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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방학식 하루 전날이다.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기분 좋은 의무감이 아침부터 나를 자극했다. 내가 나 자신을 졸업생으로 규정하고 교만해지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도 않고 친구들 또한 원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오늘이 끝나면 소중한 선생님들께 인사를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최대한 겸손한 마음을 먹고 선생님들의 방을 하나 하나씩 찾아갔다.


  선생님들께 찾아가는 것은 이 학교를 떠나가는 학생의 마땅한 도리라고 굳게 믿는다. 일년 혹은 이년 동안 함께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사람들을 말 한마디 없이 떠나는 것은 내가 그 선생님과 적어도 인간적인 교류를 했다는 점에서 비도덕적인 일이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수많은 학생들을 새로 만나고 또 새로운 세상으로 보내주신 분들이라 학생들과의 만남을 참 좋아하시고 또 의미있다고 여기신다. 이러한 상황 판단 속에서 나의 행동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선생님께 공손하고 진실한 작별인사를 한 뒤 내년의 만남을 기약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조언을 받는 일이다.


  첫째로 나는 지광현 선생님의 방을 찾아갔다. 물론 오늘 내가 방문할 선생님들께 미리 예고를 해놓은 상태에서 나는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방에 혼자 남으신 선생님들을 뵈었다. 지광현 선생님께서는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나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물 흐르듯 풀어주셨다.

  선생님의 말은 때로는 너무나도 도덕적이고 경직되어 있어 꼭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자신들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마음 속에 새기는 말 같지만, 사람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행실로 가득차 있다. 오늘 나는 선생님께 사회과학대 학생으로서 꼭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특히 연필이나 펜을 가지고 표시하고 쓰는 활동이 없어도 독서라는 활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공부임을 알았다. 평소에 끊임없이 '책을 읽어라' 소리를 들어왔지만, 막상 내가 대학 입학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이 소리를 들어보니 말의 참뜻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대학교의 몇몇 나이 많은 사람들, 그중 말과 행동이 바르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낼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안하자 선생님께서는 '和而不同'이라는 공자의 말로 나의 처세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다른 사람들과 겉으로는 가까이 지내고 그들에게 잘해주되 중요한 때에서만은 그들과 같아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처세는 평소에도 내가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과연 올바른 행동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그것이 정의에 합치하는 올바른 인간의 행동임을 나는 확인했다.


  미리 2학기 시간표를 확인한 다음 선생님들께서 수업을 맡으시지 않는 시간을 찾아다녔다. 나는 오늘 내가 선생님께 인사드릴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내일 방학식이 있는 날 선생님의 오피스에 직접 찾아가 사적인 대화를 나눌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상 나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도서관이나 다른 선생님의 빈 오피스에서 자습을 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충분히 나의 인사가 정당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오늘은 한복을 입는 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졸업생처럼 사복을 입고 갔다. 한복은 택배로 부친 상태라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늘 선생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의복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내가 좋아하는 황선생님께 찾아가면서 부정의가 되어버렸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지광현선생님처럼 반갑게 맞아주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화요일에 한복을 입지 않은 것에 대해서 화를 내셨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조기졸업생들이 나처럼 이렇게 자습을 안하고 있을까봐 나한테 인문반 조기졸업생을 불러모으라고 하셨다. 내가 의도한대로 돌아가지 않는 순간이었다. 사소한 것에서 트집을 잡히면 이렇게 일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황선생님께는 내일 인사드릴 것이라고 약속드렸다.


  다음에는 고문수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과 이야기한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연세대학교에서 어떤 커뮤니티에 참가할지를 선택하고 활동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단체를 신중히 선택하여 진실된 인간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곳을 찾아보라는 조언을 하셨다. 나는 기독교 신자들의 모임이 최대한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모임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런 나의 견해를 말씀드렸더니, 자칫하면 현실에 치중한 기독교 모임이 진리를 추구하는 모임의 본질을 흐트러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하셨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물론 빼먹지 않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문제는 전혀 고민할 필요 없다면서 사람은 공통분모가 있는 사람끼리 뭉친다고 하셨다. 정말이지 형식적으로 같은 공통분모가 아닌 자기 자신의 성격과 성향에 대한 공통분모가 없다면 사람과 사람은 어우러질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을 대학에서 만나지만, 결국 나와 깊게 사귀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언젠가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서로 같이 즐기고 서로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이 자기가 진정으로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고 진실한 관계로 사귈 수 있는 사람이다.


  고문수 선생님을 만난 다음 바로 다산관으로 뛰어가 강문근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선생님을 어드바이저로서, 그리고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존경해왔고, 선생님과의 사이도 건강하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내가 말주변이 없고 또 활동적인 여가를 많이 하지 않아서일까, 선생님과 같이 유머 섞인 대화를 하거나 함께 스포츠 혹은 여행 등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점이 지금도 많이 후회된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위해 대학교의 소그룹을 많이 찾아다니며 정적인 일이 아닌 동적인 활동에 많이 참가하라고 권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작은 동아리가 새로 사람을 받아들일 때에도 호의적이고 인간적이며, 그러한 동아리에 소속된 사람들은 결속력이 강하다. 바로 그러한 점을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졸업 전에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혼자 하는 일로도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나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넓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것은 바로 내 주변의 '새로운 세계'부터 차근차근 방문해 보는 일이다.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점점 활동 범위를 나의 집 혹은 나의 학교를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뻗어나가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하는 종로 주변부터 시작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알지 못한 곳, 표면적으로만 관찰한 곳이 너무 많다. 그리고 중랑천변에 신설되어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는 어떤가. 청계천의 그 길다란 산책길은 또 어떤가.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순간 나의 할 일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오늘 나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들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린 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하루를 의미있고 보람차게 보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배 혹은 선생님께 인생의 갈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는 언제 얼만큼 들어도 지겹지 않으며 엄청나게 즐거운 일이다. 이제 나는 대학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거의 끝내 놓았다. 계속 오늘 사색하고 마음먹은 대로 살아간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2006.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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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마키아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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