 사랑에 해당하는 케익을 하루에 일정량 항상 준비해놓고 있는 이상 그 고민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여자친구들을 만난다고 해서 내가 우정보다 사랑을 중요시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언제나 '언젠가는 끝날 가능성이 있는' 사랑보다는 '영원한' 우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정을 확인하고 쌓아갈 때는 학교나 바깥에서 친구들과 만나거나 혹은 전화나 문자 등으로 이야기할 때뿐이다. 즉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자신의 하루 중 일정량 준비해 놓고 그 시간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만들거나 나만의 시간으로 채우지만 않는다면 나는 충분히 우정을 지키면서 사랑까지도 성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케익을 잘 먹는 법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여러 가치들이 서로 간섭하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 케익 안에 스며들도록 하면 되고, 그 중에서 매일 반드시 먹어야 할 케익을 따로 잘라놓으면 된다. 다채로운 가치를 추구하여도 우리 대학생들은 시간에 쪼들리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다채로운 가치의 추구는 잡다한 관심사를 만드는 일과 전혀 다르고 이 둘을 헷갈려하면 안 된다. 인생을 조금 더 풍부하게 보내고 싶고 성공하고 싶다면 적은 시간에 많은 가치를 얻어내려 노력하고 자기가 감당할 만큼의 약속만 잡고 앞서 말한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는 시간 분배를 계획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수많은 위치 중에서도 대학생의 위치에 선 사람의 경우에는 골라 먹을 수 있는 케익의 맛이 가장 다양하고 풍부해서 다른 때보다 훨씬 신중한 가치 선택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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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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